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405화 (405/430)

 405화

[30회차] 신과 함께

파루나루 마을.

특별한 곳은 아니다. 파루나루 마을의 촌장이 말했던 것처럼 내가 1회차 때 구했던 수많은 마을 중 하나일 뿐이니까.

약간의 차이라면?

주민A와 주민B를 똑같이 구했어도, 누가 더 구하기 쉽고 어려웠냐에 따라 기억하는 무게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옷에 커피를 흘린 사람에게 휴지를 건네준 경우와 바다에 빠진 사람에게 튜브를 던져준 경우...

후자가 아무래도 더 희귀하기에 좀 더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이나 기억의 차이는 도움을 받은 당사자가 더 클 수밖에 없다.

...많이 컸던 모양이다.

“저희가 이웃 마을들이랑 협조해서 용사님의 업적을 기리고 감사하는 동상입니다. 어느 마을에 건립하느냐를 놓고 경쟁이 붙는 바람에 진땀 좀 흘렸죠. 하하! 어떻습니까?”

“...이거 만들 돈으로 마을의 부흥에 힘썼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말은 안 하겠습니다. 미래는 아무도 모르니까요. 마을의 꼬마 중 누군가 저의 저... 많이 미화된 모습에 감동해서 훌륭한 용사나 영웅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하하하! 용사님이라면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미래를 내다보시는 혜안은 여전하시군요. 하지만 하나 놓치신 게 있습니다.”

“저 동상에 더 무슨 의미가?”

나의 조각상이었다.

여러 마을에서 ‘각자 대충 만들지 말고 돈을 모아서 제대로 하나만 만들자!’라고 합의해서 세운 동상인 만큼 품질도 뛰어났다.

도시의 중앙분수대 같은 특별한 구조물에 쓰이는 고급 석재.

햄버거 패티처럼 겹겹이 쌓아놓은 용사들 무더기 위에 한 청년이 우뚝 서 있었다.

그의 오른손에는 성검 대신 삽이 들려져 있고, 왼손은 꾀죄죄한 몰골의 소년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 있었다.

“이거 참! 저희에게 관광의 중요성을 깨우쳐준 분께서 눈치채지 못하시다니...”

“...저게?”

내 동상이 관광요소?

내가 정의로운 용사로 활동하긴 했지만, 이건 지나친 무리수가 아닐까.

할아버지, 할머니가 순진한 손주들의 손을 잡고 나와서 ‘우리 마을에 저렇게 잘생긴 용사님이 방문한 적이 있었단다!’라고 한마디 해주는 정도지.

관광은 좀...

“용사님. 이 마을을 보시니 어떻습니까?”

“...과거로 돌아갔네요.”

그렇다.

내 동상은 시기상조다.

1회차 때, 나는 몽환의 숲으로 가는 길에 이 마을에 들렸다가 문제점을 발견하고 해결했었다.

암울했던 파루나루 마을은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하지만 그것도 옛말.

여기도 내가 회귀할 때 함께 초기화됐다.

“하지만 용사님 덕분에 바뀐 것도 있습니다.”

“서로에게 무관심했던 이웃들과 친하게 지내게 된 것 같네요.”

“그것 또한 용사님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가장 큰 업적은 따로 있습니다. 이거야말로 용사님이 위선자가 아닌 진짜 용사임을 알려주는 증거입니다.”

“......”

잘 모르겠다.

기억이 통합되면서 나를 기억해주는 원주민들이 생겼고, 헤어진 죽마고우를 만난 것처럼 진심으로 반가웠다.

하지만 그래서 뭐?

파루마루 마을의 상태는 내가 회귀하면서 전부 ‘환상’으로 치부돼버렸다.

“희망입니다.”

“희망...?”

“저 동상의 바닥에 깔린 용사들은 대충 만든 게 아닙니다. 모두가 이곳과 근방의 마을들을 지나간 용사들이지요. 하아... 저들은 하나를 고쳐주고 둘을 부수는 재앙 그 자체였습니다.”

“뭐...”

지크와 함께해봐서 안다.

작은 것에 얽매여서 큰 것을 잃는 전형적인 머저리.

다른 용사들도 지크랑 크게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촌장이 말했다.

“오! 강한수 용사님을 가장 뵙고 싶어 했던 사람이 저기 오는군요.”

“데이브 씨?”

“악덕 돼지 상인...”

나와 카이사는 서로 다른 명칭으로, 뒤뚱뒤뚱 힘겹게 달려오는 사내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카이사의 편견?

아니다.

저 남자는 파루나루 마을의 상권을 쥐고 주민들을 노예처럼 부려먹던 악덕 상인이 맞으니까.

외모도 호감형은 아니... 야! 껴안지 마!

