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400화 (400/430)

 400화

[30회차] 동료 아닌 동료

“한수 씨. 신혼여행지로 생각해둔 곳이라도 있나요?”

“우리의 집은 북대륙이잖아. 다시 오기 쉽지 않은 남대륙으로 갈 거야.”

“아! 좋아요.”

우리가 현재 있는 마왕의 탑과 영토가 중앙대륙 남부에 위치해서 더욱 아귀가 맞았다.

여기서 굳이 ‘남대륙에 볼일 있어.’라고 말해서 눈치 없다는 소리를 또 들을 필요는 없잖은가?

카이사는 내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안정됐다.

“이제 괜찮아?”

“네. 당신이 옆에 있어 준 덕분에요.”

“다행이네.”

내가 아는 검희는 무척 당찬 성격의 여성이었는데, 지금은 산전수전 다 겪은 노장 같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닌가?

평행세계에서 살아온 시간을 병렬에서 직렬로 나열하면 수천만 년은 가볍게 넘을 것이다.

...오래 살았네.

다른 녀석들의 상태도 어떨지 매우 궁금하다.

“한수 씨는 괜찮나요?”

“음? 아아, 그렇네. 나도 기억이 합쳐졌지.”

기간은 짧았지만, 이 육체의 강한수도 비겁한 마누라의 재활용에 걸려서 수백만으로 나뉜 채 활동했었다.

하지만 나는 전혀 실감할 수 없었다. 바다에 조약돌을 무더기로 투척한 것 같달까.

티도 나지 않았다.

“어떤가요? 머릿속에 떠오르는 여자가 수백만 명쯤 되나요?”

“...아닙니다.”

“말투가 이상해졌어요.”

“크흠! 외롭게 홀로 여행하던 도중에 스쳐 지나간 인연들이 약간 있었습니다.”

『너무 순진한 어떤 여신이 하렘을 싫어합니다』

어이. 이건 하렘이 아니라 포유동물의 평범한 본능이야.

“흐응~”

“하지만 그 말을 들으니, 막연했던 카이사의 기분과 상태를 조금은 알 것 같아.”

이건 일종의 추억.

강렬했던 큰 사건은 오래 기억하고, 별거 아닌 사건은 금방 머릿속에서 지워진다.

또한, 흔치 않은 사건들은 따로 보관되고, 평범한 일상이나 반복된 사건은 하나로 통합된다.

강한수를 예로 들자면?

중앙대륙의 만두 왕국에서 소환된 날부터 판타지아 세계를 방랑하다가 북대륙의 큐라레 공작령에서 멈춘다.

“정말로 아는 거 맞아요?”

“맞아. 내 여정의 마지막은 항상 어느 가문의 영애를 술집에서 자빠트리는 거였으니까.”

“네. 그자는 제대로 토너먼트도 안 거치고, 잘생긴 얼굴과 미소로 후려치는 양아치죠.”

“뭐...”

항상 그랬던 건 아니다.

용사라는 ‘변수’ 때문에 나비효과처럼 전혀 다른 미래로 향한 적도 은근히 많았다.

가령, 용사 지크라든가?

내게 악의를 품은 녀석이 이상한 소문을 퍼트려서 마왕으로 몰렸던 적도 있었다.

즉, 이런 식으로 탈선한 사건들이 병렬구조로 머릿속에 남고, 나머진 직렬로 기억된다.

개인차는 바로 그 때문이다.

“용사와 첫날부터 함께한 쑥떡이 걱정이에요. 저는 토너먼트 덕분에 그나마 접점이 적은 편이니까요.”

“그게 쑥떡만일까.”

5차 교육과정 때부터 쭉 용사를 소환해왔던 신성제국은 지금쯤 아비규환일 것이다.

거기는 고귀한 황제부터 밑바닥 노예까지 어떤 식으로든 용사와 엮일 수밖에 없으니까.

이건 나도 확인해보기 전까지는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다.

“그럼, 확인해볼까.”

