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5화
[29회차] 6차 교육과정
모든 학생에게 ‘넓은 교실’을 제공해주는 판타지아 시스템은 내 힘을 희생한 결과물이다.
용사와 원주민들에게 주어진 게임 같은 ‘능력치’도 마찬가지.
이렇게 설명하면 너무 막연하기에 수학적으로 계산해보자.
초등교육장: 781,704(61%)
중등교육장: 20,339(13%)
고등교육장: 3,650(7%)
학생들에게 제공하는 교실의 숫자와 차지하는 힘의 비중이다.
내 전체 신격의 약 81%가 80만 평행세계의 유지, 관리에 쓰이고 있다는 뜻이다.
80만.
정말 터무니없는 숫자다.
이 전력을 한곳에 모은다면, 80만 뇌비우스 악룡군단, 80만 에르단티 성녀군단, 80만 섹스피어 마법군단, 80만 페닉스 거인군단, 80만 알렉스 보병군단, 80만 강한수 정예군단, 80만...
여기서 차원과 자잘한 생명체 능력치를 회수하고 ‘영웅’만 복제한다고 가정해보자.
80만이 아니라 80억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개개인의 전투력까지 고려하면 은하계도 씹어먹을 수 있으리라!
나머지 19%는?
영혼보관소: 98,814,539,240(1%)
교무실: 781(3%)
졸업생: 2,014,614,072(4%)
친위대: 99,999(10%)
그리고 잘생긴 마왕님 품위 유지비, 비겁한 마누라 생활비, 캡틴 판타지 분윳값, 씨드엘 양육비, 지구 데이터통신료, 페스티벌 행성 관리비 등을 합친 자잘한 비용들이 약 1%를 차지한다.
즉, 내가 사적으로 활용하는 신격은 쪼개고 또 쪼개서 전체의 0.1%에도 못 미친다는 뜻이다.
이건 나뿐만이 아니다.
최초의 악마 페도나르
최초의 천사 파르마엘
나 이전에 판타지아 시스템을 유지해온 두 신(神)도 항상 1% 미만의 신격으로 지내왔다.
...돌이켜보면 운이 좋았달까.
파르마엘이 시스템에 신격을 빨려서 무력하지 않았다면, 나는 적대하자마자 삭제됐을 것이다.
뿅! 뿅! 뿅! 뿅...
“총장님의 취임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려요!”
“축하합니다!”
......
베이커리 교감을 선두로 교사들이 줄줄이 입장하며 내게 인사했다.
그 인원은 약 300명.
업무가 바빠서 불참한 교사와 교생들이 제법 많았지만, 판타지아 교육장을 운영하는 핵심인물은 전원 참석했다.
해임한 교장 마누라 빼고.
“주인님께서 언젠가 이렇게 하시리라고 느끼긴 했지만, 예상보다 매우 빨랐습니다.”
“빠른 게 좋잖아?”
히프리아에게 미소로 회답한 나는 교직원 일동을 쭉 훑어봤다.
그리고 설명했다.
“지금부터 학생이 사망하면 회귀시키지 말고 페스티벌 행성에서 모험을 계속 진행한다. 교사와 교생들은 학생들 사이의 마찰이 없도록 감독하며, 판타지아 차원의 통합에 전력을 기울인다. 추후의 방침은 히프리아 교감에게 전달할 것이며, 베이커리 교장에게 세부적인 조정을 맡긴다. 질문?”
“총장님. 제 이름은 페이커-리...”
“계속 교감할래?”
“...베이커리 교장은 총장님께서 맡기신 자리와 임무에 최선을 다할 것을 엄숙히 맹세합니다.”
“좋아. 해산!”
대규모 개혁을 건성으로 진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오래 전부터 준비해왔다.
몰랑폰 커뮤니티.
개별 교실을 사용하는 바람에 중등교육장이나 학생회 외에는 만날 기회가 없었던 학생들을 자연스럽게 연결했다.
▷공지: 존경하는 학생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교직원의 조직개편이 이루어짐에 따라 6차 교육과정으로 넘어가게 됐습니다. 하시던 일을 잠시 멈추시고 귀를 기울여주시길 당부드립니다.
▷공지: ‘선택받은 용사’라는 여태까지의 교육방침은 학생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는 한편, 노력을 게을리 하게끔 하는 부작용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교직원은 심사숙고 끝에 모험가들의 경쟁을 통하여 용사로 발탁되는 새로운 시스템, 6차 교육과정을 채택했습니다.
▷공지: 몸과 마음이 맞는 동료들과 새로운 모험을 떠나십시오. 미래의 용사는 바로 당신입니다.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베이커리.
정말 유능한 자다.
