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6화
[32회차] 당근을 아십니까?
“드디어 찾았군... 아!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나는 지체하지 않았다.
테니스장에서 의심을 사지 않도록 화장실 핑계를 댄 후, 바로 공간을 도약했다.
팟-
그리고 두 멍멍이 앞으로 이동했다.
“Maaang!”
“Gaaang!”
“...그래서 동생은?”
“Maaang?”
“Gaaang?”
“하아...”
지옥의 사냥개란 이름이 아까울 정도로 너무 멍청한 거 아니야?
하지만 완전히 헛걸음한 건 아니었다.
호화로운 저택.
(구)마왕의 성을 떠올리게 하는 촌스러운 디자인이다.
집주인은 안 보였지만, 최근까지 누군가가 여기서 살았음을 알 수 있는 온기가 느껴졌다.
“동생놈. 여기에 숨어있었나.”
두 멍멍이가 동생의 아지트 같은 곳을 발견한 모양이다.
위치는 깊은 숲. 어느 나라의 어느 지방인지는 모르지만, 살던 곳에서 상당히 먼 거리임은 틀림없었다.
뿅!
“남편님. 찾았어?”
한 박자 늦게 쏘시아가 내 뒤를 따라왔다.
“아니. 눈치채고 튄 모양이야.”
“굉장하네. 남편님은 모르지만, 아빠가 키우던 망구와 강구의 추적능력은 알아줘야 하거든.”
“그래?”
그것만으로도 동생놈이 평범한 인간이 아니란 건 확실해졌다.
여기서 다시 방침을 정해야 할 듯했다.
이 주변을 집중적으로 수색하느냐, 지금처럼 광범위하게 찾느냐.
그것도 아니면...
평범하지 않은 동생이 ‘지구에 이미 없다.’라고 판단을 내리고 수색을 멈춰야 하느냐.
이래저래 고민이로군.
“어떻게 할 거야? 도련님을 계속 찾을 거야?”
“...찾아야지. 마기를 일찍 발견해서 잘 해결되긴 했지만, 형으로서 동생 얼굴을 한 번쯤은 봐둬야 하지 않겠어?”
“그건 그렇네.”
게다가 무려 ‘신’이나 되는 내 눈을 피했다.
단순한 인간이었다면 사람을 동원할 것도 없이 내 개인의 탐지능력에 걸렸을 것이다.
가령, 지금도 어머니가 어디서 뭘 하는지 바로 옆에서 지켜보듯 알고 있다.
...내 험담을 하고 계시는군.
애완동물로 선물해드린 슬레이로리가 미소녀 모습으로 내 과거사를 읊은 탓이다.
‘주인님. 제 얘기 좀 들어보세요. 아드님이 예전에 저를 무지막지하게 때렸어요.’
‘어머! 너처럼 귀여운 용을 때렸다고?’
‘네. 가차없이 엉덩이를 걷어차고 목을 졸랐어요. 흑흑.’
‘실망이네, 내 아들. 엄마 앞에선 멀쩡한 척하고 뒤에선 가학적인 취미를...’
‘주인님. 저를 지켜주세요.’
‘그래. 앞으로 아들은 걱정하지 마렴, 슬레이로리. 말만 잘 들으면 해치지 않을게.’
‘네... 네?’
어머니의 자가용 겸 하녀로 선물해드렸는데, 근거 없는 고자질이나 하고 있다니...
저 희멀건 용은 나중에 따로 다듬어줘야겠다.
“헤에~ 이 흔들의자를 보니 옛날 생각 나는걸~”
쏘시아가 장난스럽게 흔들의자를 앞뒤로 흔들며 말했다.
“그거, 언젯적 얘기야?”
내 마왕의 성에는 흔들의자 같은 게 없기 때문이다.
“꽤 옛날. 엄마가 사위를 노리는 나쁜 분인 줄 모르고 잘 따르던 시절. 아빠, 엄마, 나. 이렇게 셋이서 단란하게 살았거든. 당시의 집이 딱 이런 분위기였어.”
“장인이라...”
그러고 보니, 장인어른 페도나르도 실종돼서 보이지 않는다.
사위에게 가업을 물려주고 탈주한 그는 우주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있을 터.
...괜히 기분 나쁘네.
장인어른이 떠넘긴 빚을 드디어 청산한 기분이 든 탓이다.
딩동-!
그때, 누군가 동생의 아지트 초인종을 눌렀다.
당사자는 아닐 테고, 아무것도 모르는 이웃주민A일 게 틀림없다.
