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1화
[28회차] 이것이 파티다.
3
최강의 수호자가 사는 마을은, 캡틴 판타지의 몰랑한 엉덩이 자국이 뚜렷한 분지 한복판에 있다.
죽음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해군, 해적, 노예, 인어, 탐험가... 그 후예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시끌벅적한 곳이다.
“세상이 갑자기 캄캄해졌죠.”
“하늘에서 떨어지는 그것은 탱글탱글한 엉덩이였습니다.”
“우렁찬 아기의 포효에 지리고 말았어요.”
“그날을 평생 잊지 못할 거야.”
“죽는 줄 알았지. 하하!”
난파선을 집으로 개조한 마을 ‘배의 무덤’의 주민들은, 나와 잡것들을 보자마자 스스럼없이 다가와서는 자신들이 직접 겪은 ‘신화’를 자랑하듯 이야기했다.
그 마음은 이해한다.
정말 대단한 사건을 겪었다는 건 알지만, 이 좁은 마을에서는 자랑할 대상이 없었다.
함께 겪었으니까!
그래서 입이 근질근질해서 미치던 차에 찾아온 외부인이 무척 반가운 것이다.
“용케도 살았네.”
캡틴 판타지의 몰랑한 엉덩이에 심판받았을 줄 알았는데, 사망자는 없었던 것 같았다.
▷궁금: 강한수 고문님은 이 마을이 싫으신가요?
좋은 질문이야, 도덕 아가씨!
결과부터 말하자면, 엄청나게 싫어했다.
소용돌이에 휘말린 조난자가 마을에 들어오면, 주민들은 모든 걸 빼앗은 후에 대화를 시작했다.
단순히 물질적인 것만 빼앗는 게 아니다.
존엄성, 자존심, 인간성...
밖의 세계에서 풍족하게 살아온 자들을 질투하는 약탈자였다.
그때는 그랬다.
“수호자님의 희생으로 저희는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에이. 희생은 아니지. 무모하게 덤볐다가 붙잡힌 거잖아.”
“위대한 아기님께 전혀 상대가 안 됐었죠.”
“하늘 위의 하늘이랄까.”
옛날 같으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싹 벗긴 후에 대화를 시작했을 주민들이 무척 평범해졌다.
사람이 바뀐 게 아니다.
사고방식이 변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너희는 외부인들에게 적대적이지 않았어?”
내 질문을 받고 살짝 눈을 크게 뜬 주민들이 서로를 한 번씩 돌아본 후에 답했다.
“저희 중 가장 제멋대로였던 수호자가 얌전해졌거든요.”
“아기님이 앉으셨던 이 땅에서 소란을 일으키지 말라고 엄명을 내려서 말이죠.”
“착하게 살라고 경고한 아기님께 반항할 배짱이 없거든요. 하하!”
“응애는 진리입니다.”
투하한 캡틴 판타지가 뭘 했는지 모르지만, 긍정적인 결과가 나온 것 같았다.
저들은 응애교 신자.
마스터 몰랑이 아닌, 나의 화신을 따르고 있었다.
그 점은 만족스럽군.
크지 않은 마을을 한 차례 둘러봤을 때쯤,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수호자가 돌아왔다.
“용사가 비겁하게 뒤에서...!”
“닥쳐. 땅이 습해서 발이 미끄러졌을 뿐인데, 비겁하다니? 몸이 둔한 네 잘못 아닌가?”
“13중첩 보호막을 깨고 뼈까지 부숴놓고서 실수?! 어떻게 그런 말을 태연하게 할 수 있지?!”
“변명하지 마. 그 상황은 누가 봐도 실수였다.”
“그건 내가 할 말이야!”
라누벨의 유전자가 섞여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탓일까?
1회차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던 최강의 수호자가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천마신검이나 내놔.”
“흥! 부탁해도 시원찮을 판국에 내놓으라니. 능력을 증명해라. 이번에는 방심하지- 꺄앗?!”
(후배여! 명백한 악의가 느껴지는 것 같다!)
