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5화
[33회차] 기분 탓이야!
“제가 소환된 이유요?”
“그래.”
“...막 소환됐을 때까지만 해도 판타지 세계에 선택받은 주인공이 된 줄 알았어요. 지금까지 부러울 것 하나 없는 축복받은 인생이었거든요.”
“외모, 집안, 남자?”
“저 좋다는 남자는 많아도 남자친구는 없었...”
“힘내.”
“진짜 오해거든요?! 제가 걷어차서 없는 거예요!”
“다들 그렇게 말하지.”
“두고 봐요! 내일까지 남자친구 하나 만들어서 올 테니까!”
“그런 사소한 건 됐고. 판타지 세계에 끌려온 이유나 생각해봐.”
“조금 전에 말했잖아요. 제가 너무 잘나서 선택받은 줄 알았다고요. 완전 착각이었지만!”
변변찮은 주먹으로 테이블을 때리며 분개하는 후배.
술에 찌든 용사가 저렇게 화풀이하면 목제가구는 박살 나는 게 보통이지만, 이 후배는 너무 약했다.
▷종족: 엘리트 휴먼
▷레벨: 1
▷직업: 무직(경험치 110%)
▷스킬: 통역A 매력C 변비E
체력F 인내F…
▷상태: 취기
요즘은 눈이 높아져서 G급, Z급 밑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객관적으로 이 후배는 축복받은 태생이었다.
통역A는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스킬이기에 논외로 치더라도, 매력C는 그녀가 단시간에 얻은 것이다.
매력(魅力).
이 스킬은 단순히 외모로 등급이 결정되지 않는다.
사람을 끌어들이는 카리스마.
이렇게 설명하면 이해가 쉬울까?
첫인상을 무시할 수 없기에 외모가 큰 변수로 적용되긴 하지만, 절대적인 지표는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후배는 동료들을 모으는 ‘용사의 재능’이 있었다.
“매력이 높네.”
“제 능력치를 이제 봤어요? 다들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C등급. 저게 검술이었으면 1레벨로도 고블린은 이길 수 있지.”
후배의 가녀린 체형으로는 그게 한계다.
만약 육체파 남성이었다면 1레벨로 오크까지 가능했을 것이다.
...나?
뇌비우스나 쑥떡은 무리지만, 로리왕 같은 2류 고룡(古龍)은 무난하게 잡을 수 있다.
“고블린?”
“모른다는 얼굴이네.”
“정말로 몰라서 그러는데, 고블린이 뭐예요?”
“묻는 너야말로 며칠째야?”
“오늘까지 닷새요.”
“허! 마왕을 5번 잡을 수 있는 시간 동안 뭐 했냐?”
“아저씨. 바보 취급하지 말아 주실래요? 고블린은 몰라도 마왕은 저도 알거든요? 하루 만에 못 잡는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정말인데.”
내가 하루 만에 잡았었으니까.
하지만 이 후배는 믿으려고 하질 않았다.
“닷새 동안 마음이 맞는 사람을 찾아다녔어요.”
“그런데 남자친구를 못 구했군?”
“남자친구가 아니거든요?! 자꾸 이상한 쪽으로 몰지 말아요!”
“용사의 덕목이야.”
훌륭한 용사라면, 선동과 날조가 숨 쉬듯 자연스러워야 한다.
“말 나온 김에 물어볼게요. 어째서 제가 용사죠?”
“그건 내가 먼저 질문했다만?”
이 후배가 어떻게 판타지아 시스템의 선택을 받아서 ‘용사’가 됐는지 궁금하다.
“제 직업은 무직이에요.”
“다른 용사들도 마찬가지야. 다들 자신의 성향에 맞는 직업으로 전직했지. 너는... 백수군.”
“고등학생이란 뚜렷한 직업이 있거든요?!”
“자칭 배웠다는 후배. 용사지원센터에서 안 가르쳐줬어? 반복행동 하면 스킬이 생기고, 그렇게 얻은 스킬들과 궁합이 좋은 직업을 얻는다고.”
“들어서 알죠.”
“그런데 왜 물어?”
“아저씨의 직업이 용사라서요.”
▷종족: 로열 휴먼
▷레벨: 2481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신앙Z 고귀Z 선동SSS
날조SSS 매력SS…
▷상태: 성검, 축복, 가호
비겁한 마누라 등의 눈에 안 띄려고 임시로 만든 능력치다.
하지만 그렇군.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직업을 ‘용사’로 짜버렸다.
“용사도 업적을 세우면 될 수 있는 직업이니까.”
“마왕 페도나르를 무찌르는 업적 말이죠?”
“맞아.”
“그거 완전 엉터리예요. 마왕을 무찌른 후에 용사가 왜 필요해요? 그전에 용사가 짠! 하고 등장해줘야 원주민들이 안심하죠.”
“틀려.”
“어디가 틀렸는데요?”
“마왕 페도나르는 후배 같은 신출내기 용사지망생들을 위한 첫걸음에 지나지 않아.”
