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 * *
사상 최대 규모의 던전 브레이크와 천사의 습격이 동시에 일어난 최악의 하루였지만, 최대한 버텨준 5대 길드장들의 노력과 SSS급 최강의 능력자인 최한의 힘으로 인해 위기를 무사히 넘겼다.
제주도를 가득 채웠던 먹구름과 폭우가 사라지고 밝은 햇살과 함께 무지개가 제주도 하늘을 가득 채웠다.
협회에서 나온 사후 처리 인원들과 감식반의 뒤처리를 끝으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검성 길드 연수원 건물 앞에서 발견된 용의 사체는 협회의 인원이 오기 전 검성 길드 연구소장 신세례의 지시로 지하에 있는 연구 시설로 모두 옮겨졌다.
독점하려는 것이 아닌, 협회에 빼앗기지 않기 위한 결정이었다.
이 용의 사체는 지금보다 더 안전한 미래를 만들기 위한 발판이 되어 줄 것이다.
협회의 인원들이 모두 서울로 돌아가고, 큰 전투를 했던 길드장들 모두 피로를 풀기 위해 검성 길드 연수원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있던 검성 길드 길드장 장왕윤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뗐다.
“하…. 이번에도 별다른 활약 못 했네.”
옆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던 디스 길드 길드장 지경태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너는 그래도 좀 낫지. 난 뒤에서 디버프 마법만 쓰다가, 천사한테 한 방 맞고 두 팔 잃었는데…”
지경태 옆에 앉아 있던 아레나 길드 길드장 이정은이 고개도 들지 못하고 이어 말했다.
“너는 그래도 목숨 걸고 나 지키려 했잖아. 까방권 획득이라고. 나야말로 활약한 게 없지. 회복 마법만 주야장천 쓰다가 마나 떨어져서 천사 앞에서 울기만 했는데….”
“너희는 그나마 나은 거야. 영광의 상처라도 있었지. 나는 꼬맹이 싸우는 거 뒤에서 구경이나 하고 있었다고….”
이정은의 옆에 앉아 있던 청룡 길드 길드장 이창식이 다른 길드장들을 보며 울상을 지었다.
“하….”
길드장들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동시에 흘러나왔다.
바로 앞줄에 앉아 있던 마수아가 고개를 살짝 돌려 말했다.
“아니… 길드장님들. 누가 보면 진 줄 알겠어요. 그리고 성녀가 몸들도 다 치료해 줬는데. 왜 이렇게 울상들이에요….”
고개를 숙이고 있던 길드장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더니 마수아를 노려보았다.
“너는 길드장 아니잖아.”
“네가 이 압박감을 알아?”
“두 번이나 졌다고.”
“부하 직원들이 놀리는 그 기분을 알아?”
길드장들의 목소리에 마수아가 어색한 웃음을 보이며 사과했다.
“하하…. 죄… 죄송합니다. 하….”
“흠….”
시선을 집중시키는 한숨 소리가 들렸다.
마수아와 길드장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마수아의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최수혁의 표정에 근심이 가득 끼어 있었다.
“큰일이긴 해. 아마 방송으로 나가지 않아서 일반인들은 알지 못하겠지만, 벌써 대한민국 5대 대형 길드 길드장들이 두 번이나 패배했어.”
최수혁의 목소리에 길드장들의 얼굴에 다시 한번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허공을 응시하며 최수혁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협회 놈들이 가만있지 않을 거야. 대놓고 물어뜯겠지….”
분명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다.
몬스터가 나타난 현시대에서 국민의 안전과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가장 큰 사업은 능력자로 구성된 길드일 것이다.
모든 관심이 쏠려 있다는 것은 좋은 의미에서는 돈과 인기를 얻는 감사한 일이지만, 반대로 말하면 질타를 받고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SSS급이 한국에 있는 것은 축복받은 일이긴 하나….
아직 학생 신분인 SSS급 최한에게 의존하는 것도….
길드장들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과 같은 말이니까.
길드장들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
“나약한 내 자신이 한심하군…. 하….”
“가뜩이나 A급이라 욕 많이 먹는데….”
“검성이란 명칭이 무색하군…. 하….”
연신 들리는 한숨 소리.