몰랑스타에 깃든 영혼 철판이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피곤해져서 살살 하는 중이다.
하지만 능력을 증명하라고 도발하는 것까진 어쩔 수 없다.
내게 꼬리뼈를 또 걷어차인 수호자가 맨바닥에 고꾸라졌다.
“부, 분명히 이번에는 예의주시하고 있었는데...!”
“아기에게 당하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군. 현실을 인정해. 내가 너보다 강한 거잖아.”
“아아! 아기님!”
“.....”
“아기님만 상상하면 온몸이 후끈 달아올라서... 하앙!”
“......”
(남대륙 응애교의 신이 본좌의 여식에게 무슨 짓을...!)
무슨 짓이긴. 귀여운 GGG급 아기가 생각하는 것쯤이야 쪽쪽 빨고 핥는 거겠지.
매우 건전하다.
⤷오딘: 최강의 수호자가 맥없이 쓰러지는데?
⤷제우스: 능력치는 낮은데 직업이 너무 사기잖아.
⤷루나: 말이 많네요. 불만이면 여러분도 선생님처럼 사도가 되시든가요. ^^
⤷이시스: 성룡왕 에르단티랑 요리대회에서 패배함. 레시피를 분명 똑같이 했는데...
⤷루크: 원인은 아버지의 손맛이 아니기 때문!
⤷릴리스: 어머니의 손맛은 안 되는 거? 여자가 불리하네.
최강의 수호자에게서 압류하듯 천마신검 룬을 챙긴 나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쑥떡을 불렀다.
“선배에게 정령검만 챙겨서 마왕의 탑으로 오라고 전해줘. 너도 탑에서 합류해.”
“네!”
씩씩하게 대답한 쑥떡이 파티에서 잠시 이탈했다.
나도 이젠 볼일이 끝났다.
모험을 시작하고 아직 1년도 안 지났지만, 마왕의 탑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는 일만 남았다.
너무 쉬운 거 아니야?
(후배여! 잠시만 칼날을 전개하는 걸 허락해다오. 딸아이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여기서는 매정하게 안 된다고 딱 잘라 거절해줘야 재미있지만, 미운 정이 있어서 들어줬다.
삭, 삭, 삭, 삭, 삭, 삭-
철판은 여전히 엉덩이를 문지르며 고통을 하소연하는 딸 앞에서 칼날로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나는 읽을 수 없었다.
뭐라는 거야?
▷훌쩍: 오랫동안 혼자 놔둬서 정말 미안하다는 사과문이에요. 그리고 강한수 고문님이 매우 강한 사나이라고 칭찬했어요.
고마워, 도덕 아가씨! 나는 도덕 아가씨에게 칭찬받고 싶은데!
이번 회차의 소원이다.
▷수줍: 강한수 고문님은 머리를 밀고 정의로운 용사의 미소를 지을 때가 가장 멋지세요.
그, 그렇구나!
하필이면 대머리여야 한다는 게 망설여지지만, 도덕 아가씨를 위해 진지하게 고민해봐야겠다.
그나저나...
“너는 왜 따라오냐?”
“최강의 수호자로서 용사의 모험을 도와주려고.”
“방해다.”
“그거야 두고 보면 알지.”
철판의 속셈이 뻔히 보였지만, 생방송 중인 탓에 뚜렷한 명분 없이 거절하기 힘들었다.
라누벨의 딸이라서!
아주 확실한 이유가 있지만, 공개해도 될 정보는 아니었다.
“죽어도 모른다?”
마음대로 하게 놔두기로 했다. 나도 여기서 더는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슬슬 끝내고 싶다.
“물론이지.”
“단, 귀여운 척하지 마라.”
“무슨 의미?”
“모르면 됐어.”
나와 잡것들은 수송선으로 죽음의 소용돌이를 빠져나온 후, 곧바로 정거장 몰랑포스에 탑승했다.
[목적지를 설정해주세요.]
“마왕의 탑으로.”
