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엄청난 마력을 뿜어내던 팔라딘이 윤강산과 민섭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이 이단자들.”
윤강산이 참다가 소리쳤다.
“너희 같은 놈들이 위에 있으니 종교가 썩었다느니 그런 말이 나오는 거야. 그리고 너, 그런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개새끼마냥 저 늙은이들의 말만 듣고 사람을 죽이려 하냐?”
“원로들의 말은 곧 법이다.”
짧은 목소리가 울리고 팔라딘의 손에 마력이 모여들었다.
구형 모양으로 변한 금색의 마력.
“이단은 지옥으로 꺼져라.”
팔라딘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윤강산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자신의 모든 능력을 써도 막지 못한다.
윤강산이 민섭에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마지막 말을 전했다.
“미안하다… 민섭아. 죽으면 마수아가 욕 엄청 하겠지….”
윤강산과 민섭의 눈이 질끈 감겼다.
콰과과광!!!!
큰 폭발이 일어났다.
그 폭발은…….
팔라딘의 팔이 아닌, 민섭과 강산이 딛고 있는 바닥에서 일어났다.
바닥이 폭발하듯 팽창하며 산산이 조각났다.
그리고.
심판의 자리에 큰 구멍이 생겨났다.
극적으로 피한 강산과 민섭의 눈에 구멍에서 튀어나온 생명체가 보였다.
“최한!”
민섭과 강산을 발견한 최한이 멋쩍은 웃음을 보이며 소리쳤다.
“여! 살아 있었네!”
강산이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래…. 아직 살아 있나 보네…….”
민섭이 소리쳤다.
“최한! 어서 편지 좀 꺼내 봐!”
머리를 긁적이던 최한이 무언가 생각난 건지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이거?”
두 장의 편지.
편지를 발견한 민섭과 강산의 얼굴에 밝은 표정이 지어졌다.
“다행이다. 가지고 있었구나…. 그런데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야?” 보라색 머리를 가진 여성.
그녀의 등장에 자리에 앉아 있던 원로들이 안절부절못하며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째서…. 밖으로 나온 것이냐…. 성녀….”
모든 시선을 모으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너희들이구나…… 성녀를 가둔 놈들이….”
원로들을 바라보고 있는 최한의 얼굴에 악마의 표정이 깃들었다.
쫙쫙-.
최한이 손에 든 편지를 반으로 찢었다.
“이딴 거 필요 없어. 지금부터 너희들에게 벌을 줄게.”
강산과 민섭의 표정에서 영혼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침묵이 흘렀다.
지금껏 이 장소에서 이토록 당당한 목소리를 낸 인간은 없었으니까.
심각한 얼굴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원로들이었다.
하지만.
“하하하하하하하!”
긴 침묵 뒤 이어진 것은 원로들의 웃음소리였다.
원로들의 비웃음이 곳곳에 메아리쳤다.
“정신이 이상한 꼬맹이로군.”
“여기가 어딘지 모르는 모양이야.”
“용감하면 명이 짧은 것도 모르고는….”
최한의 귀로 똑똑히 들렸다.
그들의 입 모양은 읽을 수 없었지만, 어째선지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최한이 고개를 내려 성녀를 바라보았다.
“네… 제 스킬입니다…. 이게 편할 것 같아서….”
최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손을 들어 성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뭐 하는 짓이냐! 불결하도다!”
심판의 법정을 울리는 한 남자의 목소리.
최한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원로들 사이 금색의 큰 의자에 앉아 있는 흰머리의 노인이 보였다.
정확히 말하면 노인이었지만, 큰 풍채와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한 기운은 웬만한 젊은 남성보다도 강렬했다.
“세르지오…… 교황님…….”
성녀의 작은 목소리가 울리고…….
최한의 손으로 전해져 왔다.
두려움과 분노가 묻어 있는 작은 떨림이…….
두려움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있는 성녀의 얼굴 양쪽으로 손이 얹어졌다.
그 손은 작은 힘을 주고 있었지만, 강압적이지도 위협적이지도 않았다.