축축 늘어지는 한숨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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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진짜!!!! 한숨 좀 그만 쉬어요! 아니, 그런 우울한 얘기를 왜 장기자랑하고 있는 데서 해요!”
한재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앉아 있는 길드장들에게 소리쳤다.
무대와 가장 가까운 관중석.
그곳에 길드장들이 자리해 있었다.
길드장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한재석에게 시선을 모았다.
빠직-.
한재석의 이마에 핏줄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아무것도 모른다는 눈으로 쳐다보지 마요! 아니, 그런 진지한 이야기는 어디 사람들 없는 데서 해야지, 왜 신나게 놀고 있는 여기서 하는 건데요!”
한재석과 길드장들이 앉아 있는 자리만 어두운 분위기였을 뿐.
주위는….
“꺄아악!”
“멋있다!”
“우와아아아!”
광란의 도가니라 해도 믿을 정도로 아이들이 신나게 소리치고 있었다.
수학여행의 꽃.
장기자랑 시간이었다.
원래는 검성 길드에서 OT를 할 때 많이 쓰는 장소였지만, 지금은 아이들의 뜨거운 박수와 열기가 가득 차 있었다.
무대에서 춤을 추고 있는 아이들과 객석에서 뜨거운 호응을 보내는 학생들과 달리.
길드장들이 앉아 있는 두 줄의 객석은 그야말로 초상집을 방불케 했다.
한재석의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열기를 비집고 나왔다.
“분위기 다운시키지 말고 다른 데로 가요! 그럼!”
한재석에게 시선을 모으고 있던 길드장들이 한마디씩 내뱉었다.
“남는 방 없는데….”
“길드원들 업무가 바빠서….”
“이제 고딩까지 우리한테 뭐라고 하네….”
“우리는 정말 쓸모없는 존재인가 봐….”
길드장들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더욱더 다운된 분위기에 한재석이 머리를 부여잡고 짜증을 냈다.
“으아악!!! 진짜 우울한 얘기 그만하라고요! 내가 나쁜 사람 된 거 같잖아!”
바로 옆에 있던 최한과 부기가 한재석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길드장님들이 우울해하시지만, 그래도 잘 마무리된 거 같아서 다행이다, 최한.”
“웅. 내 마지막 수학여행인데, 일 분 일 초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고!”
마지막이란 단어에 부기가 의아해했다.
“뭐? 마지….”
민섭의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 무대를 보던 최한이 크게 소리쳤다.
“이제 우리 반 차례다!”
너무도 궁금했지만, 부기가 하려던 말을 삼키고 무대로 시선을 옮겼다.
‘다음에… 다음에 물어보자.’
무대를 비추던 불빛이 모두 어두워졌다.
열기가 가득했던 객석에 침묵이 찾아왔다.
“이번 차례는 2학년 D반의 무대입니다.”
사회자의 목소리가 사라지자마자 신나는 음악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탁!
무대를 비추던 라이트가 켜지고.
무대 중앙에 5명의 학생이 나타나 춤을 추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가운데 있는 여자애 좀 이상한 거 같지 않냐?”
“상의에 풍선…. 넣은 건가?”
“저 얼굴… 분명 체육 대회 때 한재석이랑 붙었던….”
최한과 부기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배를 움켜쥐었다.
“저런 재주가 있는 줄 몰랐네.”
“어쩐지 같이 앉자 그랬는데, 도망치듯 사라지더라. 하하하하!”
전지현을 포함한 5명의 학생들이 무대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전지현, 김아진, 장미, 이나은….
그리고.
센터를 맡은.
김민섭.
풍선을 상의에 넣고, 입술의 두 배 크기로 립스틱을 바른 민섭이 농염하게 춤을 추고 있었다.
민섭이 농염하게 추면 출수록, 아이러니하게도 관객들에게 그것은 큰 웃음이 되어 전달되었다.
재치. 유머.
민섭한테 이런 면이 있는 줄 몰랐지만….
마치 화장으로 얼굴을 가린 듯.
다른 사람이 된 민섭이 자신감 있게 춤추고 있었다.
객석에서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하하하하하!”
“뭐야! 남자였잖아! 하하하하!”
