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0화
[32회차] 도덕 용사님
“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는데...”
“시치미 떼도 소용없습니다, 장인어른. 저의 척추 보는 눈은 틀린 적이 없으니까요.”
“......”
“......”
“척추로 사람을 구분하다니. 사위는 정말 볼 때마다 놀랍- 켁켁?!”
“야! 이 장인새끼야! 갈 곳이 없어서 사돈에게 빌붙냐!”
“나도 처음에는 그럴 의도가 아니었- 꾸엑!”
“이 개족보, 어떻게 책임질 거야?”
“일단은 진정하고...”
“이게 진정할 수 있는 문제냐!”
진짜 환장하겠네!
장인어른이 동생이면, 양녀도 아닌 친딸에게 도련님 소리를 듣고 있었다는 소리잖아?
그리고 아기였을 때는 어머니의 젖을 마구 빨고...
“장인어른? 나쁜 말로 할 때 그냥 죽으시죠?”
“후, 훌륭한 사위! 살아서 속죄하게 해주게! 그러려고 판타지아로 돌아온 거니까! 아가씨! 옆에서 보고만 있지 말고 도와주게!”
“그게...”
외면도 내면도 아름다운 도덕 아가씨가 난색을 표했다.
내가 실수한 게 있다면, 그녀를 보자마자 분노게이지가 사르르 녹아내렸다는 것이다.
툭.
붙잡고 있던 장인어른 겸 동생놈의 경추(頸椎) 6번과 7번 사이를 손아귀에서 풀어줬다.
“콜록콜록! 흠. 이해해줘서 고맙네. 사위.”
“아직 안 끝났습니다만?”
“......”
“장인어른이 우주로 안 튀고 돌아온 점을 높이 평가할 뿐입니다. 그래서, 무슨 속죄를 하려고 돌아오셨는지 이야기해보세요.”
이 자리에서 장인어른을 묻어버리는 건 간단하다.
최초의 악마?
그런 불멸의 규칙을 제거하는데 특화된 게 섭리니까. 나에게는 아무런 장애가 안 된다.
장인어른이 답했다.
“내가 죽인 자들에게 용서를 구하려고 돌아왔네.”
“아, 네. 그러시겠죠.”
먼 과거에 사모님을 잃은 장인어른이 폭주해서 수많은 모험가들을 살해했다.
그들 모두가 공범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역으로 대다수는 연관이 없는 무고한 자들.
(구)마왕 페도나르는 그들을 찾아가서 싹싹 빌겠다고 한다.
“내게 말해줬으면 싹 모아줬을 텐데 말이죠.”
“그래선 의미가 없지. 찾아가서 무릎 꿇고 용서를 빌어야 그나마 성의가 있어 보이지 않는가?”
“제게는요?”
“사위는 왜?”
“비겁한 따님을 저에게 떠넘기지 않았습니까?”
“어허! 사위. 그 문제는 내가 소유한 마기를 전부 넘긴 거로 계산이 끝났다고 보는데.”
“계산은 똑바로 하셔야죠. 마기를 떠넘기고 제 자유를 가로챈 게 장인어른이잖습니까? 따님 문제는 별개로 봐야죠.”
“씨드엘이 정말 귀엽더군.”
“말 돌리지 마세요.”
“사위. 세상에서 두 번째로 아름다운 딸을 아내로 줬으면 감사하다고 내게 절해야지.”
내 머리 위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마약정령도 거들었다.
“동생아! 너무너무 추하다!”
“...누님. 제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잖습니까? 당신의 조카가 예쁜 건 사실...”
“추하다!”
“......”
“히히히! 그래도 잘 돌아왔다. 영영 다시 못 볼 줄 알았는데, 이렇게 돌아와서 기쁘다.”
“누님...”
“하지만 추하다!”
“아, 좀...!”
부녀(父女)가 추한 건 똑같군!
나는 고개를 돌려서 도덕 아가씨를 빤히 쳐다봤다.
비겁한 마누라가 두 번째라고?
그렇다면 눈앞의 아름다운 아가씨는 첫 번째가 틀림없다.
“도덕 아가씨!”
“정말로 찾아오실 줄은 몰랐는데요... 안녕하세요, 강한수 총장님.”
도덕 아가씨가 꾸벅 인사했다.
어깨에 살짝 닿는 연보라색 단발머리와 부드럽게 휜 눈매.
직업을 잘못 고른 것처럼 어딘가 어색한 가죽옷마저도 ‘그녀답다.’고 느꼈다.
와아아아! 여전하네!
처음 실습 나온 교생처럼 풋풋한 도덕 아가씨의 청순함이 내 골수를 짜르르 울렸다.
이게 사랑인가...!
“도덕 아가씨. 옛날처럼 함께 모험을 떠나자!”
“저기, 사위? 장인 앞에서 딸이 아닌 딴 여자와 바람피우는 건 너무 뻔뻔하다고 보네만...”
