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2화
[32회차] 개편
“하아...”
“당근 선생님. 아직까지도 한숨 쉽니까?”
“하아!”
나의 로맨티넘 통뼈에 좌절한 당근 선생은 아까부터 당근을 만지작거리며 우울해하고 있다.
하지만 당연하잖아?
평범한 당근으로 전설의 금속 로맨티넘을 상대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 얘기인가!
그런데도 저러고 있다.
이걸 어쩌면...
“와아! 정말 멋진 당근이었어요, 당근 선생님!”
움찔.
도덕 용사님의 친절한 한마디에 당근 선생의 표정이 급변했다.
하지만 애써 고개를 돌리며 툴툴거렸다.
“저를 위한 입에 발린 소리는 됐습니다. 제가 애지중지 키운 당근은 패배했습니다.”
이보세요. 밭에서 키운 평범한 당근으로, 수십만 평행세계에서 채굴한 전설의 금속을 이기려는 건 도둑놈 심보입니다만?
딴죽을 걸고 싶지만, 이 상태로는 대화가 진전이 안 되기에 잠자코 도덕 용사님에게 맡겼다.
“에이~ 그렇지 않아요. 당근 선생님은 갑자기 호출되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싸우신 거잖아요. 로맨티넘 통뼈란 사실을 모르셨고요. 아닌가요?”
“흠. 맞습니다.”
“그리고 로맨티넘 통뼈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저처럼 가난한 선생에게는 당근 선생님의 저렴한 힘이 필요해요.”
“저렴한...”
“아앗! 사소한 형용사는 무시해주세요!”
...몸도 마음도 예쁜 도덕 용사님의 스킬 ‘친절’이 어째서 D등급밖에 안 되는지 알겠다.
친절을 베풀어서 쌓은 호감을 바로 깎아먹네?
약 주고 병 주기!
그래서 판타지아 시스템은 그녀의 친절 등급을 올려주지 않았지만, 우주 회장님은 마음에 드셨나보다.
그리고 당근 선생도 다시 기운을 차린 듯했다.
“저의 저렴한 검술이라도 필요하시다면 가르쳐드리겠습니다!”
“열심히 배울게요!”
“재능이 없어도 노력만으로 신화경(神化境)에 도달할 수 있는 저렴함이 이 검술이 장점이지요. 부르주아의 상징인 로맨티넘 베개와 통뼈를 제외한 모든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총 628조3185억3071만9986가지 검술을 다 익힐 수 있다면 좋지만, 그 심화과정까지 소화하려면 시간이 너무 걸리기 때문에 중급과정인 314조1592억6535만8993가지 검식만 있어도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진 않을 겁니다.”
“저...”
“질문이 있으시면 언제라도 제 말을 자르고 해주십시오. 자주 여기저기서 까아다보니 이젠 말 자르는 정도는 아무렇지 않습니다, 하하!”
“죄, 죄송해요...”
“정말로 괸찮습니다. 제 얼굴을 한 번 보세요. 말 잘렸다고 기분 나빠하는 얼굴입니까?”
아뇨. 울기 직전 같은데요?
벽이랑 대화하지 않아서 정말 감격했다는 얼굴이다.
지구의 학창시절 때, 가끔 보았다.
열성적인 젊은 선생이 ‘질문 있는 사람?’이라고 물어도 반응이 없는 수면 분위기의 교실.
거기서 한 학생이 ‘질문이요!’라고 오늘 수업 내용을 물어봐서 젊은 선생을 무안하지 않게, 기쁘게 해줬을 때와 비슷했다.
도덕 용사님은 분위기 환기를 위해 잽싸게 말했다.
“저도 선생이다보니 314조 검술을 전부 익힐 때까지 수업을 미룰 수가 없답니다! 좀 더 빠른 초급강좌로 부탁드려요.”
“아차!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선배님의 처지를 전혀 배려하지 못했군요. 그러면 딱 1%만, 맛보기로 가볍게 3조1415억9265만3589가지 기초검식만 배우도록 하지요. 저는 이것을 3.14 검술이라고 부릅니다.”
