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하얀 피부.
머리 위로 떠 있는 금색의 링.
처음 보는 피부색과 이전과 다른 외형을 가졌음에도 최수혁은 단번에 천사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불꽃에서 걸어 나온 천사 라파엘이 흥미로운 듯 죽어가는 장왕윤을 바라보았다.
“인간 주제에 아직 살아 있는 건가?”
라파엘의 오른손이 천천히 들렸다.
“이정은! 보호막!!!!”
최수혁의 목소리에 넋을 놓고 있던 이정은이 남아 있는 마나를 쥐어짜 냈다.
“앱솔루트 배리어!”
장왕윤을 끌어안은 최수혁의 주위로 고위 방어 마법이 구현되었다.
주위를 감싼 주황빛의 보호막을 확인한 최수혁이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다행….”
“인간 주제에 감이 좋군. 하나… 상당히 거슬리는구나.”
장왕윤을 향하던 라파엘의 손이 빠르게 이정은을 향해 움직였다.
라파엘의 손 앞에 새하얀 구체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것은 S급의 눈으로도 좇지 못할 빠르기로 발사되었다.
콰과과광!!!!!
이정은이 있던 자리에 강한 폭발이 일어났다.
이정은의 모습이 지워졌다.
자욱하게 남은 검은 연기가 시야를 가렸다.
“아…. 안 돼…. 안 돼!!!”
최수혁의 주먹이 떨렸다.
“그때, 그 용 새끼들보다… 몇 배는 더 강한 거 같은데….”
지경태의 목소리.
최수혁의 시선이 폭발이 일어난 곳으로 향했다.
검은 연기가 걷히며 이정은의 모습이 드러났다.
주저앉아 울고 있는 이정은의 앞을 당당히 지키며 서 있는 지경태의 모습.
트레이드마크이던 힙합 모자가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지경태의 뒷모습을 보며 이정은이 눈물을 흘렸다.
“A급 주제에, 네가 왜… 나를 지키는 거야!!!”
당당하게 서 있는 모습과 달리 지경태의 양쪽 팔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특유의 미소와 함께 허세를 부리며 지경태가 뒤쪽에 있던 이정은을 안심시켰다.
“네가 당하면 우리 다 땅으로 떨어진다고.”
이정은이 대꾸도 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지경태가 최수혁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최수혁! 절대 못 이겨! 어서 SSS급을….”
최수혁을 바라보던 지경태의 시야가 온통 하얗게 변했다.
순식간에 이동한 라파엘의 손이 지경태의 가슴을 관통했다.
“컥….”
폭발하듯 지경태의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쑥!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라파엘의 손이 빠졌다.
지경태의 풀린 눈이 자신의 가슴에 난 커다란 구멍을 눈에 담았다.
“존나… 세네….”
마지막 말을 남기며 지경태가 앞으로 꼬꾸라졌다.
지경태가 쓰러지자 이정은의 모습이 드러났다.
라파엘이 주저앉아 있는 이정은을 보고 작게 미소 지었다.
“인간 주제에 성가신 마법을 쓰는구나. 어차피 우리에 비하면 하등하기 짝이 없지만….”
이정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우리…라니….”
이정은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눈앞에 서 있는 하얀 천사의 어깨너머….
불꽃 속에서 걸어 나오고 있는 그림자들이 보였다.
“미드가르드는 천 년만이네.”
“그것보다 왜 바로 목표가 있는 곳으로 가지 않고, 이곳으로 온 거지?”
“그것보다 왜 여기에 헬헤임의 하수구가 있는 거야?”
파란색, 초록색, 보라색….
색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새롭게 나타난 7명의 천사를 본 순간.
인간들의 얼굴에는 절망이라는 감정밖에 남지 않게 되었으니까.
최수혁의 얼굴에 포기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최한에게 미리 연락을 취했어야 했는데….”
새롭게 나타난 천사들이 라파엘의 곁으로 날아왔다.
라파엘이 다른 능천사들을 보며 말했다.
“여기는 나 혼자면 충분하다. 너희는 그 인간 여자를 죽이러 가라.”
