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8화
[33회차] FFF급 관심용사
“선배 아저씨. 이번에는 또 어딜 가시는 거예요? 저는 여기서 인생을 걸고 도전을...”
“도전은 나중에 천천히 해. 지금은 훨씬 중요한 문제가 있어.”
마법제국 황궁에 ‘황제’밖에 없어서 곧바로 빠져나왔다.
귀염성 없는 아들놈의 설명에 따르면, 카이사는 어머니의 이삿짐 꾸리기를 도와드리고 있단다.
그러면 여기는 볼일 없지.
애초에 후배를 북대륙으로 유인하려고 아들을 이용한 것이다.
이제, 본래 목적대로 몰랑교 성지로 갈 예정이었는데...
“뭔데요?”
“하여간 있어.”
내가 소환된 원인이 고작 이런 하찮은 이유라면 상당히 우울할 것이다.
“그래서 어딜 가는데요?”
“내 고향별 친구에게.”
“아! 제가 맞춰볼게요. 선배 아저씨는 자신이 소환된 원인이 고향별의 삶에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군요?”
“......”
아직 단정하기에는 이르다.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
“이번에는 콜택시를 안 부르세요?”
“황궁에서 가깝거든.”
여기는 판타지아1에서 최대규모를 자랑하는 대도시 몰랑나서스.
능력 좀 되는 용사들은 전부 여기에 몰려 살고 있다.
나쁜 의미로.
능력에 걸맞게 판타지아2로 승급하지 않고 저학년에 터줏대감처럼 주저앉았다는 뜻이니까.
물론, 조만간 정리할 것이다.
퇴학당할래? 복학할래?
하지만 이게 참으로 애매하다. 정말로 능력이 안 돼서 유급한 용사도 있기 때문이다.
여태까지는 이 사회부적응자들을 구도하는 차원에서 봐줬지만, 이점을 악용해서 고의로 레벨과 스킬을 안 올리는 연놈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젠 가차 없이 정의의 철퇴를!
우리는 이번에도 남의 집 담장을 넘어서 입장했다.
“후배. 또 촌년처럼 한눈팔지 마.”
“안 그래요!”
“조용.”
“헙!”
후배가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너무 부주의한 거 아니야?
던전에 던져놓으면 바로 함정 밟고 죽을 것 같은 이 촌년에게 정말로 용사의 자질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다행히 이번에는 집주인의 기습이 없었다.
“가, 강한수...? 정말로 너냐?”
“오랜만이다, 친구야!”
으리으리한 저택에 사는 이 고등학교 동창생도 퇴학 후보에 들어간다. 그도 곧 선택을 강요당할 것이다.
“...그 친구의 고향별 이름은?”
“정말 오랜만이다, 야.”
“또 까먹었냐! 네가 그러고도 친구냐, 이 망할 자식!”
덥석.
그렇게 핀잔주면서 양팔로 나를 끌어안는 동창A.
남자에게 안겨서 기분이 매우 언짢았지만, 지금은 할 말이 있어서 참기로 했다.
“물어볼 게 있어.”
“오자마자 용건부터 꺼내는 게 참으로 너답긴 하다만, 그러지 말고 집에 들어와.”
“자식 자랑?”
“짜샤. 이럴 때는 모르는 척하고 초대에 응하는 거야.”
“......”
그렇게 해서, 나와 후배는 동창A의 집에 초대됐다.
*
용사님의 에필로그(epilogue).
가출선배처럼 타락해서 막장의 막장을 달릴 수도 있지만, 보통은 이 친구처럼 흘러갈 것이다.
“안녕하세요, 강한수 용사님.”
“오랜만이에요, 쑥떡의 아버님.”
모험하며 만난 두 여성과 결혼해서 대가족을 꾸렸다.
“조금 놀랍네.”
내가 엮어준 용족 혼혈 용자는 이해하지만, 권력의 노예였던 신성제국 황녀가 여기에 있는 건 의외였다.
내 표정을 읽은 걸까?
황녀가 젖먹이 아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제 권력욕보다 남편의 끈질긴 애욕이 더 강했거든요.”
“흠흠!”
“회귀를 반복한 남편과 신혼생활만 14번 했죠. 그리고 이 기억들이 한꺼번에 몰려들면서... 당신이라면 더 말 안 해도 아시겠지요?”
충분히 알아들었다.
반복 학습!
하지만 같은 여자와 14번 결혼한 이 친구의 근성도 알아줘야 할 것 같다.
황녀는 매번 새로웠겠지만, 녀석은 비슷한 삶의 반복이니까.
그건 꽤 지루할 것이다.
“한수야. 나는 그 지옥 같은 회귀를 멈춰준 마스터 몰랑께 매일매일 감사드리고 있어.”
“호오...”
“정말이야. 내가 모르는 평행세계에서 내 아내가 다른 남자와 잔다고 상상해봐. 나는 견딜 수가 없었어. 하루하루가 너무나 괴로웠어.”
“......”
“그런데 마스터 몰랑이 여신을 몰아내고 그 지옥을 끝내주셨어. 내가 그분께 보답할 길이 기도와 기부금밖에 없다는 게 한탄스러울 따름이야.”
