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6화
[29회차] 어떤 커뮤니티
“이게 뭐야?”
『공정한 어떤 인신이 뭐냐고 묻습니다』
“으음. 인간이 맨눈으로 태양을 바라보면 실명하지요. 이것은 인간이 신(神)을 볼 수 있도록 보호해주는 선글라스 같은 겁니다.”
『어떤 사신이 알려줍니다』
척추가 변변찮은 어떤 사신의 설명이 친절한 건 아니었지만, 단번에 이해됐다.
원리는 ‘중력’이랑 비슷하다.
가벼운 물체가 무거운 물체에 끌려가는 우주의 법칙.
신(神)은 방대한 존재감을 품고 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매우’ 약한 존재는 참견하기만 해도 티끌처럼 삼켜진다.
“...귀찮게 됐네.”
『공정한 어떤 인신이 좌절합니다』
나는 판타지아의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는 대로 곧장 지구의 가족을 만나러 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힘들어졌다.
내가 매연으로 아름다운 고향별 지구에 존재를 내미는 순간, 가족뿐만 아니라 지구의 생명체들이 싹 몰살당하리라.
이 일을 어찌할...
『어떤 신이 빼꼼합니다』
『어떤 수신이 인사합니다』
『어떤 신이 손을 흔듭니다』
『어떤 신이 꾸벅합니다』
『어떤 정신이 기웃거립니다』
『어떤 신이 빵긋합니다』
......
지금까지 그 존재조차 몰랐던 어떤 신들이 무더기로 느껴졌다.
내게 적대적이진 않았다. 그러긴커녕 만나서 반갑다고 이웃에게 인사하듯 발랄한 분위기.
...그런데 좀 산만하고 정신없다.
디스코가 말했다.
“빠르게 익숙해지는 편이 당신의 정신건강에 좋을 거예요, 공명정대한 인성의 신이여...”
『어떤 사신이 조언합니다』
나는 정신 사나운 어떤 신들의 메시지를 무시하고 물었다.
“이건 누가 만든 커뮤니티 시스템이지?”
“매우 순진한 어떤 여신입니다.”
“아! 1등성이라던...”
라누벨은 그 순진한 어떤 여신을 3대 신이라고 했었다.
“과거에 신(神)들은 자기밖에 모르는 존재였습니다. 아! 그래요. 몰랑폰이 보급되기 전의 판타지 용사들처럼요.”
“아!”
단번에 이해됐다.
“이때, 매우 순진한 어떤 여신이 순진한 제안을 했습니다. 그것이 발전해서 오늘날의 순진한 커뮤니티가 완성됐죠.”
“호옹...”
이기적인 신(神)들의 화합과 공존을 꿈꾸다니? 실패했다면 놀림거리가 됐을 텐데...
진짜 순진한 분이로군!
“그런데 디스코. 나는 이 커뮤니티에 가입한 기억이 없는데?”
“당신은 안 했지만, 가입된 어떤 신의 후원을 받으면 자동으로 가입됩니다.”
“후원? 아아, 그렇군.”
【마계】
【모험】
이젠 티도 안 나지만, 장모님과 라누벨에게 신격을 받았었다.
디스코가 확인해줬다.
“마계. 매우 순진한 어떤 여신과 같은 신위(神威)에 있는, 아주 성급한 어떤 마신의 신격입니다. 성급하게 신격을 뿌리고 다니는 분이라서 놀랍지도 않군요. 순진한 커뮤니티를 애용... 악용하는 분이죠.”
“어떻게?”
“보시면 압니다. 아! 저기, 지나가시는군요.”
『아주 성급한 어떤 마신이 속옷을 흔듭니다』
『어떤 수신이 애원합니다』
『아주 성급한 어떤 마신이 깔깔거리며 도망칩니다』
『어떤 수신이 울먹입니다』
『매우 순진한 어떤 여신이 베개를 던집니다』
『아주 성급한 어떤 마신이 코피를 쏟습니다』
“...흠.”
내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조금 전에 소름이 쫙 돋았다.
죽음의 공포랄까.
“그렇군요. 당신이 계약을 멋대로 파기할 수 있었던 건, 몰랑소프트랑 싸워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겠죠?”
“해석이 지나치네.”
하지만 아니라고 딱 잘라 부정할 순 없었다.
지금의 나는 강하다!
“저를 기준으로 몰랑소프트를 판단하면 곤란합니다. 저는 회장님의 애완동물일 뿐이니까요.”
“......”
허세일까?
진짜일까?
나는 판타지아 교육장에서 신격을 회수할 때까지만 해도 승리에 대한 자신감이 넘쳤었다.
그러나,
『어떤 수신이 고마워합니다』
『매우 순진한 어떤 여신이 빵긋합니다』
『어떤 토신이 땅을 팝니다』
『어떤 신이 무언가를 구덩이에 묻습니다』
『느긋한 어떤 천신이 멋진 비석을 세웁니다』
『아주 성급한 어떤 마신이 무덤에서 튀어나옵니다』
『어떤 신이 식겁합니다』
......