내 반역을 돕기도 핬지만, 사전예고도 없이 추진한 내 계획에 맞춰서 곧장 공지를 올렸다.
그래서 교장으로 임명한 거고.
쏘시아를 계속 앉히거나 히프리아에게 맡겨도 됐었다.
그러나 베이커리를 선택했다.
“어쩔 수 없지.”
나는 수없이 봐왔다.
용사들이 하렘과 응원단원을 요직에 앉혀서 국가와 파티를 말아먹는 과정을 말이다.
가출선배도 감당이 안 되자 자포자기하고 가출했다.
은하계의 왕이 된 지금은 능력 위주로 요직에 앉히는 듯하지만, 과거에 싸놓은 똥이 너무 크다.
“쏘시아가 매우 섭섭해할 거예요. 오면 꼭 위로해주세요.”
“너는 천사냐.”
질투의 화신을 옹호하다니...
교직원들이랑 함께 떠나지 않고 내 곁에 남은 히프리아가 생긋 웃으며 답했다.
“최초의 천사랍니다.”
“흐음...”
예쁜 도덕 아가씨를 비서로 삼고 싶었지만, 비겁한 마누라를 곁에 둬야 할 것 같다.
혼자 놔두면 추한 질투심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불안하기도 하고.
학생들의 반응은...
⤷시바: 제우스야. 이 채팅 보고 있니? 얼른 만나고 싶다. ^^
⤷지크: BL... 흠흠!
⤷오딘: 완전 웃기네! 앞으로 졸업할 때까지 절대 못 만날 줄 알았는데 이걸?
⤷오피온: 옛날 글들 좀 훑어봐야겠다. 내 욕한 녀석 있나.
⤷알라: 큰 그림 오졌다. ;;
⤷바알: 인증사진 없이 주둥이 털던 녀석들 실력을 드디어 볼 수 있겠군.
⤷이시스: 함께 모험할 파티원 모집해요! (1/5)
⤷루나: 와! 빠르네! 판타지아 최고의 미녀가 파티원 구함!
⤷레온: 최강의 길드를 함께 키워가실 분을 모십니다.
⤷릴리스: 중앙광장에서 보자!
교육과정 개혁에 불만을 품은 학생들의 채팅도 더러 보였지만, 몰랑폰 커뮤니티에서 사귄 친구들을 만날 수 있게 돼서 좋다는 쪽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계획대로다.
“단순한 녀석들.”
베이커리 교장이 공지로 살짝 언급했었는데, 사회부적응자들에게 ‘선택받은 용사’란 설정은 보장된 구원의 손길이다.
그걸 내가 잘라버린 셈.
뒤늦게 현실을 깨달은 낙오자들이 조만간 속출하겠지만, 그때는 체제가 이미 완전히 자리 잡고 안정궤도에 접어든 후라서 괜찮다.
이것이 선동과 날조의 진수.
전직 용사님의 실력이다!
“몰랑폰 커뮤니티는 용사들의 자주성을 해치는 요소라고 여겼는데 이런 용도일 줄은...”
디스코가 심한 말을 하네.
“이봐, 감찰관. 판타지아 교육장의 진짜 주인이랑 대화할 준비가 됐나?”
“...파르마몬 총장님. 몰랑소프트를 적으로 돌리실 셈인가요?”
“어디가?”
“투자사들의 의견도 묻지 않고 독단적으로 이만한 개혁을 추진하는 것은 명백한 월권입니다.”
“월권은 개뿔!”
내가 10년 동안 마계에서 귀여운 척하는 라누벨의 척추만 만지작거린 게 아니다.
판타지아 교육장의 생활기록부에 없는 삭제된 기록들을 그녀의 뇌에서 꽉꽉 쥐어짰다.
그래서 잘 안다.
【원죄】
“로맨티넘 산출법, 학생 제공, 평행세계 원천기술, 교육장 홍보, 페도나르 공략법, 취업 지원, 보호조약, 차원 임대. 더 있나?”
“......”
“하나하나 짚어가자고. 로맨티넘을 더는 산출하지 않을 거야. 평행세계는 정리 중. 학생 공급도 필요 없어. 학생들이 무책임하게 버린 자식들이 많아. 홍보도 자연히 쓸모없겠지? 취업도 굳이? 파르마엘이랑 달리 나는 싸움을 피하지 않아. 그러니 보호조약도 됐어. 평행세계가 아니라서 차원이 역으로 남아. 임대도 끝. 질문 있어?”
“총장님. 사업은 애들 장난이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하는 행위는 신뢰를 저버리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걸 나에게 따지면 안 되지. 너희가 강조하는 신뢰는 파르마엘이 깬 거잖아? 나하고는 상관없어.”
