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0화
[28회차] 철판
성검 몰랑로드를 끝으로 북대륙 일정을 마친 나와 잡것들은 시작지점인 중앙대륙으로 이동했다.
목적은 당연히 성검.
중앙대륙의 신성제국과 성왕국을 휘저은 김에 얻고 이동했으면 좋았겠지만, 개인적으로 혐오하는 성검이라서 근처에 두기 싫었다.
쓸모도 없고.
(용사여. 이곳의 모든 시련을 뛰어넘고 앞으로 나아가라!)
이곳은 고대 용사의 무덤.
성검 오토마니아가 봉인된 던전으로, 그 출입구에 도착하자마자 도전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시련.
판타지아 세계의 던전에 설치된 모든 종류의 함정을 맛보기로 즐길 수 있도록 계획됐다.
소환된 시작지점에서 그리 멀지 않은 만큼 던전 난이도는 높지 않았지만, 모든 종류의 함정을 경험시켜준다는 취지에 맞게 쓸데없이 길고 번잡하다.
“돌파해보실까.”
신의 총애.
면접시험의 결과가 담당자에게 달렸듯이, 사도의 싹수를 보고 신이 결정한다.
이 녀석은 마음에 드니 모든 스킬을 ZZZ등급으로 해주자.
아니면, 이 녀석은 척추가 별로니 모든 스킬을 MAX급으로 해주자.
...대충 이런 식이다.
우우웅-
내가 평범한 사도였다면 조금이라도 더 강력한 힘을 얻기 위해 온종일 신을 찬양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몰랑교, 응애교, 사이비교...
판타지아 세계에서 ‘신’으로서 신자들에게 ‘신의 힘’을 나눠줄 수 있는 건 ‘나’뿐이다.
즉, 이런 거다.
전지전능한 나여. 사랑하는 나에게 힘을 빌려다오!
응. 그래. 접수 완료. 내 사랑을 전부 받아줘!
【원죄】
팡! 팡야-!
신의 총애로 초보자용 던전 하나 뚫는 건 일도 아니다.
⤷오딘: 우리는 지금 8개월짜리 용사의 성장을 시청하고 있습니다.
⤷제우스: 너무하지 않냐? 이러면 모험이 왜 필요해? 신전에 틀어박혀서 몰랑몰랑 기도하지.
⤷시바: 새끼야. 투덜대지 말고 몰랑몰랑 해봐. 저게 쉬워 보여?
⤷이시스: 교주까지는 노려볼 만한데, 사도는 쉽지 않을 것 같네요. 동영상처럼 교화할 자신이 없어요.
⤷루나: 8개월 만에... 나는 그동안 나이만 먹고 뭘 한 걸까?
⤷루크: 루나 선배. 뼈를 너무 세게 때리시네요. ;;
나는 고대 용사의 무덤에 설치된 모든 함정을 부수면서 가장 깊은 안쪽에 도달했다.
단단하게 닫힌 대문.
여기서는,
쾅!
힘껏 걷어 차주는 게 예의다.
그러면 던전의 꽃이라고 불리는 보스가 등장한다.
(...후대 용사여. 너무 빨리 온 것 아닌가?)
편안한 파자마 차림의 해골이 주섬주섬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렇겠지.
장인어른도 그렇지만, 온종일 옥좌에 앉아있으면 허리디스크가 오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쉬어줘야 한다.
그건 고대의 용사도 마찬가지.
편안한 복장으로 관에 누워있다가 침입자가 무덤에 들어올 때만 무장하는 것이다.
“내가 좀 빨랐지?”
댕강!
떼구루루.
나는 바닥에 떨어진 성검 오토마니아를 주우려는 보스의 목을 쳤다.
(이, 이런 비겁한... 용사란 자가 어찌...)
뭐래?
전쟁터에서는 적의 사정 따위 봐주지 않는다.
보스가 성검 오토마니아를 주웠더라도 결과는 바뀌지 않았겠지만, 살짝 성가셨을 것이다.
자동공격, 자동방어, 자동회피...
보스는 능력치만 높은 한심한 쓰레기다. 그러나 성검을 쥐는 순간, 초일류검사로 탈바꿈한다.
“드디어 다 모았군.”
사도가 되기 위해 시간이 좀 걸렸지만, 8개월 만에 판타지아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성검을 수집했다.
중앙대륙 오토마니아 - 자동전투
동대륙 하이몰랑 - 스킬증폭
서대륙 몰랑피스 - 장비흡수
남대륙 몰랑코인 - 크기변환
북대륙 몰랑로드 - 에고소드
강한수 뉴클리온 - 마왕살해
용사가 사용할 수 있는 성검은 오직 1자루뿐.
이 규칙은 나도 어기지 못한다.
하지만 편법이랄까, 해결책은 존재한다.