서대륙의 대현자 섹스피어가 제작한 우주정거장 몰랑포스.

그 소유주는 ‘강한수’가 아니지만, 섹스피어가 이 이변을 눈치챘다면 나부터 찾을 것이다.

판타지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 인공위성을 보유한 그 녀석이라면 판타지아 대륙의 정세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을 터.

마왕의 탑을 빠져나온 나는 하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야! 나를 바라봐!

“...뭐해요?”

“쩝. 섹스피어도 쑥떡처럼 뻗어버린 모양이네.”

섹스피어는 몰랑폰 네트워크를 활용해서 회귀해도 중요한 기억을 보존할 수 있도록 해놨다.

그게 변수로 작용해서 그도 큰 반동이 온 모양이다.

미치지 말아야 할 텐데.

“한수 씨. 저 비행선은 못 쓰는 것 같은데, 남대륙까지 어떻게 가실 거예요?”

“직접 날아서.”

펄럭!

신력을 사용할 수 없어서 공간은 접지 못하지만,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로도 충분하다.

...이거, 구버전이네.

내가 고향별 지구의 태평양에서 늙은 왕자 보리스와 그의 하렘 응원단을 처단하며 만든 초기 형태였다.

최신형인 220년식 날개의 비행속도와 비교하면 경운기와 스포츠카만큼 차이 날 것이다.

“그 날개를 볼 때마다 묘하게 두근거려요.”

“짜릿한 밤이긴 했지.”

시원한 밤바람을 온몸의 피부로 느끼며, 구름 속에서 펼쳐지는 치열한 공성전.

즉, 공중전이다.

날개가 있는 천사나 악마쯤 돼야 흉내 낼 수 있을 것이다.

“뭔가... 한수 씨랑 이러고 있으니 슬픈 과거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기분이에요.”

“다행이네.”

정의로운 G급 신혼부부는 남대륙으로 향했다!

*

통합된 판타지아 세계의 혼란 정도는, 내 예상대로 용사들의 방문 비율, 선호도로 정해졌다.

시작지점인 중앙대륙이 가장 심한 건 예정된 결과.

하지만 인간과 용사에게 우호적인 요정제국도 만만치 않았다.

나서스 왕자

그는 몰랑폰 게시판에 떠도는 수많은 공략집에 단골로 나오는 ‘필수’ 동료인 탓이다.

그래서 지나기는 길에 잠시 들려보기로 했다.

“왕자님께서는... 사람을 만나실 수 있는 상태가 아니십니다.”

그의 보좌관 겸 수호기사인 에이리스가 대단히 안타깝다는 어조로 말했다.

“아픈 건가?”

“그렇습니다. 그래도 용사님께서 이렇게 먼길을 찾아오셨으니 이야기는 해보겠습니다.”

“아니. 됐어.”

여성 용사들은 요정답지 않게 제법 건실한 근육질 몸을 가진 ‘나서스 왕자’를 무조건 얻는다.

성격도 신사적이고, 판타지 여성들보다 현실적으로 생긴 용사들을 ‘인간이잖아.’라는 이유로 후한 가산점을 준다.

이게 왜 가산점이냐?

판타지아의 인간 여성들은 비실비실한 요정 남성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방패처럼 듬직한 남성을 선호한다.

“나서스 왕자도 상태가 무척 안 좋은 모양이네요.”

“어쩔 수 없지.”

요정 남성을 좋아하는 건, 몬스터가 없는 평화로운 세계에서 성장한 여성 용사뿐이다.

지구도 구시대로 가면, 그리스 조각상 같은 우락부락한 몸을 미남으로 꼽으니까.

“실비아 공주님이라도 괜찮다면 만나실 수 있습니다. 유부남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으셔서 거절하실 수도 있지만.”

“그런데 에이리스. 너도 상태가 영 별로인데.”

“아무래도 좀... 사모하는 분을 빼앗는 용사들이 자주 떠오르면서 혼란스럽습니다. 안 좋은 기억도 많이 떠오르고.”

