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399화 (399/430)

 399화

[29회차] 제발 돌아가...

상황을 정리해보자.

나는 판타지아 세계에서 산출되는 환상의 금속 ‘로맨티넘’을 노리는 외계인들이랑 싸우고 있다.

여기서 문제.

나는 어디에 묻혀있는지도 모르는 금속을 지키려고 척추 빠지도록 애쓰는 중이다.

참 바보 같달까?

그래서 찾아 나서기로 했다.

“한수 님. 평소보다 격렬하셔서 좀 놀랐어요.”

“뭐... 어흠!”

강한수랑 동기화해서 몰랑로이드를 속인 건 좋은데, 카이사를 대하는 태도에도 영향을 줬다.

검희.

나는 그렇게 불러왔었다.

하지만 어젯밤의 동기화는 나를 꽤 몰랑하게 바꿔놨다.

“카이사. 슬슬 내려가자.”

“이상하네요. 홀로 탑에 도전한 용사님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이 세계는 끝난다고 했는데... 그래서 좀 더 불타올랐고요.”

카이사가 얼굴을 붉히며 의문을 제시했다.

나와 함께하는 시간을 1초라도 소중히 쓰기 위해 그녀는... 음. 하여간 굉장했다.

“글쎄? 용사의 신상에 이변이 생긴 모양이지.”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카이사와 함께 침실을 나왔다.

마왕의 탑 50층.

탑의 절반을 오른 용사와 동료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완벽한 설비를 갖춘 휴게소다.

여관, 대장간, 잡화점, 온천, 훈련장, 식당가, 도서관...

모든 서비스가 무료이며, 운영과 관리는 호감형의 악마들이 하고 있다.

“식사를 준비해드릴까요?”

여관주인D가 나와 카이사를 번갈아 보며 묻는다.

“그래. 메뉴는 주방장 추천으로. 카이사는?”

“저도요.”

강한수는 평소에 원기보충에 좋은 음식만 노골적으로 먹었고, 그걸 잘 아는 주방장D는 장어 덮밥을 아침부터 내왔다.

이 녀석, 판타지아 세계에서 새 가족을 꾸릴 작정이었네.

잠시 후, 나와 카이사는 어색할 정도로 조용히 식사했다. 이건 우리 사이의 거리감이 아니라 허전한 주변 탓이었다.

넓은 식당에 둘뿐!

맛집인 줄 알았는데 함정이었던 식당에 들어온 기분이다.

“......”

“......”

“정말 맛있네요.”

“그러게.”

맛은 역으로 훌륭했다.

주방장 능력치에 요리Z와 미각Z가 있는데, 맛이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수요와 공급이 불균형이다.

탑에 도전하는 용사를 위해 서비스를 제공하는 건 좋지만, 인력을 너무 낭비하잖아.

이건 나중에 보완하자.

그때,

“설녀. 아무도 안 빼앗으니 방에 올라가서 드시오.”

“하지만 알렉스! 이 마을의 음식들은 전부 맛있어요!”

“......”

“물론, 알렉스가 해주는 밥도 맛있지만요! 여기에는 지금까지 못 먹어본 게 많잖아요~.”

“어흠! 그렇구려. 흠흠!”

알렉스와 설녀가 먹을 것을 잔뜩 들고 여관에 들어왔다.

이 부부는 아주 본격적으로 즐기는 중이랄까.

알렉스의 먹성은 1회차 때부터 알아줬었는데, 설녀는 한술 더 떠서 대식가였다.

“주인님을 닮은 주인님! 식당가로 가보세요. 먹을 게 엄청나게 많아요!”

설녀가 손이 없는 새하얀 날개를 파닥거린다.

...나란 녀석, 밖에 안 나가고 온종일 카이사의 건강한 골반만 만지고 있었던 건가.

“나중에 가볼 테니 진정해. 깃털 날리잖아.”

태생이 하피, 몬스터라서 아무리 먹어도 군살 하나 없는 몸매가 유지되는 설녀.

그래서 열량을 일절 따지지 않는다. 따질 필요가 없을 정도로 활발하기도 하지만.

“하아... 부럽네요.”

내 왼팔에 팔짱을 끼고 있는 카이사가 그런 설녀를 굉장히 부럽다는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쪽도 먹는 걸 좋아했지.

“강한수 씨는 오늘 떠나실 생각입니까?”

설녀의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으며 알렉스가 묻는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딱히 티 나는 행동은 안 했던 것 같은데.

알렉스가 별거 아니란 투로 답했다.

“제가 아는 어떤 용사님도 뭔가를 추진할 때 당신 같은 눈빛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군.”

맞아. 녀석은 알고 있었지.

마왕 파르마몬과 강한수가 동일인물이란 사실을.

하지만 이 자리에는 강한수의 아내 카이사도 있기에 그 부분은 얘기하지 않는 것이리라.

눈치가 제법 늘었네!

