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백설의 얼굴을 유심히 보던 유리엘이 두 손으로 박수를 쳤다.
“실물로 보니… 정말 천 년 전, 그놈 옆에 있던 인간이 맞는 것 같군.”
자신을 알아본 천사의 목소리에 백설이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인간이라…. 아직도 내가 인간으로 보이는 건가? 저급한 용들은 천 년이 지나도 어쩔 수 없군. 신의 노리개 새끼들.”
백설의 도발에 몇몇 천사들이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듯 몸을 움직였다.
“참아.”
유리엘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분노하던 능천사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차분해졌다.
백설이 감탄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박수를 쳤다.
“오… 용 새끼들이 참을성도 있었어? 신기하네. 천 년 전에는 제일 먼저 꼬리 말고 도망가더니.”
백설의 두 번째 도발에 천사들의 몸이 움찔거렸다.
표정은 차분했지만, 유리엘도 몸을 떨고 있었다.
“한 번만 더 그 주둥이 나불거리면 곱게 죽지 못할 줄 알아라. 너의 목만 가져가면 되니, 목 아래 있는 신체는 하나, 하나 터트려 고통에 몸부림치게….”
“해봐.”
담담히 울리는 목소리.
유리엘의 시선으로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짓고 있는 백설의 얼굴이 보였다.
“해 보라고. 이기지 못할 싸움이면 함께 했던 동료들도, 피를 나눈 형제들도 버리고 도망가던 새끼들한테는 질 것 같지 않아서 말이야.”
줄이 뚝 끊어져 버린 듯, 차분함을 유지하던 유리엘이 제2형태를 해제하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유리엘의 뒤에 있던 나머지 천사들도 본래의 모습인 드래곤의 형태로 변신했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고통을 선물해주마!”
“훗….”
백설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많은 감정이 교차하는 표정.
“최고의 고통이라…. 죽음이 두려워 전쟁에서 도망친 놈들이… 진짜 고통을 알기나 하느냐.”
낮게 울린 그 음성에 능천사들의 몸이 굳어 버렸다.
모든 감각이 잡아먹히고, 한 가지 감정만이 몸을 잠식해 갔다.
이 느낌은 천 년 전에도 느낀 적 있었다.
신들이 가지고 있는 경외와 완전히 상반된 압박감.
드래곤으로 변한 능천사들의 몸이 떨려왔다.
드래곤으로 변한 유리엘의 거대한 입이 벌어졌다.
“이 느낌은…. 어째서… 인간 따위가… 헬헤임의 왕의 기운을….”
백설이 허공을 발판 삼아 천사들이 있는 곳으로 나아갔다.
“내가 얼마나 너희를 죽이고 싶었는지 아느냐.”
터벅.
터벅.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는 백설의 머릿속으로 천 년 전 기억이 떠올랐다.
‘너희 작전은 다 알고 있었어. 용족이 알려 줬거든.’
울분이 터지던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 백설이 입술을 깨물었다.
강하게 깨문 입술이 터져 피가 흘렀다.
유리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피 색깔은….”
백설이 손등으로 흘러내린 보라색 피를 닦았다.
“내가 1,000년 동안 지옥에서 뭘 한지 아느냐…. 그분의 복수를 위해… 너희를 죽일 힘을 갖기 위해….”
하늘을 가릴 만큼 육중한 몸으로 날갯짓을 하던 7마리의 드래곤이 거대한 그림자에 잡아먹혔다.
능천사들의 목소리가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사… 살려줘….”
“잘못했어. 신에게 붙은 건 치천사들이 결정한 거야. 남아 있는 종족이라도 살리기 위해서….”
변명을 늘어놓던 능천사들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사각-.
뼈가 으깨지는 기분 나쁜 소리가 들리고.
거대한 드래곤의 몸이 갈기갈기 찢겨 있었다.
마치 상위 포식자의 이빨에 찢긴 나약한 초식동물처럼….
땅으로 떨어지고 있는 드래곤의 사체를 보며 백설이 마지막 목소리를 내뱉었다.
“난… 1,000번을 넘게… 죽었었다.”
* * *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니야? 끝이 없잖아!”