“...그렇군.”

에이리스는 인간과 요정의 혼혈로, 두 종족의 장점만 물려받은 사기 캐릭터다.

왕가슴 요정.

판타지 세계에 환상을 품은 인간 수컷들이 상상하는 그대로의 요정 모습이랄까.

그나저나 살짝 의외다.

커뮤니티를 보면, 실비아도 남성 용사들에게 은근히 인기 있는 동료이자 연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멀쩡한 건가?

“한수 씨. 정신상태가 나쁠수록 매력적인 여성이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아닙니다.”

“또, 또 존댓말.”

“어제부터 카이사에게 눈치 없다는 소리를 너무 많이 들어서 말이지.”

“그건 사실이잖아요?”

“......”

알몸 좀 보였다고 칼부림하는 여자가 ‘당신을 좋아해요.’라고 주장하면 믿겠는가?

그밖에도 할 말이 많지만, 애써 괜찮은 척하며 무리하는 그녀에게 따지고 싶진 않았다.

거참! 나란 용사는 정말 구제할 길 없는 호구로군!

내 이야기를 소설로 썼다면 한심한 용사라고 욕하면서 아무도 안 읽었을 것이다.

그때였다.

“엇?! 너는 악마 용사...!”

요정제국의 궁궐을 조용히 빠져나가려고 몸을 돌린 우리는 실비아와 딱 마주쳤다.

정말로 멀쩡해 보이네.

나를 ‘악마’라고 부르는 대사로 봐서는, 저 LCD 모니터 요정도 카이사처럼 기억이 완벽하게 돌아온 듯했다.

“...너, 기분이 좋아 보인다?”

신기했다.

요정공주 실비아.

미래의 요정왕 실비아.

그녀는 4차 교육과정까지는 요정우월주의에 빠져 있었고, 5차 교육과정에서는 남성 용사랑 결혼하려고 무진장 애썼으니까.

괴리감으로 따지면 나서스보다 훨씬 심할 텐데?

“나는 동족을 통틀어서 가장 많은 인간을 유혹한 요정이니까. 나보다 많은 남자와 사귀어본 요정은 판타지아에 없어.”

“거참...”

사람은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했던가?

실비아는 몬스터에게 당한 흉터를 자랑으로 여기는 일부 용병들처럼 얘기하고 있다.

“후후후! 사람은 외면보다 내면의 아름다움이 중요해. 에이리스가 나보다 용사들에게 인기 없었던 게 그 증거지!”

“.......”

연기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숨만 쉬어도 흔들리는 에이리스를 깔보는 실비아의 발언은 대단한 착각이다.

그녀처럼 남자친구를 만들려고 애쓰면, 원치 않는 모델보다는 당연히 많을 수밖에.

입 다문 얼굴만 보면 실비아도 썩 훌륭한 편이고.

“이왕 만난 김에 과거의 일들을 따지고 싶지만, 카이사의 행복한 얼굴을 봐서 마음 넓은 내가 참을게. 고마워하라고.”

“허...”

과거의 건방진 실비아로 돌아온 듯했다.

예전에는 요정우월주의에 빠져서 오만했다면, 현재는 판타지아 최고의 미녀라도 된 것처럼 콧대가 높아졌다.

저건 천성인가?

“카이사는 결혼한 거야?”

“네.”

“그렇구나... 정말 축하해. 결국에는 소원을 이뤘네. 수많은 너를 보아왔지만, 남자와 함께하면서 이렇게 미소 짓는 카이사의 얼굴은 처음 봐.”

“고마워요.”

“나중에 나도 결혼하면 북대륙으로 인사... 데릴사위야?”

“아직 거기까진 안 정했어요.”

“나중에 정착해서 살 곳이 정해지면 알려줘.”

“네. 실비아도 잘 지내세요.”

오랫동안 함께 모험해온 두 여성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작별했다.

실비아가 특이한 걸까?

다시 카이사를 안고 하늘로 날아오른 나는 남쪽으로 향했다.

