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4화
[30회차] 용사님은 부적응자!
내가 겉보기에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악인은 용서치 않는 완벽한 용사로 보이지만, 최근에는 남에게 말 못 할 고민이 있다.
“옛날이 좋았는데.”
아무것도 몰랐던 1회차의 나는 악인을 죽일 때도 1심에서 2심으로, 지방법원에서 대법원 가듯 상당히 신중했었다.
정말로 죽여도 괜찮을까?
필요악 같은 게 아닐까?
후폭풍을 감당할 수 있을까?
겉모습으로 판단해도 될까?
몰랑하면 되지 않을까?
......
동료들처럼 ‘외모=선’이란 단순한 잣대를 들이밀지 않고, 다양한 가능성을 고민했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내면의 아름다움이다!
“저... 한수 씨? 척추와 골반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건 좋지 않다고 보는데요...”
“카이사의 골반은 예쁘지. 척추도 관리가 잘 되어있고. 남편에게 사랑받을 운명이야.”
“...굉장히 객관적인 완벽한 지표네요. 채택하겠습니다.”
“장모B가 하신 말씀을 응용하자면, 사람의 인생은 고스란히 척추과 골반에 남는 법이야.”
이건 개똥철학이 아니다.
의자에 오랫동안 앉아있는 사무직은 척추와 골반이 틀어져서 디스크를 앓는다.
반면, 운동선수는 왕성한 활동으로 젊은 나이에 연골(軟骨)이 다 닳아서 노년에 고생한다.
즉, 내면의 아름다움이 인생을 대변한다는 건 과학이다.
“그런데 한수 씨. 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 하는 건가요?”
“푸념이지.”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네요.”
“네가 본 나는 어떤데?”
나는 해고 예정인 사악한 교사의 악행을 막기 위해 동대륙으로 날아가는 중이다.
카이사를 품은 채로.
역시, 나는 수비수보다 공격수가 체질적으로 맞는다.
공격수끼리 만나면 필연적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으니, 앞으로 장모B랑은 거리를 두는 거로...
“수틀리면 장모의 목도 부러트릴 수 있는 남자죠.”
“누구 얘기?”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얘기해달라면서요.”
“그게 내 얘기였구나! 너무 달라서 눈치채지 못했어!”
“.......”
“카이사. 그 말랑한 시선을 거두고, 몰랑한 귀로 들어봐. 나는 회귀라는 걸 믿지 않았어. 그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거든? 나를 과거로 돌려보낸다. 말은 쉽지. 나만 A시간대에서 B시간대로 이동시키면 되니까. 하지만 그건 1차원적이 사고야. 내가 과거로 가고 없는 A시간대의 우주는 어떻게 되는 걸까? 아! 우주도 과거로 되돌려진다는 건 있을 수 없어. 거기에 들어가는 힘의 총량은 창조신의 조상님이 와도 감당할 수 없으니까. 가능하더라도하찮은 사회부적응자 1명을 위해서 할 짓은 아니지. 여기까진 이해했어?”
“아니요.”
“내 설명이 어려웠나? 나중에 과학 선생을 붙여줄게.”
“몰라도 결혼생활에는 전혀 지장이 없을 것 같은데요? 당신이 이런저런 이유로 회귀를 안 믿었다는 건 이해했습니다.”
오! 그거면 됐다.
“충분해. 그래서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하자면, 회귀를 믿지 않았던 나는1회차의 시간과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했어.”
“시간은 인정하지만, 인연은 아니라고 보는데요. 당신은 한 번 틀어진 동료들이랑 관계를 개선할 마음이 없었잖아요.”
“당연하지. 가엾은 소녀 하나를 구하기 위해 도시의 시장경제를 마비시키는 연놈들의 손을 들어줄 순 없으니까. 용사로서 절대 타협할 수 없는 문제야.”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변명의 여지가 없네요.”
“카이사. 나는 말이지. 1회차 때는 정말 열심히 살았어.”
“다양한 용사를 만나본 기억이 있어서 비교할 수 있는 지금은 인정합니다. 당신은 정말 부지런했어요. 용사의 직업특성이 있음에도 쉬지 않고 노력했- 아읏?! 멋진 얘기 중이지 않았나요?! 손가락은 잠시 멈춰도 좋았잖아요!”
“이건 이거, 그건 그거.”
사족이 길었다.
결론을 얘기하자면, 1회차의 나는 우매한 판타지 원주민 중 그나마 괜찮은 사람의 이름은 달달 외우면서 돌아다닐 정도로 성실하게 생활했었다.
예를 들자면?
동료들이 나를 힘들게 한 날에는 술집에서 함께 이야기꽃을 피웠고, 이런 용사를 불쌍히 여긴 누님들이랑 뜨겁게 불타오를 정도로 친해졌다.
후회 없는 1회차였다.
그런데 회귀 한 방으로 싹 증발하면서 내 가치관부터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됐다.
“좋지 않았나요? 다른 용사들은 신(神)이라도 된 것처럼 행복해하던데요.”