하지만 아무도 찾지 않는 이런 깊은 산골에?
일단은 만나보기로 했다.
“마누라.”
“응. 기다려.”
두 멍멍이는 마당으로 내보내고 마누라는 손님 마중을 나가도록 시켰다.
그리고 나는 동생의 아지트 내부를 좀 더 둘러봤다.
끼익끼익-
흔들의자가 자꾸 눈에 띈다.
“...뭔가 중요한 단서를 놓치는 기분인데.”
그게 뭔지를 모르겠다.
“남편님. 인사해. 도련님의 손님이야.”
“동생의 손님?”
쏘시아가 용무만 듣고 돌려보냈을 줄 알았던 손님이 들어왔다.
평범한 농부...
그렇게 말하기에는 새까맣게 탄 얼굴이 무척 비범하게 생겼다.
“한진이의 형님이시라고요? 형제가 전혀 안 닮았네요. 하하! 하여간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이 근처에서 당근을 키우는 평범한 농부입니다.”
소개를 마친 그가 호주머니에서 당근을 꺼내어 내게 내밀었다.
“어... 감사합니다.”
“당근은 비타민A가 많이 들어있어서 눈에 좋습니다. 최정상을 목표로 하는 무인이라면 필히 안목을 키워야 합니다. 그러자면 건강한 눈이 우선이겠지요?”
“......”
당근도 뜬금없지만, 농부가 무인 어쩌고 논해서 더욱 어이가 없었다.
그때, 쏘시아가 옆에서 아는 척하며 거들었다.
“이분은 어머님의 테니스 선배님이셔. 어머님께 테니스를 가르쳐드렸다고 해.”
“이거 참... 가르쳤다고 하기에는 너무 미약하군요. 요령을 조금 알려줬을 뿐입니다.”
어머니의 테니스 선배라고?
조금 특이한 당근 농부 아저씨를 다시 보게 됐다.
“그런데 여기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한진이에게 어제 수확한 당근을 좀 주려고 왔지요. 이 별장은 우리만 아는 비밀의 장소. 경치가 정말 좋지 않습니까? 오염된 지구에서 흔치 않지 않은 장소지요. 녀석의 어미도 모릅니다.”
과연...
말처럼 경치는 정말 좋았다.
푸른 소나무에 새하얀 눈이 덮힌 설경이 무척 아름다웠다.
그런데 이상하군.
“이런 추운 날씨에 당근농사가 가능합니까?”
“정성이 들어가면 뭐든 가능합니다. 날씨보다 무서운 건 키우는 자의 마음이지요.”
“.....”
정성으로 뭐든 가능했다면 계절음식, 열대과일이란 말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흙 묻은 당근을 건네는 농부를 보고 있자니 ‘가능할지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은 현재 실종된 상태입니다. 혹시 어디로 갔는지 짐작가는 바가 있으십니까?”
“음? 어제도 저와 아무렇지 않게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는데 실종이요? 흠. 제 어미에게 말하지 않고 온 모양입니다.”
“어제라...”
태평양 한복판에서 어제 실종됐는데, 어제 여기에 있었다고?
비행기를 탄다면 지구 어디든 하루 안에 갈 수 있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시차가 거의 없는 것 같았다.
실종되자마자 여기에 뚝 나타났다고 해야 할까.
평범한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판타지아 졸업생일 리 없으니 내 동생은 정말로 ‘고위급 악마’인 걸까?
그렇게 고민에 빠졌을 때,
몰랑?
쏘시아의 누추한 가슴골에서 마스터 몰랑이 몰랑거리셨다.
“헛! 그것은...”
당근의 좋은 점을 설명하던 농부가 식겁했다.
나는 서둘러 말했다.
“당황하지 마십시오. 이 무지갯빛 슬라임은 사람을 해치지 않습니다. 해치긴커녕 이로운...”
“몰랑이.”
“어?”
알고 있어?
판타지 야만인들도 몰랐던 마스터 몰랑을 지구의 농사꾼이 안다는 게 충격적이었다.
“그 슬라임은 제가 탐탁지않게 여기는 남자가 키우는 애완동물입니다.”
“어떻게...”
“한진이의 형님분. 겸손한 마음으로 세상을 넓게 보세요. 당신이 하찮게 여겼던 사람이 커서 자신을 포함한 우주 전체를 지배할 수도 있습니다.”
“......”
평범한 농부가 아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렇게 느꼈지만, 마스터 몰랑을 아는 시점에 확 깼다.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그가 말했다.
