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이 녀석 모두 알고 있다.
유영진의 모습으로 변해 있던 유미나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대체 언제부터….’
“대체 언제부터…라고 생각했지?”
생각을 읽힌 유미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처음부터… 네가 이곳에 들어와 나를 상무라 부를 때부터. 유영진은 회장님이라 부르거든. 뭐, 취조하듯 묻는 이상한 질문들도 한몫했고. 마지막으로 확신을 가진 것은….”
“…….”
“너와 함께 있었던 K의 부하들. 내가 묻지 않자 그들의 이야기를 쏙 빼먹는 것을 보고 확신했지. 너무 진부한 변명이었어. K의 부하들이 당해서 혼자 도망쳐 왔다거나, 최한이 사라졌어도 K의 부하들과 함께 왔어야 맞는 건데 말이야….”
조민성 상무의 목소리에 유미나의 발이 조금씩 뒤로 움직이고 있었다.
“멈춰.”
사무실을 채우는 작은 목소리.
그 명확하고도 단호한 소리에 유미나의 몸이 순식간에 돌처럼 굳어 버렸다.
유미나의 존재까지는 아니지만,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남자가 유영진이 아니란 것을 확실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아마…… 최한이 보낸 거겠지? 동영상을 찍어 나에게 한 방 먹여주려고 말이야…. 하지만.”
행동을 대신하는 조민성 상무의 눈짓에 K의 다리가 움직였다.
거구의 남자가 자신을 향해 조금씩 다가왔다.
눈을 마주치고 있는 것만으로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게… 사신이라 불리는 S급….’
유영진으로 변한 유미나의 온몸이 땀에 젖어갔다.
“너희는 상대를 잘못 골랐어. 내가 너를 순순히 보내줄 것 같았나? 아니면 정말 내가 너희 같은 놈에게 속을 줄 알았던 거야?”
조민성 상무의 목소리가 K의 어깨를 넘어왔다.
K의 존재감과 무섭도록 냉철한 조민성 상무의 목소리에 유미나의 얼굴에 포기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유영진으로 변한 유미나의 고개가 땅으로 향했다.
축 처진 어깨.
조민성 상무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어차피 너희가 뿌려봤자 내 선에서 다 정리할 수 있긴 하지만, 그래도 뭐, 눈앞에 있으니…… 핸드폰은 압수해야겠어.”
“…….”
대답 없이 고개를 떨구고 있는 유미나의 모습.
“벌로 휴대폰 들고 있는 손목까지 가져와. K.”
짧게 울리는 조민성 상무의 목소리.
K의 손이 높게 들렸다.
사신의 낫이 손목을 자르기 위해 빠르게 내리쳐졌다.
슈우웅-.
그때.
팟!
순식간에 어두워진 내부.
JJ 본사 전체가 정전되었다.
그때, 들리는 작은 목소리.
“도박이긴 했지만, 그래도…… 바보는 아니야. 우리가 설마 패, 하나 없이 이런 미친 짓을 했을 거 같아?”
유영진으로 변한 유미나의 얼굴에 자신감 넘치는 웃음이 지어지고.
K의 얼굴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통유리 창에 시선을 둔 K의 입에서 짧은 욕설이 튀어나왔다.
“씻!”
콰과과광!!!!!
쨍!!!!!!!
천둥소리와 함께 사무실의 유리창이 박살 났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사무실 내부.
대포처럼 날아온 무언가 때문에 책상이건 소파건 사무실을 채우고 있던 물건들이 모두 박살 나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쑥대밭이 된 사무실과 대자로 뻗어 있는 비서를 보며 목소리를 내뱉는 조민성 상무.
고개를 들어 자신의 앞을 가리고 있는 거구의 남자에게 시선을 옮겼다.
“이거 한 방 먹었군…. 내가 클라이언트를 지키는 게 얼마 만인지….”
이마에 피를 흘리고 있는 K의 표정이 더는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폭발과 유리 파편으로부터 조민성을 지키기 위해 K가 자신의 몸을 방패로 삼았다.
“이거 방탄유리인데……”
조민성 상무의 얼굴에 아직도 놀란 기색이 가라앉지 않았다.
“어이.”
새로운 목소리.
조민성과 K의 시선이 한곳으로 행했다.
노란 머리칼.
새하얀 교복.
남자를 알아본 K의 입이 떨어졌다.
“너는… 그때 그 꼬맹이….”
한 손으로 유영진으로 변한 유미나를 들고 있는 한재석의 모습이 보였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매만지며 한재석이 말했다.
“꼬맹이가 아니고 한재석이다.”
