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똑바로 서!”
“반별로 간격 좀 벌리고.”
미림고 학생들이 오후 일정을 위해 1층 로비에 모여 있었다.
때마침 지하 결투장에서 돌아온 최한과 검성 길드장 장왕윤이 학생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어? 최한이다.”
“쌤! 최한 왔어요.”
D반 아이들의 목소리에 조일환 선생의 몸이 돌아섰다.
최한이 볼을 긁적이며 고개를 숙였다.
“제가 꼴등이네요.”
능청스럽게 행동하며 다가 온 최한과 다르게 장왕윤은 D반 담임인 조일환에게 반쯤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사과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잠깐 얘기한다는 것이 그만….”
조일환 선생이 장왕윤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길드장님이 최한을 데리고 가셨다는 이야기는 아이들에게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희도 방금 내려왔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최한이 조일환 선생을 지나 D반 아이들 틈으로 들어갔다.
장부기가 최한을 보며 물었다.
“어디 갔었던 거야?”
“잠깐 지하에.”
“지하?”
“어. 왜?”
옆에 있던 김민섭이 끼어들었다.
“지하에 있었다고?”
장부기와 김민섭의 반응에 최한이 되레 물었다.
“이 반응들은 뭐야. 지하에 뭐 불이라도 났냐?”
장부기와 김민섭이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다시 최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조금 전에 지진 났었거든.”
“진짜 완전 크게 났었어. 진원지가 이 건물 아래라고 해도 믿을 만큼.”
장부기와 김민섭의 심각해진 얼굴 표정에 최한이 어색한 웃음을 보였다.
“아…. 지진….”
김민섭이 천진난만한 얼굴로 최한에게 물었다.
“응? 못 느꼈어?”
“아… 아냐. 나도 아까 잠깐 느꼈어….”
시선을 피하는 최한의 모습에 장부기와 김민섭이 수상한 낌새를 느꼈지만, 표현은 하지 않았다.
그때.
장왕윤과 길드 직원의 대화가 들렸다.
“지원팀과 신세례 박사에게 지하 결투장으로 이동하라고 전달 부탁하네.”
“결투장에 무슨 일 있나요? 요 몇 주 사용한 적도 없을 텐데요.”
“결투장 전체가 무너졌네.”
“네?”
최한과 아이들의 귀로 정확히 들려온 목소리.
장부기와 김민섭의 눈매가 일자로 변했다.
“설마….”
“최한 너….”
최한이 크게 웃으며 상황을 무마하려 했다.
“하하하하하하! 돌고래 보러 가자! 유람선!”
장부기와 김민섭이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띠리리리리!
전화벨이 울렸다.
길드장 장왕윤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네. 안 그래도 연락드리려던 참인데. 무슨 일로…. 네…. 네….”
급격히 어두워진 장왕윤의 표정.
통화를 끝내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다시 집어넣은 장왕윤이 교사들을 불러 모았다.
아이들이 듣지 못할 정도로 작게 이야기가 몇 마디 오갔다.
“그럼… 죄송합니다.”
이야기를 마치고 빠르게 자리를 벗어나는 장왕윤이었다.
D반 담임 조일환 선생과 A반 담임 김기덕 선생이 아이들을 집중시켰다.
“모두 주목!”
로비에 모여 있던 미림고 2학년 학생 전체가 시선을 모았다.
“오후 일정에 약간 변동이 생겼다.”
“유람선이 운행을 하지 못할 것 같다는구나.”
두둥.
아이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아….”
짧은 탁식이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왜지?”
“배가 못 뜨는 이유가 뭐지?”
“비 오나?”
“날씨 완전 좋은데?”
짝짝!
“그만.”
웅성거림을 잠재우는 박수 소리와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의 시선이 조일환 선생에게 쏠려 있었다.
“30년이 넘게 항해를 하신 선장님이 내린 결정이니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검성 길드의 길드장님도 무척 안타까워하며, 미안해하고 있으니 모두 이해 부탁한다.”
아이들의 힘없는 대답이 들려왔다.
“네….”
“그럼 이동해 볼까?”
조일환 선생의 인솔을 시작으로 미림고 학생들이 건물을 빠져나갔다.