“그건 저도 알아요. 8단계까지 있다면서요? 하지만 직업이...”
“직업이 용사가 아니라고?”
“네.”
“애초에 능력치를 볼 수 있는 건 용사들뿐이야. 네가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 원주민들은 절대 몰라. 그들의 판단기준은 네 호주머니에 든 몰랑폰이야. 능력치의 직업은 겉치레에 지나지 않아. 용사보다 더 좋은 직업도 찾아보면 꽤 되고.”
“...잘 아시네요?”
“200년 넘게 여기서 살았으니까.”
몰랑폰은 여전히 용사들에게만 지급되는 물건이다.
판타지아 원주민들에게 보급하면 일상생활이 다채로워지겠지만, 나는 그대로 놔두는 길을 선택했다.
특히, 1학년.
판타지아1.
여기는 과거를 보존한다는 차원에서 기존의 오리지널 판타지아 대륙 형태가 바뀌지 않도록 유도했다.
새로운 차원으로 이주하며 원주민 숫자가 제법 줄어들었지만, 수세식 변기가 보급된 이후부터 꾸준히 인구가 폭증해온 판타지아1은 5년 만에 복구됐다.
다른 차원들도 말할 것 없고.
즉, 판타지아2부터는 시간이 가속되어 수천 년이 흐른 상태지만, 여기는 아직 5년밖에 안 지났다.
“안 질려요?”
“사는 게?”
“솔직히 실감이 안 돼요. 아직 20살도 안 된 저에게 200년은... 아저씨도 겉보기에는 30대잖아요.”
“20대라고 해줘.”
“양심 어디?”
“내가 바로 양심이지.”
나는 술에 찌든 후배와 시답잖은 얘기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답은 마지막까지 찾지 못했다.
소환된 이유.
나보다 훨씬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후배는 유전자의 혜택까지 받은 엄친딸이었다.
그런데 왜?
본인은 ‘선택받은 공주님’이 된 줄 착각했다지만, 후배가 했든 아니든 납치는 시스템이 결정한다.
여기에 당사자의 의사는 무관.
소질만 보고 뽑는다.
쿵-!
“쿨...”
과일주의 달콤함에 속아서 알코올로 위장을 채운 후배는 테이블에 시원하게 이마 박고 잠들었다.
그녀가 요정이었다면 온몸이 해체되어 마법 재료로 암시장에 팔려갔겠지만, 흔한 인간이기에 누구도 업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별 걸 고민하는군.”
“토니.”
빈 술잔을 닦으며 툭 던지듯 말하는 나의 정신적 스승.
지금까지 조용히 우리의 얘기를 듣고 있던 그가 이어서 말했다.
“어떤 암살자 1호의 얘기를 들려주지. 그는 길드로부터 어떤 훌륭한 귀족을 죽이라는 지령을 받았어. 그는 영지의 백성들에게 친절하고, 신하들의 얘기를 귀담아들을 줄 알았으며, 아내와 자식들에게 충실했지.”
“그래서 죽였습니까?”
“암살자 1호가 머뭇거리는 게 답답했던 암살자 2호가 대신 죽였다. 그리고 이에 분노한 1호는 사랑했던 2호와 헤어졌지. 어떻게 됐을 것 같아?”
“흠... 고자?”
“틀린 답은 아니지만, 논점에서 벗어났잖나!”
토니가 자기 일처럼 발끈했다.
“그러면 뭔데요?”
“죄책감에 시달린 암살자 1호는 1년 뒤에 다시 그곳을 방문했지. 그리고 암살자 2호의 결단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 귀족이 사실은 악당이었다는 전개입니까?”
“조금 복잡해.”
“그렇다면... 후계 다툼이 있었던 모양이군요.”
“맞아.”
판타지아에서는 귀족마다 후계자를 선택하는 방식이 다르다.
태어난 순, 능력 순, 혈통 순...
그중에서도 가장 까다로운 선택 기준이 ‘능력’이다.
이건 대단히 주관적이니까.
수학 1등급, 영어 3등급 나온 학생A와 수학 3등급, 영어 1등급 나온 학생B 중에 누가 더 우수하냐고 물으면 사람마다 대답이 다 다를 것이다.
마찬가지다.
“둘 다 양보하지 않아서 가문이 둘로 쪼개질 상황이었군요.”
형제가 사이좋게 나누면 좋지 않으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귀족사회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정확해.”
“그래서 잘 해결됐습니까?”
토니가 내 옆에 앉으며 뒷이야기를 설명했다.
“그래. 내란으로 번질 뻔한 영지는 평화를 되찾고, 동생을 암살한 형은 만두처럼 토실토실해졌지.”
“풉-! 콜록콜록!”
“하하하! 내 이야기가 재미있었다니 다행이군.”
“귀족이 아니라 왕족이었습니까?!”
“글쎄다?”
개구쟁이처럼 능글맞은 토니의 미소를 보자마자 나도 뒤따라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하여간 못 당하겠네요.”
“한수야. 때로는 과정이 아닌 결과에 이유가 있을 때도 있어.”
“그건 좀...”
