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최한과 아이들이 거대한 황금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와….”
모두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끝없이 펼쳐진 하늘.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한 하늘이 보였다.
마치 하늘색 바다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그 끝을 가늠할 수도, 그 깊이를 짐작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 끝없는 하늘에서 뻗어 내려오고 있는 갈색의 긴 무언가.
구불거리고 서로 엉켜 있는 모습에 단번에 그것이 무언인지는 알아챌 수 없었지만, 밑으로 내려올수록 작아지는 그 모습에 비슷한 무언가를 떠올릴 수는 있었다.
“설마… 나무야?”
“나무보단 뿌리 같은데….”
한재석과 강진철이 그것의 거대한 위용에 몸이 굳어 입만 살짝 움직이고 있었다.
거대한 나무뿌리 중 하나가 최한과 아이들이 서 있는 장소에 박혀 있었다.
그리고.
“어서들 오시게.”
급작스레 울린 낯선 음성에 최한과 아이들이 흠칫 놀라며 시선을 옮겼다.
거대한 나무뿌리가 박힌 곳에 작은 샘이 보였다.
말이 샘이지, 실내 수영장 정도의 큰 물웅덩이였다.
“저게 뭐냐….”
“이거… 호러 장르였나?”
“호러도 저렇게까진 안 해….”
아이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아이들의 시선이 모인 곳.
샘의 정중앙에 거대한 얼굴이 둥둥 떠 있었다.
나이 든 거인족의 얼굴 같았다.
목이 잘린 채 물 위에서 얼굴을 계속해서 돌리고 있었다.
“미안하네. 오랜만에 손님이 와서 나도 모르게.”
기쁨의 행동 같았다.
하나 그 모습이 꽤나 괴이해서 아이들의 몸에 거부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아…. 닭살 올랐어.”
돌아가던 얼굴이 멈췄다. 웃고 있던 표정이 사라지고 진지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너는….”
한재석을 유심히 바라보던 거대한 얼굴이 자신만 들릴 듯이 작게 말했다.
“재미있게 돌아가는군….”
한재석이 자신에게 향한 시선을 느끼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 토 나와….”
강진철이 한재석을 보며 말했다.
“근데… 언제 옆에 와 있었냐? 저기 땅에 박혀서 자고 있을 줄 알았는데.”
한재석이 반박하지 못하고 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돌렸다.
“그냥 좀 넘어가자….”
최한이 천천히 샘의 앞으로 다가갔다.
“당신이 미미르?”
“그렇다. 내 이름은 미미르. 우주의 지혜를 관리하는 자다.”
최한을 확인한 미미르가 작게 미소 지었다.
최한이 자신의 상태창에 쓰인 미미르의 이름을 확인했다.
‘여기가 맞나 보군. 그럼….’
최한의 입술이 떨어졌다.
질문할 것들이 너무도 많고, 머릿속에 정리도 되지 않았지만, 단 한 가지. 가장 먼저 질문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이건 개인적인 궁금증인데, 이곳으로 오는 입구를 왜 이렇게 찾기 쉬운 곳에 숨겨 놓은 거야?”
“너희는….”
미미르가 최한과 아이들을 쓱 한번 흘겨보더니 마치 다 안다는 듯이 미소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탑을 통해서 왔나 보군. 14층에서 온 건가?”
최한과 아이들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아무도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오가는 눈빛 속에 무언의 감탄이 느껴졌다.
“난 입구를 찾기 쉬운 곳에 숨겨 둔 적 없네. 들어올 수 있는 입구를 10개 정도 만들긴 했지만, 지난 1000년 동안 아무도 이곳에 오지 못했지.”
“우린 너무 쉽게 왔는데….”
“너희는 인간이니까. 난 신을 싫어해서 신들이 이곳에 오지 못하도록 숨겨 놨거든.”
“인간인 거랑 입구 찾는 거랑 무슨 상관….”
“상관있지. 신은… 무릎을 꿇지 않거든.”
“뭐?”
“이곳에 오려면 14층 얼음 초원뿐 아니라 다른 입구에서도 무릎 꿇고 문의 입구를 눌러야 하지.”
“문의 입구가 뭔데?”
“룬문자가 쓰인 작은 돌.”
최한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뭔가를 알아낸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민섭이가 기어가는 자세로 이곳으로 넘어온 거구나.’
이곳으로 오게 된 궁금증은 모두 풀렸다.