“아앗...”
도덕 용사님이 차마 말은 못 하고 내게 눈빛으로 SOS를 요청했다.
공명정대한 GGG급 상식인의 눈으로 봤을 때, 314조나 3조나 터무니없이 많은 건 똑같다.
알겠어, 도덕 용사님! 이 정의로운 동료만 믿어달라구!
“어흠. 당근 선생님.”
“로맨티넘 통뼈이신 강한수 총장님은 이런 저렴한 검술을 안 배우셔도 됩니다.”
“제가 배우겠다는 건 아니고요. 단순한 질문입니다. 뛰어난 검술 하나를 제대로 익혀서 상황에 따라 응용하는 게 상식 아닙니까?”
“누가 그걸 상식이라고 정했는지요?”
“...음?”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는 화법을 나는 굉장히 싫어하지만, 이번만큼은 척추를 잡지 않았다.
이게 상식이냐고?
상식이라고 딱딱하게 정의내리는 게 바보 같을 만큼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총장님, 잘 들으십시오. 검술 하나만 파서 응용한다는 녀석들은 태양계 밖으로 못 나오는 하수입니다. 응용. 말은 좋지요. 하지만 신들의 싸움은 느리지 않습니다. 찰나에 모든 게 결정되지요. 다음은 어떻게 응용할지 고민할 시간이 없습니다.”
“과연...”
당근 선생의 설명이 어떤 논리인지 대충 알겠다.
일반:
검술A→상황→고민→검술A+
당근:
검술A→상황→검술B
일반적인 검술은 응용하기 위해 생각하는 시간이 있다.
아예 없을 순 없다.
이 시간을 얼마나 단축하느냐에 따라 생(生)과 사(死), 재능과 숙련도가 결정될 뿐.
하지만 당근 선생의 628조 검술은 고민하는 단계가 깔끔히 생략됐다.
상황에 대응할 검술을 이미 알고 있기에 고민할 필요가 없다!
...논리는 그럴싸하군.
“하지만 당근 선생님. 상황에 알맞은 검술을 머릿속에서 검색하는 것도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요?”
“총장님은 평소에 말할 때, 언어를 검색해서 하는지요?”
“아니요.”
“제 검술도 똑같습니다.”
“그런가요...?”
“쉽게 설명하기 위해 조금 극단적인 예를 들지요. 인간의 언어는 여러 단어를 조합해서 다양한 표현력을 구사합니다. 하지만 멍멍이를 보십시오. 멍멍멍. 이 하나만으로 인간 같은 언어표현을 할 수 있을지요?”
“아...”
“총장님이 말씀하시는 상식은 멍멍 우는 겁니다. 멍멍이가 멍멍 열심히 짖다보면 주인과 약간의 의사소통도 되겠지요. 그게 다양한 단어를 조합하는 언어를 배우는 것보다 쉽고 빠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멍멍 짖기만 해서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늦든 빠르든 언젠가는 인간의 언어에 추월당하지요.”
“......”
나는 더 묻지 않았다.
여기서 내가 어떤 반론을 제기하더라도 당근 선생은 별 고민 없이 시원하게 대답할 테니까.
그가 전부 옳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 검신(劍神)의 철학을 절대 뒤집지 못하리라.
“제 설명이 제대로 전달됐는지 모르겠습니다. 검술은 자신 있지만, 대화능력은 멍멍이 수준이라서...”
“아니요. 좋은 공부가 됐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요.”
나는 얼떨결에 신(神)이 됐다.
순전히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운도 실력이라고?
“아니. 실력도 운이지.”
어떤 기연 같은 계기로 사람이 강해지거나 바뀌는 경우가 있다.
이건 실력일까?
우리의 현재 실력은 노력 외 수많은 운과 우연이 겹쳐서 나온 결과물이다.
<운도 실력이다.>
<실력도 운이다.>
같은 말처럼 보여도 미묘하게 차이가 있다.
앞의 ‘운도 실력’이란 표현은 매우 건방지다.