끼워 맞춘 억지 같습니다만?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지. 거의 매일 같이 찾아와서 동료들 때문에 힘들다고 투덜대던 청년을. 녀석은 어느새 어른이 됐고, 잠깐 안 본 사이에 굉장히 뻔뻔한 유부남이 됐더군.”
“하, 하하...”
“판타지아 여신님이 너를 용사로 선택한 이유. 그 답은 너에게 이미 있다고 보는데? 나는 제법 많은 용사를 이 술집에서 보았지만, 너보다 뛰어난 녀석은 한 놈도 못 봤다.”
“...제가 모르는 용사의 자질을 시스템- 판타지아 여신님이 알아보셨다는 겁니까?”
“그렇지.”
“......”
“서두르지 말고 기다려. 암살자 1호처럼 언젠가 답을 찾게 될 테니까.”
“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후배는?”
“오늘 처음 만난 사이입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비겁한 마누라가 질투하기 전에 헤어지는 편이 서로에게 좋다.
“오늘처럼 함께 있다 보면 이유를 좀 더 빨리 알 수 있지 않을까?”
“가는 길에 용사지원센터에 연락해서 데려가라고 할게요.”
“그러지 말고 데려가. 내 직감이 그러라고 속삭이네.”
“전직 암살자의 그겁니까?”
“그거? 뭘 말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는데.”
“네네. 어련하시겠어요.”
나는 술에 찌든 후배를 짐짝처럼 왼쪽 어깨에 메고 술집을 나섰다.
시간은 꼭두새벽.
이대로 그녀를 용사지원센터에 던져놔도 되지만, 토니의 말이 귓가에서 계속 맴돌아서 그럴 수 없었다.
“마약용사. 어쩌려고?”
내 머리 위에 드러누워 있던 마약정령이 질문했다.
“토니의 말도 일리가 있어.”
“뭐가?”
“숨어있는 후배의 재능을 찾는 모험을 떠나는 거야.”
정의로운 GGG급 선배님은 꿈과 희망이 넘치길 기대해봤다.
*
“여, 여긴 대체 어디예요?!”
침낭에서 눈을 뜬 후배가 상체를 벌떡 일으키며 외쳤다.
“보면 몰라? 야외잖아.”
“아저씨. 제가 그걸 몰라서 묻는 줄 아세요? 멀쩡한 여관 놔두고 왜 노숙 중이냐고 묻는 거잖아요?!”
“노숙이 이상한가? 술 마시고 길거리에서 자는 사람들은 고향별에서도 종종 보지 않았어?”
“제가 그 1인이 될 줄은 전혀 몰랐거든요?!”
후배는 양손으로 본인 몸을 더듬으며 무언가를 확인했다.
“너무하네. 이 정의로운 선배님이 너의 변변찮은 골반을 만졌을 리 없잖아.”
“제 골반이 어때서요! 작년에 해수욕장에서 비키니경연대회 2위 했거든요? 가슴만 좀 더 컸어도 1등을... 하, 하여간 변변찮지 않거든요!”
“밥이나 먹어.”
“이 상황에 밥이 넘어갈 것 같아요? 술에 취해서 잠든 사이에 무섭게 생긴 아저씨에게 납치당했는데!”
“오해야. 나는 너처럼 변변찮게 생긴 여자애에게 관심 없어.”
“아씨! 그러면 왜 도시 밖으로 데려온 건데요! 여기는 위험한 몬스터가 득실거린다면서요!”
“걱정하지 마. 이 근방에는 몬스터가 없어.”
“어? 정말로요?”
“정말로. 무시무시한 악룡(惡龍)의 영역이거든~”
“히익?!”
“고블린은 모르면서 악룡은 아는 모양이네.”
“그런 시답잖은 소리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마왕만큼 위험하다는 악룡이 산다면서요! 들키기 전에 도망쳐야 해요!”
“이미 늦었어.”
“예?”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후배에게 뒤편을 가리켰다.
“저기.”
“와! 초절정 미소년...!”
“틀렸어. 저 녀석의 척추를 잘 봐.”
“네. 봤어요. 그래서요?”
봐서 어쩌라고 묻는 얼굴.
한숨을 내쉰 나는, 우리를 위해 열심히 요리 중인 소년을 소개했다.
“이쪽은 마룡왕 로리코스트. 미소녀만 편식하는 흉악한 용이야. 후배의 재능을 알아보기 위해 특별히 수배했지.”
“으아아! 판타지아에서 가장 귀엽고 위대한 황제님! 제 척추 좀 그만 용서해세요! 흑흑!”
“닥쳐.”
“넵.”
나는 입 다물고 다시 요리에 집중하는 마룡왕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 후배에게 정의로운 용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든든하게 아침 먹고 한 판 붙으면 돼.”
“저기... 마룡 맞나요? 제 눈에는 미성년자의 노동력을 쥐어짜는 사악한 아저씨밖에 안 보이는데요.”
“기분 탓이야.”
공명정대한 GGG급 인성의 신(神)이 보증한다. 몰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