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8화
[32회차] 8학년
동생놈의 현재 위치는 내가 판타지아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런데 하는 일들이 흥미로워서 당분간은 지켜보기로 했다.
내가 바쁘기도 했고.
“판타지 세계에 카페라...”
거친 용병들이 주로 드나드는 선술집밖에 없는 이 야만적인 세계에 카페라는 개념이 통할까?
하지만 어머니의 고집은 꺾을 수 없었다.
“남편이 타주는 커피를 마시면서 동네 아주마들이랑 수다 떠는 게 꿈이었어.”
“아, 네.”
원하시는 주문대로 해드리겠습니다.
마왕의 탑 근처 조용한 숲에 단독주택을 꾸미고 있던 쏘시아만 날벼락을 맞은 셈.
새로 꾸며야 했다.
“잘생긴 남편님의 그 유감스러운 꿈이 누구의 영향인지 알 것 같아.”
“잔말 말고 장소나 물색해봐.”
“내가 카페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사람의 유동이 많은 번화가 한복판이 좋지 않아?”
“잘 아는군. 너에게 이 일을 위임하마.”
“남편님은?”
“지금은 거의 휴학이잖아. 슬슬 학생들을 다시 판타지아로 불러들여서 개학해야지.”
“아! 드디어...”
방금까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불만을 표시하던 쏘시아의 입술이 쏙 들어갔다.
기대에 찬 눈빛.
내게 마누라가 운영하는 카페 매니저란 꿈이 있듯이, 쏘시아에게도 꿈이 있었다.
학교 건설.
제대로 다시 시작한다는 내 말에 그녀는 한껏 흥분했다.
“그러니 부모님의 집을 부탁하마. 1층은 카페, 2층은 주거. 이해했지?”
“응응!”
그렇게 쏘시아에게 일을 맡긴 후, 나는 본격적으로 학교운영에 관한 회의를 시작했다.
참가자는 딱 둘.
교장 베이커리.
교감 히프리아.
판타지아 행성과 교육장의 미래가 이 자리에서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차원에 전부 몰아넣는 건 현실적으로 무리입니다. 페스티벌 행성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문제들이 그걸 증명합니다.”
그러면서 내게 보고서를 내미는 베이커리.
“흠. 사고가 많았네.”
보고서 내용을 쓱 훑어본 나는 신음을 삼켰다.
사회부적응자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으면 이렇게 되는구나...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습니다. 과거의 중등교육과정도 10명의 용사를 묶는 방식을 선택했지만, 이번처럼 절대다수가 함께하며 얻는 이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단점이 더 많다는 게 문제란 건가?”
“조금 다릅니다. 이건 인원수의 문제라고 봅니다.”
베이커리의 설명을 히프리아가 조용히 받았다.
“용사의 수준에 맞춰서 차원을 나눠야 한다고 생각해요.”
“기각.”
나는 그녀의 의견을 별 고민 없이 단칼에 잘랐다.
기껏 판타지아 원주민들의 기억과 정신을 하나로 합쳤다.
그런데 다시 나누자고?
못할 짓이다.
“주인님. 제 설명을 좀 더 듣고 재고해주세요. 차원만 나누고 원주민들은 이주시키는 거예요.”
“호오...”
그거라면 나도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남은 문제는, 몇 개의 차원으로 나누어야 적당하냐는 것이다.
차원의 숫자가 많아지면 내 부담도 덩달아 커지니까.
“8단계. 학생의 수준별로 1학년부터 8학년까지. 현재 학생수와 교직원 인력으로 보았을 때, 8개 차원이 가장 적당하다고 저희는 판단했습니다.”
“그렇군.”
무심코 실소가 나왔다.
내게는 정말 별거 아닌 숫자였으니까.
8만 개도, 8천 개도 아닌 꼴랑 8개?
하물며 판타지 원주민들을 복사하지도 않으니 부담은 훨씬 적을 터.
차원을 유지하는 내 섭리의 총량에 티도 나지 않으리라.
“총장님. 8개라고 쉽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왜?”
“기존의 상급교육과정이 3학년 수준밖에 안 됩니다.”
“잠깐! 그 얘기는...”
베이커리 교장이 확고한 어조로 답했다.
“저희는 총장님의 지난 성장과정을 토대로 새로운 교육시스템을 고안해냈습니다. 하지만 그 교육환경을 구현하려면, 상대가 전 교장 파르마엘 수준으로 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신력이 많이 들어가겠군.”
“그렇습니다.”
양보다는 질이란 소리.
예전에도 하급교육장보다 상급교육장이 훨씬 많은 신력을 소모했었다.