“이 장인이 오해할 소리를! 우리는 어디까지나 아름다운 우정을 이어가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장인어른은 제게 감사해야 해요. 작업 거시던 이 아가씨가 더 강하거든요~”
“하아?”
“장인어른은 삼류 마왕이고, 이쪽은 일류 여신입니다. 건드렸으면 세상에서 삭제됐을 겁니다.”
“...정말인가?”
“그럼요.”
『항상 공정한 어떤 인신이 동행을 원합니다』
『친절한 어떤 여신이 무척 난감해합니다』
여기서는 (구)마왕 페도나르라고 불리지만, 우주로 나가면 악당P로 불렸을 엑스트라 장인어른하고는 비교가 안 되는 진짜 여신님이다.
장인어른이 자기 목을 문지르며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보는 눈이 있는 모양이군.”
“굉장히 긍정적이시네요.”
“사위가 이해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주 어릴 적에 굉장한 신들을 많이 보았네. 그중에는 베개를 한 번 휘둘러서 은하계를 지우는 얼토당토않은 여신님도 있었지.”
『너무 순진한 어떤 여신이 누군지 궁금해합니다』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촌구석 (구)마왕인 줄로만 알았는데, 내 장인어른은 소싯적에 도시맛을 좀 봤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도덕 아가씨! 도덕 아가씨는 어디로 가는 중이야?”
“남서쪽 거인왕국의 응애교 총본산으로 이동 중이었어요. 우유엘 교주님에게 중요한 서찰을 전달해달라는 의뢰를 받았거든요.”
“잔심부름?”
공간이동으로 단번에 이동해서 전달해주면 되지 않나?
아니, 애초에 이건 용사가 아닌 우체부가 할 일이다.
“아! 강한수 총장님은 제약을 안 받으셔서 모르시는 모양인데요. 여기서는 공간이동, 순간이동 같은 이동계열 능력을 전혀 쓸 수 없어요.”
“왜?”
진짜 궁금해서 묻는 거다.
나는 그 편리한 기능을 막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과거의 판타지아가 시끌시끌한 책방이었다면, 현재의 판타지아는 정숙을 요구하는 국립도서관이에요.”
“의미를 모르겠는걸.”
“숫자의 차이에요. 수십만 개의 차원으로 찢겼을 때는 각각의 차원 비중이 낮았지만, 현재는 딸랑 여덟 개뿐. 그래서 시간과 공간을 지배하는 강한수 총장님의 직접적인 영향을 크게 받고 있어요. 즉, 총장님의 허락 없이는 판타지아에서 시간과 공간을 조작할 수 없어요. 격이 더 높은 어떤 신(神)이 아닌 한.”
“오오...”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추억이 셈솟아서.”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도덕 아가씨를 보고 있자니, 아직 교생 아가씨였던 시절에 함께 신나는 모험을 다니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가 참 좋진 않았어도 그럭저럭 괜찮은 나날이었지...
“하여간 사위.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건 쏘시아에게 비밀로 해주게.”
“히히히!”
“...무리겠군.”
진지한 얼굴로 내게 부탁하던 장인어른은, 내 머리 위에서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 마약정령을 보자마자 깔끔히 포기했다.
“장인어른.”
“못 본 걸로 해주게. 저 여신님이 말했듯이, 여기서는 공간이동계열의 힘을 전혀 쓸 수 없으니. 들어오는 건 쉬웠지만, 나갈 순 없어서 나도 난감하던 참이었지.”
“아뇨. 탈주하지 못하는 건 당연하고요. 장인어른이 과거를 속죄한다고 해서 막 떠오른 겁니다. 순서를 잘못 고른 것 같아요.”
“순서? 아! 검희가 사위의 또 다른 아내였지. 하지만 그녀에게는 사과할 마음이 없네. 정당방위였...”
“장모님.”
“......”
“순서로 따지면, 모험가들에게 살해된 장모님께 사과하는 게 최우선입니다만? 장모님이 대신 복수해줘서 고맙다며 자꾸 제 몸을 노리셔서 난감합니다.”
“그, 그건...”
(구)마왕 페도나르가 말을 잇지 못하고 식은땀을 주르륵 흘렸다.
“판타지아 남대륙에 사는 모험가Q의 집에 찾아가서 사죄를 구하는 건 그 뒤에 하세요.”
낌새가 이상하다고 느낀 장인어른이 뒷걸음치며 외쳤다.
“잠깐! 아직 마음의 준비가...!”
팟-
【마계】
장인어른은 바람과 함께 마계로 사라졌다.
지금부터 진행될 도덕스러운 모험을 방해하게 놔둘 순 없지!
이제, 둘만 남았다.
“도덕 아가씨! 아니, 도덕 용사님! 그러면 함께 모험을 떠나볼까! 그 번거로운 의뢰. 이 GGG급 동료가 도와줄게!”