“몰랑계시록 9장 13절. 불공정한 율법학자가 진저리치더라. 그분은 누구에게나 몰랑하시기 때문이다.”
“몰랑-”
“몰랑.”
“친구야. 마스터 몰랑은 너를 위해서만 몰랑하신 게 아니야. 그러니 부담 가질 필요 없어.”
“그건 알지만... 몰랑.”
“그래. 그거면 돼. 몰랑.”
우매한 후배가 우리의 고등한 대화를 따라오지 못하는 모습이 무척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 아이들을 소개해줄게.”
“용건부터...”
“그건 이따가 밤새 들어줄 테니 걱정하지 마.”
“......”
몰랑한 내 신경이 점점 팽팽해지려고 했지만, 처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척추 잡긴 좀 그래서 참았다.
지금이라도 다른 동창을 알아볼까?
그 생각을 15번쯤 했을 때, 드디어 본론을 꺼낼 수 있었다.
“강한수, 네 학창시절?”
“그래.”
“흠...”
“......”
“기다려봐. 200년도 더 된 옛날 일이잖아. SS급 지능이 아니었다면 진즉 까먹었을 거야.”
“솔직하게 말해봐. 네 말대로 200년 전의 일이잖아.”
두근두근.
2회차 성적표를 받기 직전처럼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학창시절에 친구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었는가?
지금의 내게는 매우 중요했다.
“짜증 나는 녀석이었지.”
“...너무 추상적인데.”
“우리와 판타지 소설과 게임 등을 똑같이 즐기면서 공부도 그럭저럭 잘하던 놈이었지. 수세식 변기가 없는 판타지 세계는 싫다고 했었나? 조금 엉뚱한 구석이 있긴 했지만, 내가 직접 겪어보니 수세식 변기의 소중함을 알겠더라. 하하!”
“끝?”
“흐음... 세세하게 얘기하면 끝도 없지. 교과서에 없는 과학용어까지 알면서 친구 이름은 자주 까먹는 점? 신비한 과학사전처럼 잡지식을 많이 알고 있는 너를 좋아하던 여학생이 있었다는 거?”
“음? 있었어?”
“있었지. 내 아내 다음으로 아름다운 여성분과 결혼한 너에게는 이미 지나간 과거지만, 우리 학년에서 가장 예쁘다는 여학생 중 하나였지. 이성으로서 너를 좋아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랬군...”
“뭔가 후련한 표정이네? 마누라에게 바람둥이라고 구박이라도 받았어?”
“아니.”
나도 사회부적응자였다는 의심이 완전히 풀린 건 아니었지만, 이건 내 주관이 아닌 동창의 판단이니 십중팔구 틀림없을 것이다.
“...아! 맞다!”
“뭐가 또 남았어?”
“그 여자애가 너를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나왔던 이유 말이야.”
“관심 없어.”
『너무 순진한 어떤 여신이 관심 많다고 합니다』
『너무 순진한 어떤 여신이 정말 궁금하다고 합니다』
『너무 순진한 어떤 여신이 초롱초롱 두 눈을 반짝입니다』
...이보세요. 언제부터 엿듣고 있었는지 물어보고 싶습니다만?
『매우 성급한 어떤 마신이 얼른 말하라고 재촉합니다』
『매우 성급한 어떤 마신이 이야기와 속옷을 교환하자고 제안합니다』
『어떤 수신이 갑작스러운 허전함에 식겁합니다』
마신도 아직 있었냐...
말하지 않으면 세상을 0번 멸망시킬 기세인 어떤 신들의 압박을 무의식적으로 느낀 걸까?
동창A는 부탁하지도 않았던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수능준비를 위해 일찍 간 수학여행 때, 현지에서 친절한 어떤 여대생을 만났었잖아.”
“그랬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어이. 당사자가 기억 못 하면 안 되지.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네가 여대생과 단둘이... 둘이... 어라?”
“너도 기억 안 나냐?”
“이상하네. 학창시절의 사소한 일까지 기억하는 내가 어째서 이 중요한 이벤트를 까먹었지?”
“......”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나는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니까.
“하여간 그 여대생 때문에 너의 연애설이 덩달아 튀어나왔어.”
“그랬군.”
굉장히 찜찜했다.
사소하다면 사소한 일이지만, 어떤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강한수, 너는 어디 사냐? 나도 나중에 찾아가...”
“판타지아 8학년.”
“켁!”
“꼭 와라. 기다리고 있으마.”
어엿한 가장이 된 이 친구가 퇴학당해서 가족들과 헤어지는 불상사가 없길 빌어주자. 몰랑.
*
결국, 내가 소환된 이유를 찾지 못한 채 모험이 막을 내렸다.
금방 고향별로 귀환할 줄 알았던 후배는 장기체류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결국은 다르군.”
나는 후배처럼 모험 도중에 생각이 바뀌지 않았으니까.
“저는 선배 아저씨가 고민하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몰랑계시록 10장 1절. 의심하지 않은 자, 몰랑하지도 말라.”
“그건 정말 모르겠네요! 하여간 아저씨의 고민은 정말 이상해요. 시간 낭비예요.”
