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402화 (402/430)

 402화

[30회차] 성녀를 찾아서

“나서스. 잘 살아있냐?”

“손님께 이런 말을 하면 안 되지만, 전혀 안 괜찮습니다.”

중환자처럼 핼쑥한 얼굴의 나서스 왕자가 침대에 누워있었다.

특이한 점이라면 주위의 수행원들이 전부 남성. 이 공간에 여성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왕자님. 이 서류를 검토해주십시오.”

“지금은 일보다 안정을 취해야 할 때입니다, 왕자님.”

“왕자님. 차를 준비할까요?”

“백성의 청원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왕자님.”

“왕자님.”

사방에서 ‘왕자님’을 찾았다.

환자를 돌보는 의사와 하인들도 있지만, 조용히 일을 보는 관리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어쩔 수 없지.

요정왕 엘브하임 대신 누군가가 국정을 운영해야 하니까.

“왕자님.”

“왕자님.”

“왕자님.”

...하지만 환자에게 저건 좀 지나친 중노동 아닐까?

내 눈에는 학대로 보였다.

최종 검토나 확인도 아니고, 어떻게 하냐고 아이처럼 무작정 매달리는 것에 가까웠다.

사방에서 ‘나서스 왕자님’을 외쳐대고 있었다.

나서스 왕자.

제국에서 황자가 아닌 웬 왕자냐고 하겠지만, 유감스러운 요정왕이 영원히 다스리는 이 나라는 기본적으로 독재다.

나라만이 아니라 종족 전체가 그에게 의존하고 있다. 정치는 ‘잘나신 우리 폐하’가 알아서 잘해주실 거란 믿음으로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래서 나라가 좀 특이하다.

거의 혼자 정치하고 개혁하는 유감스러운 요정왕 엘브하임이 그나마 진보적이고, 국민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외골수 ‘왕바라기’로 굉장히 보수적이다.

그렇기에 이 요정들에게 국적의 구분은 무의미.

즉, 요정왕은 ‘나라의 왕’이 아니라 ‘종족의 왕’을 뜻한다.

“엘브하임이 떠난 상황에서 너까지 이러면 우매한- 가엾은 백성들은 어떡하냐?”

“괜찮습니다.”

“아픈 사람에게 미안한데, 너무 무책임한...”

“왕께서 눈빛으로 제게 속삭이셨습니다. 다시 돌아온다고. 요정은 구원받는다고. 평소에 그분이 얼마나 대단하셨는지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요정왕이란 이름은 제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무겁습니다.”

“그, 그러냐.”

요정들은 머리 아픈 정치가 귀찮아서 엘브하임에게 전부 떠맡긴 줄 알았는데, 그냥 신뢰도가 무한정에 가까운 것 같다.

아니, 당장 과로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서스 왕자의 퀭한 눈동자를 본다면, 누구라도 왕이 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이 녀석, 설마...

“용사님께서는 무슨 일로 절 찾아오셨습니까?”

“기억이 통합돼서 힘들어한다는 얘기를 들었거든. 그런데... 과거를 돌아볼 틈이 없는 것 같네.”

“하, 하하...”

나서스 왕자의 메마른 웃음이 너무나 와 닿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가 누워있는 침대와 그 주위에 떨어진 머리카락이 잔뜩 보였다.

슥슥.

하인이 말없이 그것들을 청소하는 거로 봐서는, 자주 머리카락을 치웠음을 예상할 수 있다.

이건 탈모인가...

수명만큼 느긋한 요정은 스트레스성 탈모와 인연이 없는데, 이 왕자는 예외였다.

이러다가 진짜 죽겠는데?

실비아 공주랑 너무나 다른 삶을 살고 있다.

“동생은?”

“...정치와 인연이 없는 아이입니다. 괜히 맡겼다가 화병으로 각혈 몇 번 해본 뒤부터 그냥 내버려두고 있습니다.”

“그, 그렇군.”

실비아는 여타 요정들처럼 융통성이 없긴 했다.

과거에는 요정우월주의에 빠져서 어리석었고, 지금은 굉장한 착각에 빠져서 참...