2000년을 넘게 살았으니 당연한 연륜이려나?

“맞아. 용사를 돕느라 미룬 신혼여행을 떠나려고. 오늘 내려갈 계획이야.”

“서두르시는군요.”

“세상이 언제 사라질지도 모르니까.”

“아... 정말 죄송합니다. 우문이었습니다.”

근처의 빈 테이블에 앉은 알렉스는 묻지도 않았던 자신의 계획을 주절주절 얘기했다.

탑 50층에서 보름쯤 기다렸다가 그때도 세계가 존재하면 옛 동료들을 만나러 간다고...

“너, 기억이 돌아왔어?”

“...제가 갑자기 무슨 말을? 방금까지는 아니었습니다.”

설마...

나는 카이사를 돌아봤다.

설녀를 부럽다는 듯이 바라보던 그녀는 자기 몸을 양팔로 끌어안은 채 떨고 있었다.

반면에 설녀는 멍청한 닭대가리 같은 표정 그대로.

대충 예상이 갔다.

“카이사. 진정해.”

판타지아의 평행세계가 통합되면서 원주민들의 기억도 하나로 합쳐진 것이다.

방금까지 느긋했던 알렉스가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세계가 방금 합쳐졌습니다. 기억과 함께.”

“어떻게 알지?”

“책으로 읽은 전설처럼 지식이 전해져옵니다. 흠. 당신의 정보도 어렴풋이 떠오릅니다. 지구란 세계에서 온 용사고, 저를 매우 싫어했었습니다.”

“크흠!”

알렉스의 설명을 들어보니, 꿈처럼 애매한 형태로 기억이 압축되어 통합됐다.

그 반동은 개인차가 있는 듯하지만.

“악마...”

카이사가 내 얼굴을 보며 작게 중얼거린다.

그녀가 내게 ‘악마’라고 불렀던 건 1회차의 마지막 순간이 처음이자 끝이었다.

...이게 업보란 걸까?

판타지 소설 속 주인공들은 회귀하면, 등신 같았던 전생을 청산하고 뻔뻔하게 살아간다.

전생에는 감히 엄두도 못 냈던 여자의 신상정보를 이용해서 아내로 만들고, 라이벌이 누려야 할 기연과 미래를 빼앗고 얼치기로 바꿔버린다.

나도 그랬는가?

아니다.

“그 악마는, 판타지아 세계가 낯설었던 1회차의 강한수였지. 카이사 큐레일, 네가 어떻게 생각하던 그때 파티를 몰살시킨 걸 후회하거나 반성할 마음은 없어.”

“...카이사.”

“음? 맞아. 너는 큐레일 공작가의 무남독녀 카이사지.”

“이름으로 부르란 의미였어요.”

“......”

나는 모르겠다.

평행세계의 수많은 기억이 합쳐진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신(神)이 된 지금의 나라면 비슷한 환경을 조성해서 얼마든지 체험해볼 수 있지만, 딱 봐도 위험한 지뢰인 줄 알면서 고의로 밟고 싶진 않았다.

“한수 씨.”

“불만 있으면 말해.”

“당신은 제가 어릴 적부터 꿈꿔온 이상형입니다.”

“...이 심각한 타이밍에 고백이 훅 들어올 줄 몰랐네.”

“그렇겠죠. 당신은 악마였던 1회차나 지금이나 제 마음을 쥐뿔도 모르니까요.”

“......”

나는 옆을 힐끔 돌아봤다.

알렉스와 멍청한 닭대가리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와줄 마음이 없는 듯하군.

카이사의 독설이 계속됐다.

“전설의 마룡도 벌벌 떨 만큼 잘생기면 다인가요? 대륙의 미녀들을 공기 취급하던 당신은 진짜 밥맛이었어요. 용사. 그까짓 게 뭐라고 제 데이트 신청을 단칼에 걷어차나요!”

“잠깐. 데이트?”

“시치미 떼지 마세요. 동대륙 레이퍼스 마을의 푸른색 지붕 2층짜리 여관 뒷마당에서 새벽부터 웃통 벗고 땀을 흘리며 훈련하는 당신에게 말했잖아요.”

“...뭐라고?”

기억이 전혀 안 납니다만?

“점심 먹고 마을 밖의 공동묘지에서 보자고요.”

“...아! 기억났다! 나를 거기에 묻어버리겠다고...”

“당신이 아니라 전날 함께 싸우다가 전사한 마을 자경단원의 장례식이었거든요? 거기서 어떻게 해석하면 잘생긴 용사님을 묻어버리는 게 되죠?”

“어이, 카이사. 그것까지 내가 알 리 없잖아. 소꿉친구에게 잘 보이려고 까불다가 개죽음당한 자경단원의 장례식 따위.”