“아이고! 용사님! 너무 반가워서 무슨 말부터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데이브 씨. 젊은 나이에 요절하기 싫으면 살 좀 빼라고 조언했던 것 같은데요. 그리고 남자가 껴안는 건 사절입니다.”

“저는 용사님이 좋습니다.”

“아내가 들으면 오해할 발언은 자제해주시죠.”

“아! 그러고 보니 함께 오신 미녀분은... 히익?! 거, 검희?!”

내 옆에 있는 미녀가 누군지 뒤늦게 확인한 상인 데이브가 식겁하면 뒤로 물러났다.

얼마나 놀랐으면 뒷걸음치다가 벌러덩 자빠지기까지 했다.

연쇄살인마를 목도한 겁에 질린 얼굴.

완전히 틀린 표현도 아니다.

1회차 때, 그는 내 동료들에게 살해될 뻔했으니까.

“...데이브 씨. 예전처럼 당신을 죽이는 일을 없을 거예요. 그러니 저는 없는 사람 취급하세요. 한수 씨가 데려온 조랑말쯤으로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카이사가 내 뒤편으로 살짝 물러서며 말했다.

“노, 놀랍군요. 원수 같이 지내던 두 분이 결혼하실 줄은... 히익?! 안 어울린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상인 데이브는 카이사의 미세한 표정 변화에도 호들갑 떨면서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너무 심한데.

나는 카이사를 돌아보며 물었다.

“카이사. 데이브 씨를 몇 번이나 죽인 거냐?”

“저만 죽인 게 아니에요.”

“하여간 제법 죽였다는 뜻이군.”

그렇다면 전형적인 악덕 상인이었던 데이브가 저렇게 벌벌 떠는 것도 이해가 됐다.

하지만 이대로면 이야기가 풀리지 않는데.

“데이브 씨. 겁먹지 말고 고개를 드세요. 이 검희는 당신을 해치지 않아요.”

“...용사님을 뵐 때마다 놀랍군요. 다른 용사였으면, 검희 님의 가슴에 손을 댄 시점에 팔이 잘려나갔을 텐데.”

“신혼부부 사이의 흔한 애정표현이죠.”

“그... 흔하다는 부분은 꼭 지적해드리고 싶은데요... 하여간 잘 알겠습니다. 제 앞의 검희 님도 용사님을 만나서 달라졌군요.”

“뭐... 조금?”

대단한 일은 아니다.

회귀하지만 않는다면 누구나 살면서 조금씩 바뀌니까.

사람도, 환경도, 관계도...

앞으로도 계속, 판타지아 세계는 바뀔 것이다.

“강한수 용사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저는 지금쯤 어떻게 됐을지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어떻게 살긴요. 어딘가에서 잘 살았겠지.”

“하, 하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용사들에게 살해된 기억이 한꺼번에 밀려들면서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복수. 그 대상은 용사와 그의 동료들만이 아니었습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안다.

용사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빚 갚기 싫어요!’라고 탄원한 마을 주민들도 그 복수의 대상에 들어가리라.

하지만 상인 데이브는 복수 대신 마을 주민들이랑 친해지는 길을 택했다.

용사가 없음에도.

딱 내 1회차 때처럼 말이다.

“설마... 함께 구상했던 공동사업을 다시 추진하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저는 뼛속까지 상인이니까요. 돈이 되는 일을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빌어먹을 용사들... 어흠! 실례. 그들은 저를 악(惡)으로 규정하고 멋대로 공개처형까지 했지만, 저는 그저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파루나루 마을에서 독점시장을 구축한 한 명의 상인일 뿐입니다.”

검희가 안전하다고 판단한 상인 데이브는 용기 내어 당당히 억울하다고 말했다.

매점매석(買占賣惜).

그의 수법은 판타지아의 경계를 지배했던 암흑상회 상인들이 자주 쓰던 상술이다.

교류가 제한된 외진 마을의 생필품을 저렴하게 싹 구매한 후에 비싸게 되파는 방식.

물가가 치솟아도 마땅한 해결책이 없는 주민들은 바가지를 뒤집어쓸 수밖에 없다.

핵심은 수익.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이런 방식을 선택한 상인에게 더 큰 이익을 안겨준다면? 그리고 마을 주민이랑 협력해야 한다면?

더는 마을 주민의 고혈을 쥐어짜지 않을 것이다.

“용사님.”

“설명하지 마십시오. 데이브 씨의 자랑을 다 듣다가는 일을 못 봅니다.”

“그런 섭섭한 말씀 마십시오. 저 동상에 가장 많은 후원금을 낸 것도 저입니다.”

“그거야 촌장님의 말씀처럼 우리의 사업구상 중 하나였던 관광업의 연장선이잖습니까? 상인인 당신은 과거에 성공했던 기억을 토대로 재투자하는 것뿐이죠.”