그런데 그게 고작 3학년?
베이커리와 히프리아의 말대로 8학년을 정말 구현한다면, 들어가는 신력이 만만치 않으리라.
하지만 문제가 있다.
“교사들이 8학년까지 가르칠 수준이 되나?”
베이커리와 히프리아가 서로를 돌아본 후에 입을 맞춘 것처럼 답했다.
“다시 배워야지요.”
“그렇습니다.”
아주 단단히 준비했군...
처음부터 나의 이 질문도 예상했다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참 쉽게 말하네.”
교사들이 전부 복학하면 학교가 마비될 텐데?
“괜찮습니다. 대다수 학생은 1학년, 2학년 수준이고 고학년은 아예 없습니다. 그나마 4학년이 최대인데 그것도 극소수고, 그 정도는 현재 교사들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 학교에서 오랫동안 종사한 둘이서 이미 다 짜둔 모양이네. 그렇다면 내가 실질적으로 도와줘야 할 부분은?”
“시간입니다.”
“과연...”
차원을 나누고 끝이 아니다.
원주민들이 이주해서 정착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어디 그뿐이랴?
교사들이 8학년까지 졸업하려면 까마득한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8학년은 아닙니다.”
베이커리가 쓴웃음을 지었다.
“네 수준이 몇 학년인데?”
“8학년입니다. 하지만 신의 사도가 아닌 저는 6학년 수준밖에 되지 않습니다.”
“어이. 교장 선생. 교육수준을 너무 높게 잡은 거 아니야?”
“아니요. 총장님은 고작 200년 만에 학년으로 나눌 수 없는 까마득한 경지에 도달하지 않으셨습니까? 거기에 비교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흠...”
현역 시절에 뛰어난 운동선수라고 해서, 뛰어난 감독이나 코치가 되는 건 아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
오랫동안 이 일에 종사한 둘에게 이러쿵저러쿵 따질 생각은 없었다.
나는 최종결정자로서 의문점을 묻고 확인할 뿐.
물론, 아무것도 안 하고 ‘예스맨’이 될 생각은 없다.
“전학년이 소통하는 몰랑폰 보급. 그리고 가족들과 대화할 수 있는 창구개설. 반론은 받지 않아. 할 수 있겠지?”
“네.”
“좋아. 세세한 사항들은 믿고 위임하지. 나중에 간략한 보고만 히프리아가 따로 해줘. 밤에.”
“네. 주인님.”
그것으로 회의는 종료...
아니지.
“내 동생놈이 멋대로 판타지아에 들어왔어.”
“예?”
“도련님이?!”
뜻밖의 사태에 베이커리와 히프리아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나는 씩 웃으며 지시했다.
“녀석을 8학년에 넣고 좀 굴려줘.”
“그러다가 죽으면...”
“괜찮아.”
이 정의로운 형님이 몇 번이고 부활시켜줄 테니까!
*
시간 가속.
전자레인지 3분 요리처럼 굉장히 편리할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학생의 시간을 3600배 가속한다고 가정해보자.
1초가 1시간. 24초면 하루. 약 2시간이면 1년이 지나버린다.
선생의 관점에서 보면, 하루면 12년 동안 공부한 학생이 뚝딱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학생 관점에서는?
교사에게 아무런 개인교습도 받지 못한 채 12년 동안 교과서만 읽으며 독학한 셈!
학생은 가축이 아니다.
교과서가 개인교습보다 월등히 뛰어나지 않은 한, 시간만 잔뜩 들여서는 훌륭한 졸업생이 배출되지 않는다.
“당장은 어쩔 수 없지.”
판타지아 교직원들은 당장 일선에 투입되어야 하니까.
학생들처럼 한가하게 말랑거리며 배우고 있을 시간이 없다.
그래서 가속했다.
100배? 500배? 1000배?
최근에 다양한 경험으로 성장한 GGG급 용사님의 스케일도 제법 우주급으로 커졌다.
“50만 배.”
1분이면 약 1년이 지나는 속도.
내 능력이면 좀 더 빠르게 할 수도 있지만, 혹시 모를 변수나 불상사에 대비해서 이 정도로 타협했다.
“들어가기 무섭네요...”
“50만 배라니... 엄마.”
“하, 하하. 벌써 후회가...”
“이거 괜찮겠지요?
교사들은 50만 배 가속이란 말에 식겁했다.
1시간이면 약 60년.
사람의 인생관이 수십 번 바뀌고도 남을 긴 시간이다.
1시간 전까지만 해도 아주 친한 동료고 연인이었는데, 갑자기 낯설어지는 상황!