성녀의 눈이 떠졌다.
“괜찮아. 약속했잖아, 구해주기로…….”
파란색 눈동자 속으로 들어온 그 남자의 얼굴은 부드러우면서도 향긋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어떤 표정보다 믿음직스러웠다. 또한 그가 진심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성녀는 느낄 수 있었다.
쿵!
교황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서 손 떼지 못할까! 이단 놈! 힘이 탁해진단 말이…….”
목소리가 이어지지 않았다.
분노를 태운 채 법정을 돌아다니던 인간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너구나…… 성녀를 그곳에 가둔 게.”
작은 목소리가 울리고 법정에 있는 모든 시선이 한곳으로 옮겨졌다.
좇지 못했다.
아니, 그곳에 당도했다는 것을 알아채지도 못했다.
“교황님!”
“세르지오 교황님!”
“주님이시여…….”
법정이 순식간에 탄식과 공포로 휩싸였다.
교황의 다리가 땅을 떠나 있었다.
“사… 살려줘…….”
거친 숨 사이로 쥐어짜 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최한에게 멱살이 잡혀 있는 교황의 모습이 보였다.
“네 목숨은 아까워? 어린 소녀의 몇 년이라는 시간을 앗아가 놓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생이별하게 해놓고… 너는 겨우 이 고통도 못 참는 거냐?”
하늘로 길게 뻗은 손에 매달린 교황이 필사적으로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신의 뜻이다…… 서… 성녀는… 신의 뜻을 따라 바티칸을 지키…….”
“저 지하에 갇혀 지내는 게… 썩어가는 곰팡이 냄새를 맡는 게… 딱딱해져 버린 빵을 먹는 게…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게…… 바티칸을 지키는 거냐!”
주위에 있던 원로들이 하나둘씩 목소리를 내었다.
“어… 어서 놔라! 이단!”
“성역에 있어야 할 성녀를 풀어준 것도 모자라 교황님에게 손을 대다니!”
“성녀는 바티칸을 지키려고 태어난 것이다!”
최한의 입술이 떨려왔다.
“어이, 노인네들…… 그동안 잘 빨아 먹었나 봐? 피부도 그렇고 목소리들도 그렇고…… 성녀의 힘으로 노화를 멈추고 있었지?”
원로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 이단 놈! 못 하는 말이 없구나!”
“바티칸은 곧 우리다.”
“원로들이 있어야 바티칸이 번영할 수가…….”
큰소리치던 원로들의 목소리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더는 입을 벌릴 수가 없었다.
눈이…….
빛에 반사된 그 갈색 눈동자가…….
더 이상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무리 깨끗한 물이라도 흐르지 않고 고이면 썩기 마련이지. 이봐! 성녀! 잘 봐둬! 바티칸이 사라지는 순간을!”
멍하니 있던 성녀가 최한을 보며 다급하게 말했다.
“아… 안 돼요! 진짜 바티칸이 사라지면… 우리 가족도… 죄 없는 사람들까지도…….”
원로들을 바라보고 있는 최한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걱정 마! 내가 사라지게 하는 건 이 도시가 아니야. 이 도시에 뿌리내리고 있는 기생충들이지. 지금 이 시간부로 바티칸은 다시 태어날 테니까!”
최한의 주먹이 당겨졌다.
“사… 살려줘…. 팔라딘…….”
쾅!
큰 폭발음과 함께 최한과 교황이 있던 자리가 연기로 자욱해졌다.
“이거…… 참…… 언제까지 방해할 셈이야? 원로들의 악행을 알고서도 감싸주려고?”
최한의 시선으로 팔라딘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설령… 원로회가 썩었다고 해도… 신의 뜻으로 바티칸을 지키는 것은 변함없다. 바티칸과 교황을 지키는 것이 신께서 주신 팔라딘의 숙명이니까.”
금색 오라가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전투 형태.
팔라딘이 새하얀 날개를 펄럭이며 질식할 것 같은 강한 기운을 최한에게 쏘아내고 있었다.
