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397화 (397/430)

 397화

[29회차] 친절한 몰랑이

【원천】

【창세】

조금 전에는 디스코부터 처리하려다가 빈틈을 보였지만, 우선순위가 바뀐 현재는 아니다.

우우웅-

나는 저 인형이 회피하지 못하도록 공간을 비틀었다.

이곳은 마왕의 탑 100층.

용사의 회피기동을 제한하지 않도록 탑의 실질적인 면적보다 훨씬 넓은 4차원 공간으로 확장되어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배려할 필요가 없다.

상대는 용사가 아니라, 이 고향을 노리는 명백한 침략자니까.

“짓눌려라.”

파직!

촤아악-

완벽하게 뭉개져서 고철로 변했어야 할 몰랑로이드가 탑의 벽을 베며 돌파했다.

진짜 끈질기다.

신격도 없는 주제에 저 말도 안 되는 절삭력은 뭐란 말인가.

【원천】

【창세】

뿅!

나는 몰랑스타를 즉흥적으로 생성했다.

80만 등분이었던 판타지아 차원이 하나로 합쳐진 만큼, 몰랑스타의 성능도 내가 학생 흉내를 낼 때보다 압도적으로 우수하다.

‘복사.’

뿅, 뿅, 뿅, 뿅, 뿅...

몰랑스타를 추가로 소환했다.

한 자루는 내가 쥐고, 나머지는 동굴에 매달린 종유석처럼 하늘에 가득 채웠다.

‘낙하.’

내게 달려오는 몰랑로이드를 향해 칼날의 비가 쏟아졌다.

팅, 팅, 팅...

막아도 소용없다.

팅, 팅, 팅...

나는 저 안드로이드가 파괴되어 고철이 될 때까지 끊임없이 몰랑스타를 소환할 테니까.

팅, 팅, 팅...

내가 먼저 지칠 일은 없다.

팅, 팅, 팅...

그런데 언제 파괴되는 거지?

팅, 팅, 팅...

파괴될 기미가 안 보인다.

“...괴물인가.”

몰랑로이드는 쌍검으로 모든 칼날을 쳐내며 내게 돌격해왔다.

나는 피하지 않았다.

“걸어오는 싸움을 피하지 않는 당신의 오만과 만용에 경의를 표합니다. 접근을 허용한 건 몰랑로이드를 모르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승률을 스스로 깎는 당신의 비효율적인 판단을 비웃는 중이었습니다. 설마, 놀림거리가 됐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건가요?”

“...너, 짜증 난다.”

팔다리를 자르고 머리와 몸통만 남겨서 벽에 장식해두리라.

그때도 저렇게 떠들 수 있을지 궁금하다.

【원천】

【창세】

파르마엘이 그랬듯이 내 육체의 움직임을 가속했다.

그리고 저 수다쟁이 안드로이드의 시간은 역으로 늦췄다.

효과는 확실했다.

“......”

상대적으로 느려진 몰랑로이드는 비처럼 쏟아지는 몰랑스타를 간신히 막아내고 있었다.

저 정도 빠르기면, 내 관점에서는 멈춘 거나 다름없다.

깡통 주제에 접근전에 제법 자신 있는 모양이지만, 움직일 수 없다면 아무런 소용없다.

“까불긴.”

“...그렇게 판단하고 방심해주길 기다렸습니다.”

“미친...!”

회피할 수가 없었다.

느려진 줄 알았던 안드로이드가 기습적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바람에 대응이 늦고 말았다.

서걱!

내가 팔다리를 베어줄 생각이었는데, 역으로 베였다.

촤아아-

오른팔이 절단되어 떨어졌다.

나는 방심하지 않았다.

목의 상처를 보자마자 암흑물질을 압축한 막을 피부 위에 겹겹이 쌓으며 중첩했다.

그런데 소용없었다.

내 이해를 넘어섰다.

“정보에 목마른 당신을 위해 친절하게 설명합니다. 몰랑로이드는 신격을 거부하는 합금으로 코팅되어 있습니다. 또한, 당신의 신격을 분석한 고유전파를 발산해서 물리력을 약화하는 중입니다.”

“......”

나는 말을 섞지 않았다.

말려들지 말자.

저렇게 편리한 만능형 안드로이드가 세상에 있을 리 없다.

스르륵.

잘린 오른팔은 금방 재생했다.

절단면에서 재생을 방해하는 미미한 저항감이 있었지만, 경계해야 할 수준은 아니었다.

【원천】

【창세】

내 육체의 가속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답답하다.

내가 원하는 배수는 최소 500배인데, 체감되는 속도는 5배 정도밖에 빨라지지 않는다.

떨쳐낼 수 없다.

“당신의 신격은 파악이 끝났습니다. 속성은 시간과 공간. 판타지아 세계에 귀속된 존재를 자유자재로 복사, 편집, 저장, 재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창의력은 영 꽝이로군요.”