변화에 빠르게 적응해야 하는 정치인이랑 어울리지 않았다.

“용사님께서는 무슨 일로 절 찾아오셨습니까?”

“걱정돼서.”

“...이런 말은 실례겠지만, 제 기억 속의 용사님은 남을 걱정할 성격이 아닌데요.”

“그러면?”

“목부터 잡은 후에 이제 괜찮을 거라고 하실 분이지요.”

“흐음... 나에 대한 편견이 있는 것 같네. 나는 말이지. 실수는 자주 해도 우기진 않아.”

“이미 우기고 계십니다만, 그 얘기는 중요하지 않으니 넘어가도록 하지요. 용사님께 다시 질문하겠습니다. 제 걱정 외에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대화를 참 힘들게 하네.

뭐라고 한마디 몰랑하게 따지고 싶지만, 노동력을 쥐어짜이고 있는 환자에게 그건 너무 가혹한 것 같아서 참았다.

“성녀를 만났다며.”

“아아, 역시나 그 일로 찾아오셨군요. 여성공포... 기피증이 생겨서 대화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 덕분에 많이 나아질 수 있었습니다.”

“사랑?”

“......”

“너도 엘브하임처럼 큰 걸 좋아하는구나?”

“흠흠! 큰누나를 보는 기분이었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나이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저희에게는 잘 생기지 않는 감정이지만, 존경심이 들 정도로...”

“연상녀랑 만날 때는 원래 그래. 어리광부리고 싶은 엄마 같은 인상의 누나를 짝사랑하다 서서히 마누라로 바뀌는 법이지.”

“......”

“괜찮아, 괜찮아. 자연스러운 현상이야.”

내게 일리나는 치졸한 가슴사기꾼이지만, 같은 요정에게는 다르게 보이는 모양이다.

애초에 이 왕자는 일리나의 우월한 가슴이 뽕이란 사실도 모르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정말 불쌍하군.

“성녀님도 저처럼 기억이 통합되면서 방황하시는 듯했습니다. 제 물음에도 초연한 미소만 지으실 뿐이었지요.”

“...여성공포증을 사랑의 힘으로 극복하는 드라마를 찍는 와중에 정말 미안한데, 그래서 어디로 간다는 얘기 없었어?”

나는 일리나가 당연히 가족을 찾으러 떠났으리라고 여겼다.

그런데 잠자코 나서스 왕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완전히 잘못 짚은 듯했다.

“유감스럽게도 가르쳐주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나라의 왕자. 일리나 성녀님이 배를 타고 동대륙 알카브라 항(港)으로 가는 것까지 확인했습니다.”

“오! 뒤를 밟았다는 거군.”

에이리스의 설명을 들을 때까지만 해도, 나서스 왕자가 방구석 폐인이 된 줄 알았다.

그런데 짝사랑하는 누나를 스토커 하는 중이었네?

나중에 이모와 조카 관계란 사실이 밝혀진다면, 지구의 어머니가 테니스 동호회를 마다하고 눈물을 글썽이며 즐겨 보시던 토요드라마 못지않게 재미있겠다.

“뒤를 밟다니요! 저는 성녀님의 안위가 걱정됐을 뿐입니다!”

“그렇겠지!”

내 고향별 지구의 스토커들도 경찰서에서 취조받을 때는 그렇게 진술하지!

가출선배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남의 여자를 빼앗아도 된다고 굳게 믿고 있다.

아! 그 선배도 나중에 만나러 한 번 가야겠군.

친애하는 절친 뇌비우스의 진짜 애인을 되찾아줘야 한다.

몰랑로이드 군단에 함께 맞서 싸우면서 약속했으니까.

아무튼,

“성녀는 어디에 있어?”

“놓쳤습니다. 신뢰할 수 있는 수하의 얘기에 따르면, 여관에 들어간 후에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과연...”

일리나가 조카의 미행을 눈치챘을 확률이 굉장히 높다.

그녀는 판타지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혼돈의 유물’을 찾는 사명을 띠고 활동했었으니까.

나서스가 생각하는 얌전한 성녀는 연극용 가면.