한재석의 시선이 K에게 향했다.
잔뜩 구겨진 얼굴로 웃고 있는 K의 모습.
그리고 그의 손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기운.
‘저건 그때….’
한재석의 기억 속. K와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민섭의 목을 쥐고 있을 때 풍기던 검은 오라.
“준비한 패가 너였나? 네까짓 꼬맹이가 내게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작게 미소 짓는 한재석.
“안 이겨, 오늘은.”
“뭐?”
“어떤 놈이 하도 부탁을 해서 말이야.”
“…….”
“혹시 다음에 볼 기회가 생긴다면 그때는 이겨줄게. 더 강해져서 말이야.”
빠르게 창가로 달리는 한재석.
“그냥 보내줄 것 같아!”
작은 미소와 함께 K를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이는 한재석이었다.
콰과과광!!!!!!!!!!
마른하늘에 번개가 치듯 공기를 찢는 굉음이 울리고
한재석이 다리에서 쏟아져 나온 전류를 타고 순식간에 보이지 않을 정도까지 날아갔다.
정적이 흘렀다.
S급의 킬러.
300미터가 넘는 건물 최상층.
누구도 도망이란 단어조차 생각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
너무도 간단히 빠져나갔다.
부서진 창 앞에 멍하니 서 있는 K.
“이걸로…… 방탄유리를 깨고 들어온 거군. 이 정도의 자연계 능력자라….”
그때, 조민성 상무가 옆으로 다가왔다.
“매스컴은 모두 접수해 놨어. 저딴 녀석들의 말은 들어주지 않을 거야. 영상을 보내면 내게 연락이 오겠지.”
* * *
번개의 힘으로 빠르게 JJ 본사 꼭대기 층에서 벗어난 한재석과 유영진… 아니, 유미나.
아직까지 번개의 힘으로 하늘을 날고 있었다.
유영진의 얼굴이 뚝뚝 떨어지더니 유미나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후…… 죽을 뻔했네….”
“잘 찍었지?”
“그럼. 얼굴이랑 목소리 다 제대로 녹화됐을 거야. 그런데…….”
유미나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걱정 마. 생각이 있으니까, 이런 일을 시킨 거겠지.”
“그렇겠지?”
한재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미나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그런데 있잖아….”
“뭐가.”
“그러니까, 내가 지금 이상하게 느끼는 건지도 모르겠는데….”
유미나의 시선에 평온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한재석의 얼굴이 들어왔다.
“네 표정 보니까… 더 물어야겠는데… 지금 우리 떨어지고 있는 거 아니지?”
“맞아.”
“…….”
응?
어….
그러니까….
많은 생각과 단어들이 유미나의 머릿속을 스쳐 갔다.
“떨어지는 거라고?”
“응.”
“꺄아악!!!!!!!!”
슈우우웅!
번지점프.
아니, 300미터부터 떨어지는 번지점프가 어디 있으랴.
그것도 줄도 매달지 않은 채로.
“멈춰! 멈춰! 빨리! 바보야! 번개! 번개라도 치든가! 그냥 떨어지면 죽는다고!!!!!”
“아! 움직이지 마!”
고층 빌딩 사이로 낙하하고 있는 그들의 표정은 너무도 달랐다.
한재석의 팔에 붙들려 있는 유미나는 눈물까지 보이며 발악하고 있었다.
“살려주세요! 난 아직 죽기 싫어요! 분명 사주에 70살까지는 산다고 했는데!”
“아! 쫌! 가만히 좀 있으라고!”
허공을 허우적거리는 유미나의 정신은 이미 반쯤 나간 상태였다.
“엄마! 살려줘요! 이렇게 싸가지 없는 애랑 같이 죽긴 싫어요!”
한재석의 얼굴이 구겨졌다.
“뭐! 싸가지? 너 말 다 했냐?”
“아! 몰라! 죽기 싫어! 살려주세요!”
한재석의 시선으로 유미나의 반쯤 풀린 눈이 들어왔다.
“휴… 읏짜!”
찌지직….
쾅!!!!!!!!
굉음과 함께 콘크리트 바닥이 내려앉으며 크게 금이 갔다.
툭.
한재석이 들고 있던 유미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뭐 거의 던지다시피 했지만….
유미나가 그대로 바닥에 누운 채 온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주님… 천지신명님… 부처님… 감사합니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짝짝짝-.
박수 소리를 내며 누군가 다가왔다.
“이야… 대체 어디서부터 떨어진 겁니까, 재석 군?”
미리 만나기로 한 장소에 대기 중이던 오지훈이었다.