“D반에 저렇게 웃긴 애가 있었어?”
우울한 분위기였던 길드장들의 얼굴에도 한 아름 큰 웃음이 지어졌다.
“민섭 군한테 저런 능력이 있는 줄 몰랐군.”
“역시! 청춘은 좋은 거야!”
“크… 학생 때 생각난다.”
한재석이 갑자기 분위기가 바뀐 길드장들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늙은이들 정말…. 그런데….”
한재석의 시선이 민섭에게 향했다.
괜히 더 오버를 하며 웃음을 이끌어내고 있는 민섭의 모습.
민섭이 동작을 하나 취할 때마다 객석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민섭을 보며 웃고 있는 사람들 속.
유일하게 한재석만이 웃고 있지 않았다.
‘저 녀석….’
한재석이 민섭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표정이 어두워졌다.
“민섭이 파이팅!”
“민섭이 누나 너무 예뻐요!!!”
최한과 부기의 응원 소리를 끝으로….
그렇게.
무대가 마무리되었다.
모든 무대가 끝난 뒤.
“장기 자랑 일등은… 2학년 D반입니다.”
짝짝짝-.
우레와 같은 함성이 울려 퍼지고, 박수 소리가 모두 한 사람에게 향하고 있었다.
“고마워! 최고의 수학여행이야.”
민섭의 주위로 모여든 아이들.
조일환 선생과 D반 아이들이 민섭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먼발치서 바라보고 있는 최한.
최한의 얼굴에 한재석과 같은 표정이 지어져 있었다.
그렇게….
최한의 마지막 수학여행 날이 저물었다.
* * *
이그드라실의 최상층부.
신들이 사는 세계 아스가르드.
오딘의 궁전 발라스칼프에 오딘과 토르의 모습이 보였다.
오딘의 권좌가 있는 그곳에 백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1,000번을 넘게 죽었었다.”
금색의 거울 속에 보이는 백설의 모습.
이어진, 능천사들의 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장면을 확인한 오딘이 근심 어린 한숨을 내뱉었다.
토르가 오딘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버지께서는 만류하셨지만… 저 녀석들이 신경 쓰여서….”
“괜찮다. 네가 얼마나 신경이 쓰였으면 능천사까지 보냈겠느냐.”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딘이 거울 속 백설의 얼굴을 보며 수염을 매만졌다.
“1,000년 동안 많은 일이 있던 것 같군. 그런데 왜 하필 지금 헬헤임에서 돌아온 거지….”
“복수 때문에 돌아온 것이 아닙니까? 저 녀석은 분명 그 녀석의 곁에 있던….”
“아니…. 그것만이 아닐 것이야. 인간이 영혼을 뺏긴 주제에 헬헤임과 미드가르드를 마음대로 오가는 것은… 불가능해….”
토르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렇다면 헬헤임의 왕들이 뭔가 꿍꿍이를 가지고….”
오딘이 어깨에 있는 까마귀를 만지며 말했다.
“그곳은 우리의 관할 밖이니…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는 없는 노릇이야. 자칫하다간 전쟁으로 번질 수도 있으니까.”
토르가 마른침을 삼키며 천 년 전 ‘그날’을 떠올렸다.
“휴거 때 저 여자와 ‘헬헤임’에 대한 대비도 해놔야겠군요. 천 년 전 그때처럼… 운이 따라주진 않을 겁니다. 저들까지 참전했다면… 아마 이 아스가르드는….”
침묵이 이어졌다.
오딘과 토르 모두 천 년 전 ‘반역의 날’에 대해 떠올리고 있었다.
신에게 처음으로 도전했던….
인간과 거인족, 그리고 용족까지.
용족의 배신으로 다행히 신들의 승리로 마무리되었지만….
죽은 자들의 세계.
지옥이라 불리는 헬헤임의 전사들이 난입했다면….
결과는 달랐으리라….
오딘과 토르가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
백설을 비추던 거울에 한 남성의 모습이 나타났다.
“저 녀석은 참 신기하군. 마치 인간이 아닌 것 같아.”
오딘의 목소리에 토르의 시선이 거울로 향했다.
그곳엔 노란 머리칼을 휘날리며 번개를 던지고 있는 한재석의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