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4화
[33회차] 우리의 공통점은?
“마약용사. 정말 이상한 여자다. 판타지아가 얼마나 멋진 세계인데! 저렇게 난동 부리는 이유를 모르겠다.”
“나는 알아.”
남의 일이라고 무시할 수 없었다.
내가 그 피해자였으니까!
판타지아의 총책임자가 된 현재는 나와 똑같은 피해자가 안 나오도록 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끼고 있다.
⤷토니: 무슨 말인지는 알겠지만, 나는 여기가 더 좋은데?
⤷마리오: 고향별에서 지옥 같은 노동의 나날을 보냈던 저에게 여기는 완전히 천국인데요?
⤷세라: 이상한 언니. 사방에 미남들 천지야. 그런데 뭐가 불만?
⤷미르: 멀쩡한 사람들을 정신병자 취급하지 마시고 싫으면 돌려보내 달라고 여신님께 청원하세요.
⤷지크: 한수... 큭! 머리가!
몰랑한 커뮤니티에서 놀림거리가 된 문제의 용사는 씩씩거리며 몰랑폰에서 시선을 뗐다.
“집단최면인가! 뭐야, 정말...!”
“진정해.”
“지금 진정하게 생겼... 히익?!”
“지나가던 선배A의 얼굴을 보자마자 식겁하는 건 너무 예의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아?”
손을 뻗으면 척추가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본 문제의 용사는 18세 전후의 여학생이었다.
흠. 보자마자 알 것 같군.
외적인 아름다움이 전부는 아니지만, 예쁘면 사회생활이든 학교생활이든 굉장히 편한 건 사실이다.
그리고 눈앞의 여학생은 그 혜택을 제대로 누려온 듯했다.
판타지 세계의 미적 기준으로 마을소녀A쯤은 될 법한 미모.
지구에서는 여배우 확정이다.
“제 예의가 어때서요! 갑자기 등 뒤에서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걸면 누구라도 놀라거든요? 그리고 거울 좀 보고 사세요. 진짜 무섭게 생기셨거든요?”
“억지가 심하네.”
“하여간 당신에게 관심 없으니 딴 여자를 알아보세요.”
“잠깐.”
“끈질기시네요.”
“아니. 오해하는 듯해서 말이야. 이게 내 마누라들의 사진이야. 자식도 꽤 있고. 후배의 변변찮은 외모에 혹해서 말을 걸었다고 착각했다면...”
“뭔가요! 그 가엾다는 시선은! 그리고 유부남이니 안심하라는 식으로 작업 거는 선생들도 많았거든요?”
“주위를 봐.”
“봐서 뭐요?”
“후배 수준의 예쁜 아가씨가 널렸어. 그런데 굳이?”
“......”
여학생의 입술이 꾹 다물어졌다.
그리고는 굉장히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몸을 휙 돌려서는 시작도시의 혼잡한 광장을 빠져나가려 했다.
나는 조용히 그 뒤를 따라갔다.
“마약용사. 진짜 이상한 여자다. 판타지아 초절정 미남의 얼굴을 보고 무섭다니?”
“척추 보는 눈이 없는 거지.”
이해하기 힘들다는 마약정령의 말을 적당히 받아줬다.
이 정령의 눈에 비친 저 용사는 모난 돌처럼 비정상일 터.
내가 1회차 때 그랬듯이.
그렇기에 가만히 놔둘 수 없었다.
“......”
“......”
“자칭 선배 아저씨. 왜 계속 쫓아오시는 거예요? 예쁜 원주민이 주위에 많은데.”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답하기 싫은데요? 머리 위에 벌거벗은 요정을 앉혀둔 변태 아저씨와 무슨 대화를 하나요.”
“오해야. 이 녀석은 요정이 아니라 정령이고, 암컷이냐고 묻는다면 중성이야. 잘 봐. 생식기가 없잖아.”
“하지만 가슴이... 아씨! 됐어요! 말 걸지 마세요!”
그래도 나는 꿋꿋하게 후배의 뒤를 따라갔다.