내 시야가 확정되면서 몰랐던 어떤 신들의 세계를 알게 되다.
그 뒤부터 경각심이 스멀스멀 고개를 내밀었다.
이 세계다.
시간을 조종하는 막강한 신격과 자연이란 뒷배를 가진 파르마엘이 삶에 만족하지 못한 이유.
그녀는 수많은 어떤 신(神)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그만큼 우주는 넓었다.
“목적이 뭐지?”
“로맨티넘. 신들이 창조할 수 없는 2대 금속입니다. 그리고 판타지아 교육장은 질 좋은 로맨티넘 산출지였죠. 조금 전까지.”
“그거 안 됐네.”
나는 채석장이라고 할 수 있는 평행세계를 전부 철수시켰다.
“공명정대한 인성의 신이여. 당신은 로맨티넘의 가치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알았다면 파르마엘 교장이 긴 시간을 공들여 구축한 판타지아 교육장을 간단히 포기할 리 없었겠죠.”
“할 말은 그게 끝이야?”
나를 너무 얕보는군.
노른자 땅에 카페를 차리고, 마누라의 골반을 쓰다듬는 기둥서방이면 나는 딱 만족한다.
그 이상은 바라지 않는다.
아! 그러고 보니, 비겁한 마누라가 아까부터 문 열어달라고 두드리는 중이었다.
깜빡했네.
뿅!
“남편님~!”
출입금지를 풀자마자 쏘시아가 내 품에 덥석 안겼다.
『어떤 신이 눈을 빛냅니다』
『느긋한 어떤 천신이 이 장면을 좋아합니다』
『어떤 신이 음흉하게 웃습니다』
『어떤 미신이 설렙니다』
......
이 커뮤니티에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할 듯했다.
나는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쏘시아의 골반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히프리아.”
“네, 주인님.”
나는 놀고 있는 팔로 히프리아의 척추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간지럽다는 듯이 등허리를 비트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그래. 이거면 충분하다.
내가 원한 미래.
“로맨스 소설이었으면 해피엔딩, 에필로그로 딱 좋은...”
『어떤 신이 빤히 쳐다봅니다』
『어떤 미신이 빤히 쳐다봅니다』
『어떤 신이 빤히 쳐다봅니다』
『느긋한 어떤 천신이 빤히 쳐다봅니다』
『어떤 신이 빤히 쳐다봅니다』
『어떤 수신이 빤히 쳐다봅니다』
......
이것들만 없었으면 당장 오늘부터 기둥서방의 삶을 즐길 텐데.
남의 가정사와 연애사에 관심 많은 신(神)이 뭐 이리 많아?
“씨드엘은?”
“흑! 엄마에게 뺏겼어...”
“그렇군.”
마계에 계신 장모님이 손자를 많이 예뻐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유감스러운 마약정령과 귀여운 척하는 라누벨도 함께 있는 게 살짝 걱정되는걸.
▷보고: 총장님. 생도들의 전학과 통합이 끝났습니다. 망설이는 생도들도 있었지만, 약간의 편의와 보상을 약속해주는 식으로 빠르게 처리됐어요.
편의와 보상인가. 베이커리가 훌륭한 아이디어를 냈군.
그나저나, 도덕 아가씨의 말투가 딱딱해지고 거리감이 느껴져서 마음이 너무나 아프다!
▷난감: 업무 중이라... 바빠서 총장 취임식에 참석하지 못한 건 정말 죄송해요.
『공정한 어떤 인신이 굉장히 섭섭해합니다』
『친절한 어떤 여신이 난감해합니다』
...음?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도덕 아가씨! 도덕 아가씨! 나의 비서가 되어줘!
▷사양: 저보다는 쏘시아 님이 훨씬 적임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훌륭한 교사가 되는 게 꿈이에요.
『공정한 어떤 인신이 찝쩍댑니다』
『친절한 어떤 여신이 사양합니다』
아앗...
한 번쯤은 우연히 겹칠 수 있지만, 두 번은 아니다.
풋풋한 교생 때문에 좋아했던 나의 도덕 아가씨가...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서 오늘은 아무런 생각도 하기 싫어졌다.
“...디스코.”
“가, 갑자기 뭔가요?! 하늘 위에 하늘이 있는 줄 모르고 기세등등하다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네가 남자의 마음을 알아?”
“......”
“이것저것 새로운 정보를 가르쳐준 건 고마운데, 오늘은 너랑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잠깐! 잠깐만요! 사업적으로 살짝 마찰이 있긴 했지만, 남자를 울릴 만큼 심한 말을 한 기억은 없는데요!”