자기 뒷배경에 행운의 여신이 있으니 까불지 말라는 식이랄까!
반면, 뒤는 겸손하다.
내가 성공한 건 부모님 덕분이기에 자랑하지 않는다는 태도!
이 차이는 매우 크다.
“나는 운이 좋았지.”
지극히 평범한 지구인이었던 내가 여기까지 도달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운이다.
운도 실력이라고 믿는 사회부적응자들은 ‘다음 운은 언제 오시나♪’ 같은 시답잖은 노래를 부르며 기다리겠지만.
“총장님. 그렇게 겸손하지 않아도 됩니다. 운만으로 신이 될 수 있었다면 누구나 됐을 겁니다.”
“그 반대죠.”
나보다 훨씬 노력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널리고 널렸다.
내가 비겁한 척추와 골반을 만지작거릴 때, 밤낮없이 일하는 직장인들이 셀 수 없이 많으니까.
그래서 그들은 신(神)이 됐나?
그렇지 않다.
자기 영혼을 담은 필사적인 노력은 사회부적응자가 아닌 이상, 누구나 몇 번씩 다 한다.
하지만 노력한만큼 결과가 늘 좋은 건 아니다.
“저는 운이 좋았습니다.”
노력한만큼 보상이 따라왔으니까.
누구나 다 하는 노력에 운이 좀 많이 곁들어져서 대성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단지 그뿐.
그러니 자랑할 것 없다.
“흠... 총장님. 제 고향에는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천명(天命)은 아무나 받는 게 아니다. 남들 다 하는 노력에 운까지 곁들어진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하늘에게 받은 힘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는...”
“기각!”
“예?”
“우주 회장님이 무료봉사하라고 준 힘이 아닐 테니까요. 그게 정말이라면 사람을 잘못 고른 겁니다.”
“그, 그렇군요.”
“오늘의 만남도 저에게는 행운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당근 선생님 덕분에 많이 배웁니다.”
“저야말로...”
“그러면 이만.”
뿅!
...공명정대한 내가 몸도 마음도 중요한 무언가를 깜빡한 것 같지만, 기분 탓일 것이다.
『계속 완벽한 어떤 검신이 수업을 시작합니다』
『친절한 어떤 여신이 애써 미소를 짓습니다』
*
“마약용사! 추하다!”
“뭐가?”
“하여간 추하다!”
“.....”
남의 머리에 총배설강을 비비는 정령보다 추할 것 같진 않다만...
나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검지로 문지르며 경고했다.
“마약정령. 손가락으로 혼나기 싫으면 얌전히-”
“추하다! 추하다!”
“이 정령이...!”
선량한 GGG급 용사님을 아주 호구로 아는구만!
“히히히! 깜짝 놀랐다. 페도나르가 남동생이었다니. 족보가 너무 꼬여서 나는 생각하길 포기했다.”
“참 자랑이다!”
친동생이 장인어른이었다.
이 충격적인 현실에 나도 생각하길 포기하고 싶은데, 웃어른인 마약정령이 먼저 포기선언을 하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야, 마약정령. 너는 조카 같은 동생의 누나잖아? 뭔가 기발한 생각 없어?”
“없다! 히히히!”
“하아...”
“그렇게 말하는 마약용사의 조상님들은 어디에 있냐?”
“인간의 수명은 찰나야.”
아직 300년도 안 산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좀 그렇지만, 우주의 기준에서 보자면 정말 찰나다.
밤하늘의 별들은 수백만 년 전에 쏘아진 빛이니까.
“그런데 마약용사. 내 추한 조카에게 안 가고 어딜 가는 거냐? 처음 보는 곳이다.”
당연히 처음이겠지. 판타지아 학생과 교보재는 절대 출입할 수 없는 금지구역이니까.
“교무실.”
“히익?!”
“뭘 그렇게 놀래?”
“교무실이라고 하지 않았냐?! 학생들을 질식사시킨다는 교무실! 겁먹는 게 당연하다!”