정의로운 GG급 용사님의 모험에 마침표를 찍을 때가 됐다.
*
마왕의 탑 입구에 세워진 마을에서 강한수와 합류했다.
녀석의 허리춤에는 정말로 정령검 엔드미온이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옆구리에는 검희가 신혼부부의 분위기를 풍기면서 정답게 팔짱을 끼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용사님.”
“어, 그래.”
나는 검희의 인사에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은혜는 갚는다.”
강한수가 비장감 넘치는 표정으로 인사 대신 각오를 다졌다.
내 파티는 실로 화려했다.
<탱커>
나: 몰랑스타
<미드필더>
알렉스: 성마검 소드마스타
강한수: 정령검 엔드미온
수호자: 천마신검 룬
검희: 마법검 아이어
<서포터>
쑥떡: 뒷정리
디스코: 잉여
설녀: 치어걸
신의 총애를 받는 내가 맷집이 가장 좋기에 탱커다.
하지만 내가 없는 다른 파티에서는 미드필더 넷이 최강의 탱커 겸 딜러가 될 것이다.
탑을 오르는 전력으로는 나 혼자서도 충분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돌려보내긴 좀 그렇잖은가?
이 맴버로 등반하기로 했다.
“빠르게 가자고.”
탑 10층.
가출선배의 부하였던 요정 용사인 실레리온이 지키고 있다.
검술 실력이 뛰어나지만, 협공에 취약해서 언제부턴가 탑의 호구로 통하고 있었다.
“이, 이건 무슨 파티입니까?!”
요정 용사 실레리온은 내 파티 구성원들을 보자마자 자기소개도 잊고 공황에 빠졌다.
“뭐긴. 판타지아 대륙에서 가장 칼질을 잘하는 친구들만 모아놓은 검사 파티지. 선택권을 줄게. 가장 만만한 녀석으로 골라봐.”
선택받은 녀석은 쪽팔려서 고개도 못 들...
“용사여! 내 칼을- 켁?!”
“이 새끼가 나를 물로 보네!”
0.1초 컷.
정의로운 GG급 용사 파티는 피해 없이 다음 층으로 향했다!
⤷오딘: 저 교사는 피도 눈물도 없나?
⤷제우스: 내가 실레리온이었으면 쌍욕부터 했다.
⤷루크: 채플 선생님은 10층을 검술로 썰어버리시네. ;;
그리고 20층.
용사 실레리온의 아내이며, 유감스러운 3대 요정왕 엘브하임의 여동생인 엘브하슈가 지키고 있다.
그녀의 특징은 마법 면역.
칼질 같은 난폭한 물리 공격 외에는 일절 통하지 않는다.
“다, 당신들은 대체 뭔가요?!”
“...그러게.”
나도 살짝 의문이다.
마법이랑 친하지 않은 검사들로만 이루어진 용사 파티를 본 엘브하슈도 남편처럼 혼란에 빠졌다.
전의를 완전히 상실.
같은 여성인 검희와 수호자가 깔끔하게 그녀의 목숨을 거뒀다.
⤷바알: 진짜 잔인하다.
⤷아몬: 용사가 힘없는 마왕을 괴롭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아?
⤷릴리스: 마의 벽인 20층이 저리 쉽게? 자괴감 드네요.
⤷루나: 힘내세요.
계속해서 30층.
은하계를 다스리는 가출선배의 아들 보리스가 상대다.
과거에는 ‘암흑의 왕자’라고 불렸을 만큼 뛰어난 암살자였고, 내게 패배한 뒤에는 강철 같은 정신력을 보유하게 됐다.
탑에 배치된 보리스는 인간의 육체적 한계를 초월한 최강의 안드로이드란 설정인데...
이쪽도 최강이 많았다.
“미친! 알렉스와 강한수가 동료라고? 이봐, 젊은 용사. 너는 양심도 없냐?”
“내 양심은 몰랑하지.”
콰광-!
유부남 알렉스의 성마검에 보리스가 고철로 변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1초를 넘기지 않았다.