몰랑폰 커뮤니티의 게시판에도 누군가 공략이랍시고 소개해놨기에 딱히 새로울 건 없다.
단, 6자루를 전부 모은 자는 여태까지 없었던 거로 안다.
그 방법이란?
“몰랑피스. 다른 성검을 먹어라.”
휙! 휙! 휙! 휙! 휙!
장비를 흡수하는 효과가 있는 서대륙의 성검 몰랑피스.
물론, 차원의 숫자만큼 분할되기 전의 성검 뉴클리온 수준의 성능은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1자루보다 6자루가 중첩됐을 때가 더욱 막강하리란 건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다.
변화는 극적이었다.
우득, 우드득.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나면서 성검 몰랑피스의 형태가 변화했다.
백금색 칼날 아래로 황금색 육망성(六芒星) 모양의 손잡이.
...정말 오랜만에 중2병마저 초월한 스타일의 검을 보는군.
칼날의 옆면에는 이름이 멋들어진 글씨체로 친절하게 쓰여 있었다.
몰 랑 스 타
성능도 완전히 바뀌었다.
모든 성검의 기능을 조금씩 이어받아서 완전히 새로운 능력이 됐다.
도덕 아가씨! 설명 좀...
(하이몰랑으로 성능이 증폭된 몰랑코인이 형태를 바꿔서 칼날을 6개 사출한다. 그 칼날은 오토마니아의 자동전투로 개별전투가 가능하지. 그것들은 몰랑로드에 깃든 본좌가 관리해서 매우 똑똑...)
철판! 너에게 안 물었다!
(...본좌는 철판이 아니라 천마다.)
“내가 알 바냐.”
(......)
“흠. 이건 아무리 봐도 그건데. 어느 메카물에 나오는 판넬...”
(이기어검이다.)
“너, 판타지 장르를 자꾸 이상하게 바꾸려고 시도하는데, 그런다고 달라질 건 없어.”
성검 몰랑스타는 편리했다.
오토마니아는 내 몸을 멋대로 움직여서 불쾌했지만, 이건 성검에서 분리된 6개의 칼날이 따로 움직인다.
내가 조종할 수도 있지만, 귀찮으므로 평상시에는 몰랑스타에 깃든 영혼 철판이 알아서 한다.
본인을 무림 세계의 중증 사회부적응자라고 소개해서 살짝 미덥지 않았는데, 의외로 잘 싸운다.
사회부적응자 주제에 제법이잖아?
(본좌는 절대자라고 했다...)
“철판!”
그리고 통하는 구석이 있었다.
솨솨솩-!
철판은 내가 이름을 부르면 알아서 칼날을 전개해서 싸웠다.
몰랑폰으로 그 장면의 녹화영상을 봤는데, 슈퍼로봇처럼 남자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점점 마음에 드는걸?
나중에 정의로운 용사의 성검으로 채택해도 될 것 같다.
“...용사님. 마왕의 탑으로 언제 가실 생각인가요?”
디스코가 무표정으로 질문했다.
아직 1년도 안 됐는데, 이 감찰관은 내 모험에 벌써 질린 듯했다.
나는 상큼하게 답해줬다.
“기껏 만든 성검이 아깝잖아. 그래서 후배들에게 최상급 던전 공략법을 알려주는 중이야.”
감격한 후배들의 커뮤니티 반응은 매우 뜨거웠다.
⤷루크: 채플 교수님. 그건 좀...
⤷오딘: 1. 던전에 들어간다. 2. 철판이라고 외친다. 3. 길을 헤매지 않도록 주의한다. 4. 전리품은 쑥떡에게 맡긴다. 5. 던전을 나온다.
⤷제우스: 오딘아. 6번을 빼먹으면 곤란하지. 6. 참 쉽죠?
⤷바알: 교수님. 너무 어려워서 진도를 못 따라가겠습니다...
⤷시바: 나도 오늘부터 성검 모으기 시작했다. 조만간 몰랑스타 인증사진 찍어서 올리마.
⤷이시스: 채플 선생님. 응애교도 되나요?
⤷M.사탄: 응애교도 가능하다는 공식답변을 받았습니다.
정의로운 G급 용사님의 생방송을 따라 하는 모범적인 학생들이 있어서 잠시 기다려주는 중이다.
덤으로 강한수도.
3대 보검 중 하나인 성마검 소드마스타는 검성 알렉스가 처음부터 보유하고 있었다.
남은 보검은 둘.
정령검 엔드미온은 요정제국의 보물창고에 있고, 천마신검 룬은 무한의 바다에 잠들어 있다.
(후배여! 천마신검의 위치를 알고 있단 말인가?!)
1회차 때부터 알고 있었다.
동대륙과 서대륙 사이를 가로막는 무한의 바다, 그 정중앙에는 바닷물을 빨아들이는 ‘죽음의 소용돌이’가 항상 돌고 있다.
