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6화
[30회차] 맙소사...
권능(權能)에서 섭리(攝理)로.
겉보기에는 단어만 그럴싸하게 바뀐 것 같지만, 이 둘은 명백한 차이가 있다.
권능은 강제.
남에게 ‘나의 철학’이 옳다고 우기는 것이다.
귀여운 척하는 라누벨이 자신의 모험이 옳다고 남들에게 설득하고 강요했듯이.
내 신격도 그랬다.
【명암】
나는 시간과 공간, 빛과 어둠을 지배할 테니 너희는 복종해라!
...라고 강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강요하지 않는다.
있는 사실을 보여준다.
권능이란 이름의 선동과 날조로 상대를 이해시키지 않고, 그냥 ‘사실’을 보여준다.
이해하지 못해도 된다.
받아들이지 못해도 된다.
그런다고 정해진 ‘섭리’가 바뀌지는 않으니까.
『용사』
내가 용사란 사실은 절대불변의 진리이기에 제삼자의 허가나 인정은 필요 없다.
좀 더 쉽게 말해서...
지금까지 내가 사용해온 신격들이 ‘물리&마법공격력: 100000’ 이상이라면, 섭리는 상대의 방어력과 저항력을 무시하고 고스란히 타격하는 ‘관통공격력: 10’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막을 수 없다.
때리면 때리는 대로 전부 맞아야 한다.
『어떤 신이 팝콘의 맛을 고르라고 제안합니다』
『너무 순진한 어떤 신이 선택 장애에 빠집니다』
『너무 순진한 어떤 신이 춘장맛을 고릅니다』
『어떤 신이 팝콘을 튀기기 시작합니다』
어떤 신들의 이 채팅창도 섭리라고 할 수 있다.
이에 의문을 품고 연구, 탐구해봐야 자신만 손해다. 이건 원래부터 그런 거니까.
누군가의 섭리다.
“관통 100%라...”
그 자체는 마음에 든다.
내가 먼지 취급했던 디스코도 방어력과 저항력을 게임처럼 수치화하면 99.9999%쯤 됐으니까.
아무리 강한 공격으로 후려쳐도 흠집밖에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섭리는?
그 공격력은 위대한 자연의 법칙에 간섭하는 탓에 대폭 떨어지지만, 절대로 막지 못한다는 게 중요하다.
아무리 방어력과 저항력이 높은 존재라도 ‘10’ 피해를 꼭 받게 된다는 뜻이다.
즉, 섭리는 일정 수준을 넘어선 강자들에게 치명적인 힘!
나도 앞으로 조심해야겠네.
섭리에 잘못 걸리면 한 방에 소멸하는 수가 있으니까.
“...이럴 때가 아니지.”
본의는 아니지만, 나의 변화를 눈치챈 신들이 판타지아 차원으로 우르르 올려오기 시작했다.
느긋하게 감동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너무 순진한 어떤 여신이 조용했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신이 춘장맛 팝콘을 건넵니다』
『너무 순진한 어떤 여신이 고맙다고 합니다』
『너무 순진한 어떤 여신이 맛있다고 칭찬합니다』
『어떤 신이 뿌듯해합니다』
이 둘의 대화 뒤로 어떤 신들이 줄줄이 입장하기 시작했다.
『어떤 용신이 빼꼼합니다』
『느긋한 어떤 천신이 흥미롭게 바라봅니다』
『어떤 수신이 손을 흔들며 반갑게 인사합니다』
『친절한 어떤 여신이 난감해합니다』
▷난감: 어떻게든 시선을 돌리려고 했는데, 강한수 총장님의 신격이 사방으로 뻗치는 바람에...
나를 위해 애써줘서 정말 고맙고 반가워, 도덕 아가씨!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내 실수로 들키고 말았지만, 이 근방에 일리나가 있으니 괜찮다.
게다가 자신감도 생겼다.
섭리를 갖춘 나는 대우주(메이저리그)에서도 먹힌다는 확신.
그게 중요하다. 내가 판타지아 차원에서 산출되고 있었던 로맨티넘을 찾는 것도 결국은 강해지기 위해서니까.
나쁠 거 없다.
『항상 공정한 어떤 인신이 접근금지를 선언합니다』
『항상 공정한 어떤 인신이 다가오면 때린다고 합니다』
농담이 아니다.
『어떤 악신이 사악하다고 비난합니다』
『어떤 역신이 소심하게 항의합니다』
『느긋한 어떤 천신이 쪼잔하다고 비난합니다』
『어떤 앙신이 주위를 기웃거립니다』
시끄러워!
섭리를 악용해서 남의 사생활이나 공짜로 훔쳐보는 녀석들이!
소설과 만화를 불법으로 다운로드해서 읽던 내 고등학교 동창들만큼이나 나빴다.
이젠 거리낄 게 없지.