라파엘의 목소리에 최수혁의 미간이 구겨졌다.
왜 갑자기 그 학생이 생각 난 건지는 모르지만, 아마 맞을 것이다.
‘붉은 머리 소녀….’
라파엘을 제외한 능천사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혼자가 된 라파엘의 얼굴에 흥미로운 미소가 지어졌다.
“오호…. 그렇게 힘의 차이를 보여줬는데? 아직도 덤비려 하는 것이냐?”
쓰러진 장왕윤과 지경태를 제외한 모든 S급들이 라파엘을 보며 전투태세를 취했다.
최수혁이 이정은을 보며 말했다.
“넌 뒤에서 애들이나 치료해주지, 뭐하러 여기 있어.”
이정은이 새로운 마법진을 그리며 대답했다.
“기본적인 치료 마법은 걸어두고 왔어. 어차피 지금 남아 있는 마나로는 둘 다 살리지 못해. 그러니까….”
이창식이 초록색 날개를 펄럭이며 이정은을 바라보았다.
“다 같이 여기에서 죽거나… 이 녀석을 물리치는 기적을 바라 보거나… 인가?”
마수아가 무릎을 두 번 내려쳐, 번개 부츠를 소환했다.
“그런데 다른 천사들을 따라가지 않아도 될는지….”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그냥… 느낌이지만… 괜찮을 거야, 아마. 그리고 어차피 최한이 곁에 있으니….”
라파엘이 최수혁의 목소리를 잘랐다.
“최한이라…. 대천사들을 죽인 그 녀석을 말하는 것이냐?”
라파엘의 목소리에 최수혁의 얼굴이 구겨졌다.
‘미카엘.’
최수혁의 머릿속으로 예전에 싸웠던 파란 피부를 가진 천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최수혁을 바라보던 미카엘이 말했다.
“표정을 보니 맞는 것 같군. 그런데 이거 어쩌지? 그 최한이라는 녀석은 이리로 오고 있는데?”
“오고 있다니, 그게 무슨….”
“신의 검이라 불리는 이 능천사 라파엘 님이 겨우 너희 같은 약한 인간을 만나러 이곳에 온 줄 아는 것이냐?”
천사의 말이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최한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이야기는 굉장히 희망적인 이야기이다.
하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붉은 소녀만이 아니라… 미림고 학생들도 위험하다.’
최수혁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옆에 있던 마수아가 소리쳤다.
“네가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겠지만, 최한이 오면 넌 한 방에 죽게 될걸? 보낸 친구들 데려오는 게 어때?”
마수아의 도발에 라파엘의 입술로 작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지간히 그를 믿나 보군.”
말을 마친 라파엘의 얼굴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마수아의 온몸에 소름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움직일 수 없었다.
시간이 느리게라도 흘러가는 것인지.
천사의 손이 천천히 들려 자신을 향하는 것을 발견했지만, 어떠한 대응도 하지 못했다.
천사의 손에서 뻗어 나간 빛이 마수아의 몸통을 그대로 통과했다.
“도발도 상대를 봐가면서 해야지. 인간 주제에….”
라파엘의 목소리가 잦아들자, 마수아를 통과했던 빛도 사라져 갔다.
마수아의 몸통에 커다란 구멍이 생겨났다.
“몸에 빵꾸 내는 게 취미냐…. 이 개 같은… 천…사….”
마수아의 검은 눈동자가 사라지며 그대로 기절했다.
턱….
“재미있는 게 생각났다. 마침 헬헤임의 하수구도 있고 하니….”
천사가 손가락을 튕기자, 붉은 포탈 앞에서 타오르고 있던 불꽃이 사라졌다.
동시에….
“꾸에엑!!!”
“끼야야악!!!”
붉은 포탈에서 몬스터들이 포효하며 쏟아져 나왔다.
던전 브레이크가 다시 시작되었다.
최수혁과 이창식이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를 처치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워… 워…. 내 여흥을 방해하면 안 되지. 이 하급 악마들이 지상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게 보고 싶군.”
라파엘이 최수혁과 이창식의 앞을 가로막았다.