“어째서?”
“저는 따라다니면서 선배 아저씨의 예쁜 아내와 훌륭한 아드님들을 봤어요. 친구도요.”
“내 아들들이 핵심이군.”
“그, 그건... 아무튼! 누가 보더라도 성공한 인생이잖아요. 그런데도 이 세계에 소환된 게 불만이세요?”
“......”
불만인가?
그렇다.
좋게 끝났으니 괜찮다는 사고방식은 잘못됐다.
그거야말로, 동족들을 이끌고 개미지옥으로 돌격해온 요정공주 실비아와 하등 다를 게 없지 않은가?
그때, 후배가 말했다.
“산적왕의 잘생긴 외모를 보고 깊이 반성하는 중인데요. 그렇게 말한 아저씨도 좀 더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어쭈? 평생 볼 미남을 한꺼번에 본 것처럼 굴던 애가 뭐래?”
“그건 그거고요! 아저씨는 진짜 성격 나빠요. 남의 약점을 잡고 대화의 본질을 비틀잖아요.”
“너, 국어 좀 했구나?”
“제가 좀... 앗! 이번에는 안 당해요! 흠흠. 한 번 들어보세요. 아저씨는 신천지(新天地)로 이탈하기 원하는 사회부적응자만 판타지아 세계로 소환된다고 하셨죠?”
“그랬지.”
“하지만 그러면 이 세계가 너무 가엾지 않나요?”
“...음?”
가엾다니?
“그렇잖아요. 다른 차원에서 버려진 인간들을 받아주는 세계. 쓰레기처리장이랑 뭐가 달라요?”
“그건...”
그편이 공짜로 부려먹기 편해서 사회부적응자만 뽑는 거다.
그런데 후배의 생각은 조금 다른 모양이다.
“점점 쌓여가는 쓰레기에 위기의식을 느낀 세계가 정말 필요로 하는 인간을 소환한 게 아닐까요?”
“자정작용(自淨作用)?”
“예? 예. 그거요.”
“......”
시스템에는 그런 기능이 없다.
규격화된 선별기준에 맞춰서 용사를 소환하게 되어있다.
환경오염을 스스로 정화하는 자정작용 같은 유용한 기능이 없다.
판타지아 세계란?
범우주적 그린피스!
다른 차원에서 버려진 인간들을 재활용해서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시설이다.
...하지만 만약, 만약에 그 허용치를 넘어서서 판타지아 차원이 위기의식을 느꼈다면?
“시간만 낭비한 줄 알았는데, 막판에 도움이 되네.”
“저 들으라고 한 말이에요?!”
“칭찬이야.”
“그런 뼈 때리는 칭찬은 됐고, 크리스 황제님이랑 또 만나게 해줘요.”
“거기서부터는 네가 알아서 해. 안면은 익히게 해줬잖아.”
“쳇.”
“...하지만 후배가 8학년까지 올라온다면 진지하게 생각해볼게. 내 아들이 그때까지 독신일 거라고는 보장 못 하지만.”
“아저씨. 남의 꿈과 희망을 짓밟아서 속 시원하세요?”
“하핫!”
나는 유쾌하게 손을 흔들며 툴툴거리는 후배와 작별했다.
팟-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자.
과거의 나였다면 고향별 지구를 떠올렸겠지만, 이젠 아니다.
판타지아8.
1학년부터 7학년까지는 장인어른의 더미가 수고해주지만, 8학년만은 내가 직접 상대해준다.
여긴 그 최종결투장.
다른 이름은 총장실이다.
“주인님. 시찰은 어떠셨나요?”
용사의 도전을 아직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마왕의 탑 100층.
그곳에 놓인 수세식 변기에 앉아서 나를 기다리는 여인이 있었다.
나는 정의로운 용사의 미소를 지은 채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히프리아.”
“네.”
“나는 아직도 너의 용사님인가?”
“그럼요.”
망설임 없는 대답.
그렇다면...
“파르마엘에게 지배받던 이 세계도 나를 그렇게 생각할까?”
후배의 말마따나 판타지아 세계에 시스템을 초월한 자정작용이 정말로 존재하더라도, 나를 ‘용사’로 생각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증명하지?
“후후후! 주인님도 바보스러울 때가 있네요.”
“그, 그런...”
쏘시아가 아닌 히프리아가 내게 그런 심한 말을 하다니...!
“당신이 FFF등급을 받은 이유를 떠올려보세요.”
“이유?”
“그것은 파르마엘 여신의 치세에 저항했다는 증거랍니다. 그러니 자부심을 가지세요. 나의 FFF급 관심용사님.”
“아...”
그랬다.
나는 FFF급 관심용사.
꿈과 희망의 판타지아 세계에 정의를 우뚝 세운 용사다.
“여태 그걸 고민하신 거예요?”
“하, 하하... 나의 성녀님. 용사도 성검을 놓칠 때가 있는 법이야.”
“자주 놓치시죠.”
“하핫!”
판타지 여신에게 도전했던 FFF급 용사는 오늘도 기다린다.
SSS급 후배님들의 도전을.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