“한수 씨. 생각해둔 목적지가 있으세요?”

“어. 우리의 여행을 방해받지 않는 선에서 녀석들이 무사한지만 확인해볼 생각이야.”

“녀석들이라면 동료?”

“......”

“동료들을 동료로 인정하지 않는 태도는 변하지 않았네요.”

“약간은 변했어.”

유부남이 되면서 야만성이 사라지고 개념을 챙긴 알렉스가 그 대표적인 예다.

이건 내 태도보다는 그가 바뀌어서 평가가 달라진 거지만.

“다양한 용사들을 만나본 지금은 알 것 같아요. 한수 씨가 동료들이랑 매번 부딪히고 싸웠던 이유는 하나예요.”

“뭔데?”

“중요도.”

“그게 뭐야?”

“당신은 언제나 개인보다 전체를 생각했어요. 예를 들어... 정략결혼.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하기 싫어서 가출한 공주를 보호하길 원했지만, 당신은 얼른 돌려보내서 국가나 가문의 분쟁이 커지지 않길 원했죠.”

“당연한 거야.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줄 착각하지. 그 이기심으로 수많은 사람이 직간접적으로 고통받을 건 생각하지 않아.”

“하아...”

“또 왜?”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래서 한수 씨는 싫어하는 누구부터 만나러 가시는 중인가요?”

“성녀.”

“남대륙의 척박한 환경을 보고 자란 그분은 한수 씨의 생각을 이해하는 편이었죠.”

“아니. 최근에 바뀐 성녀를 만나러 가는 거야.”

그 말을 들은 카이사가 의혹의 눈빛으로 내 얼굴을 본다.

“그 요정 성녀랑 접점이 없으실 텐데요.”

“...약간 있어.”

뽕에 속은 뼈아픈 기억이 있다.

“그 성녀님 이름이 일리나였었죠? 잤나요?”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과거를 따지려는 건 아니었어요. 저도 다를 바 없으니까요. 하지만 미래는 좀 궁금하네요.”

비겁한 마누라만 그런 줄 알았는데, 카이사도 질투나 독점욕이 강한 듯하다.

이게 현실인가...

판타지 소설 속 주인공의 여자들은 친자매처럼 잘 지내던데, 여기는 붙여 놓으면 독살과 암살은 기본일 것 같다.

“그녀의 모친께 약간 신세를...”

“장모님이요?”

“아니야! 그... 동료였지.”

지금은 페스티벌 행성에서 남편과 재회하여, 딸을 잊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그렇군요. 동료를 싫어하는 한수 씨의 동료였군요?”

“.......”

요정제국을 떠난 우리는 거인제국의 중앙에 자리한 신전에 금방 도착했다.

응애교의 대신전.

거인들이 믿는 종교인만큼 신전 규모도 상식 밖으로 컸다.

나와 카이사는 크고 작은 신도들 사이를 지나서 성녀가 항상 머무는 기도실로 향했다.

끼익-

매우 신성한 장소인 만큼 용사가 아니면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기도실 내부는 한산했다.

...화장실이라도 갔나?

나는 캡틴 판타지 1/10000 비율 황금상 앞에 무릎 꿇고 기도 중인 여인에게 말을 걸었다.

“실례합니다. 신혼여행 중인 용사A가 성녀님을 급히 뵙고 싶은데요. 불러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성녀입니다만, 무슨 일로 찾으시나요.”

여인이 뒤를 돌아본다.

“음?”

뽕으로 사기 치는 요정 대신 진짜로 어마어마한 천사 성녀.

아는 얼굴이었다.

“저를 아시나요?”

“우유엘. 네가 왜 여기에...?”

옆에서 카이사가 얼른 해명해달라는 시선을 보냈지만, 대답할 상황이 아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저의 진짜 이름을 아시는 분이 있을 줄 몰랐네요. 전임자가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이런!”

큰일 났다.

이 요정 사기꾼이 로맨티넘 뽕과 함께 실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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