그녀의 진짜 직업은 숨거나 도망치는 것이 특기인 ‘도적’이다.

난감하게 됐네?

지금처럼 도적 일리나가 작정하고 숨어버리면, 유명무실해진 판타지아 시스템이나 신력의 도움 없이는 찾기가 힘들다.

“용사님. 저도 질문해도 괜찮겠습니까?”

“몰랑한 거라면.”

“예? 예. 몰랑교도이셨군요. 몰랑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판타지아 원주민들은 세계가 통합되면서 한곳으로 모였습니다. 그렇다면 용사들도 이곳에 몰려야 하는데, 지금까지 파악된 용사는 당신이 유일합니다. 혹시, 짚이는 바가 있으십니까?”

나서스의 질문은 당연했다.

당한 게 많으니까.

만약, 용사들이 찾지 않는 벽지에서 살았다면 합쳐지든 말든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순순히 알려줬다.

“언젠가 나처럼 하나둘 이곳으로 돌아올 거야.”

이 자리에서 전부 밝힐 순 없지만, 내가 바로 그 일을 주관하는 총장이지!

“대비해야겠군요. 하지만 그날이 오면 엘브하임 폐하께서 어떻게든 해주실 것 같습니다. 저열한 동족들이 위기에 빠질 때마다 구원해주셨으니까요.”

“어이. 그 변태를 너무 신뢰하는 거 아니야?”

“......”

“아아, 미안. 존경하는 조상님이었지.”

“괜찮습니다. 단지, 당신이 평범한 용사가 아니란 사실을 막 눈치챘을 뿐입니다. 대다수 동족과 용사는 그분이 박애주의자인 건 알아도, 동족을 혐오하신다는 건 모르니까요.”

“뭐... 우연히 알게 됐지.”

깜빡했네.

외부에 알려진 3대 요정왕 엘브하임은 완벽한 지도자다.

요정 종족의 가장 큰 축복은 긴 수명과 젊음이 아니라, 엘브하임을 지도자로 둔 것이다!

...라는 개소리가 진리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그 변태 요정의 평판은 확고하다.

“사연이 있으시군요.”

“그런 셈이지.”

내게는 장인어른이 된다.

안 그래도 요정은 출생률이 매우 낮은데, 쌍둥이 손녀가 태어나면서 팔불출이 다 됐다.

딸들은 나를 닮아서 젊은 나이에 페스티벌 행성을 양분해서 지배하는 황제가 됐다.

잘 지내고 있으려나?

젊은 뇌비우스를 사냥한 실력이니, 몰랑로이드만 마주치지 않으면 무사할 것이다.

“용사님. 나중에 일리나 성녀님을 찾으시거든 제국으로 돌아와달라고 전해주십시오. 이 나라는 당신이 꼭 필요하다고.”

“너에게 필요한 게 아니라?”

“흠흠!”

“만나면 이야기쯤을 해줄게.”

하지만 나는 만날 가능성을 매우 낮게 봤다.

그녀가 도적이기도 하지만, 판타지아 동대륙은 군도의 집합체라서 도시와 나라의 정보교류가 원활하지 않으니까.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가령...

“나서스. 3대 요정왕의 두 번째 왕비인 네 친할머니는 지금 어디에 있어?”

“글쎄요. 갑자기 왜 그분을 찾으시는지는 모르지만, 에이리스라면 알 겁니다.”

“그래. 수고해.”

“폐하를 만나시거든 빨리 돌아와달라고 전해주십시오.”

“어이. 죽은 사람을 왜 내게 부탁하냐?”

“감입니다.”

“......”

그거참 정말 편리한 감이네!

“이렇게 그분을 대행해보며 절절히 느끼는 중입니다. 엘브하임 폐하만이 이 나약한 동족들을 올바르게 이끌 수 있습니다.”

“거참.”

요정 관점에선 ‘엘브하임이 없는 세상’은 끔찍한 세기말 지옥인 모양이다.

그 후, 조그마한 제국을 관리하면서 엄살떠는 나서스와 헤어진 나는 에이리스를 다시 찾았다.

“제2 왕비님이요?”