“저는 한진이에게 세상 사는 법을 가르쳐줬습니다. 제가 고안한 628조3185억3071만9986가지 농사법의 절반도 소화하지 못한 풋내기지만, 오랜만에 거둔 제자라서 나름 애착을 가지고 가르쳤지요. 그런데 뜬금없이 실종이라니... 쩝. 집에 돌아가서 당근이나 키워야겠군요. 제자를 두는 게 아니었어...”
한숨을 푹 내쉰 남자는 당근이 가득 든 상자를 살포시 내려놓고 몸을 돌렸다.
몰랑몰랑?
마스터 몰랑이 의문을 가득 담아서 몰랑거리셨다.
그러자 농부가 여기에 답했다.
“평범한 몰랑이. 너에게 과민반응해서 좀 미안하구나. 네 선조의 주인에게 유감이 좀 있어서 말이다. 그러니 괘념치 말거라.”
몰랑...
농부의 말을 듣는 순간, 벼락을 맞은 기분이 들었다.
마스터 몰랑의 선조.
그렇게 부를 수 있는 위대한 존재는 이 우주에 ‘교황 몰랑이’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교황 몰랑이의 주인이라면 단 한 명밖에 없다.
아주 몰랑한 어떤 군신.
섭리를 온몸에 덕지덕지 달고 있는 반칙적인 괴물이다.
“어떤 군신을 아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스승이었지요.”
“허...?”
예상을 넘어선 신분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귀여운 몰랑이로 봐서는 그와 친분이 있을 터. 하지만 제 얘기는 절대 하지 마십시오. 후배의 아들을 당근으로 후려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스터 몰랑 때문에 발걸음을 멈췄던 농부- 수상한 사내가 정말로 떠나려 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이상한 아저씨’로 보였지만, 뒤돌아선 그의 등과 어깨는 굉장히 넓었다.
허! 자세히 보니 척추도 굉장하잖아?
“잠시만요. 그렇게 수상한 떡밥만 잔뜩 풀어놓고 그냥 떠나실 셈입니까?”
이젠 동생이 문제가 아니다.
눈앞의 수상한 농부.
나는 그에게서 새로운 꿈과 희망을 보았다.
『용사』
섭리를 활성화했다.
어떤 군신에게 유감이 많은 존재가 평범할 리 없다.
내 짐작이 맞다면...
“...한진이가 간혹 툭 던지듯 하던 말이 있었습니다. 자기 형은 완전무결한 용사라고.”
농부는 전혀 놀라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아니, 애초에 ‘어떤 신(神)’이 아니면 섭리를 볼 수조차 없다.
하지만 내게는 그의 진짜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당신은 어떤 신입니까?”
“어떤 신으로 보입니까?”
“......”
질문에 질문인가.
내가 굉장히 싫어하는 화법이다.
그래서 무심코, 농부의 경추(頸椎) 6번과 7번 사이로 오른손을 뻗고 말았다.
단순한 실수라구?
그때, 나는 보았다.
디스코 같은 하급 신은 반응조차 못할 내 움직임에 그가 입꼬리를 올리며 어이없다는 시선을 보내는 것을.
“거참.”
톡.
농부의 손에 자연스럽게 쥐어진 당근이 내 손등을 치면서 헛손질로 끝나버렸다.
“......”
나는 무산된 오른손을 힐끔 내려다보았다.
덜덜 떨리고 있잖아?
근육을 놀라게 해서 행동에 제약을 건 것 같았다.
“손을 못 쓰게 해놨는데, 살짝 떨리는 정도로 끝이라니. 평범한 신체가 아닌 모양입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는 재차 질문했다.
이대로 조용히 보내주지 않으리란 걸 눈치챈 걸까.
어떤 군신을 피해 은둔 중인 그는 일이 커지길 원치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 질문에 순순히 답해줬다.
“아주 몰랑한 어떤 군신에게 314조1592억6535만8993가지 검식(劍式)을 빼앗긴 신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떠오르는 단어가 있었다.
“몰랑로이드?”
무지막지한 검술을 다수 보유한 안드로이드가 대량생산되어 덤벼드니 답이 없었다.
“그것과 이미 싸워봤다는 얼굴. 좋아요. 합격입니다.”
『계속 완벽한 어떤 검신이 당근을 건넵니다』
“검신...”
어떤 검신이 당근을 내게 건네며 질문했다.
“당신은 활검(活劍)을 뭐라고 생각합니까?”
“......”
판타지 다음은 무협(武俠)?
좀 봐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