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거울이 비추고 있는 노란 머리의 소년은 분명 인간이었다.
하지만.
소년의 몸을 감싸고 있는 저 붉은 기운은 아무리 봐도….
틀림없는 마기였다.
토르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사선이 된 눈썹과 잔뜩 찡그린 미간이 그의 심경을 대변해주었다.
“마기는 신들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의 기운인데 어째서 저 인간 녀석이….”
차분히 거울 속에 비친 한재석을 바라보던 오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유일하게 신이 아니어도 마기를 가질 수 있는 존재가 있지.”
말을 마친 오딘이 오른손을 살짝 들어 거울을 가리키자, 한재석이 비치던 거울에 파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화면이 넘어가듯 다른 곳을 비추기 시작한 거울이었다.
토르가 새롭게 비친 거울 속 얼굴을 보며 말했다.
“저 녀석은… 열쇠가 아닙니까?”
거울 속 여장을 하고 있는 민섭의 모습이 보였다.
“그렇다. 내가 그토록 바꾸려 했던 예언의 주인공…. 이 우주의 종말을 가져올 라그나로크의 시작점…. 신을 끌어내릴 열쇠.”
토르의 시선으로 민섭의 몸을 감싼 붉은 마기가 눈에 들어왔다.
“확실히… 열쇠는 인간이 분명함에도 마기를 가지고 있군요. 그럼 아까 그 녀석은 대체….”
오딘이 거울 속 민섭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
“인간 주제에 열쇠와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면 둘 중 하나겠지.”
오딘의 목소리에 토르의 얼굴에 더욱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또 하나의 열쇠이든가, 아니면… 신이든가.”
침묵이 이어졌다.
오딘의 입에서 나온 두 개의 가설 중 어떤 것이 정답일지라도….
그들에겐 독이 될 테니까.
“그건 그렇고….”
침묵을 이어가던 오딘이 민섭의 가슴 쪽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신기하구나. 모든 생명 에너지가 심장에 모이고 있어. 아니, 마치 생명을 갉아 먹는 듯… 힘을 빼앗고 있는 건가….”
토르의 시선에도 민섭의 심장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붉은 마기가 보였다.
“최소한의 마기로 몸의 형태를 유지시키며, 모든 힘을 심장으로 모으는 듯합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가서 죽이고 싶지만….”
“저희는 만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저 녀석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을지…. 만약… 저희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우주는 끝입니다.”
오딘이 비어 있는 한쪽 눈 위로 손을 얹었다.
“정확히 무엇일까…. 신을 끌어내릴 열쇠라…. 한쪽 눈까지 버리며 모든 지식을 손에 넣은 이 오딘이 유일하게 알아내지 못한 저 존재…. 정말 저런 약한 인간에게 신이 멸망당하는 것인가….”
“그럴 리 없습니다. 아버님, 휴거가 진행되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올 겁니다. 예언도 라그나로크도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오딘이 토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어깨에 있는 까마귀를 쓰다듬었다.
“그래. 토르 네 말이 맞다. 우리에게는 세계수에 있는 많은 세상과 그곳에 살고 있는 종족을 지킬 의무가 있으니까.”
“인간이 모두 죽어야 나머지 8개의 세계가 살 수 있습니다.”
“한 세계의 죽음으로 나머지가 살 수 있다면… 인간들도 이해할 것이야.”
토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기심.
불합리.
자신들이 살기 위해 하나의 세계를 멸망시킨다.
이기적이게도 보일 수 있지만, 대의를 의해 소수를 희생하는 것.
그것만큼 번지르르한 변명 또한 없다.
“저희가 살아 있어야 혼돈이 오지 않습니다. 이 우주를 평화롭게 지배할 수 있는 건. 아버님밖에 없습니다.”
분명한 사실이었다.
지금까지 나타난 어떠한 신도 오딘보다 강하지 않았으니까.
평화라는 것은 완벽한 통제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오딘이 입을 뗐다.
“전쟁은… 선과 악의 충돌이 아니다. 전쟁이란 둘 다 선이기에 일어나는 것. 인간들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오딘이 천 년 전 자신에게 도전했던 유일한 인간의 얼굴을 떠올렸다.
“신은… 선과 악. 착한 일과 나쁜 일을 고르면서 할 필요가 없어. 신이니까… 내가 정하는 것이 곧 선이고, 법이다.”
오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딘의 시선이 거울 속 최한에게 향했다.
소리치고 있는 최한.
“나를 노리고 이 녀석들을 보낸 거라면… 또 보고 있겠지…. 다음번엔 이딴 약한 놈들 보내지 말고… 네가 직접 와, 쓰레기 신 새끼야.”
오딘의 얼굴에 사악한 미소가 번졌다.
“역시 인간은 모두 죽어야 해.”
휴거 D – 63일.
* * *
미림 고등학교 수학여행 일주일 후.
수학여행의 여운이 아직 채 가시지도 않은 아이들이 등교를 하고 있었다.
교문을 지나는 부기와 민섭의 얼굴에 땀이 흥건했다.
“와… 진짜 덥다. 걷기만 했는데도 땀나.”
“아침에 뉴스에서 보니까 오늘 최고 기온 37도라던데.”
“뭐? 37도! 여기 정말 한국 맞냐?”
내리쬐는 햇빛이 완전 불덩이처럼 느껴졌다.
마치 불가마 안에 있는 것 같은 느낌에 부기가 시름시름 앓는 소리는 내뱉었다.