“왜? 그쪽도 상태가 안 좋아?”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다른 의미로 좋지 않으십니다. 폐하께서 붕어하신 뒤부터 제1 왕비님에게 구박을- 실례. 죄인처럼 혼나면서 지내십니다.”

“그렇군.”

이게 남편 없는 곳에서 펼쳐지는 아내들의 질투란 걸까.

『너무 순진한 어떤 여신이 하렘을 비난합니다』

『너무 순진한 어떤 여신이 순정을 강력히 지지합니다』

조용히 잘 있다가 이 여신은 갑자기 왜 흥분하는 거야?

나는 어떤 신들에게 들키지 않길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빌며, 제2 왕비의 거처로 향했다.

실레시아.

부활 대기 중인 요정 용사 ‘검성 실레리온’의 여동생이며, 엘브하임을 몰아내고 요정왕국을 차지한 배신자의 아이콘이다.

인성은 어디에?

하지만 파르마엘은 이런 여자를 교사로 채용했다!

베이커리가 교장으로 앉은 현재도 보직을 유지 중이다. 인성은 나빠도 능력은 우수한 걸까?

만나보면 알겠지.

“용사님. 이 앞의 방입니다. 시녀의 설명에 따르면, 제1 왕비님과 함께 계십니다.”

“그런 것 같네.”

방음처리 된 문 너머에서 두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으니까.

“실레시아. 자꾸 물어서 미안한데, 내 딸이 다른 세계에서 멋대로 인간이랑 잠자고 쌍둥이 손녀를 낳았다는 게 정말이야?”

“네. 몇 번째 말씀드리는지 저도 이젠 모르지만, 몇 번이고 확인한 사실입니다.”

“미안. 답답해서 그래.”

“이해합니다.”

“엘브하임 폐하는 인간을 사랑해도 결혼은 동족과 하셨어. 공과 사는 확신한 분이시지. 그런데 장녀가, 그것도 하필이면 내 딸이 인간이랑... 아아! 못난 딸을 낳아서 폐하를 뵐 면목이 없구나!”

“괘, 괜찮습니다. 그 인간은 매우 강하고 우수하니까요. 폐하의 친구이기도 합니다.”

“흥! 우수하긴 무슨. 엘브하임 폐하를 닮은 훌륭한 따님을 낳아주셔서 정말 감사하다고 인사 한번 하러 오지 않는 쓰레기인걸.”

“드, 듣겠습니다.”

“누가?”

“언니가 상상하시는 그 어떤 인간보다도 그는 대단합니다.”

“...폐하보다?”

“아니요. 이 세상에 엘브하임 폐하보다 고귀하고 대단한 존재는 없습니다. 비교 자체가 그분을 향한 모욕입니다.”

“실레시아. 잘 들어.”

“네.”

“나의 딸 엘카테리나는 그 대단한 분의 피를 물려받은 가문의 장녀야. 그리고 인간은 이런 내 딸에게 함부로 손을 댔어. 그러고는 찾아올 생각도 안 하지. 나의 영원한 경쟁자 실레시아. 네가 내 입장이 됐다고 생각해봐.”

“쓰레기네요.”

“그렇지? 객관적으로 쓰레기가 맞지?”

똑똑.

이야기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끼어들기로 했다.

“실례합니다. 찾으시던 쓰레기가 배달왔는데요.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잠시만요. 처음 듣는 목소리인데, 본녀를 놀리는 건가요? 이 방은 위대하고 위대하신 요정왕 엘브하임의 반려가 기거하는 공간입니다. 쓰레기통이나 분리수거장의 위치는 제 시녀에게 물어- 응? 실레시아? 갑자기 표정이 안 좋은데, 어디 아파?”

끼이익-

통보한 나는 허락받지 않고 숙녀의 방에 무단침입했다.

쓰레기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장모님. 제가 그 쓰레기입니다.”

“예?”

“쓰레기통은 어디입니까?”

멍한 표정의 장모님이 내 얼굴을 바라보며 답하셨다.

“존잘...”

“예?”

“존나 잘생겼네...”

“아, 네. 감사합니다.”

아직 분리수거 되지 않은 잘생긴 용사님이 입장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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