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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급 관심용사-387화 (387/430)

 387화

[28회차] 정의로운 용사

남대륙의 성검 몰랑코인은 크기와 무게를 자유롭게 바꿀 수 있다.

물론, 여기에도 한계가 존재하긴 하지만, 평범한 덩치를 가진 용사에게는 무한한 거나 다름없다.

이곳에서 볼일은 끝났다.

“난쟁이왕국으로.”

[동대륙 동부 섬 레웅...]

[경로설정 완료.]

[도착 예정시간: 112초]

내가 평범한 학생이었다면 세계정복을 꿈꾸는 요정제국의 문제도 해결했겠지만, 90층을 돌파하는 게 목적이기에 생략했다.

“한심한 학생 제군들. 자잘한 평판작업은 알아서 하라구?”

▷지적: 강한수 고문님. 아무리 생도들이 먼지 같더라도, 공신력 있는 생방송에서 대놓고 한심하다는 표현은 자제해주세요.

넵! 발언에 주의하겠습니다! 도덕 아가씨!

교생이었을 때는 몸도 마음도 몰랑몰랑했는데, 선생이 되면서 도덕 아가씨가 까칠해졌다.

여린 내 가슴을 너무 찌르는군.

아름다운 친구 사이에 높은 벽이 세워진 기분이다.

▷난감: 섭섭하셨다면 정말 죄송해요. 이건 대다수 학생이 시청하는 중요한 생방송이라서... 차후의 교육방침을 세울 참고자료로 사용할 예정이기도 하고요.

비겁한 마누라는 장모님이랑 면담하고 있어서 업무를 전혀 못 보는 상황이다.

그래도 판타지아 교육장은 문제없이 잘 굴러가는 모양이다.

▷설명: 쏘시엘 교장님은 육아에 집중하시기 위해 업무를 분산해놓으셨거든요.

...내 꿈이 기둥서방인데, 정작 나는 분신까지 동원해서 일하고 마누라는 아들이랑 놀고 있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이번 감찰만 끝나면 실추된 남편의 자유를 되찾으리라!

“아! 다 왔군.”

몰랑포스가 난쟁이왕국의 왕궁 상공에서 멈췄다.

거인제국에서는 뭐든지 커서 반응이 덜했지만, 짜리몽땅한 난쟁이들에게는 아니었다.

“허억! 저게 뭐야!”

“마, 맙소사!”

“신이 노하신 건가!”

“어떻게 이런...”

왕국의 수도에 내리쬐던 빛을 완벽하게 덮어버리고도 남을 만큼 거대한 비행체에 식겁했다.

우매한 난쟁이들은 보아라.

현대전쟁에 도움 안 되는 날붙이에 재능을 낭비한 너희는 단 한 명의 발명가에게 패배했다.

이것이 과학의 힘이다.

⤷시바: 내가 예언 하나 한다. 저렇게 뽐내다가 곧 추락함.

⤷제우스: 고인물아. 네 희망 사항을 말하지 말고 왜 추락하는지 설명해봐.

⤷오딘: 네 경험담이냐?

⤷알라: 과시욕에 찌든 병신이라고 인증하는구먼.

⤷M.사탄: 과도한 언어폭력은 커뮤니티 활동에 제약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자제해주세요.

⤷아몬: 우리 사탄이. 졸업해도 열심히 일하누. (경고 1/3)

⤷이시스: 바로 경고 먹었네?

⤷루나: 경고 실화임? 풋!

⤷지크: 사탄 형. 사랑해요. 저는 하루라도 커뮤니티를 안 하면 살 수 없어요.

⤷오피온: 절레절레.

내 한마디면 난쟁이왕국은 순식간에 폐허로 변하리라.

하지만 난쟁이들도 무방비하게 넋 놓고 있진 않았다.

시민들을 지하로 대피시키고 얄팍한 석궁으로 하늘을 조준했다.

그리고 난쟁이왕국의 수호룡이 빛과 함께 허공에 출현했다.

“Silllll-!”

위협의 포효를 터트린 은색 날도마뱀 주위로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지모왕(智模王) 말파리.

가출선배의 주문을 들어주다가 과로사한 전적이 있는 난쟁이왕자를 사랑하는 용왕이다.

바로 공격해오진 않았다.

그러나 물러나라고 요구하듯 위협적으로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시바: 저대로 가만히 있으면 앞으로 10초 뒤에 지모왕 말파리아스가 선제공격한다. 그리고 콰광!

⤷바알: 시바야. 1위를 빼앗겨서 열 받은 건 알겠는데, 네 흑역사를 공개하는 건 좀...

⤷제우스: 냅둬. 좋은 꿈이라도 꾸나 보지.

⤷오딘: 10초 아직 멀었나?

⤷아담: 그러게. 엄청나게 긴 10초네.

은룡(銀龍)의 특기인 바람의 숨결을 토해내려던 말파리.