살아가는 시간축이 다르다는 건 그런 의미다.
“학생들에게 밀리기 싫으면 얼른 들어가. 아니면 지금이라도 사직서 내도 돼.”
게다가 교사들에게 아무런 지원이 없는 건 아니다.
나 나름대로 생각이 있다구?
“이쪽은 당근 선생이야. 다른 이름은 어떤 검신. 다들 한 번쯤은 들어봤지?”
“......”
“...검신?”
“누구?”
교직원 대다수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판타지아에서 평생을 보낸 자들이 많아서, 몰랑소프트가 간섭해오기 전까지는 어떤 신의 존재조차 모르던 자가 대부분인 건 어쩔 수 없으리라.
“하아...”
『계속 완벽한 어떤 검신이 시무룩해합니다』
나는 무명(無名) 취급당해서 시무룩해하는 당근 선생의 어깨를 두드리며 북돋아줬다.
“하하! 당근 선생님.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판타지 촌놈, 촌년들이라 모르는 것뿐이예요.”
“하아...”
“...눈치 없는 교직원 제군들. 이분이 각 차원을 돌아다니면서 여러분들을 지도해줄 거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어? 밉보이면 주옥 되는 거야.”
반응은 바로 나왔다.
“어머! 그 유명한 검성이...!”
“음악 선생님. 검성이 아니라 검신이에요.”
“와!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검신님!”
“우수한 어떤 검신님! 예전부터 흠모해왔어요!”
“우수가 아니라 완벽...”
너무 어설퍼서 이미 틀린 것처럼 보였는데, 시무룩해하던 어떤 검신의 표정이 어린아이처럼 해맑아졌다.
...이런 호구를 보았나.
성급한 어떤 마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 열심히 하도록.”
총 8개로 복사된 판타지아 차원은 원주민들의 이주가 완벽히 끝난 상태.
그리고 단 몇 시간만에 수천 년이란 시간이 훌쩍 흘렀다.
정치, 문화, 사회, 국가, 종족...
똑같이 ‘판타지아’로 시작했던 8개 행성은 전혀 다른 형태로 변모했다.
똑같았던 지형마저도.
딱히 놀라운 일은 아니다.
예전부터 천재지변급의 몬스터들이 영역다툼을 벌이면 지형이 크게 바뀌었으니까.
1학년: 인간/몰랑교/알렉스
2학년: 인어/몰랑교/쑥떡
3학년: 요정/응애교/엘브하슈
4학년: 난쟁이/여신교/보리스
5학년: 천사/응애교/우유엘
6학년: 거인/응애교/페닉스
7학년: 흡혈귀/몰랑교/섹스피어
8학년: 용/응애교/뇌비우스
각 학년별 주종족과 주종교 그리고 절대자의 이름이다.
지나친 경쟁을 원치 않아서 일정 경지를 넘어선 강자들에게는 차원을 자유롭게 옮길 수 있는 권리를 줬다.
그리고 이 상태로 세월이 흐르며 자연스럽게 정착한 모습이 현재의 세력구도.
각 학년의 주종족과 주종교는 절대자의 종족과 종교를 따라가는 경향이 강했지만, 반드시 그런 건 아니었다.
또한, 학년이 꼭 절대자들의 실력순인 건 아니다.
안 그렇다면 쑥떡이 고작 2학년일 리 없잖아?
아무튼, 나도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구경만 할 순 없었다.
“도덕 아가씨! 도덕 아가씨! 어디에 있어?”
판타지아 교육장의 총장이 됐는데, 아직도 도덕 아가씨를 만나지 못하다니!
상당히 충격적이다.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만나서 못다한 우리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눌 계획.
상상만으로도 두근두근!
▷난감: 강한수 총장님. 제가 어디에 있는지 이미 아시면서 질문하다니, 너무 짓궂으세요. 신이란 게 들통나면서 훌륭한 선배님들을 제치고 8학년으로 조기입학했어요. 고작 신이란 이유로 이런 특혜를 누려도 괜찮은지 걱정과 부담이 태산이에요...
괜찮아, 도덕 아가씨!
이 정의로운 GGG급 총장님이 직접 가서 몰랑한 지도편달을 해줄 테니까!
▷당혹: 그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돼요. 페이커-리 교장님도 6학년인데, 저만 특별취급을 받는 건 좋지 않다고...
“몸도 마음도 예쁜 도덕 아가씨가 있는 8학년으로 출발~!”
특별취급이라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걸~
나는 어디까지나 총장으로서 학생들의 교육터전을 시찰하는 것뿐이다. 몰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