“크으... 역시, 강한수 용사님이십니다. 다른 그 야만적인 살인귀들이랑 달리 말이 통하십니다. 흐흐흐!”

“나중에 시간 되면 또 보죠. 지금은 좀 바빠서.”

“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요. 시간 되실 때, 저의 데이브 상회를 찾아주십시오. 강한수 용사님이라면 뭐든 절반에 해드리겠습니다. 예전처럼 요것도?”

상인 데이브가 새끼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당신이 이번 생에도 검희에게 살해된다면 그건 방정맞은 새끼손가락 때문일 겁니다.”

“히익?! 아름다운 검희 님! 살려주십시오! 소인이 잠시 미쳤나 봅니다...!”

카이사는 바닥에 넙죽 엎드린 그를 게슴츠레 뜬 눈으로 한 번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작게 중얼거린다.

“예전에 그런 일이...?”

“남자니까. 흠흠.”

그때, 촌장 레오드가 연륜을 살려서 타이밍 좋게 끼어들었다.

“자자, 데이브. 얼른 가서 일 보시게. 용사님께서 이런 외진 마을에 아무런 이유도 없이 오셨을 리 없잖는가?”

“아차! 제가 눈치가 없었군요. 그러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데이브 상회! 꼭 나중에 들려주십시오! 그리고... 검희 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데이브가 무거운 몸을 뒤뚱뒤뚱 움직이며 떠나고, 다시 촌장과 우리만 남았다.

“요란하네요.”

“하하! 강한수 용사님의 인기가 그 정도로 뜨겁습니다. 말씀처럼 바쁘신 듯하니 짧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헤에~ 그러면 감사하죠.”

“위기에 빠진 마을을 다양한 용사들이 구해줬습니다. 저희는 이 기억들을 전부 모아서 비교해봤지요. 그랬더니 전부 쓸모없고 강한수 용사님만 남았습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다른 용사들이랑 비교할 수 있게 되면서 강한수 용사님이 저희를 얼마만큼 생각했으며, 또 대단했었는지 깨닫게 됐습니다.”

대충 그림이 그려졌다.

다른 용사들은 가진 무력을 동원해서, 조금 전에 만난 데이브 같은 악(惡)을 처단하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했으리라.

하지만 그 방식은 기억이 아무리 돌아왔어도 마을 주민들이 쓸 수 없었다.

가령...

내년에 강력한 몬스터가 마을을 침공해온다는 사실을 미래의 기억을 통해 안다고 해보자.

하지만 의미가 없다.

과거에는 용사가 토벌해줬었기 때문에 큰돈 들여서 용병들을 고용하는 것 외에는 마땅한 해결책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나는?

좀 더 시간이 들더라도 마을 사람들이 자력으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사냥법을 가르쳐줬다.

이런 차이.

눈앞의 결과물은 같아도 미래는 다르다.

“잘됐네요.”

내가 원하는 그림대로 됐다.

용사가 떠나고 없어도 문제없도록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200년 만에 그 결실을 직접 내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었다.

덤으로 감사 인사까지.

지금도 주위에선 나랑 눈이 마주친 마을 주민들이 손을 흔들며 반가움을 전했다.

나는 그 모든 풍경을 내 머릿속에 꾸역꾸역 담았다.

“음...”

꿈틀.

감동이나 성취감이랑 비슷하면서도 묘하게 다른 무언가가 내 몸을 휘감는다.

이건, 비겁한 마누라의 몰랑한 가슴을 처음 움켜쥐었을 때처럼 정말 굉장한 감각인데, 뭐라고 표현할 방법이 없네!

누가 좀 설명해줬으면...

『공정한 어떤 인신이 묘한 희열에 휩싸입니다』

『공정한 어떤 인신이 공정한 섭리를 정의합니다』

『너무 순진한 어떤 여신이 눈을 휘둥그레 뜹니다』

『어떤 신이 팝콘을 들고 조용히 착석합니다』

신(神)이란?

귀여운 척하는 라누벨 따위도 될 수 있는 하찮은 존재다.

나는 이 사실을 알게 된 뒤부터 신이란 녀석들을 무척 하찮게 여겼었다.

그게 이런 이유였군?

「내 정의는 틀리지 않았다」

그 확고한 자신감이 나의 원천이자 본질이 되었다.

이것이 신(神)의 조건.

지금까지의 나는 자연에서 태어난 페도나르와 파르마엘의 힘을 흡수한 ‘자연계 신’이었다.

집안 빵빵한 마누라 덕분에 성공한 기둥서방이라고 할까!

그러나 이젠 아니다.

나 스스로 정의를 내리고 한 번 더 신의 반열에 올랐다.

스스로.

“내가 용사다.”

『항상 공정한 어떤 인신이 선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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