『어떤 사신이 변명합니다』
『느긋한 어떤 천신이 유죄를 선고합니다』
『어떤 신이 크게 질책합니다』
『어떤 수신이 사과를 제안합니다』
『어떤 신이 비난합니다』
『어떤 미신이 누군가에게 실망합니다』
.......
이 커뮤니티. 상당히 정신 사납긴 해도 나쁘진 않은 것 같다.
환영 인사를 마친 어떤 신들이 썰물처럼 쭉 빠졌다. 그리고 대여섯만 내 주위를 계속 기웃거렸다.
이제 좀 조용해졌군.
“집에 가.”
감찰이랍시고 진짜 오랫동안 판타지아 세계에 머물렀다.
조금 전에 도덕 아가씨에게 받은 충격이 너무 커서, 더는 상대해주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좀 바쁘다.
【창세(創世)】
【원천(原泉)】
예전에 소화하지 못해서 쏘시아에게 맡겼던 신력 ‘창세’가 내게 흡수되고 있었다.
이게 원죄(原罪)와 원천(原泉)의 결정적인 차이일 것이다.
원천이 원재료라면, 창세는 이것을 가공하는 공장이다.
원래부터 하나였던 둘이 다시금 하나로 합쳐지고 있었다.
그때,
“공명정대한 인성의 신이여. 판타지아의 새로운 총장이여. 마지막 제안입니다. 몰랑소프트는 판타지아 행성을 구매하고 싶습니다. 굉장히 후한 가격으로요. 또한, 원하신다면 가족들이랑 조용히 지낼 행성도 알아봐 드리죠. 이 정도면 상당히 양보했다고 보는데요.”
디스코가 의미심장한 실눈으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정의로운 내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몰랑소프트의 의도를 알 수 없었던 탓이다.
“폐교돼서 이젠 로맨티넘도 산출되지 않는데?”
“그래도 연구할 가치는 있으니까요.”
“흐음~”
“당연한 얘기겠지만, 원주민과 생태계는 고스란히 남겨주셔야 합니다. 또...”
“설명은 됐어.”
“그러면-”
“거절할 생각이거든.”
“총장님. 일단 가격이라도 들어보고 결정하셔도 늦지 않다고 보는데요.”
“됐어.”
내 영혼은 지구별에서 태어났지만, 육체는 판타지아 행성의 북대륙 출신이다.
즉, 판타지아 행성은 비겁한 마누라와 장모님뿐만 아니라, 내게도 고향별에 해당했다.
아무리 좋은 조건을 제시하더라도 절대로 안 판다.
“...그런가요.”
“알았으면 집에 가.”
“저는 그간의 정을 생각해서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싶었는데, 무척 유감입니다.”
쫘악-
디스코의 말이 끝나자마자 판타지아 차원의 벽이 찢어졌다.
내가 한 게 아니다.
“디스토리아 외교부장의 지원요청을 확인했습니다. 제가 섬멸해야 할 적은 누구인가요?”
화려한 붉은색 무복 차림의 아름다운 여자였다.
목소리 또한 아름다웠으나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사무적인 표정과 시선도 섬뜩했다.
...이 여자, 뭐지?
그녀에게서는 신격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내 본능이 속삭이고 있었다.
디스코보다 강하다고.
정체가 뭐기에 내 신경을 자극하는...
“몰랑로이드야!”
내게 새끼고양이처럼 안겨있던 쏘시아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비명을 질렀다.
“몰랑로이드?”
“신살용(神殺用) 안드로이드! 디스토리아는 힘으로 판타지아 행성을 빼앗을 속셈-”
【마계】
뿅! 뿅!
내 판단은 신속했다.
구구절절한 설명을 더 듣지 않고 쏘시아와 히프리아를 마계로 날려버렸다.
그리고 내게 시비를 건 어떤 사신을 향해 신벌을 내렸다.
【원천】
【창세】
아직 통합이 덜됐지만, 버르장머리 없는 감찰관을 이 세상에서 지우는데 문제없었다.
자연을 가공해서 쏜-
“뭣?! 미친!”
서걱-
내가 기습적으로 조종한 시공간에 갇힌 디스코는 마네킹처럼 꼼짝달싹 못 했다.
이것이 우리의 격차.
하지만 내가 그녀를 망가트리기 직전에 난입한 칼날이 한 박자 빠르게 나를 위협했다.
주르륵...
그것은 피였다.
내 목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기습을 포기하고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면, 망설이느라 타이밍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출혈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원흉은 그 안드로이드.
양손에는 내 피가 묻은 쌍검을 쥐고 있었다.
쫘악-
내가 형성한 시공간을 또 아무렇지 않게 찢은 그것은 무미건조한 어조로 말했다.
“항복을 권고합니다. 당신의 승률은 99.7%밖에 안 됩니다.”
“...뭐래?”
이 몰랑로이드, 망가진 건가?
나는 재차 도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