...보스들이 너무 약한가?
아직 저층이라서 그럴 것이다.
⤷알라: 눈 뜨고 못 보겠다.
⤷제우스: 얼른 눈을 떠. 이건 꿈이 아니야!
⤷아크: 이걸 공략이랍시고 생방송 하는 이유가 매우 궁금함.
⤷피코: 몰랑을 믿으세요! 행복해집니다! 몰랑! 몰랑!
그 기세로 40층까지 쭉!
40층 보스는 가출선배의 부하이자 보리스의 아내인 빨강이.
우주에서 활동하던 적룡 크로마티구스 장군이다.
“Reeee...!”
자기소개는 없었다.
우리를 보자마자 그녀는 망설임 없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전직 군인답게 감이 좋군?
“내가 처리하마.”
펄럭!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를 펼친 강한수가 공중전에 돌입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땅, 불, 바람, 물, 마음!
정령검 엔드미온에 깃든 마음의 정령과 탑에 사는 토박이 정령들이 녀석을 도왔다.
“Reeee~!?”
“몰랑의 이름으로. 몰랑.”
40층 보스는 ‘용자의 힘’으로 능력치를 무시하지만, 마스터 몰랑의 가르침을 승화한 강한수에게는 상관없는 얘기였다.
그리고 전투 시작 후, 강한수는 약 10초 만에 40층 보스의 두꺼운 경추(頸椎) 6번과 7번 사이를 예쁘게 베었다.
쿠웅-
붉은색 거구가 지상에 맥없이 처박혔다.
⤷지크: 사탄 형. 의문의 1패.
⤷이드: 사탄님의 공략에는 보스를 도발해서 용인 형태로 싸우도록 유도하라고 했었는데...
⤷M.사탄: 저분을 상식으로 잡으면 곤란합니다.
⤷알라: 와! 50층에서 잠시도 안 쉴 모양이네.
⤷아몬: 쉴 필요가 없지.
한 박자 쉬고 60층!
마왕의 탑 내에서 정비와 휴식을 할 수 있도록 마련된 50층을 무시하고 그냥 올라갔다.
뭘 했다고 쉬어?
“판타지아 세계에 사는 수많은 생명아. 나에게 너희들의 힘을 조금씩만 빌려- 꾸엑?!”
“기다려주기 귀찮다.”
마왕의 탑에 취직한 천사 감자엘이 양팔을 번쩍 들고 자연의 기운을 모으고 있었다.
잠깐이면 노력한 성의를 생각해서 기다려주려고 했는데, 10초도 넘게 걸려서 그냥 죽여버렸다.
⤷이시스: 애도...
⤷피코: 조문 왔어요. 몰랑.
70층은 추억이 샘솟았다.
구-마왕 페도나르.
장인어른이 강렬한 퍼포먼스를 선보이면서 나를 환영해줬다.
“마침내 여기까지 왔구나, 비겁한 여신에게 선택받은 용사여. 짐은 모든 마(魔)의 정점, 마왕 페도나르- 커억?!”
“어이쿠! 손이 미끄러졌네!”
가업을 떠넘기고 탈주한 장인어른의 뻔질뻔질한 용안(龍顏)을 보자마자 울컥해서 그만.
대사 포함해서 5초 컷.
나는 고꾸라진 장인어른의 척추를 질근질근 밟아드리며 잡것들을 돌아보았다.
아무리 봐도 과잉전력이다.
⤷루크: 80층도 쉽게 돌파할 것 같네요. 자기 복제와 6인 파티를 상대하는 거라서.
⤷오딘: 이 파티면 90층은 몰라도 80층은 확실히 쉽지.
⤷시바: 시시하군.
⤷제우스: 시바야. 시바야. 몰랑스타 인증사진 멀었니?
⤷알라: 그만 좀 괴롭혀. 시바랑 원수졌냐?
하지만 80층부터는 다르다.
나 vs 나
“따라온다고 수고했어. 여기서부터는 나 혼자 간다.”
본게임을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