“천만에.”
그건 단세포에 가까운 사고다.
인생이 소중한 이유는, 한 번 지나간 시간은 절대로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대전제가 기본적으로 깔려 있기에 우리는 노력하는 것이다.
하지만 회귀를 보았다.
그것은 ‘남들이 모르는 미래의 정보를 안다’라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가치, 시간의 소중함 등을 하수구 밑바닥까지 떨어트리니까.
잘못되면 재시작하는 RPG 게임의 캐릭터와 동일선에 놓이게 된다는 뜻이다.
그건 잔혹한 일이다.
“지금의 한수 씨는 개운한 표정을 하고 있네요. 세계의 통합이랑 관련이 있나요?”
“물론이지.”
우리의 삶이 기니피그- 실험용 쥐 수준에서 확실하게 벗어났다는 뜻이니까.
회귀는 앞으로 없다.
카이사는 세상에 하나뿐이다.
“이상하네요. 당신의 소망대로 잘 풀렸잖아요? 그런데 고민이 아직 남았나요?”
“어. 적응이 안 돼.”
“......”
“어이없게 보지 마. 내게는 아주 중요한 문제거든? 예전처럼 주민A, 공주C, 기사B 같은 식으로 무시하기가 힘들어졌다고 할까. 예를 들자면... 내가 손가락으로 이렇게 하면, 카이사의 몸에 영원히 기록될 거야.”
“아읏...?!”
“되돌릴 수 없기에 소중하게 대해야 하지. 골반을 만질 때도 닳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자, 잘 알겠으니 그만! 대낮부터 이상해질 것 같아요...!”
“다행이네. 내 손가락으로 이상해진 카이사가 되돌아갈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평범한 예시는 없나요?!”
“나 때문에 이상해진 카이사는 확실하게 책임질게. 멀쩡한 너는 필요 없어.”
“사랑의 표현법이 너무... 제 상식을 초월하네요. 하지만 당신의 감정은 확실하게 전해졌어요.”
“그러면 계속할게.”
“예? 하읏...!”
온몸이 촉촉하게 젖은 카이사가 미역처럼 변했을 때쯤에 동대륙에 도달할 수 있었다.
먼저 주위를 훑어봤다.
주민A, 주민B, 주민C, 주민D...
북적북적한 항구랑 달리, 어떠한 분쟁도 허락하지 않는 내륙은 지극히 평화로웠다.
“이 근처일 텐데...”
요정제국의 사악한 교사가 ‘교직원 권한’으로 알려준 일리나의 위치는 이 근방이다.
몽환의 숲마을D
이름은 저래도 위험한 몽환의 숲에 붙어있는 건 아니고,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다.
숲을 찾는 모험가와 용병들이 물자를 보급받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거리의 마을일 뿐.
숲하고는 하루 거리에 있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제법 똘똘하게 생긴 주민C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저기, 한가하신 와중에 실례합니다. 마을의 처녀들 엉덩이를 감상할 만큼 방심하고 계셔서 말씀 좀 묻겠는데요.”
“켁켁?!”
“요정 여성을 찾습니다. 일반적인 요정들보다 귀가 뾰족하고, 가슴도 제법 큽니다. 특징이 워낙 뚜렷해서 모를 리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모, 목부터...! 켁켁!”
“흐음? 아아, 이런. 정말로 실례했습니다. 무심코 옛날 버릇이 튀어나왔네요. 기억이 합쳐지면서 정신이 오락가락합니다.”
나는 주민C의 경추(頸椎) 6번과 7번 사이를 놔줬다.
풀려난 그가 말했다.
“크윽! 당신도 그 부적응자였군요. 혼란스러운 건 이해하지만, 그래도 조심하십시오. 죽는 줄 알았습니다.”
“부적응자... 아주 명료한 표현이군요. 맞습니다, 저도 그 부적응자입니다.”
기가 막혔다.
올곧은 정의만 실천해온 내가 사회부적응자로 낙인찍힐 날이 올 줄이야!
“그래도 이 마을은 워낙 외진 곳에 자리해서 나은 편입니다, 용사들의 방문이 잦았던 이웃 마을은 부적응자가 많아서 농사가 마비된 수준이지요.”
“그래도 여기까지 용사가 오긴 했었던 모양이군요.”
“네. 손에 꼽을 정도로 매우 적지만, 제 가족과 친구들 모두가 입을 모아 기억하는 용사님이 딱 한 분 계십니다.”
“헤에~”
그런 용사가 있었다고?
내 직업이 직업인지라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한수라고...”
“콜록콜록!”
“어? 그러고 보니... 설마! 강한수 용사님이 맞으시지요?!”
“흠흠.”
“오! 세상에! 신이시여! 갑자기 목을 잡혀서 정신도 없었지만, 분위기가 너무 변해서 바로 못 알아봤습니다! 옆에는 검희 님이 맞으시죠?”
“맞는데...”
“동네 사람들~! 하던 일을 멈추고 이쪽으로 와보십시오! 그분께서 다시 와주셨습니다! 우리의 용사님이 오셨습니다~!”