* * *
유람선은 타지 못했지만, 미림고 학생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지루한 수업과, 고단한 훈련이 아닌, 친구들과 그저 웃고 즐기는 활동.
보이지 않는 경쟁 속에서 치열하게 지내 왔던 아이들에게는 그야말로 천국이 따로 없었다.
오후 일정은 유람선 대신 제주도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자연사 박물관으로 대체되었다.
각 반별로 박물관 안내원이 한 명씩 붙어 견학에 도움을 주었다.
“지금 앞에 보이시는 게, 1,000년 전 이곳 제주도의 생활이 기록되어 있는 아주 귀한 문헌입니다.”
안내원의 목소리에 D반 아이들의 눈동자가 한곳을 향했다.
“오오, 귀한 문헌!”
안내원의 설명에 큰 소리로 반응을 보이는 최한이었다.
바로 옆에 있던 장부기가 최한을 보며 말했다.
“최한 너 문헌이 뭔지나 알고 놀란 거냐?”
가장 앞줄에 있던 D반 아이들이 문헌을 보고 한마디씩 거들었다.
“한자인가?”
“낡았네….”
“신기하긴 하다. 1,000년 전 물건이 이렇게 잘 보존되어 있다니.”
안내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 문헌이 얼마나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냐면 1,019년 제주도에 첫눈이 온 기록까지 적혀 있습니다. 12월 11일이라고….”
“오….”
아이들의 감탄이 이어졌다.
“아니, 11월 8일이다.”
감탄을 지우는 목소리.
안내원의 얼굴에서도 표정이 지워졌다.
문헌에 쏠려 있던 D반 아이들의 모든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붉은 머리칼과 새하얀 피부.
차가운 표정을 가진 여성.
목소리의 주인공은 백설이었다.
아이들이 당황해 어떤 반응도 보이지 못하고 그저 백설의 얼굴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백설이 자신에게 쏠린 시선들을 무시한 채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짧은 정적이 흐른 뒤.
정신을 차린 안내원이 주머니에 있던 작은 수첩을 꺼내 읽으며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 교육받을 때 분명 12월 11일이라고….”
당황해하는 안내원을 뒤로하고 D반 아이들이 멀어져 가는 백설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뭐지?”
“분위기 어쩔….”
“쟤는 가끔 이상한 소리를 한단 말이야.”
“얼음 공주네….”
뚱딴지같은 말로 넘겨 버리는 아이들과 다르게 최한은 진지한 표정으로 백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통과 함께 떠오른….
언젠지 모를 기억과 함께.
‘11월에 눈이 다 오고… 별일이구나.’
또 남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기억 속 보이는 여성의 얼굴은 분명 백설이었다.
“젠장…. 또 이상한 기억이….”
최한이 이마를 짚으며 몸을 숙였다.
안내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12월 11일이라고 정확히 나와 있네요. 참, 그러고 보니 재미있는 이야기가 떠올랐네요. 이 문헌에는 1,000년 전 1021년 여름 일주일간의 기록만이 없습니다. 그런데 더 신기한 건….”
조금 전 백설의 일은 까맣게 잊은 듯 아이들이 금세 안내원의 이야기에 빠져 버렸다.
“전 세계 그 어느 곳에서도 그 일주일 동안의 기록이 발견된 적 없다고 합니다.”
“우와….”
D반 아이들의 입에서 감탄이 이어졌다.
안내원이 만족한 듯 웃음을 지어 보이며 몸을 돌렸다.
“그럼 다음으로 이동할까요?”
* * *
내 이름은 백설.
인간….
이었다.
1,000년 전.
죽어 가던 나를 살려준 남자가 있었다. 이름도 없는 내게 이름을 지어 준 그 남자.
그를 스승으로 모시며 2년 동안 따라 다녔다.
행복했다.
살아갈 이유가 없던 내게 그는 그 이유가 되어주었다.
그를 따라 다니며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곳을 다녀보았다.
그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평생 이 작은 섬에서 살다 죽었으리라.
그렇기에 내 눈에 많은 것을 담게 해주고, 많은 것을 경험하게 해준 그를 위해 살고 싶었다.
인간을 자신의 목숨보다 사랑했던 그 남자.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목숨으로 인간을 살리는 것을 기쁘게 생각했다.
그렇기에 나는.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인간을 증오한다.