“와! 미남...”
“진짜 잘생겼다...”
“세상에나...”
나를 흠모의 눈으로 바라보는 판타지아 여인들의 속닥거림이 들렸다.
귀여운 황제로 태어났을 때부터 인기남이었지만, 차원이 통합되어 6개만 남은 현재는 호불호가 안 갈리는 초절정 미남으로 통하는 나.
능력치 보정으로 귀가 밝은 후배도 들은 듯했다.
“정말로 제가 오해했네요.”
굉장히 쌀쌀맞은 말투로 먼저 내게 말을 걸었다.
“이제 믿겠어?”
“그래서 참 좋으시겠어요. 미남으로 대접받는 세상에 떨어지셔서.”
“너는 어떤데?”
“부모님이 주신 신용카드가 쓸모없게 돼서 빈털터리가 됐고요. 아저씨의 막말처럼 흔한 여자 취급이라 생소하면서도 기분 최악이네요.”
“하핫!”
“웃지 말아요. 원래는 무시하려고 했는데, 저에게 이상하다고 말하지 않은 사람은 아저씨가 처음이라서 조금 어울려준 것뿐이니까.”
“돈도 없겠네.”
“당연하죠. 급료도 짠 고양이 찾기 같은 어이없는 아르바이트는 도저히 못 하겠어요. 몬스터 사냥도 마찬가지예요. 몬스터와 싸우다가 다치고 심하면 죽을 수 있는데, 사람들은 너무나 태연하게 도시 밖으로 나가요.”
“배고프지?”
“평생 연애 한 번 제대로 안 해본 아저씨 같은 작업대사네요.”
“맞아. 연애 경험은 별로 없어. 나 좋다고 따라다니는 어떤 비겁한 악마에게 일찍 코가 꿰였거든~”
지금도 안타깝다.
내 MAX급 청춘을 장인어른(마왕)과 마누라에게 전부 날린 것이.
“밥이라면 조금 전에 용사지원센터에서 먹었어요.”
“맛은 어때? 현지식에 적응 못 하거나, 후배처럼 돈 없는 용사를 위해 무료로 서비스하는 곳인데.”
“솔직히 좋진 않아요.”
“다행이네.”
“뭐가 다행이에요?”
“생각해봐. 맛이 좋으면 용사들이 현지식에 적응하려고 노력할까?”
“아...”
“하지만 좀 그렇네. 후배처럼 맛이 없어도 버티는 용사들이 있겠어. 좀 더 맛없게 하라고 건의해볼까?”
“악마...! 하지 마욧...!”
“하하하!”
용사지원센터.
1회차 때, 만두 왕국에서 전혀 지원받지 못해서 고생한 내가 한이 맺혀서 고안한 공공시설이다.
정보, 식사, 숙소.
이렇게 셋을 제공해주고 있다.
무전취식이 가능하기에 이론상으로는 평생 일 안 하고 살 수 있지만, 시설이 그리 좋지 않기에 오래 머물 장소는 아니다.
그리고 주변 식당과 여관의 물가를 의도적으로 낮춰서, 센터를 자발적으로 졸업하도록 유도했다.
“아저씨는 여기 오래 살았죠?”
“수세식 변기가 없던 끔찍한 시대부터 살았지.”
“사, 상상이 안 가네요. 그런 곳에서 사람이 살 수 있나요?”
“죽지 못해서 살았지.”
나는 후배를 이끌고 괜찮은 식당으로 향했다.
“여긴 술집이잖아요? 저는 아직 미성년자인데...”
“여기서는 대충 15살만 넘기면 성인이야.”
“대충?”
“초경(初經)과 몽정(夢精)하는 시기는 전부 제각각이니까.”
“...성교육시간에만 조심스럽게 나오는 용어를 너무 막 쓰시네요.”
“아기는 두루미가 물어다 준다는 식으로 설명해줄까?”
“아뇨.”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입술을 삐죽 내민 후배를 이끌고, 나는 바텐더에게 먼저 아는 척했다.
“토니.”
“저를 아십니까?”