약했다면 이전처럼 숨어서 조용히 일을 진행했겠지만, 지금은 어떤 신들의 접근을 물릴 만큼의 힘을 갖췄다.
『용사』
섭리를 사용했다.
내가 생각하는 용사란?
제멋대로인 동료쯤은 눈 감고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저기군.”
판타지아 차원은 ‘나’라는 거대한 의지와 힘을 보관하는 창고라고 할 수 있다.
성급한 어떤 마신의 마계처럼.
그렇기에 판타지아 차원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손금 보듯 알 수 있다.
약간의 수고만으로.
“옷가게...?”
파루나루 마을의 단 하나뿐인 옷가게에 일리나가 있었다.
해독한다던 요정이 어째서 이런 장소에 있는 걸까?
“한수 씨. 여자가 여행지의 옷가게를 구경하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건데요...”
“그런가?”
하필이면 왜 지금일까, 같은 사소한 의문이 들긴 했지만, 카이사의 설명을 들으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카이사는 나의 변화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어쩔 수 없지.
나와 그녀는 보는 세계가 너무 다르니까.
저 시끄러운 어떤 신들의 메시지를 포함해서, 그녀는 아무것도 보고 느낄 수 없다.
이건 좀 슬프군.
비겁한 마누라만 내 얘기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니...
딸랑♪
옷가게 문을 열자마자 운치 있는 종소리가 반겼다.
조그마한 종이나 방울을 출입문에 매달아서 좀도둑을 예방하는 것이다.
여관, 가게, 술집, 대장간...
판타지아 대륙의 어딜 가던 대부분 이렇게 해놨다. 그러나 오늘따라 기분이 살짝 묘했다.
새롭달까.
이 옷가게의 주인하고도 1회차 때 나름의 인연이 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실례합니다?”
나의 감각이 알려주고 있다.
옷가게 주인은 공방에서 새로운 옷을 짜기 위해 준비 중이고, 점원인 그녀의 딸이 일리나의 몸 치수를 재고 있었다.
...잴 게 있나?
예전에 그녀랑 잠깐 동행해봐서 아는데, 그녀는 뽕을 들키지 않으려고 신체접촉을 꺼렸었다.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분 거지?
이것만은 판타지아의 유일신(唯一神)인 나도 모르겠다.
“아앗?!”
옷의 치수를 재는데 굳이 상의를 전부 벗을 필요가 있나?
출입문 방향을 등진 채 양팔을 벌리고 줄자로 가슴둘레를 재고 있던 일리나.
그녀는 종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봤다가 내 얼굴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며 가슴부터 가렸다.
너무 허술한 거 아니야?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애초에 이런 촌구석 옷가게는 손님이 거의 없고, 그 손님조차 대부분이 함께 자라온 이웃이기에 칸막이 같은 시설이 없다.
“일리나. 너의 누추한 몸매와 척추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이미 내 머릿속에 기록되어 있거든? 그러니 비명을 지르려거든 다른 남자를 만나면 해.”
“첫마디부터 핀잔인가...!”
옷걸이 뒤로 숨은 일리나가 빽 소리를 질렀다.
사악한 교사가 그녀에게 독약을 먹였다고 해서 병약한 인상을 상상했었는데, 멀쩡하잖아?
괜히 걱정했었던 모양이다.
“잘 지낸 모양이네.”
“내 어머니 앞에서도 그렇고 은근슬쩍 말 돌리지 마라. 그리고 누추하다는 표현은 당장 철회해야 할 것이다. 자! 봐라!”
그렇게 말하면서 옷걸이 뒤편에서 주춤주춤 나온 일리나.
그래도 여자니 뭐라도 위에 걸쳐서 가릴 줄 알았는데, 그녀는 치수를 재던 그대로 당당히 상반신을 노출했다.
대수롭지 않게 쳐다본 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뭐, 뭐냐, 그 가슴은...!”
뽕이 아니었다.
그녀의 모친처럼 변용술을 이용한 고도의 사기도 아니었다.
진짜잖아!
저 몰랑몰랑한 출렁임이 가짜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조화지...?
“어머니의 말씀이 맞았다. 간절히 바라면서 계속 착용했더니 진짜로 변했다!”
“그 뽕이...?”
“만져볼 테냐? 아, 아니지. 나도 이젠 콧대 높은 여자다. 그러니 만지고 짚으면 무릎 꿇고 간질한 목소리로 부탁해라.”
“...엘브하임의 유전자에 깃든 본능인가? 뭔가 안 풀리다가 잘 되면 우쭐대는 거 말이야.”
“흥! 남자인 네가 알 리 없지. 무심코 고개를 숙여도 가슴에 가려져서 발등이 보이지 않았을 때의 희열을!”
“...그러게.”
전혀 모르겠다.