“설아….”
아득해진 정신을 비집고 소리가 들렸다.
“백설아!”
여성의 목소리와 함께 정신이 돌아왔다.
시선을 돌려 앞에 앉아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앳된 얼굴을 하고 있는 반 아이들이 모두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또 생각에 잠긴 건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야? 몇 번이나 불렀다고.”
“미안하군. 그….”
“내 이름은 전지현이야. 이제는 좀 외우라고. 그것보다….”
장미가 전지현의 뒷말을 가로챘다.
“넌 우리 반 남자 애들 중에 누가 제일 좋아?”
“뭐?”
“누가 제일 좋냐고? 우린 다 말했어. 이제 네 차례야.”
‘갑자기 왜 친한 척이지…. 죽여 버릴까.’
담담하게 피어오르는 살인 충동이었다.
이깟 인간 하나 죽인다고 화가 가라앉지는 않겠지만, 눈앞을 날아다니는 벌레를 죽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려나.
살아 있는 인간 전부를 몰살시켜도 내 기분은 풀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해야 할 일이 많다.’
날숨을 내뱉으며 차분하게 살의를 지웠다.
“못 들었다. 너희가 누구를 선택했는지.”
장미가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한숨을 내뱉었다.
“정말… 한 번에 좀 듣지…. 여자 입장에서 괜찮은 남자 두 번 말하는 거 얼마나 부끄러운지 알….”
“난 최한!”
성녀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특유의 냄새가 코로 들어왔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향긋하다 생각할 정도로 달콤한 냄새였지만, 내 입장에서는….
너무도 지독했다.
살짝 얼굴을 구겼다.
그럼에도 성녀는 눈치가 없는 것인지, 흥분해 있는 것인지 자기 할 말만 늘어놓았다.
“다른 애들도 다 최한이 좋다 그랬어!”
전지현과 장미를 포함한 여학생들이 허공을 바라보며 얼굴을 붉혔다.
“그딴 놈을? 코나 파고, 장난이나 치는 그런 남자를 왜 좋아하는 거지?”
“그딴 놈이라니! 최한이 얼마나 멋있는데! 괴물들도 다 한 방에 해치우고! 지구에서 제일 강한 SSS급이고… 또….”
‘아주 빠져 버렸군.’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별로 그런 자식…. 아무리 강하다 해도, 실실 웃기나 하고, 코나 파는 그딴….”
장미가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하하… 안 좋아하는구나. 뭐… 각자 취향이 다 다르니까. 하하….”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
나조차도.
이런 표정을….
아직 인간의 감정이 남아 있을 줄….
알지 못했다.
“그딴 재수탱이가….”
‘너무도 보고 싶었다.’
* * *
같은 시각 D반 남학생들의 방.
인원수 때문에 두 방으로 나뉘었지만, 어째선지 아이들이 모두 최한이 있는 방에 모여 있었다.
“수학여행 첫날밤은 역시!!!!”
홍철의 목소리가 크게 울리고.
아이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쨍쨍.
부스럭. 부스럭.
유리병 부딪치는 소리와 정체 모를 음식 포장 용기 소리가 방을 가득 채웠다.
“언제 해 보겠어! 이럴 때나 나쁜….”
펑!!!!!!
병이 들어 있던 박스가 열린 거실 창을 뚫고 하늘로 날아갔다.
“…….”
모여 있던 아이들의 얼굴에 멍한 표정이 지어졌다.
그리고 그 시선들은 모두 한곳을 향하고 있었다.
발을 뻗고 있는 최한의 모습.
아이들과 눈이 마주친 최한이 입술을 쭉 말아 올려 웃음을 지어 보였다.
“…….”
웃음의 의미를 깨달은 아이들의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다시 분주히 움직이는 아이들.
최한이 날려 버린 박스가 있던 자리에 색색의 음료수병과 과자 봉지가 놓였다.
마치 시간이라도 되돌린 듯 홍철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수학여행 첫날밤은 역시! 음료수 마시며, 진실 게임이지!!!”
후창하듯 아이들의 입이 하나의 목소리가 되어 울렸다.
“끝나고는 베개 싸움이 국룰이고!”
이제야 편안한 웃음을 보이는 최한이었다.
홍철의 밝은 표정 사이로 눈물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