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화
[31회차] 개똥철학
파앙-
펑!
기습공격은 실패했다.
나의 정의감을 듬뿍 담은 주먹이었는데, 뜬금없는 시공의 비틀림으로 물러나야 했다.
“뭐냐, 이건.”
이 타이밍과 장소에 시공의 비틀림이라니?
블랙홀도 없이 이런 게 갑자기 발생한 이유를 모르겠다.
기습과 동시에 압도적인 나의 승리를 예상했는데, 예상치 못한 자연재해로 실패했다.
그렇다는 건,
【불패】
【행운】
가출선배가 보유한 신격이 무언가를 한 게 틀림없으리라.
“하핫! 짐작하긴 했지만, 후배는 정말 강하군. 내가 혈통충이 아니었다면 조금 전의 기습으로 졌을 것이다.”
“원리가 뭡니까?”
“보이는 그대로다, 후배여. 할아버지의 힘을 활성화한 나는 절대 패하지 않는다. 그렇게 버티다가 우연히 이기지.”
“뭔...”
삼류악당처럼 알려달라 한다고 순순히 알려주는 가출선배도 기가 막혔지만, 그만큼 승리에 대한 확신이 있다는 건 틀림없었다.
불패.
패하지 않는다.
그 어떤 강한 신격보다도 불합리한 힘이었다.
“그 힘, 한 번 시험해보죠.”
기습에 실패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힘을 쏟아부어 보자!
나의 무기는 몰랑스타.
하지만 현역 MAX급 용사님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돼서 직접 휘두르진 않는다.
영 서툴러서 원...
그 대신, 남아도는 신력으로 성검의 비를 만들었다.
“아아, 그랬지. 가출선배. 사망보험료로 뉴클리온은 잘 받았습니다.”
“가출한 건 틀림없지만, 가출선배라고 하지 마라! 전에 말했던 것으로 아는데!”
“하하! 가출선배, 가출선배! 이건 그 보답입니다.”
가출선배가 마왕 페도나르의 탈출에 대비해서 제작한 성검 뉴클리온.
그 자체만으로도 썩 훌륭하지만, 몰랑스타에는 그것 외에도 무려 8자루의 명검이 섞여 있다.
중앙대륙 성검 오토마니아
동대륙 성검 하이몰랑
서대륙 성검 몰랑피스
남대륙 성검 몰랑코인
북대륙 성검 몰랑로드
성마검(聖魔劒) 소드마스타
천마신검(天魔神劍) 룬
정령검(精靈劍) 엔드미온
판타지아 최고의 무기들.
이렇게 굉장한 것들을 하나로 집대성한 몰랑스타를 막아낸 몰랑로이드의 검술은 논외...
아니, 그 몰랑로이드도 여러 차례 파괴됐었다. 내가 눈치채지 못했을 뿐.
그야말로 신의 힘!
인간은 절대 버틸 수 없다.
슈슈슈-!
내 신격을 한껏 빨아들인 몰랑스타가 하늘에서 소나기처럼 빼곡하게 떨어졌다.
“이건...!”
기세등등하다가 두 눈을 부릅뜬 가출선배의 손이 빨라졌다.
팅팅팅팅-
칼자루보다 여자 가슴과 엉덩이 잡는 시간이 길어지며 무뎌진 가출선배의 한심한 검술 실력.
그래도 제법 버티네?
이유는 간단했다.
▶종족: 카오스 휴먼 레볼루션
▷레벨: 9999+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신성GGG 마기GGG
검술GGG 체력GGG
맷집GGG 방어GGG
저항GGG 회피GGG
내성GGG 정의GGG
사랑GGG 우정GGG
정력GGG 선동GGG
날조GGG 혼돈GGG
파괴GGG 망각GGG
불사GGG 불로GGG···
▷상태: 축복, 가호, 성녀,
성검, 성배, 성물, 창고···
가출선배의 능력치.
마왕 페도나르를 쓰러트려달라고 여신 파르마엘이 부탁하며 준 GGG등급 스킬의 향연이었다.