“너무하네!”
“하하하! 나의 용사 한수! 이번에도 양고기와 블랙드래곤으로 줄까?”
전직 암살자이자 나의 정신적 스승인 토니.
2회차 때 만난 이후로 처음이니 얼추 200년 만인 듯하다.
지금은 무한한 회귀가 멈췄기에 그도 언젠가 늙어서 내 곁을 영원히 떠나리라.
하지만 괜찮다.
거기에 의미가 있다.
영원하다면, 이런 만남의 시간이 전혀 소중하게 느껴지지 않을 테니까.
“토니, 기억합니까? 판타지아 현지식에 적응 못 하던 저에게 당신이 권했던 음식.”
“레드드래곤.”
“술 말고요.”
“내가 보장하지. 그 술을 곁들이면 뭘 먹어도 입에 맞을 거야.”
“뭐...”
요리가 안주로 변하면 맛은 별 상관없어지긴 하지.
토니가 근사한 미소를 지었다.
나도 그를 따라서 정의로운 용사의 미소로 회답해줬다.
“가르쳐준 걸 여전히 잊지 않았군.”
“당연하죠.”
“조금만 기다려. 옆의 숙녀분이 비슷한 처지란 거잖나? 내가 오랜만에 실력 발휘를 하지.”
그렇게 토니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주위 손님들이 아는 척해왔다.
“한수라고?”
“오! 자세히 보니 정말이잖아?”
“토니만 알고 우리는 계속 모른 척할 거야?”
“그러면 대단히 섭섭한데! 안 그래, 친구들?”
“어머! 귀염둥이 한수. 옛날보다 훈남이 돼서 바로 못 알아봤네!”
“귀엽긴. 불만쟁이였지.”
“맞아! 불만쟁이. 하하하!”
골목진 토니의 술집은 암시장 손님과 단골들만 찾아온다.
그렇기에 이들은 전부 내 1회차 때 인연이 있었던 사람들.
나는 일일이 회답해줬다.
“그리드. 언제 얘기를 합니까? 당신에게는 얼마 안 됐겠지만, 저에게는 200년도 더 된 일입니다. 그리고 테이부스 씨. 불만쟁이가 뭡니까? 당신의 불만을 가장 많이 상담해준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세요? 아카샤 누님이 역시 최고입니다. 제가 좀 귀여웠죠. 하하하!”
“와! 그 한수가 뻔뻔해졌네.”
“소심한 것보다야 낫지.”
“우리 한수. 많이 성장했구먼!”
“잘생겨졌고? 후후후!”
내가 술집 단골손님들과 과거를 안주 삼아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이, 토니가 음식 접시를 들고 나왔다.
“토니 정식이다.”
“그 정식은 남은 재료로 만들기에 맨날 메뉴가 바뀌잖아요.”
“잔말 말고 먹어. 맛만 좋으면 상관없잖나.”
“하핫!”
전직 암살자인 토니의 저 대사는 원래 ‘상대를 죽일 수만 있으면 방법은 상관없잖나’였다.
나는 그런 그에게, 야만적인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판타지아 세계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그립군.
...그때로 되돌아가고 싶진 않지만.
“혼자만 즐거우시네요.”
“아차! 미안.”
토니의 술집에 들어오고부터 완전히 소외된 뾰로통한 표정의 후배에게 사과했다.
하지만 온 이유가 있다.
그녀가 눈치챘는지는 모르지만.
“대충 대화를 들어보니... 선배 아저씨도 200년 전에? 저와 비슷한 고민을 했었던 모양이네요.”
“더 심했지.”
그때는 몰랑폰 같은 커뮤니티도 없어서 혼자 끙끙 앓아야 했다.
“어떻게 극복했어요?”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별로 반드시 돌아가겠다는 일념 하나로.”
“......”
“하지만 후배는 아니겠지. 소환된 직후에 분명히 물어봤을 거야. 되돌아가고 싶냐고. 나 때는 선택지가 없었지만, 요즘은 세상 참 좋아졌으니까.”
가장 이해가 안 되는 점.