“젠장….”
“5시간이나 개고생했는데….”
마수아를 치료하고 있던 이정은의 고개가 떨어졌다.
“다 끝났어….”
최수혁과 이창식이 몬스터가 쏟아져 나오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최수혁의 턱 끝이 떨려왔다.
‘S급의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찌 이리도 나약하고 허무한지….’
라파엘이 절망적인 표정을 짓고 있는 최수혁을 보며 흐느끼듯 웃었다.
“흐흐흐… 좋아. 역시 인간은 그런 절망적인 표정이 잘 어울….”
“포기하지 마!”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는 들릴 리 없는 목소리였고.
이리 강하고 힘이 넘치는 소리를 낼 수 없는 이의….
목소리였다.
최수혁의 시선이 던전 브레이크의 핵으로 향했다.
슝.
촤악!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몬스터의 살이 찢기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최수혁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너… 너… 지금 거기서 뭐 하는 거야!”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에 파묻힌 남자가 보였다.
위태로운 움직임으로 대검을 휘두르며 한 마리, 한 마리씩 몬스터를 토벌하고 있는 사내의 모습.
그 모습에 이정은과 이창식마저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오호…. 그 몸으로도 싸우는 건가? 대체 무엇을 위해서….”
라파엘이 몬스터에 파묻힌 남자를 보며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을 위해서…. 저 밑에서 일상을 보내고 있는… 죄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루를 살아내는 사람들을 위해…. 그들이 하루를 어제처럼 평범하게 보낼 수 있게 하기 위해….”
배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채 대검 율도를 휘둘러 몬스터를 죽이고 있는 장왕윤의 모습이 보였다.
이정은의 치료 마법을 받긴 했으나….
이미 바닥난 마나로 최대한 죽지 않게 현상 유지만 시켜 놓은 상태였다.
초점도 제대로 맞지 않는 눈을 하고 칼을 휘둘렀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칼을 휘둘렀다.
온몸이 비명을 질러댔지만, 칼을 휘둘렀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몸 상태였지만….
장왕윤은 포기하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몬스터에 집중했다.
한 마리.
한 마리.
최대한 눈앞에 있는 놈만이라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그만해! 소용없으니 제발… 제발… 그만해….”
이정은의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 들렸다.
검성이란 이름이 무색하게도
장왕윤을 지나쳐가는 몬스터의 숫자가 훨씬 더 많았다.
그럼에도 검을 멈추지 않는 장왕윤이었다.
“이게 내 최선이고, 내 전부다. 몸이 움직이는 한… 난 사람들을… 돕고 싶다….”
최수혁과 이창식의 주먹이 강하게 쥐어졌다.
저런 모습을 보고도 이렇게 겁에 질려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최수혁과 이창식이 장왕윤을 돕기 위해 이동하려 했다.
하지만.
절망은 언제나 희망이 싹트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최수혁과 이창식의 시선으로 장왕윤의 바로 앞에 서 있는 천사의 모습이 보였다.
“안 돼!!!!!”
“도망쳐! 장왕윤!!!”
최수혁과 이창식의 절규에도 라파엘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라파엘의 손이 최강의 검이 되어 장왕윤의 목을 베었다.
슈욱!!!!
퍽….
허공을 자르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최수혁과 이창식이 눈도 뜨지 못한 채 귓속으로 전해지는 그 소름 끼치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게… 뭐야….”
라파엘의 떨리는 음성이 들렸다.
이상함을 감지한 최수혁과 이창식이 천천히 눈을 떴다.
장왕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부러진 목검을 들고 있는 천사의 모습뿐.
천사의 시선이 조금 더 먼 곳을 향했다.
“드디어 왔군. 이 목검을 던져 그 녀석을 구한 건가?”
천사의 목소리에 최수혁과 이창식의 시선이 뒤쪽으로 움직였다.
기다렸다.
마음속으로.
제발 시간 내에 오길.
부디 죽기 전에 와주길….
최수혁과 이창식의 눈동자에 그토록 기다렸던 사내의 얼굴이 보였다.
“늦어서 미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