일단은 저것부터 처리해야겠군.
“선배. 압수합니다.”
“뭐?”
“당신 앞에 있는 후배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종족: 카오스 휴먼 레볼루션
▷레벨: 1
▷직업: 무직(경험치 110%)
▷스킬: 혼돈GGG 정력GGG
▷상태: 성녀, 성검, 성배, 성물,
창고···
종족은 내가 정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도달한 경지이기에 건드릴 수 없었다.
보유한 소유품들 또한 마찬가지. 가호와 축복은 거뒀지만, 성녀 에르단티를 포함한 나머지는 능력과 상관없이 그의 소유물이었다.
하지만 레벨과 스킬은 전부 회수했다.
정력과 혼돈 빼고.
저 둘은 내 통제에서 이탈하여 완벽하게 가출선배와 동화됐다.
그만큼 그가 완벽하게 체득했다는 뜻이리라.
아무튼,
“이, 이건...!? 큭!”
GGG등급 검술과 회피 등의 편리한 스킬들을 잃은 가출선배의 움직임이 다급해졌다.
“하하! 후배가 출세해서 판타지아의 총장이 됐습니다.”
“우려했던 일이 현실이 됐... 대화할 때는 공격하지 마라! 너는 우주의 예의도 모르냐!”
“관에 들어가신 후에 실컷 대화하시면 됩니다.”
내게는 별거 아니었다.
GGG등급으로 도배된 가출선배의 능력치를 회수해도 내 신격의 총량에는 티도 나지 않았다
이미 1000000000000배로 증폭된 상태에서 50000배가 늘어나서 1000000050000배가 된들 의미가 없다.
하지만 선배는?
50000배 증폭이 사라진 가출선배는 그만큼 턱없이 약해졌다.
벌써 그의 몸놀림이 눈에 띄게 굼떠졌다.
나태한 남자의 표본 같은 움직임이로군!
“이렇게까지 해야 했나...!”
가출선배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제 목숨을 노리신 분이 할 말씀은 아닌 것 같네요.”
“......”
입을 꾹 다문 가출선배는 내 예상대로 전부 막아내지 못했다.
잠깐 은퇴한 내가 ‘현역 시절의 나’에게 처맞았던 만큼, 아주 오랫동안 옥좌에 앉아서 정치와 하렘만 추구한 가출선배는 훨씬 도태되어 있었다.
분명히 그럴진대,
“...이상한걸.”
신격을 고려하더라도 능력치를 상실하면서 대략 100배 이상 약해졌을 선배가 여전히 악착같이 버티고 있었다.
원인은 안다.
지직, 직-
아까부터 신격에 잡음이 낀 것처럼 내 의지대로 잘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살짝만 넋 놓고 있으면 폭주할 기세라서, 제어에 살짝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건 대체...?
『너무 순진한 어떤 여신이 비밀이라고 합니다』
『매우 성급한 어떤 마신이 콧방귀를 뀝니다』
『매우 성급한 어떤 마신이 유전자 덕분이라고 합니다』
『너무 순진한 어떤 여신이 뿌듯해합니다』
『매우 성급한 어떤 마신이 휘파람을 불며 두리안을 던집니다』
『너무 순진한 어떤 여신이 베개로 코를 막습니다』
...유전자인가.
가출선배가 말했던 ‘혈통충’이란 이걸 뜻하는 모양이다.
휙, 휙, 휙-
가히, 기적의 기적 같은 우연으로 하늘에서 쏟아지는 모든 몰랑스타를 피해내고 있다.
저게 가능하다고?
“하지만 저런 식으로 영원히 버티진 못하겠지.”
그런데...
몰랑스타 소나기 속에 파묻혀서 모습조차 보이지 않던 가출선배의 움직임이 점점 좋아졌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
저렇게 노골적으로 실력이 향상되면 모를 수가 없다.
“타핫...!”
팅팅팅팅-
예장용처럼 거추장스러운 장식이 잔뜩 달린 성검으로 모든 몰랑스타를 쳐낸 가출선배.