“그럼….”
이제….
시작이다.
물어볼 것이 산더미였다. 이 머리만 있는 거인에게 물으면… 자신이 왜 그곳에 100년 동안이나 갇혀 있었는지에 대한 해답도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최한의 입술이 떼어졌다.
“나를 왜 이곳으로 부른 거지?”
“너로군. 세계수의 기회를 얻은 자가.”
띠링!
띠링!
[‘거인족의 복수’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보상을 산정합니다.]
[미미르가 세계수의 진실에 대해 알려줄 겁니다.]
[오딘의 눈을 획득했습니다.]
[현자(EX) 칭호를 획득합니다.]
최한이 알림창을 확인하고 미미르에게 물었다.
“세계수의 기회가 정확히 뭐지? 나는 왜 100년이나… 100년이나 그런 곳에 갇혀 있던 거야!”
최한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뒤쪽에서 지켜보고 있던 한재석과 강진철 그리고 김민섭이 무슨 일인지 묻지도 못하고 그저 최한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물 위에 둥둥 떠 있던 미미르의 머리가 대답했다.
“차근차근 설명해 주마. 우선 세계수라는 것은 이 우주 전체를 떠받들고 있는 나무다. 내 뒤쪽에 있는 게 세계수의 뿌리고. 신들은 이것을 이그드라실이라 부르지.”
“우리가 사는 지구도….”
“맞다. 세계수는 총 아홉 개의 세상을 떠받들고 있다. 그 아홉 개의 세상도 세계수의 상중하부에 따라 세 개로 나뉘지.”
미미르가 눈을 깜빡하자.
샘의 위쪽으로 영화를 튼 것처럼 영상이 나오기 시작했다.
“신이 사는 천상계, 인간과 거인 난쟁이가 사는 중간계, 그리고 살아 있는 자는 들어가지 못하는 지하계로 나뉘어 있다.”
말로만 들었으면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미르가 샘 위에 만들어 낸 영상을 보고 최한과 아이들은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영상을 보던 최한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저… 저… 난쟁이가 사는….”
목소리뿐 아니라 온몸이 떨려왔다.
중간계를 설명할 때 나온, 난쟁이가 사는 세상.
그곳이 너무도 눈에 익었다.
슬쩍 눈동자만 올려 영상을 확인하던 미미르가 대답했다.
“니다벨리르. 우주에서 가장 손재주가 좋은 난쟁이들의 세상이지. 뭐… 그곳에 다른 종족도 살긴 하지만.”
“저곳이야…. 100년 동안이나, 이유도 모른 채… 매일 죽지 않기 위해 싸워온 세상….”
“그렇군. 항상 어디서 훈련을 시키나 했더니… 저곳에서 했던 거로군. 네가 왜 저곳으로 가게 된 건지 알려주마.”
최한의 심장이 터질 듯이 뛰기 시작했다.
“네가 저곳에 가게 된 이유는… 천상계에서 휴거가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휴거?”
“휴거는… 인간의 멸망이다.”
최한뿐 아니라 뒤쪽에 있던 아이들의 얼굴 전체가 구겨졌다.
미미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유를 물을 수도 있겠군. 인간은 너무도 빠르게 진화를 거듭하지. 그리고 너무도 빠르게 세상을 망가트리고 있어. 자연은 유한하지 않거든. 너희들 인간이 사는 세상의 유지를 위해 세계수의 에너지가 너무도 많이 소모되고 있어.”
“…….”
“그것도 한몫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저기 있는 예언의 반역자 때문이겠지.”
미미르의 큰 눈이 민섭을 향했다.
“신을 끌어내릴 수 있으니까. 자신들의 자리가 위험해질까 봐 겁난 거지. 그 잘난 신들이 말이야.”
모든 시선이 민섭에게 향했다.
최한이 가슴속에서 뜨겁게 터져 나오는 감정을 입 밖으로 내뱉으려다 미미르의 얼굴을 보고 차분하게 말했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네….”
“그럼. 난 지금 진실만을 말해야 하거든.”
“뭐, 받아들이긴 어렵지만, 받아들인다 치자. 그런데 인간들의 멸망과 내가 100년 동안 난쟁이 세상에 갇힌 게 무슨 연관이 있다는 거야?”