“...좀 닥쳐봐.”

뿅!

나는 복구한 오른손에 새로이 소환한 몰랑스타를 거머쥐었다.

팅, 팅, 팅-

몰랑로이드는 비처럼 쏟아지는 성검을 일일이 쳐내면서 내게 접근해오고 있었다.

나불거리는 걸 보면 무척 여유로워 보인다.

‘가속’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한다.

상대는 기계.

동시에 여러 작업을 하면 집중력이 떨어지는 인간과 달리, 듀얼컴퓨터처럼 주둥이와 몸뚱이가 완전히 따로 논다고 봐야 한다.

초조할 것 없다.

팅- 서걱!

촤아악!

“큭-!”

공방은 순식간에 결판났다.

내 공격을 간단히 튕겨내면서 다시금 오른팔을 절단하고, 옆구리까지 깊숙이 베었다.

검술 초보와 고수의 싸움.

그렇게밖에 볼 수 없는 압도적인 실력 차이였다.

“진짜 돌아버리겠네!”

저 안드로이드랑 비교하면 보리스는 유아용 장난감이었다.

파앗-

나는 마왕의 탑에서 탈출했다.

몰랑로이드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탑이란 새장에 붙잡아둘 계획이었는데, 내가 버티지 못하고 먼저 탈주하고 말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근접전에서 아예 상대가 안 되니까.

거리를 벌려야 한다.

“늦었습니다.”

“끈질겨!”

그러나 한 번 따라잡힌 거리는 멀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친절한 설명이 이어진다.

“포기하세요. 몰랑로이드는 314조1592억6535만8993가지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어떤 검신의 314조1592억6535만8993검식(劍式)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또한, 무한의 칼날을 본능만으로 튕겨내는 몰랑한 어떤 군신의 자동방어시스템이 내장되어 있습니다.”

“...친절도 하셔라.”

어떤 검신(劍神)인가.

314조란, 정신 나간 숫자의 원리는 모르겠지만, 칼질을 엄청나게 잘한다는 건 알겠다.

이건, 확실히 정보 부족이군.

검술과 근접전이 특기인 안드로이드에게 칼로 도전했으니, 상대가 될 리 없었다.

하지만 왜...?

“적에게 정보를 알려주는 몰랑로이드가 수상한가요? 이건 고급정보가 아닙니다. 당신이 지독한 촌뜨기 신(神)이라서 기본적인 상식조차 모르는 거죠.”

“촌뜨기...”

유학파인 비겁한 마누라가 스스로 ‘촌년’이라고 했던 건 기억하지만, 진지하게 듣진 않았다.

그런데 제삼자에게 직접 들으니 좀 충격적이네.

“저항해도 소용없습니다. 당신의 움직임은 은퇴하고 나태해진 유부남 용사 Q형 초기입니다. 은퇴하기 전이라면 승률이 0.1% 올라갔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결과는 바뀌지 않습니다.”

“하! 그러셔?”

펄럭!

마왕의 탑을 빠져나온 나는 우주로 이동했다.

몰랑로이드는 날개나 부스터 없이 허공을 밟으며 뒤쫓아왔다.

...여기쯤이라면 판타지아 행성에 타격이 덜할 터.

【원천】

【창세】

저 안드로이드가 나를 분석하는 동안, 나도 허둥거리며 넋 놓고 있던 건 아니다.

‘생성.’

괜히 근접전을 시도했다가 본전도 못 건졌지만, 나는 80만 차원을 유지해온 몸이다.

절대 약하지 않다.

차원은 소우주 안의 태양계를 포함하며, 생명체의 존속에 필수적인 ‘태양’도 당연히 들어간다.

‘압축.’

공간을 접어서 막 생성한 태양을 볼링공 크기로 축소했다.

일명, 태양M.

다음은 간단하다.

‘복사.’

세계가 코로나(corona)의 백광으로 뒤덮였다.

태양M이 발산하는 천문학적인 질량의 중력이 끌어당기고, 압축된 100만K의 초고온이 깐죽대는 몰랑로이드를 집어삼켰다.

“...좀 과했나?”

총알을 튕겨내는 검술의 달인을 죽이려고 핵미사일을 무더기로 쏜 셈이다.

판타지아 행성과 쏘시아 위성을 따로 격리해놓지 않았다면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리라.

빠르게 뒷수습에 들어갔다.

【창세】

【원천】

표적을 잃고 방황하는 태양M을 자연으로 전부 환원했다.

“...방심인가요?”

“뭣...!”

촤아악-

소리도 없이 다가온 몰랑로이드가 내 몸을 양분했다.

방심했냐고?

이건 내 잘못이 아니라, 태양을 견디는 안드로이드의 성능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상하다.

나는 방심하지 않았다.

저 수다쟁이 안드로이드가 태양M의 초신성에 휩쓸리는 마지막까지 확인했다.

그런데 멀쩡하다고?