그가 급기야 나를 향해 검기를 쏘는 여유마저 보였다.
“허!”
예전에 내가 난동부렸을 때의 가출선배가 아니었다.
신의 사도.
이 감투를 쓰자마자 완전히 다른 성가신 괴물이 돼버렸다.
아니면 싸움의 귀재인가?
알렉스나 검희처럼 목숨을 건 치열한 전투 속에서 성장하는 부류일지도 모르겠다.
뚝.
나는 공격을 멈췄다.
가출선배의 실력을 키워주는 교관, 교보재가 될 마음은 추호도 없으니까.
확실하게 끝낼 방법.
그걸 찾기 전에는 무의미한 공격은 자제하기로 했다.
“후우... 재차 말하지. 후배여. 너는 절대로 나를 못 이긴다. 봉인해둔 이 힘을 사용한 나를 쓰러트리는 건 불가능하기에. 마왕 페도나르뿐만 아니라, 수많은 어떤 신이 나를 얕잡아보고 도전했다가 참패를 당했다.”
치이이이...
가출선배의 몸에 생긴 자잘한 상처가 급속도로 아물었다.
능력치의 스킬 보조 없이 스스로 그 경지에 오른 것이리라.
나와 싸우면서 성장했다.
“뭔가... 소설 주인공처럼 터무니없는 보정이군요.”
가출선배와 말을 섞을 생각이 없었는데, 지금은 대화를 통해서 실마리나 돌파구를 찾아봐야 할 것 같았다.
물론, 여력이라면 아직 넘친다.
하지만 만약, 정말 만약에 가출선배가 그 맹공마저 버티고 급격히 성장해버린다면?
그때는 대책이 없다.
살충제에 면역력이 생기는 바퀴벌레를 상대하는 기분인걸...
“이게 혈통이다.”
“굉장하네.”
“후배는 내 하렘을 보면서 불쾌감이나 나태함을 느꼈을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자부심이다. 유일하게 노력해서 얻은 것들이니까.”
“노력?”
“그렇다. 남들처럼 수련하는 건 내게 무의미하다. 100번 수련보다 1번 실전이 훨씬 유익하니. 수련할 시간에 다른 일을 하는 편이 낫지. 안 그런가?”
“그건 앞뒤가 바뀌었는데.”
선배의 말처럼 100배는 아니지만, 수련보다 실전이 실력을 급속도로 키워주는 건 맞다.
그러나 실전은 실전.
죽을 수도 있는 전투에 몸을 맡기려면, 수련을 통해 준비해둬야 한다. 안 그러면 개죽음당하기 딱 좋으니까.
“나는 안 죽는다.”
“아...”
정말로 소설 속 주인공이네!
자신은 절대 안 죽는다는 자신감으로 일을 벌린다.
남들에게는 무모한 행동과 도전도, 가출선배에게는 ‘안전’이 보장된 일과에 지나지 않는다.
그 차이는 매우 크다.
가령, 롤플레잉게임에서 용사 캐릭터로 위험한 던전에 막 도전할 수 있는 건, 죽더라도 부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한 번이라도 죽으면 캐릭터가 완전히 삭제된다고 한다면?
철저히 준비되기 전에는 절대 도전하지 않으리라.
“솔직하게 말하마. 내게 모험은 새로운 여자를 찾는 여정이다.”
『매우 성급한 어떤 마신이 엄지를 치켜듭니다』
『너무 순진한 어떤 여신이 굉장히 불편해합니다』
관전하는 두 어떤 신(神)이 상반된 태도를 보이는 가운데, 가출선배가 터무니없는 선언을 했다
“그건 또 뭡니까?”
“불패와 행운. 두 신격은 연애까지 도와주진 않는다.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은 그 밖에도 꽤 되지만, 가장 성취감을 크게 느끼는 게 연애였지.”
“허...”
진짜 개똥 같은 논리인데?
아니면 배가 불렀다고 해야 하나?