“거참...”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어떤 말랑한 용사에게 이상한 지식을 주입받은 모양이다.
판타지아 교무실.
여긴 말랑한 용사들을 질식사시키는 장례식장이 아니다.
...과거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앗! 마스터...!”
“리틀 쏘시아잖아?”
쏘시아가 만든 판타지아 시스템의 인격체.
통칭, 판타지아 여신.
고향별 이름도 판타지아, 모친 이름도 판타지아, 인공지능 이름도 판타지아...
너무 대충이잖아?
쏘시아의 어릴 적 모습을 한 판타지아 여신이 말했다.
“시스템 제어권이 판타지시아 님에게서 마스터로 넘어간 뒤부터 저도 권한이 대폭 축소됐어요. 지금은 이렇게 교무실 복도를 청소하며 백수신세만 간신히 면하는 중이죠.”
“말을 하지.”
“그게... 판타지시아 님은 씨드엘 님을 낳으시고부터 저에게 신경을 거의 못 쓰세요.”
“저런.”
비겁한 마누라가 잘못했네!
“나중에 너 대신 쏘시아의 골반에 대고 쓴소리해줄게.”
“골반입니까...?”
“왜? 척추가 더 좋아?”
“그... 아닙니다. 마스터와 오래 대화하면 시스템이 망가질 것 같으니 본론으로 빨리 넘어가죠. 그렇게 증오하시던 교직원들의 아지트에는 무슨 볼일이신가요? 학살? 몰살? 말살? 멸살?”
“어째서 죽인다로 귀결되냐?”
“다른 이유일 확률은 0.27%밖에 되지 않으니까요. 총장이 되시고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교무실을 여태까지 방문하지 않은 게 근거입니다.”
“뭐...”
나는 반박하지 않았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니까.
그러나 정답인 건 아니다.
“나는 귀여운 황제였을 때도 밑은 잘 보지 않았어.”
“그 이전부터 그러셨어요. 당신은 문제만 키우는 동료와 원주민들에게 손을 내밀지 않고 전부 혼자 해결했죠. 예전 같으면 신뢰의 중요성을 주제로 일장연설을 해드렸겠지만, 삭제되기 싫으므로 참겠습니다.”
“섭섭하네. 나는 너를 딸이라고 여겼는데.”
“끔찍한 말씀을 쉽게 하시네요.”
“상처되는 말을 쉽게 하네!”
“농담입니다.”
“그래?”
“기쁘게 생각해요. 당신이 저를 딸이라고 여기는 한, 불필요하다고 삭제하진 않을 테니까요.”
“야. 네 머릿속에 든 내 이미지는 대체 뭐냐?”
“농도 98% 마신(魔神)쯤 되죠. 부족한 2%는 미미하게 남아있는 인간시절의 양심입니다.”
“너무하네.”
그렇게 막말을 내뱉고 내 왼팔에 팔짱을 끼는 판타지아 여신.
그녀가 말했다.
“살기 위한 노력이에요, 아빠.”
“아, 아빠...?”
“아빠라고 살갑게 부르면 삭제되지 않을 확률이 17.05%나 증가한다는 놀라운 계산결과가 나왔거든요.”
“...그 뒷말만 안 했어도 정말 증가했을지도 모르는데.”
“그래서 교무실은 무슨 일로 오셨나요?”
좋은 질문이다.
“교육방식을 정말 바꾸려면 선생도 바꿔야 하지 않겠어?”
“이해했습니다. 1회차 동료들처럼 불필요해진 교사들을 교무실에서 치우려고 방문하셨다는 뜻이군요.”
“아니거든?”
아비를 어떻게든 악인으로 몰려는 딸이랑은 나중에 진지하게 척추 잡고 대화해봐야겠다.
내가 교무실을 방문한 이유.
확장공사를 위해서다.
『항상 공정한 어떤 인신이 파릇파릇한 교사를 모집합니다』
『항상 공정한 어떤 인신이 강의료는 열정이라고 합니다』
『항상 공정한 어떤 인신이 방학연휴는 없다고 못을 박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