아니, 그보다-

【원천】

【창세】

몰랑로이드의 쌍칼에 분쇄된 몸이 형태를 유지하지 못한다.

이 육체는 틀렸다.

‘복사.’

조금 멀리 떨어진 거리에 새로운 육체를 생성했다.

푹!

“큭-?!”

하지만 바로 눈치챈 몰랑로이드가 모든 방해를 뿌리치고 날아와서는 내 복부에 칼을 쑤셨다.

현기증이 난다.

“치명상에도 소멸하지 않는 당신의 속성에 전설이 있음을 막 확인했습니다. 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은 디스토리아 외교부장을 업무 태만으로 추궁하지 않으면 안 되겠군요.”

“...고마워.”

안 죽는다는 걸 확인해줘서.

【원천】

【창세】

태양M을 나와 몰랑로이드 주위에 한계까지 생성했다.

그리고 터트렸다.

번쩍-!

“...이젠 죽었겠지.”

나는 우주를 떠도는 이름 없는 소행성에 드러누웠다.

피곤하다.

“제 이야기를 귀담아듣기 시작한 당신의 심리에 적합한 검식은 총 10,736,390가지입니다.”

“......”

진절머리나는 아름다운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왔다.

나는 오른손에 쥔 차가운 금속의 감촉을 재확인했다.

자폭하기 직전에 빼돌린, 몰랑로이드의 경추(頸椎) 6번에 해당하는 부품이다.

...이상한데.

“몰랑소프트의 몰랑레이더가 당신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추적하는 중입니다. 제게서 절대 도망칠 수 없습니다.”

“도망? 내가?”

“아무리 부정해도 몰랑한 현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분석이 완벽히 끝난 당신의 승률은 99.4%밖에 되지 않으니까요.”

“거짓말이네.”

“굉장히 불쾌하군요. 몰랑한 저는 거짓말한 적이 없습니다.”

휙.

나는 오른손에 쥐고 있던 부품을 몰랑로이드에게 던졌다.

그리고 검지를 들었다.

“하나. 아까부터 쭉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은하계도 날려버릴 위력의 공격을 정통으로 맞고도 멀쩡했거든.”

“그게 이상한가요?”

“너는 혼자가 아니야. 혼자 싸우는 척했던 거지.”

“......”

수다쟁이 안드로이드가 나불거리던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나는 이어서 중지를 들었다.

“둘. 나를 완벽하게 분석했다고 막말했겠다?”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찰칵!

연극의 장면전환처럼 주위가 완벽한 어둠에 휩싸였다가 1초 뒤에 원래 밝기로 환해졌다.

몰랑로이드가 말했다.

“빛과 어둠. 상반되는 두 신격의 융합에 성공한 모양이군요. 원천과 창세 사이의 절차가 생략돼서 대응이 늦었습니다. 당신의 성장을 축하합니다.”

“야. 그 꼬락서니로 여유냐?”

“문제없습니다.”

방금까지 내 앞에서 거드름 피우던 몰랑로이드는 머리와 몸통만 남고 팔다리는 사라졌다.

그러면 한 번 더.

찰칵!

나는 복사한 몰랑로이드의 팔다리를 아무렇게나 쌓아 올린 언덕 위에 앉아있다.

1초.

내가 원하는 공간을 생성하거나 지우는데 필요한 시간.

【명암(明暗)】

신격이 아주 깔끔해졌다.

“자! 이제 어쩔 거지?”

머리와 몸통만 남은 몰랑로이드가 답했다.

“크게 바뀐 건 없습니다. 당신의 승률은 여전히 99.7%밖에 안 되니까요.”

“그거면 충분해.”

“...하지만 그렇군요. 몰랑한 제가 거짓말했다는 오해를 풀 필요가 있겠습니다. 다른 몰랑로이드로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얼마든지.”

또 부숴버리면 그만이다.

“......”

전원이 꺼진 가전제품처럼 몰랑로이드의 활동이 멈췄다.

하지만 그 지긋지긋한 목소리는 여전히 들렸다.

사방에서.

“몰랑로이드 침투... 완료.”

“전투데이터 공유... 완료.”

“검신 프로그램 로딩... 완료.”

“시스템 최적화... 완료.”

“자율구동 승인요청... 완료.”

“몰랑로이드 포진... 완료.”

쌍검을 쥔 붉은색 무복의 미녀들이 판타지아를 뒤덮었다.

몰랑로이드.

수천이 아니다.

내 시야에 잡힌 숫자만 수천만에 달했다. 그리고 계속 불어나고 있었다.

“...실화냐.”

내가 우주 스케일을 너무 얕잡아본 모양이다.

그때, 한 몰랑로이드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정식으로 다시 인사합니다. 저는 173사단 보병연대 시골경계초소에 근무하는 용감한 몰랑이 상병입니다. 당신의 현재 승률은 0%임을 알려드립니다.”

“......”

나의 정의로운 심장이 몰랑거리기 시작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