던전 브레이크를 홀로 막고 있던 한재석의 입에서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한 마리도 놓치지 않았다.
번개 하나 던지는 족족 한 방에 수백에 달하는 몬스터를 죽일 수 있었다.
하나.
아무리 몬스터를 죽여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시간은 그리 많이 흐르지 않았지만, 번개를 던지는 것만 반복하던 한재석의 참을성이 한계에 달해 있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이거 없앨 수 있는 거야!”
한재석의 짜증을 듣고 있던 최수혁과 이창식이 한재석의 곁으로 다가왔다.
“던전 브레이크 자체를 제거할 방법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포탈이 닫힐 때까지 몬스터를 해치우는 방법밖에는 없다.”
“다른 길드장들과 함께 5시간 넘게 몬스터를 해치웠어도 닫히지 않던 포탈이다. 더구나 저 천사의 능력 때문에 크기가 두 배나 커졌으니 아마….”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에 번개를 날리던 한재석의 얼굴에 놀란 표정이 지어졌다.
“그럼 아무리 적게 잡아도 최소 다섯 시간 동안은 이렇게 있어야 하는 거예요?”
최수혁과 이창식이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방법이 없으니….”
“혼자서 힘들면 우리가 도와줄게. 체력도 어느 정도 회복했으니….”
한재석이 손을 들어 최수혁과 이창식에게 뻗었다.
“아니요. 혼자서도 충분해요. 최한이랑 내기도 했거든요. 끝까지 혼자서 막겠다고….”
최수혁과 이창식이 억지를 부리는 한재석에게 어른으로서 한마디 크게 꾸짖고 싶었지만….
콰과과광!!!!!
“꾸에엑!!!!”
“끼이이이!”
한 발, 한 발.
창처럼 던지고 있는 번개가 몬스터를 순식간에 터트렸다.
포탈을 지나오자마자 녹아내리는 몬스터들.
자신들이 힘을 합친 것보다 쉽게 몬스터를 학살하는 그 모습을 보며 그들은 생각했다.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고.
혼자서도 던전 브레이크를 없앨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한 최수혁과 이창식이 한재석의 뒤쪽으로 물러났다.
“그럼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봐라.”
“힘내라. 꼬맹이.”
말을 마친 그들의 시선이 아래쪽으로 향했다.
천사와 대치하고 있는 최한이 있는 곳으로.
라파엘이 머리를 움켜쥐고 있었다.
“이게 대체….”
불안한 눈빛과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최한의 목소리가 라파엘에게 닿았다.
“반응을 보니 전부… 죽었나 보지?”
라파엘의 떨리는 목소리가 최한에게 향했다.
“어째서… 인간 따위가 신의 가호를 받은 천사를 이길 수 있는 거지…? 그 여자 정체가 무엇이기에….”
“나도 정확히는 몰라. 그래도… 너희 덕분에 하나는 확실히 알게 됐어.”
최한의 머릿속으로 교실에 앉아 있던 백설의 모습이 떠올랐다.
온몸에서 퍼져 나오는 인간을 증오하는 살기.
그녀의 몸속으로 흐르는, 마기도 마나도 아닌 처음 보는 에너지의 흐름.
백설은….
‘인간이 아니야.’
최한이 허리춤에 숨겨 두었던 단검을 꺼내 들었다.
“이제… 마무리하자. 빨리 돌아가서 수학여행을 즐겨야 하거든.”
최한의 목소리에 라파엘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불안한 눈빛은 사라지고, 동료들을 잃은 일조차 잊은 것처럼 온몸의 기운이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명을 지키지 못했으니, 어차피 돌아가도 남아 있는 건 죽음뿐이다. 그렇다면….”
라파엘의 몸에서 금색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몸집을 키워나갔다.
제2형태를 해제하고 본모습을 드러냈다.
백룡.
새하얀 비늘이 온몸을 두르고 있었다.
거대한 이빨 사이로 뜨거운 숨결이 뿜어져 나왔다.
“네놈과 함께 지옥으로 떨어지겠다.”