내가 현역 용사일 때는 ‘마왕을 쓰러트리기 전까지는 귀환 불가.’라고 외길을 강요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원치 않는 학생들은 고향별로 돌려보내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그런데 이 후배는 고향별로 곧장 돌아가지 않았다.
왜?
“저도 이탈을 원했으니까요.”
“가출 같은 느낌?”
“어... 갑자기 굉장히 유치한 이유로 떡락해버린 기분인데요.”
“기분 탓이야.”
“흥!”
토니 정식은 남은 재료를 긁어모아서 즉흥적으로 만든 요리로 안 보일 만큼 훌륭했다.
후배가 열심히 먹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아직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은 건 미련 탓인가?”
“속았어요.”
“뭘?”
“로맨스 판타지를 읽어보셨나요?”
“마누라가 좀 읽긴 하지.”
“저는 판타지아를 로맨스 판타지라고 생각했어요. 저만 예쁘고 다른 여자들은 변변찮은 세상.”
“그 반대였다는 거군.”
“반대까지는 아니거든요?! 선배 아저씨. 아까부터 은근히 뼈 때리는 말을 막 하시네요!”
“어? 어떻게 알았어? 내가 척추 좀 때릴 줄 알지.”
“아아, 진짜! 밥 사주지 않았으면 정강이를 걷어찼을 거예요.”
“그러면 네 발이 더 아플걸?”
“얄미워!”
후배가 미성년자라며 꺼리던 술을 벌컥벌컥 들이켜기 시작했다.
꺼린 것치고는 잘 마시네?
아! 여기서 오해가 없도록 미리 밝혀두겠는데, 내가 마시려고 주문한 술이었다.
“우리 숙맥 한수가...”
“정말로 200년을 살았나?”
“능구렁이가 됐네. 후후!”
“한수야. 자랑스럽다.”
주위에서 계속 선동과 날조를 해댔지만, 이미 취해버린 후배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듯했다.
“로맨스 판타지의 진짜 공주님이 되어 며칠만 즐겨보자는 심정으로 귀환을 연기했어요. 그런데 밖에 나와보니... 아저씨 말대로 반대였어요. 방송국보다 예쁜 언니들이 많았어요.”
“그랬겠지.”
유전자와 상관없이, 판타지아 태생들은 능력치 보정으로 아기 때부터 척추가 예쁘게 자라니까.
선남선녀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보다 이상한 건 요거였어요.”
그렇게 말하며, 교복 치마 호주머니에서 몰랑폰을 꺼내는 후배.
“커뮤니티?”
“설마, 제가 올린 글을 읽어보셨나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걸. 몰랑폰이 문제라면 커뮤니티밖에 없어서 어림짐작해본 것뿐이야.”
여기서 긍정해버리면 안 된다.
흥신소가 따로 없는 판타지아에서 용사의 개인정보를 볼 수 있는 존재는 운영진밖에 없으니까.
다행히도 후배는 별 의심 없이 넘어갔다.
“그렇군요... 아저씨. 어째서 사람들은 고향으로 안 돌아가고 납치범들의 부탁을 들어주는 걸까요?”
진지한 표정의 질문.
후배. 아주 좋은 질문이야!
나는 200년 넘게 판타지아에 살면서 그 해답을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고향별의 삶이 여기보다 만족스럽지 않았기 때문이지.”
“왜...?”
“글쎄다.”
후배가 던진 화두는 나도 알고 싶은 내용이다.
나도 내가 판타지아 세계로 납치된 이유를 여전히 모르니까.
생활기록부에는 ‘적합자’라고 판명되어 소환했다는 무성의한 사유뿐.
“이 세계가 무작위로 납치하는 건 아니야. 나름대로 적합한 인재를 선별해서 소환하지.”
“저도 그건 들어서 알아요.”
안다면 얘기가 쉽겠군.
나는 마누라의 오해를 무릅쓰고 찾아온 목적을 밝혔다.
“후배는 자신이 소환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어쩌면 이 불만쟁이 후배에게서 그 실마리를 찾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