(그곳으로 가줬으면 한다. 꼭 확인하고 싶은 게 있다. 부탁한다.)
...싫은데?
(본좌가 자존심을 접고 이렇게 부탁하는데 너무 매정한 것 아닌가? 그대는 악마인가?)
악마가 아니라 마왕이다.
하지만 가려는 이유를 먼저 말한다면 고려해볼 수도 있다.
(그건...)
말하기 싫으면 말고.
(용사 시절에 낳은 딸이 그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도 왠지 콩가루의 그림자가- 어흠! 가보자!”
재미있을 것 같아서 가는 게 절대 아니다!
철판을 위해서다.
정의로운 G급 용사님과 잡것들은 무한의 바다로 출발했다!
*
죽음의 소용돌이.
4차 교육과정까지는 ‘배의 무덤’으로 불렸던 장소지만, 5차 교육과정부터는 달랐다.
당시에 제1사도였던 내가 캡틴 판타지를 투하해서 죽음의 소용돌이 한복판을 몰랑한 엉덩이로 뭉개버렸기 때문이다.
아기님의 엉덩이 앞에는 ‘부자연스러운 현상’도 어쩔 수 없었다.
현재는 ‘죽음’이란 수식어가 붙기에는 많이 부족한 조금 빠른 물살 수준으로 바뀌었다.
“아버지- 같은 용사님! 여기는 제가 잘 알아요. 저희는 몰랑포스를 타고 날아와서 체감하기 힘들지만, 죽음의 소용돌이 안쪽으로 이동하는 안전한 해로가 있어요.”
“그러면 여기서부터는 쑥떡에게 안내를 맡겨볼까.”
“네! 열심히 할게요!”
의욕적으로 대답한 쑥떡이 안전한 길로 몰랑포스를 이동시켰다.
암초를 무시하고 일직선으로!
그리하여 소용돌이 한복판에 부자연스럽게 솟아난 인공섬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기, 보이네.”
인공섬 모퉁이에 앉아서 낚시를 즐기는 여자가 있었다.
푸른색 뱀장어가 그녀의 알몸을 붕대처럼 감아서 중요한 부위만 대충 가리고 있었다.
“sheeee~”
인공섬 상공에 멈춘 우리를 발견한 뱀장어가 여자의 어깨 위에 머리를 기댄 채 혀를 날름거렸다.
최강의 수호자.
몸에 뱀장어를 두른 저 여자가 5대 재앙이랑 대치하는 5대 수호자의 수좌다.
또한, 소유자에게 방대한 ‘내공’을 빌려주는 마법검 ‘천마신검 룬’의 주인이기도 하다.
능력치 좀 바뀌었으려나?
▷종족: 하프 휴먼
▷레벨: 9999+
▷직업: 무신(무술=초월↑)
▷스킬: 신앙GG 무술G 검술G
내공G 매력ZZZ…
▷상태: 마검
내 1회차 때는 없었던 신앙이 추가됐다. 심지어 GG등급이다.
무슨 종교에 심취한 거지?
철판의 목소리가 살짝 격양됐다.
(복장이 다소 파격적이지만, 본좌의 여식이 틀림없다. 어떤 변태가 저런... 저런... 본좌의 눈에 띄면 분근착골로...!)
그래서 모친이 누구야?
(귀엽고 사랑스러운 고고학자 라누벨이다.)
...라누벨?
(그렇다. 마왕 페도나르에게 패하기 전까지 최강의 모험가로 불렸던 본좌와 그녀의 결합은 그야말로 하늘이 정한 운명이었지! 후배가 간절히 원한다면 본좌의 여식이랑 교제를 허락해주겠다.)
내가 미쳤냐?
(후배가 여자에게 관심이 없다는 건 익히 알고 있다. 하지만 본좌의 모든 가르침을 흡수하고 귀여운 라누벨을 닮은 이 아이는 다르다. 고향의 신물 천마신검을 망설임 없이 맡긴 것도 그런 연유지.)
그거야 네 생각이고.
유전자에 라누벨이 섞인 시점에 완전히 아웃이다.
(후배여. 라누벨이 다소 얼빠진 구석이 있는 건 인정하지만, 편견은 좋지 않다.)
그건 내가 역으로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만?
그래도 여기까지 찾아온 수고가 아까워서 대화해보기로 했다.
(이름은 갈소영이다.)
안 물어봤다.
“어이, 수호자. 손님이 왔으면 쳐다보기라도...”
“돌아가. 여기는 어쭙잖은 용사가 올 곳이- 꺄아앗~?!”
풍덩!
내게 꼬리뼈를 걷어차인 수호자가 소용돌이에 삼켜졌다.
(소영아?!)
“어이쿠! 습해서 그런가? 발이 미끄러졌네. 몰랑.”
사람이 살다 보면 참을 수 없는 것도 있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