“약혼자가 있는 미녀, 남편이 있는 미녀, 다른 사내를 짝사랑 중인 미녀, 연애 중인 미녀. 전부 내 도전 상대였다.”
“그건 그냥 개새끼입니다만?”
『너무 순진한 어떤 여신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합니다』
『매우 성급한 어떤 마신이 비공감을 누릅니다』
...좀 조용히 해보쇼. 안 그래도 가출선배 때문에 머리가 터질 것 같으니까.
엑스트라처럼 쉽게 끝날 줄 알았던 상대가 사실은 주인공 같은 운명이었고, 심지어 그의 개똥철학을 듣고 있어서 굉장히 기분이 언짢다.
“이해를 바라진 않는다.”
“그건 참 용사답네요.”
진정한 용사는 불의(不義)와 타협하지 않는다!
선배는 그 의미를 좀 다르게 활용하지만, 뚝심 하나는 인정해줘도 될 것 같았다.
“후배여. 너는 실수했다.”
“뭘 말입니까?”
“나는 지금까지 힘을 철저하게 숨겨왔다. 내가 판타지아 차원에 납치되기 전까지 검술을 가르쳐줬던 당근 사부님의 ‘9할의 힘을 숨겨라’는 당부를 실천하는 의미이기도 했지만.”
“당근 사부?”
“당근으로 314조 검술을 펼치고 우주를 베는 분이시다.”
“......”
틀림없이 어떤 신이겠지. 검신(劍神)쯤 되려나?
“다시 본론으로 넘어가서, 너는 내 노력의 결정체 중 하나인 능력치를 빼앗았다. 연애 말고 내가 노력해서 얻은 몇 안 되는 것을 백지화로 돌렸다. 너의 목숨을 노렸으니 당연한 처사겠지만, 내가 느낀 공허함의 대가를 이 자리에서 치르도록 해주겠다.”
가출선배가 상처 입은 맹수처럼 으르렁거렸다.
과연...
갑자기 연애 얘기가 나와서 뭔가 했는데, 결론은 노력해서 얻은 능력치를 압수해서 매우 화났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어쩔 겁니까?”
“불패로 만족하지 않는다. 너를 이기고 모든 걸 빼앗아주마. 내가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 정복한 수많은 행성처럼.”
“뭔 수로 이길 건데요?”
진심으로 궁금했다.
가출선배가 보유한 ‘패배하지 않는다.’는 신격이 사기인 건 틀림없지만, 승리는 별개의 문제다.
그는 나를 이길 힘이 없다.
“내 노력의 성과를 보여주마.”
탁!
가출선배가 손가락을 튕겼다.
뿅! 뿅! 뿅! 뿅!
그러자 란제리 같은 헐벗은 차림의 수많은 미녀가 줄줄이 그의 뒤편에 소환됐다.
응원단?
그렇지 않다.
그녀들의 손에는 무기가 확실하게 들려 있었기 때문이다.
“......”
최초의 성녀 에르단티도 그 무리에 섞여 있었다. 한 남자에게 사랑받는 여자가 아닌, 가출선배가 노력이랍시고 수집한 수많은 미녀 중 하나로 대충.
“제가 여자라고 봐줄 인물이라 생각하셨다면 아주 큰 오산입니다만?”
“죽여라. 할 수 있다면. 나는 그동안 놀았지만, 남에게 노력하라고 명령하는 건 쉽지. 그녀들은 그렇게 만든 나의 친위대다.”
진짜 제멋대로네!
하지만 좋다.
이렇게 확실한 ‘악(惡)’의 포지션에 서주면 나로선 편하니까.
가출선배에게 용사로서 확실하게 답해주리라.
“당신에게 제 노력의 성과를 보여드리죠.”
『항상 공정한 어떤 인신이 정의로운 미소를 짓습니다』
『항상 공정한 어떤 인신이 정의로운 날개를 펼칩니다』
번거롭게도 내 섭리는 발동 조건이 있다.
정의로울 것.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추락한 별에 정의가 우뚝 설 때가 됐다.
참회의 피눈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