한재석이 유미나를 들고 있던 팔을 주무르며 말했다.
“JJ 본사 꼭대기 층 정도?”
“70층이라…. 역시 S급이 되고 신체 능력이 A급이랑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올라갔네요.”
“뭐… 그렇죠.”
“이렇게 무사히 돌아온 걸 보면, 작전은 성공한 거겠죠?”
한재석이 아직까지 누워 떨고 있는 유미나에게 시선을 옮겼다.
“휴… 영상은 쟤 핸드폰에 있을 거예요. 그런데….”
“그런데?”
“진짜 어쩔 생각이에요? 매스컴 쪽은 그놈이 다 손써놨을 텐데.”
“아마 조민성 상무와 관련한 어떤 뉴스도 큰 사건도 받아들이지 않겠지요.”
“…….”
한재석이 혀를 차며 땅을 찼다.
머리싸움은 자신의 영역이 아니었기에, 이 얽힌 상황이 짜증 나기만 했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오지훈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도 완전히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최한 군과 얘기하다 답을 찾았거든요. 매스컴의 제지 없이 영상을 크게 터트릴 수 있는 방법을요.”
“뭔데요, 그게?”
“우선 그 방법을 말씀드리기 전에 최한 군이 한마디만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에?”
한재석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진짜, 진짜 미안하다고요.”
* * *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기자회견의 진행을 맡은 아나운서 유한준입니다.”
대한민국 8번째 S급 능력자.
전 세계에서 제일 많은 S급 능력자를 보유한 국가.
플래카드가 벽면을 가득 채웠다.
그 아래로 혼이 빠진 표정으로 앉아 있는 한재석의 모습이 보였다.
찰칵!
찰칵!
수많은 플래시 세례가 이어졌다.
한재석이 반쯤 혼이 빠진 상태로 중얼거렸다.
“미안하다고 했던 이유가…….”
한재석의 옆에 앉아 있던 오지훈이 작게 속삭였다.
“미안합니다. 재석 군……. 그냥 앉아만 있어 주세요….”
최한과 오지훈이 생각해낸 방법.
매스컴 쪽에 손을 써둬서 조민성 상무와 관련된 어떤 뉴스도 큰 사건도 받아들이지 않을 테니까….
그것보다도 더 큰 이슈를 만들면 된다.
“그럼 대한민국 8번째 S급 능력자 한재석 군의 기자 회견을 시작하겠습니다.”
플래시 세례가 또 한 번 이어지고, 한재석의 옆에 앉아 있던 남성이 마이크를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십니까. 브로스 길드장 최수혁입니다. 7번째 S급 능력자의 기자 회견이 끝난 지 며칠도 안 된 시점에 이렇게 또 좋은 일로 인사드릴 수 있게 되어서 저 또한 너무 기쁜 마음입니다.”
타닥.
타다닥!
기자들의 타자기 소리가 기자회견을 가득 채웠다.
“오늘은 두 가지의 경사가 있는 날입니다. 바로 8번째 S급 능력자가 나온 것과 동시에 중국이 가지고 있던 S급 능력자 최다 보유국 타이틀을 저희 대한민국이 빼앗아 오게 되었으니까요.”
타닥.
찰칵!
타다닥!
찰칵!
“S급 능력자 최다 보유국. 그냥 이름뿐인 타이틀이 아닙니다. 과거 군사력으로 세계적인 강대국을 정했다면, 지금은 다릅니다. 던전과 몬스터가 나타난 이 능력자 세상에서 S급 능력자 한 명의 가치는 그 어떤 미사일과 군대와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큰 국가의 힘입니다.”
최수혁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것이 본론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도 8번째 S급 능력자가 나타난 것은 사실이고, 대한민국이 어느 나라보다도 강대국으로 우뚝 솟아오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으니까.
대통령, 국회의원, 공직자, 아니, 국민들에게 까지도….
지금의 뉴스는 그 어떤 것보다 자세히 알려주어야 하는 것이니까.
두려움을 없애는 것도 브로스 길드의 역할이니까.
“그럼… 우선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하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 발표가 더 있습니다.”
한참을 이야기하던 최수혁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하나 꺼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최한… 다음은 너에게 맡기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까먹은 거야? 내 장난감을 가로챘으니, 당연히 새로운 장난감이 되어야지. 내가 최만식한테 투자한 시간과 뒤를 봐준 게 얼만데.”
휴대폰 화면을 뚫고 나오는 목소리.
그리고 그 주인공의 모습이 휴대폰을 잡은 카메라에 고스란히 전국으로 생중계되었다.
JJ 조민성 상무의 악행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