“어깨끈 없는 드레스를 입어도 흘러내릴 걱정이 없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줄도 모르겠지? 점원이 내 몸을 보면서 어떤 옷을 입어도 잘 어울리겠다고 말할 때의 쾌감을 아느냐?”
“어... 마지막은 조금?”
하여간 나는 그런 시시콜콜한 얘기나 하려고 일리나를 찾던 게 아니다.
일단 뽕을...
“검희도 있었구나!”
“네? 네. 자주는 아니었지만, 성녀로 합류하신 일리나 님이랑 몇 차례 함께 모험했었죠. 독살의 위기를 겪었다고 들었는데, 건강하신 듯하여 다하여 다행입니다. 그런데 제가 무언가 잘못했나요? 표정이 좀...”
“그때는 왠지 나만 비참해질 것 같아서 말을 아꼈지만, 이젠 확실하게 말하겠다. 동료 중에서 네가 가장 짜증 났었다!”
“그, 그런...!”
“가슴이 흔들려서 무게중심을 잡기 힘들다고 투덜대고, 어깨가 자꾸 결린다면서 한숨을 내쉬고, 옷이 너무 껴서 숨쉬기 불편하다며 짜증내고, 가슴이 아래 시야를 가려서 하체 방어에 취약하고 불만을 늘어놓고...”
“그... 죄송합니다.”
“함께 모험하는 내내 불평하던 네가 정말 싫었어. 기억이 합쳐진 지금은 더욱더! 내가 너보다 못한 게 뭔데? 칼질? 나도 잘해. 엄마가 자기처럼 사랑받는 아내가 되려면 강해져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이도록 얘기했으니까.”
“속았네.”
일리나가 너무 진지해서 끼어들기 싫었는데, 무심코 말이 튀어나왔다.
그게 도화선이 된 걸까?
“그렇다! 엄마는 내게 정도(正道)를 가라고 했지만, 정작 본인도 변용술로 만든 가짜 가슴으로 아빠를 속여서 결혼했다!”
“저기, 일리나?”
“내 말은 아직 안 끝났다! 그러니 잠자코 있어라, 몰랑만 찾는 변태 용사.”
“......”
타이밍이 정말 예술이네!
방금 섭리로 ‘완벽한 용사’가 된 참이다.
그런데 이 요정이 말 몇 마디로 몰랑한 가슴만 찾는 변태 용사로 나를 격하시켜버렸다.
이건 정신적인 타격이 좀 컸다.
『어떤 앙신이 키득거립니다』
『어떤 신이 부지런히 팝콘을 나눠줍니다』
『느긋한 어떤 천신이 이 전개를 높이 평가합니다』
『너무 순진한 어떤 여신이 누군가를 가볍게 여깁니다』
『어떤 수신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줍니다』
『너무 순진한 어떤 여신이 훌쩍이며 고마워합니다』
좋다고 날뛰는 어떤 신들의 메시지로 시야가 도배되는 바람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일리나의 불만은 계속됐다.
“그 커다란 가슴 덕분에 용사에게 사랑받은 주제에 틈만 나면 투덜대기나 하고! 하지만 이젠 나도 꿀리지 않는다!”
“...그거 진짜냐?”
“진짜다! 못 믿겠으면 만져보겠는가? 이런 건 싫어하지만, 오늘만 특별히 허락해주마!”
“뽕은?”
“이 가슴으로 변했다.”
내 원대한 계획에 뜻하지 않은 차질이 생기면서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그게 가능한가?
로맨티넘(Romantinum).
소유자의 감정에 따라 그 형질이 바뀌는 환상의 금속.
직접 써본 적은 없지만, 대도시로 유학을 다녀온 비겁한 마누라의 설명에 따르면 그랬다.
용도?
신(神)의 무기.
자신만의 완벽한 철학을 가진 신들에게 로맨티넘은 상성이 매우 좋기 때문이다.
나도 그걸 노리고 로맨티넘을 찾던 거였다.
그랬는데...
“잠깐만 확인할게.”
“헉! 이 변태 용사 녀석! 보통은 상대가 이렇게 자신만만하면 그냥 믿어주는 게 도리... 아읏?! 이, 이건가! 남자에게 가슴이 주물러진다는 감각은...!”
“변태라고 하지 마.”
원초의 계획이 틀어진 나는 굉장히 심각하니까. 흑심은 주먹만큼밖에 없다.
흠. 진짜로 몰랑하군.
이젠 완전평면의 LCD 모니터가 더는 아니었다.
“사, 살살해라! 불쾌하면서도 싫지 않은 이건 뭔가...!”
나는 판타지아 세계의 유일신으로서, 일리나의 가슴 기록을 빠르게 훑어봤다.
그리고 인정했다.
“허! 정말로 가슴이 됐네. 하지만 전부는 아니야.”
이 무지(無知)한 요정이 가슴 따위에 소모해버리고 남은 로맨티넘이 있었다.
희망은 아직 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