“그 데이트 신청은 말이죠. 제가 2년 전부터 기회를 엿보다가 간신히 용기를 쥐어짠 결과물이었습니다. 부끄러워서 동료들이 전부 잠든 새벽을 노린 거였는데, 라누벨은 항상 그 시간대에 깨어있는 난적이었어요. 무려 2년 만에 온 절호의 기회였다고요. 그걸 당신이 알아요?”

“......”

아뇨. 전혀 몰랐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저도 정말 한심했지만, 당시에는 정말 노력한 거였어요. 그런데 그걸 진짜 싫다는 얼굴로 망설임 없이...!”

“......”

카이사의 불만은 끝날 기미가 안 보였다.

중간중간에 알렉스가 ‘맞아. 그런 일이 있었소.’라며 맞장구치는 바람에 더욱.

대체 언제까지...

『너무 순진한 어떤 여신이 사연에 얼굴을 붉힙니다』

『너무 순진한 어떤 여신이 너무했다고 야단칩니다』

『너무 순진한 어떤 여신이 얼른 사과하라고 합니다』

...이 여신은 언제 온 거야?

『공정한 어떤 인신이 조용히 하라고 부탁합니다』

『너무 순진한 어떤 여신이 얼른 사과하라고 재촉합니다』

『공정한 어떤 인신이 알겠으니 조용히 해달라고 합니다』

『너무 순진한 어떤 여신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이보쇼. 입만 다문다고 사라지는 메시지가 아니잖아...

하여간 위기상황이다.

“미안해, 카이사! 내가 전부 잘못했어!”

“진심이 안 느껴져요.”

“어떻게 해주면 믿을 건데?”

“안아줘요.”

“그건 매일 하잖아.”

“하아... 당신은 볼 때마다 두근거릴 만큼 잘생기고 다 좋은데, 가끔 분위기 파악을 너무 못해서 탈이예요.”

『너무 순진한 어떤 여신이 나무라듯 쳐다봅니다』

누가 저 여신 좀 데리고 가줘...

이러다가 들키겠다.

『친절한 어떤 여신이 사탕을 흔듭니다』

『너무 순진한 어떤 여신이 무척 반가워합니다』

『너무 순진한 어떤 여신이 사탕을 따라갑니다』

...실화인가?

순진한 어떤 여신은 사탕의 유혹에 순진하게 넘어갔다.

신이 이래도 괜찮은 걸까.

아무튼, 도덕 아가씨 덕분에 위기를 넘겼다.

꼬옥.

그래도 나는 카이사의 요구대로 그녀를 안아줬다.

아까부터 계속 무언가를 두려워하듯 떨고 있었으니까.

작은 속삭임이 내 귀를 간지럽게 했다.

“한수 씨. 지금의 당신은 사라지지 않는 진짜인가요?”

“어.”

무엇이 카이사를 두렵게 하는지 단번에 눈치챘다.

회귀, 회귀, 회귀, 회귀...

충실했던 삶을 부정당하는 기분은 나도 겪어봤기에 잘 안다.

그 허무감, 그 상실감.

회귀한 횟수가 압도적으로 많은 그녀는 나보다 훨씬 심하겠지.

아니, 이건 카이사만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다.

“현재, 제 머릿속에는 남편이었던 용사들의 기억으로 가득 차서 숨이 막혀요. 저는 약속대로 토너먼트 우승자의 여자가 되고, 때때로 아이를 낳았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내가 제 몸에 손을 댔는지 상상이...”

“안심해. 카이사, 그래도 나는 너를 사랑해.”

“흑...!”

카이사는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울고 또 울었다.

덕분에 확신할 수 있었다.

판타지아 교육장.

사회부적응자들만을 위한 파라다이스인 이곳을 폐교한 내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고.

『너무 순진한 어떤 여신이 훌쩍입니다』

『친절한 어떤 여신이 난감해합니다』

제발 좀 가줘...

*

이후에 쑥떡과 최강의 수호자가 나란히 여관에 들어왔다.

천마와 라누벨의 딸이 쑥떡에게 치근대는 모습이 굉장히 불편했지만, 지금은 그걸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쑥떡. 괜찮아?”

“죄송합니다, 아버지. 뒤섞인 기억이 안정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요.”

전혀 안 괜찮아 보인다만.

“아버님. 다양한 경험을 쌓은 쑥떡 공자는 깨달음을 얻고 벽을 깨는 중이에요. 지금은 절대 방해하면 안 돼요.”

“...넌 뭐냐?”

“천마신검 수호령의 딸 갈소영이에요.”

“그걸 묻는 게 아니거든? 얼마나 봤다고 며느리 행세야.”

“호호호! 아버님. 쑥떡은 소녀가 잘 돌볼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여행 다니세요.”

“이 요망한 년! 네가 가장 걱정이다!”

하지만 이젠 어쩔 수 없다.

카이사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바깥바람으로 기분전환 해줄 필요가 있었으니까.

더는 지체할 수 없다.

언제 들통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너무 순진한 어떤 여신님이 조용하겠다고 합니다』

“하아...”

진짜 돌아버리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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