하지만 몰랑포스 갑판 위에 팔짱 끼고 선 강한수와 알렉스를 발견한 용은 주둥이를 닫았다.

그리고는...

번쩍-!

비단처럼 반짝이는 은색 머리카락을 나부끼는 인간 여성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용사님. 여기는 무슨 일로...”

갑판 위에 올라탄 여인, 말파리는 내가 아닌 강한수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분신이라도 나는 나.

신용이 MAX등급인 정의로운 용사라서 매우 편하다.

착하게 살아온 보람을 느끼는군!

강한수가 나를 가리켰다.

“이쪽은 아주 몰랑한 내 후배님인데, 너희가 보관 중인 성검이 필요하다고 해서 함께 왔어.”

“그러셨군요. 예술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모르는 서대륙 현자가 침공해온 줄 알았습니다...”

“어리석긴. 섹스피어가 그럴 마음이 있었다면 너는 벌써 죽었어.”

“부정할 수 없군요.”

지모왕 말파리는 강한수에 이어 알렉스와 설녀에게 인사했다.

나를 완전히 투명인간 취급했다.

하지만 이해한다. 가출선배에게 농락당한 전적이 있는 그녀는 기본적으로 용사를 싫어하니까.

말파리는 한참 뒤에야 은색 눈동자로 나를 바라봤다.

“성검을 받으러 오셨다고요?”

“그렇습니다.”

“마왕 페도나르의 시대가 끝난 이 세계는 평화롭습니다. 그렇기에 새로운 전쟁의 불씨를 키우려는 당신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대가 싸우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없는데?

과거의 나였다면 ‘아름다운 고향별로 돌아가기 위해!’라고 대답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것도 아니다.

감찰단 때문에 억지로...

이것도 올바른 답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대답을 미루거나 안 할 수는 없는 상황.

말파리가 질문한 시점에 이미 ‘용사의 시험’은 시작됐으니까.

나는 차분한 어조로 답했다.

“그것은 세상이 위험하다면서 소환한 신에게 해야 할 질문입니다. 그래도 굳이 답하자면, 제 눈으로 진실을 확인하기 위함입니다.”

“오만한 용사여. 그것은 당신 스스로 정의로운 존재라고 생각하기에 할 수 있는 발언이로군요.”

“맞습니다.”

나는 용사 생활 200년 동안 내 정의감을 의심해본 적이 없다.

말파리가 말했다.

“용사여. 당신의 의지를 잘 알았습니다. 하지만 말로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법이죠. 간단한 시험을 내겠습니다. 이것을 통과하면 성검을 바로 내드리겠습니다.”

“경청하겠습니다.”

이번만큼은 나도 어떤 시험인지 알 수 없었다.

동대륙에서는 ‘용사가 오면 협조해줘.’라는 당부 외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으니까.

지모왕 말파리가 생긋 웃으며 시험내용을 읊었다.

“하렘을 포기하세요.”

*

이 시험내용은 가출선배의 망령 혹은 잔재라고 할 수 있다.

예쁘면 종족과 국적을 불문하고 소유욕을 불태운 선배는 지모왕 말파리도 노렸었다.

그 결과, 이 은색 날도마뱀은 하렘을 혐오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증오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하렘이란?

남의 사랑을 파괴하는 악(惡)의 결정체!

여기에 남녀 구분은 없었다.

정의로운 용사라면 무조건 일부일처(一夫一妻)여야 한다는 논리.

⤷아몬: 그래서 나는 서대륙 성검을 깔끔히 포기했지.

⤷제우스: 하렘 >>> 성검 1자루

⤷오딘: 저게 쉬운 것 같아도 누구에게는 지옥임. 예쁜이들을 파티에서 잠시 내보내는 편법도 안 됨. 명성이 밑바닥까지 추락함.

⤷루크: 그 밑바닥이 바로 접니다. 하하하!

⤷알라: 교사는?

정보가 부족한 동대륙의 성검은 전혀 대비하고 있지 않았다.

계획 없이 즉흥적인 판단력으로 헤쳐나가야 했다.

“내놔.”

“예...?”

“내놓으라고, 성검.”

거인왕 페닉스를 상대할 때는 평판이 ‘용사의 시련’에 큰 영향을 줘서 말투에도 신경 써야 했다.

그런데 지모왕 말파리는 아니네?

평판작업이 불필요했다. 하렘만 아니면 성검을 주겠단다.

이건 시험이라고 말하기 민망한 수준이다.

“사랑하는 여자는...”

“없어.”

나는 딱 잘라 말했다.

황녀와 아쿠아를 포함해서 몇몇 여성의 척추와 골반은 만졌지만, 이 몸뚱이는 생물학적으로 동정이다.

“파티에 여자는...”

“있긴 한데 유부녀야.”

설녀는 알렉스의 아내다. 그러므로 하렘의 조건에 해당하지 않는다.

“저를 무시하지 마세요!”