격하게 흥분한 주민C가 조용한 마을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 목소리에 놀란 카이사가 내 품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습격인가요?!”
“아니. 단순한 소란...”
“아! 여기는 예전에 한수 씨가 도와줬던 파루나루 마을이네요. 저와 동료들에게는 안 좋은 추억이 가득한 곳이지만, 마을 주민들에게는 다르겠죠.”
주민C의 외침을 들은 마을 주민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분이 마을에 오셨다고?”
“오! 세상에! 참말인가?!”
“강한수 용사님이다!”
“우리의 현자께서 오셨다!”
“환영합니다, 용사님!”
“동네 사람들! 여깁니다~!”
나는 조용히 일리나의 뽕만 찾고 떠나려 했는데, 갑자기 부산스러워졌다.
이해하기 힘들군.
이대로 그냥은 못 넘어간다고 판단한 나는 안고 있던 카이사를 옆에 세워줬다.
“여러분! 진정하십시오. 용사를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너무 흥분하시는 거 아닙니까? 평소처럼 일들 보십시오.”
내 선동에 주민A가 답했다.
“하하! 다른 용사랑 비교되기에 강한수 용사님이 더욱 반가운 거 아니겠습니까?”
“당신은...”
“촌장입니다. 당신이 구하신 수많은 마을 중 하나를 책임진 무능한 요정 늙은이지요.”
그렇게 겸손 떨며 씩 웃는 요정의 외모는 30대 초반이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무능하다니. 겸손이 너무 지나치군. 이 마을을 구해낸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다. 나는 방법을 제시하고 설득했을 뿐. 그러니 자신감을 가지십시오. 레오드 씨.”
“오오오! 하찮은 제 이름을 용사님께서 아직 기억해주시다니! 너무나 영광입니다!”
“...닷새 동안 함께 일하며 불렀던 이름이니까요.”
여태까지는 일일이 기억할 필요성을 못 느껴서 안 한 것이다.
회귀하면 사라질 인연이니까.
하지만 세계가 통합되면서 우리는 이렇게 다시 만났다.
“한수 씨?”
“아무것도 아니야.”
“우시나요.”
“...그럴 리가. 강철 같은 심장을 가진 정의의 용사는 이까짓 일로 울지 않아.”
“후후. 네. 그러시겠죠.”
“......”
나는 드디어 되찾았다.
과거의 인연을.
더는 ‘누구세요?’ 같은 무미건조한 시선을 받지 않아도 된다.
가둬둔 기억을 열었다.
“말괄량이 루카는 아직도 결혼하지 않은 모양이네. 아직도 도시의 남자만 고집하는 거야?”
“당연하죠! 이번에는 개념 박힌 도시의 청년을... 어라?! 용사님은 결혼하신 건가요?!”
“흠. 검은털 트롤을 사냥한 자경단원 엘리오. 자신감을 가져도 돼. 무슨 말인지 알지?”
“하아... 압니다, 용사님. 하지만 저는 촌놈이니까요...”
“드로이 씨. 아직도 허리가 아프십니까? 슬슬 대장간은 따님에게 맡기심이? 그러다가 손주도 못 보고 쓰러지십니다.”
“용사님께서 또 약점을... 크으. 손주, 정말 보고 싶은데 이 딸년은 도통 결혼할 생각이 없으니!”
......
주민들을 일일이 상대했다간 이야기가 끝이 없을 것 같았다.
반면에 검희의 대우는...
“무서운 여자도 왔네.”
“마녀가 왜 용사님의 품에?”
“말조심해. 들을라.”
“휴! 다행히 검희뿐이네.”
재앙 취급이다.
앞에서는 수많은 무법자(모험가)를 상대하며 익힌 ‘선량한 마을 주민의 미소’로 응대하고, 뒤에서 얼른 꺼져주길 비는 것이다.
저러면 곤란한데.
세계가 통합되면서 기억만 늘어난 게 아니니까.
다양한 삶을 겪은 자들은 성장한다. 심하면 쑥떡이나 섹스피어처럼 성장통을 앓고.
카이사의 귀도 밝아졌다.
“한수 씨.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이건 저와 동료들이 안아야 할 업보니까요.”
“그러면...”
나는 일리나의 수색을 진행하고자 촌장을 돌아봤다.
하지만 분위기라고 할까.
정의로운 용사님은 주민들에게 떠밀리다시피 끌려가고 말았다.
“마을 광장으로 와주십시오. 다른 마을이랑 협력해서 용사님의 동상을 세우고 있습니다. 위선적인 용사들 위에 우뚝 선 강한수 용사님의 모습을 담았습니다!”
“.......”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지만, 저렇게 말하면 안 가볼 수 없잖아?
일리나의 뽕은 그 뒤에 찾아도 늦지 않는...
『너무 순진한 어떤 여신이 뿌듯해합니다』
왜 당신이 뿌듯한데?
아무튼, 정의로운 G급 용사님은 마을 광장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