“그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사양하지 않아도 돼!”
도덕 용사님과 정의로운 동료는 함께 모험을 떠났다!
*
신격을 봉인한 도덕 용사님의 전투력은 그리 높지 않았다.
무기력한 건 아니었지만, G급 스킬이 붙은 악룡 3마리를 상대로 쩔쩔매고 있었다.
“Chaooo!”
“Daaaaaaar!”
“Blaaaaaa!”
신을 목표로 하는 8학년 학생들이 시시하다고 느끼지 않도록, 이에 걸맞는 전투력을 보유한 몬스터들.
능력치가 제법 화려하다.
▷종족: 카오스 드래곤
▷레벨: 15324
▷직업: 산적(산악→색적↑)
▷스킬: 혼돈G 은신ZZZ 협박ZZZ 도주ZZ 탐지ZZ…
▷상태: 위협, 강화, 주물
최종보스도 울고 갈 레벨과 스킬인데 직업이 산적.
이런 G급 산적들이 판타지아8에는 조약돌처럼 널리고 널렸다.
그러면 판타지아8 원주민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렇게 강하냐?
그건 아니다.
대신에 성장이 매우 빠르다.
용족은 나이를 먹으면 덩치가 커지면서 저절로 강해지는데, 그 성장폭이 판타지아8은 매우 큰 편.
그래서 용족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주류가 된 것이다.
선(善)이든 악(惡)이든.
이에 맞서는 도덕 용사님의 예쁜 능력치도 한 번 보자!
▶종족: 퍼스트 에로프
▷레벨: 11573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교육GG 검술GG 민첩G 조교G 설교G…
▶상태: 양호, 도덕, 친절
무려 첫 번째.
종족은 요정의 상위호환 에로프.
하지만 판타지아8을 기준으로 레벨은 낮은 편이고, 스킬구성도 전투특화가 아니었다.
그래도 밀리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건, 순전히 오랫동안 쌓아온 전투경험 덕분.
그리고 하나 더.
“친절이라...?”
신격을 봉인했지만, 그래도 타고난 성향이 능력치로 표출된 듯하다.
도덕 용사님을 상대하는 산적들은 결정적인 타격을 못 하고 움찔거리며 기회를 놓쳤다.
계속, 패배할 때까지.
“Chaoo~?!”
“Daaaaar~?!”
“Blaaaa~?!”
가출선배가 쓰던 무패(無敗)와 묘하게 비슷한 반칙이었다.
“겨울이 되어야 소나무와 전나무가 푸르다는 걸 깨닫게 된다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늘 남의 것을 빼앗아온 산적 여러분이 역으로 모든 걸 빼앗길 수도 있답니다! 다음에 태어날 때는 명심하시길.”
서걱-
그렇게 덕담 한마디를 남겨주고 산적들을 베어버리는 도덕 용사님.
뒤편에서 구경하는 내내 너무 멋져서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굉장해! 도덕 용사님!”
“뭘요... 예전에는 웬만하면 살려줬었는데, 강한수 총장님의 모험을 본 이후부터 마음을 좀 독하게 먹게 됐어요. 악(惡)을 용서한다면, 저들에게 이미 빼앗긴 자들이 억울하고 불쌍하니까요.”
오오...
이 도덕 용사님은 철학까지 너무 훌륭해서 내가 지적할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의문.
나는 GGG급 동료로서, 그녀 대신 산적들의 주검을 정리하며 툭 던지듯 질문했다.
“그런데 도덕 용사님.”
“으으. 부끄러우니 평소처럼 불러주세요. 진정한 용사님께 용사라고 불리니 낯간지러워요.”
그럴 순 없지.
나는 외면도 내면도 아름다운 도덕 용사님이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감상하며, 질문했다.
“예전에도 했던 질문인데, 어째서 판타지아 교육장의 교사가 되려고 애쓰는 거야?”
여긴 촌구석 학원이니까.
도덕 용사님 같은 세련된 도시미인이 일하기에는 너무 누추하다.
그녀가 답했다.
“교사는 수단에 지나지 않아요. 저는 도움이 필요한 많은 학생을 가르치고 싶었어요. 그런데 엘몰랑도 같은 행성과 차원에는 이미 뛰어난 교사가 많답니다. 반면에 여기 같은 시골은 소외되어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말랑이가 많아요.”
“그야 그렇지.”
중고등학생을 둔 학부모들이 괜히 수도로 이사 가려는 게 아니다.
학군을 위해.
교육환경이 번화가로 편향되는 건 스케일이 크든 작든 똑같다.
“그래서 저 하나라도 도움이 되려고 판타지아로 왔어요.”
“아...”
이 도덕 용사님. 너무 친절한 거 아니야?
『매우 성급한 어떤 마신이 호구라고 합니다』
당신은 좀 빠져!
나, 아무래도 진정한 사랑에 빠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