“모든 신들이 휴거를 찬성했던 건 아니야. 인간을 사랑하는 몇몇의 신들은 반대를 했지. 하지만 다수결과 최고신의 결정으로 인해 그들의 의견은 묵살되었지. 그래서 그들이 너를 선택한 거야. 휴거를 막기 위해서.”
최한의 머리가 핑 돌았다.
잡음 같은 것이 들렸다.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끓어오르는 분노에 머리도 가슴도 귀도 눈도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 아닌 듯했다.
잡음을 지우는 큰 고함.
“지들이… 하면 될 것이지. 왜 엄한 고딩을 데려다 100년이나 굴려 먹어!”
최한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한재석의 모습이 보였다.
“신은 최고신에게 대들 수 없으니까. 인간의 대표가 필요했거든. 그리고 이맘때 꼭 환생하거든, 그놈이….”
미미르의 목소리에 한재석이 입술을 쭉 내밀고 짜증을 냈다.
“참나…. 지들은 무서우니까, 숨고. 대신 싸워줄 놈 구한 거잖아. 아따! 신들도 별거 아니네!”
그제야 조금은 편안해진 표정을 짓는 최한이었다.
강진철과 김민섭의 시선이 마주쳤다.
편안히 지어지는 웃음.
처음으로 한재석이 든든해 보였다.
미미르가 말을 이어갔다.
“아무튼 휴거를 막기 위해 네가 난쟁이의 세상에서 훈련하며 강해진 것이다. 아마… 이곳에 온 것도 모두 필연이겠지. 세상에 우연은 없으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최한이 담담한 목소리로 미미르에게 물었다.
“그럼… 난 인간의 멸망을 막기 위해 신이라는 놈들과 싸워야 하는 건가?”
차분해 보이는 말투였지만, 그 안에 담긴 중압감은 상당한 것이었다.
최한이 아니었다면 미미르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은 고사하고 미쳐 난리를 피웠을 수도 있다.
의외로 평온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최한이 신기한 듯 미미르가 살짝 미소를 보이고는 말을 이어갔다.
“그건 네 선택에 달렸지. 하나 넌 그들과 싸우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항상 그래왔으니까….”
최한이 미미르의 말에서 이상함을 감지하고 표정이 굳어졌다.
“그런데 아까부터 이상해서 그러는데. 너 나에게 말하면서 자꾸 다른 사람을 떠올리는 것 같은데. 아까 훈련 얘기 할 때도 그렇고 인간의 대표 얘기 할 때도 그렇고.”
최한이 날 선 눈매로 미미르를 바라보자 미미르의 표정이 놀란 듯 크게 변했다.
“하하하하하하!”
샘을 울리는 웃음소리.
최한과 아이들은 갑작스레 터진 미미르의 웃음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샘 위에 달랑 머리만 떠 있는 노인의 큰 웃음이 옅어져 갔다.
“정말 변하지 않는구나. 너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또 이상한 소리나 하고.”
“이건 설명해줄 수 없다. 내 권한 밖이거든. 대신 다른 이야기를 해주마. 인간들에게 아니, 너에게 가장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지….”
미미르의 위쪽에 새로운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최한의 시선이 영상으로 향했다.
다리가 여덟 개 달린 말이 멈춰 섰다.
창을 들고 있던 인간들이 말 앞에 엎드려 절을 올렸다.
인간의 가장 앞에 서 있던 여자가 말 위에 탄 존재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스가르드의 영광은 끝날 것입니다. 예언의 반역자가 나타나 신을 끌어내리고, 숨어 지내오던 거인의 복수가 시작될 것입니다. 무스펠헤임의 꺼지지 않는 불꽃이 주인을 만나 아스가르드를 태워 버릴 것입니다.”
미미르의 목소리였지만, 영상 속에서는 무녀로 보이는 여우 목도리를 한 여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었다.
“높디높으신 최고 신… 당신도… 죽을 것입니다.”
촥!
순식간에 최한과 아이들의 얼굴이 구겨졌다.
말을 하던 여자의 목에서 피가 솟구쳐 올라오고, 머리통이 하늘로 떠올랐다가 땅에 떨어졌다.
영상에 애꾸눈을 가진 한 남성의 얼굴만이 보였다.
“이것이 신들에게 전해진 무녀의 예언. 그리고 그런 무녀의 목을 몇백 번이나 자른 신이 있었지.”
최한은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마지막에 만나겠군.’
최한이 애꾸눈을 가진 남성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 이름은 오딘. 아스가르드의 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