“그대로 돌려드리죠. 몰랑소프트는 파르마엘이 아니라 기업 대 기업으로 판타지아 교육장과 계약한 겁니다.”
“아까부터 뭘 본 거야? 판타지아 교육장은 폐교됐어.”
“...예?”
디스코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문한다.
바보인가?
“폐교됐다고.”
“그, 그게 무슨 뜻이죠?”
진짜 바보인가?
“학생들에게는 6차 교육과정이라고 둘러댔지만, 제삼자의 눈으로 보면 어떻지? 평범한 차원이랑 구조가 똑같아. 모험가 비중이 좀 높긴 하지만, 그런 차원은 찾아보면 은근히 많잖아?”
“.......”
반박하지 못한 감찰관 디스코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제야 눈치챈 모양이다.
“나는 운이 정말 좋았어. 감금 생활에 지친 페도나르가 신격을 내게 떠넘겼거든. 아무리 내가 훌륭한 사위라도 상식적으론 절대 있을 수 없는 기행이지.”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준다.
매우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러나 ‘불로영생’의 몸이어도 자식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줄까?
아닐 것이다.
아랫사람으로 두거나 약간의 재산을 줘서 독립시킬 순 있어도, 쌓아온 모든 걸 자식에게 넘기진 않을 것이다.
하물며 애지중지 키운 딸아이의 마음을 훔친 사위라면 더욱!
【암흑】
그러나 페도나르는 했다.
영겁의 징역살이에 지친 장인어른은 모든 권리를 믿음직한 사위에게 떠넘기고 자유를 선택했다.
일이 이렇게 잘 풀릴 줄 알았다면 절대 양보하지 않았겠지.
【백광】
파르마엘도 어리석었다.
나와 히프리아를 벌레 취급하며 방심한 그녀는 무방비상태로 처맞기만 하다가 끝났다.
평행세계의 숫자를 조금만 줄이고 품위 유지비를 높였다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원죄】
“그래서 나는 품위 유지비를 대폭 늘리기로 했지.”
6차 교육과정.
그것은 봉인된 99%의 신격을 자연스럽게 회수하기 위한 명분에 지나지 않는다.
초등교육장: 64,280(6%)
중등교육장: 2,145(1%)
고등교육장: 503(1%)
전체 비중의 81%에 달했던 교육장 유지비가 줄어들면서 73%의 신격이 내게 돌아왔다.
조만간 모든 평행세계가 사라지면 낭비가 1% 미만이 될 것이다.
영혼보관소: 98,814,530,000(1%)
교무실: 1000(4%)
졸업생: 2,014,623,851(4%)
친위대: 90,000(9%)
친위대는 10만 명의 남정네로 이루어진 파르마엘의 하렘이다.
비겁한 마누라가 성검 몰랑로드에 집어넣은 1세대 용사 ‘천마’도 친위대 출신이다.
베이커리 교장은 서두르지 않고 친위대 1만 명을 졸업생과 교무실에 편입시켰다.
그 과정에서 1%의 신격이 내게 회수됐다.
“흐음... 대충 75%인가.”
베이커리 교장은 내 예상보다 훨씬 유능했던 모양이다.
그게 아니면, 내가 안배해놓은 몰랑폰 커뮤니티가 상상 이상으로 큰 효과를 발휘했든가.
90% 이상 회수에 10년쯤 걸릴 줄 알았는데, 이 기세대로라면 며칠로 충분할 것 같았다.
【원죄】
【원죄】
......
무한대에 가깝게 쪼개졌던 신격이 하나로 합쳐진다.
파르마엘과 페도나르는 부모(자연)에게 물려받은 피(세계)와 살(능력치)을 쪼개서 나눠줬다.
그것이 원초의 죄.
나의 신격.
하지만 이젠 아니다.
나는 뿔뿔이 흩어진 피와 살을 회수하여 잘못을 바로잡았다.
이것은 그 보상.
【원천】
“...중2병 같아서 평소에는 이런 말을 안 하는데, 지금은 안 하고 넘기기 아깝네. 온몸에 힘이 흘러넘치는군! 하하핫!”
“주인님...”
“흠흠.”
히프리아가 나를 걱정스럽게 쳐다봐서 1절만 하기로 했다.
나는 디스코를 쳐다봤다.
【파멸】
작다. 너무나 작다.
파르마엘이 나를 얕잡아보고 방심한 이유가 지금은 이해됐다.
“이제 어쩔래?”
『공정한 어떤 인신이 척추를 쓰다듬습니다』
『어떤 사신이 소스라칩니다』
『공정한 어떤 인신이 손을 멈춥니다』
『어떤 사신이 긴장합니다』
...음?
나는 어떤 신들의 세계에 첫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