“넌 너무 꽉 막혀 있다니까. 그렇게 살면 주위에 아무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친구… 동료 따위 필요 없다. 이 검을 받은 순간부터…….”
최한이 들고 있던 교황을 바닥으로 던졌다.
“노인네들 벌주기 전에 너부터 좀 정신 차리게 해야겠다. 너 그렇게 딱딱하게 살다가는 언젠가…… 부러진다.”
“난 바티칸의 검이다. 부러질 리…… 없다!”
팔라딘이 허리에 찬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반으로 잘려 있는 검.
부러진 엑스칼리버에서 금색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터질 듯이 뻗어 나가는 금색 빛에 법정에 모인 사람들 모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단 두 사람.
최한과 팔라딘 ‘토티’만이 두 눈을 부릅뜨며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깔끔하게 잘린 단면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전설 아이템.
엑스칼리버가 복구되었다.
“너는 큰 죄를 저질렀다. 성역에 있어야 할 성녀를 납치한 것과 바티칸의 심장인 교황에게 해를 가한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팔라딘을 약하다 한 것!”
팔라딘이 엑스칼리버를 머리 높이 들어 올렸다.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이 엑스칼리버로 모여들었다.
“안 돼요, 토티! 그렇게 강한 힘을 사용하면 당신 목숨이…….”
성녀의 목소리에 팔라딘이 작게 대답했다.
“상관없습니다. 몇 년분의 목숨을 잃더라도…… 눈앞의 이단을 없앨 수 있다면 전 괜찮습니다. 주위에 보호 결계를 부탁합니다…… 마리아…….”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이단이 아니라고요! 제발…… 제발… 토티…….”
팔라딘은 성녀의 외침을 듣지 않았다.
슬픈 표정을 짓던 성녀가 두 손을 모은 채 눈을 감았다.
성녀의 머리 위로 하얀빛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빛은 날개 달린 인간의 형태로 모습을 바꾸더니 천상의 목소리로 노래하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아아아-.”
청아하고 맑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최한과 팔라딘의 주위로 구형 보호막이 생성되었다.
“네놈 따위가 이 검의 무게를 알 리 없겠지……. 이것이 내 수명과 맞바꾼 최강의 힘이다. 막을 수 있으면 막아 보거라….”
“내가… 너를 약하다 한 이유가 이거야. 넌 힘을 써야 할 곳을 잘 못 알고 있어. 이미 마음속 깊숙이 색칠된 네 신앙심에는 관여할 생각 없어. 하지만…….”
최한이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색색의 보석이 박혀 있는 단검.
드워프들에게 선물 받은 신화급 아이템이었다.
“원로회가 썩어 버린 것을 알고도 종교와 너의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해 부하와 자신의 목숨을 소중히 하지 않는 놈은 아무리 강한 무력을 가졌다 해도…… 약한 거야.”
최한이 몸을 살짝 숙여 단검의 날이 몸쪽으로 가게 자세를 취했다.
“걱정 마라, 팔라딘이여! 이단의 목소리 따위 들을 필요 없다. 넌 신이 보내주신 엑스칼리버의 주인! 바티칸과 나를 지키는 것이 너의 숙명이다! 넌 목숨을 바쳐 날 지키면 된다! 으하하하하!”
바닥에 쓰러져 있던 교황이 어느새 일어나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알고 있으니까.
신의 가호를 받은 전설급 아이템 엑스칼리버.
그리고.
전 세계에서 가장 강하다 알려진 S급 팔라딘이 있는 이상 패배는 없다는 것을…….
팔라딘이 입술을 깨물며 눈을 감았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엑스칼리버의 날이 최한을 향해 떨어졌다.
엑스칼리버가 지나간 공간이 뒤틀려갔다.
시공간이 버티지 못했다.
.
.
.
최한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검술 1초식…… 바람 가르기.”
슈우우우웅-.
작은 단검에서 바람 소리가 일었다.
그리고.
콰과과쾅!!!!!!
땅에서 시작된 그 폭발이…….
바티칸 상공에 있는 모든 구름을 잘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