드래곤의 모습으로 변한 라파엘이 빠르게 더 높은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비를 뚫고 날아오르던 라파엘이 던전브레이크의 핵이 있는 곳에 멈춰 섰다.
몬스터가 쏟아지고 있는 붉은 포탈 바로 위에서 가볍게 날갯짓을 하고 있는 라파엘.
날갯짓을 할 때마다 떨어지는 빗방울이 태풍이 되어 몰아쳤다.
몬스터를 처리하고 있던 한재석이 급작스럽게 등장한 거대한 백룡으로 인해 미간이 구겨졌다.
“아까 그 표백제 새끼인가… 최한은 뭐 하는 거야? 이런 놈 하나 해치우지 못하고.”
한재석이 들고 있던 번개 하나를 강하게 던졌다.
콰과과광!!!!
대기를 찢으며 날아간 번개가 라파엘의 몸에 명중했다.
찌지직-.
하얀 몸 전체에 고압의 전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한재석의 얼굴에 거만한 표정이 지어졌다.
“표백제 새끼, 조금 있으면 온몸이 까맣게 그을릴….”
“번개라…. 인간 주제에 과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군. 하지만….”
라파엘의 날갯짓에 거센 바람이 한재석을 덮쳤다.
“윽…. 어째서….”
라파엘의 거대한 앞발이 머리 위에 떠 있는 링을 가리켰다.
“신에게 하사받은 이 링은 전기 내성도 가지고 있거든. 나에게 번개는 통하지 않아.”
한재석의 공격에도 작은 상처나 조금의 그을음조차 생기지 않았다.
짜증이 올라온 한재석이 어금니를 강하게 깨물었다.
“용 새끼 주제에 과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군그래.”
라파엘이 주둥이를 크게 벌렸다.
“내 모든 생명 에너지를 이 한 방에 올인하겠다.”
날카로운 이빨들이 드러난 앞쪽으로 거대한 마법진이 나타났다.
고대의 문자로 이루어진 검은 마법진.
검은 번개가 요동치고 있었다.
뒤쪽에 있던 최수혁과 이창식이 한재석의 곁으로 다가왔다.
“이제는 던전 브레이크가 문제가 아니야.”
“서울에서 만났던 천사보다 훨씬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면… 저 녀석의 공격 한 방에 제주도 전체가 사라질 거야.”
한재석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저 녀석… 뭔가 할 셈인데….”
이창식의 목소리가 울렸다.
한재석과 최수혁의 시선이 아래 있는 최한에게 향했다.
최한이 검집에서 단검을 빼내고 있었다.
검집을 주머니에 넣은 최한이 브레스를 모으고 있는 라파엘에게 시선을 옮겼다.
‘한재석에게는 미안하지만… 내기는 여기까지 해야겠군.’
신화급 아이템.
마왕의 헬룬 단검.
최한이 단검의 손잡이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짧긴 하네. 그래도 지금 나에겐 이 검밖에는 없으니….”
후-.
최한이 깊은 날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감각을 떠올리자.
다리의 각도.
어깨의 움직임.
양손의 파지 법.
안정된 호흡.
장왕윤과 지하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저 양손으로 휘두르는 게 아니야. 검에 진심을 담아….’
검을 쥔 최한의 양손이 머리 위로 천천히 들렸다.
최한이 정신을 집중한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를 노리고 이 녀석들을 보낸 거라면… 또 보고 있겠지…. 다음번엔 이딴 약한 놈들 보내지 말고… 네가 직접 와, 쓰레기 신 새끼야.”
신에게 마지막 경고를 보낸 최한이 천천히 눈을 떴다.
목표인 거대한 백룡과 던전 브레이크의 핵만을 시야에 담았다.
“장왕윤 사사. 검성 제1 초식….”
단검을 쥐고 있던 최한의 손이 부드럽게 떨어졌다.
허공을 가르는 단검.
“마왕의 첫걸음.”
슈우웅-.
콰과과광!!!!!!!!!!!!
.
.
.
최한의 목소리를 끝으로….
금기였던 고대 흑마법을 연산한 라파엘도.
7,000k를 넘었던 던전 브레이크도.
제주도에 흩날리던 비바람도.
모두….
세상에서 지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