디스코가 발끈했다.

“모험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길 셈?”

“...그럴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성(性)을 부정당해서 따진 것뿐이니 오해하진 마세요. 지모왕 말파리아스 님. 저는 유부녀가 아니지만, 모시는 주인님이 이미 있습니다. 그 증명은 나중에 사석에서 하겠습니다. 그러니 논외로 해주세요.”

“그렇다는군.”

내 파티는 남성 비율이 더 높다.

지모왕 말파리는 어떻게든 트집 잡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없는 여성 동료를 만들어낼 순 없었다.

하지만 확실히 집요했다.

“신성제국의 제1 황녀님이랑 어떤 사이시죠?”

“소환자와 피소환자 관계지. 같은 몰랑교 신자라서 동업자 개념의 친분은 조금 있지만, 그뿐이야.”

“성녀님은...”

“성녀의 지위를 잃고 방황하는 그녀에게 토마토 성기사단장을 소개해줬어. 현재는 결혼해서 잘 사는 중이지. 하렘이랑 무관해.”

“인어공주는...”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는 미련한 물고기지. 나를 싫어하기에 서대륙에 남겨두고 왔어. 또 질문?”

“...없습니다.”

지모왕 말파리는 내 과거의 행적까지 조사해서 추궁했다.

그러나 털어서 먼지 하나 안 나온 G급 용사님께는 가소로웠다.

“내놔.”

“용사님. 당신의 정의감을 의심해서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제 입김이 닿는 모든 용이 용사님의 모험을 도울 겁니다. 성검 하이몰랑. 저를 타락한 용사의 하렘에서 구해주신 어느 용사님이 애용하셨던 무기입니다. 소중히 다뤄주세요.”

“그러지.”

성검 하이몰랑.

5차 교육과정으로 넘어오면서 이름은 바뀌었지만, 성능과 외형은 성검2 시절 그대로였다.

용사의 스킬 효과를 증폭하고, 신성 외의 속성도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도와준다.

지모왕 말파리의 말대로, 성검 뉴클리온을 얻기 전에 장인어른을 여러 차례 베며 애용했던 성검.

다시 손에 쥐니 감회가 새로운걸?

“무운을 빕니다.”

“몰랑의 가호가 함께하길.”

나의 동대륙 일정은 반나절도 안 지나서 끝나버렸다.

⤷오딘: 10초 뒤에 정거장 추락한다고 장담한 고인물 어디 감?

⤷제우스: 시바야. 시바야. 어디 갔니? 울지 말고 나오렴. 이 형이 웃지 않을게.

⤷알라: 재미없으니 엄한 고인물 좀 그만 놀려. 저 교사의 모험이 이상한 거야. 성검 하이몰랑이 저리 쉬웠나? 잘 생각해봐.

⤷아몬: 고자라면 쉽지 않을까?

⤷이시스: 추하네요. 선생님이 목욕하시는 모습을 봤으면서. ^^

⤷루나: 맞아. 매우 건강하심.

...내 몸뚱이가 아니긴 하지만, 프라이버시도 없는 거냐.

앞으로 남은 대륙은 하나.

나는 몰랑교의 총본산이 있는 북대륙으로 향했다.

나의 힘을 빌리기 위해.

*

몰랑교의 발상지는 마스터 몰랑이 은거하시는 중앙대륙 북부의 신성제국이지만, 본격적으로 발전한 장소는 북대륙이다.

그리고 2000년이 지난 현재는 몰랑교를 믿지 않는 북대륙 원주민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 함께 몰랑합시다.”

“몰랑의 가호가 함께하길.”

“그분을 찬양하라! 몰랑-”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교리도 모른 채 막연하게 믿을 뿐이다.

슬라임을 사냥하거나 핍박하지 말라는 기본 중의 기본만 지켜지고 있는 셈.

그래도 괜찮다.

몰랑계시록의 모든 내용은 ‘몰랑한 그분 아래에 모두가 평등하다.’로 이어지니까.

물론, 개인차는 있다.

몰랑과 말랑을 구분할 줄 아는 재능은 억지로 되는 게 아니기에.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몰랑교의 총본산.

그곳은 제1사도인 내가 손수 만든 수세식 화장실 1호가 세워진 역사적인 장소다.

200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잘 보존되어 있으며, 남녀공용이란 역사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안쪽.

내가 손수 만든 시제품인 수세식 변기 1호가 있는데, 교주만이 그 위에 앉을 수 있다.

“몰랑한 분이여. 멈추십시오.”

“방문목적을 밝혀주세요.”

나는 화장실 1호를 박물관처럼 감싼 신전 입구를 지키는 두 성기사에게 가로막혔다.

살짝 불쾌해졌다.

사람이 화장실에 들어가는 이유는 뻔하지 않은가?

그래도 나는 정의로운 용사의 미소를 지으며 회답해줬다.

“큰 거.”

드디어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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