“으…. 아침에도 이렇게 더우면… 오후에는 진짜 죽을 수도….”
“뭘 이 정도 가지고 그러냐?”
부기와 민섭에게 날아든 목소리.
부기와 민섭이 본관으로 향하던 걸음을 멈추고 몸을 뒤로 돌렸다.
“요!”
최한이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인사했다.
민섭이 밝게 웃으며 최한을 반겼다.
“오늘은 웬일로 늦게 왔네? 항상 맨 처음 등교하더니.”
최한이 아이들에게 다가가며 대답했다.
“오늘은 아침에 빨래 좀 하느라. 날씨가 이렇게 좋으니, 저녁이면 마를 거 같아서.”
장부기가 힘없는 표정으로 손을 들어 보였다.
“이 더위에 웃을 수 있다니…. 넌 덥지도 않냐?”
“안 덥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한데 버틸 만은 해. 이 정도는 이세계 있을 때 갔던 용암 마을에 비하면 봄이라고.”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마을 이름에 민섭과 부기의 눈동자가 두 배나 커졌다.
“용암 마을?”
“이 정도가 봄이라면… 거기 온도는….”
최한이 리자드맨들이 살던 용암 마을을 떠올렸다.
“대충 80도는 됐던 거 같은데.”
가늠조차 되지 않는 온도에 민섭과 부기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넋이 나간 아이들의 표정에 최한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큭! 놀라기는. 그러니까 이 정도 더위는 양반이라고. 암튼 얼른 들어가자.”
최한의 발걸음을 시작으로, 민섭과 부기의 걸음이 옮겨졌다.
최한과 아이들이 2학년 D반 교실에 도착했다.
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시원한 바람에 아이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다 죽어가던 장부기가 만세를 외치며 문 안으로 들어섰다.
“아! 역시! 에어컨 바람이 최고야. 이 작위적으로 만들어낸 인공 바람! 그 어떤 것보다도 21세기 최고의 발명품이야! 사랑한다! 에어컨!”
뒤쪽에 있던 최한과 민섭이 고개를 저었다.
“오버는….”
“더위 먹은 게 분명해….”
최한과 아이들이 문을 통과하자 교실 한곳에 모여 있던 아이들이 손을 들어 인사했다.
“왔냐, 최한? 민섭이도 안녕.”
“좋은 아침!”
“안녕. 세계 최강, 그리고 인류 최약 병기였지만, B급이 된 로또맨.”
“장부기는 아침부터 왜 저러냐….”
아이들의 농담 섞인 인사에 밝은 얼굴로 답하는 최한과 민섭이었다.
성녀가 두 팔을 벌리며 최한에게 달려들었다.
“보고 싶었습니다! 최한!”
최한이 살짝 몸을 틀어 성녀를 피했다.
콰과과쾅!!!!
성녀가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최한이 아이들을 보며 말했다.
“근데 왜 다들 모여 있냐?”
아이들이 홍철의 자리 주변으로 모두 모여 있었다.
휴대폰을 보고 있는 홍철.
홍철이 최한을 발견하고 겁먹은 듯 휴대폰을 자신의 몸쪽으로 가렸다.
최수혁의 기자 회견 때 최한이 홍철의 휴대폰을 부쉈던 일 때문에 겁먹은 것 같았다.
최한이 홍철을 안심시키며 다가갔다.
“걱정 마. 안 부술게. 그래도 내가 그거 최신 폰으로 사줬잖아.”
최한의 목소리에 홍철이 다시 휴대폰을 책상의 중앙에 가져다 놓았다.
“지금 뉴스에 아주 난리가 나가지고, 다 같이 보고 있었어.”
홍철의 목소리에 최한이 아이들 틈으로 들어가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작은 화면을 가득 채운 뉴스 속보가 보였다.
‘대한민국 사상 첫 던전 브레이크.’
‘또다시 패배한 길드장들.’
‘대한민국 5대 길드 이대로 괜찮은가?’
화면 아래로 지나가는 기사 제목에 최한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뉴스 진행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약 일주일 전 대한민국에 일어난 던전 브레이크 영상입니다. 제보를 받은 영상이라 화면은 고르지 못하지만, 거리가 있음에도….”
작은 휴대폰 화면 가득 제주도 상공에서 있었던 던전 브레이크의 영상이 나타났다.
새하얀 천사의 공격으로 쓰러지는 S급의 대형 길드장들.
뒤이어 노란 머리의 학생이 혼자서 던전 브레이크를 막는 화면이 짧게 이어지고….
마지막으로.
“역시나 이번에도 사건을 해결한 이는 다름 아닌 미림고에 재학 중인 SSS급 최한 군이었습니다.”
최한이 어두운 표정으로 자신이 나온 영상을 보고 있었다.
‘중간중간 보기 좋게 짜깁기했군.’
화면이 바뀌며 다시 진행자의 얼굴이 보였다.
“일각에서는 두 번이나 패배한 길드장들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국가에서 관리하는 브로스 길드를 향해서도 이번에는 많은 우려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진행자의 목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인터뷰를 진행하는 화면으로 바뀌었다.
“대한민국 5대 길드장들이 두 번이나 패배한 건 좀 그렇네요….”
“대형 길드 불필요한 거 같아요. 브로스 길드 때문에 세금이나 많이 걷고.”
“5대 길드가 거의 독식하다시피 하니까, 작은 길드들이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그런데 저렇게 망신이나 당하다니. 어휴.”
“디스 길드장 그거는 A급 주제에 가서 하는 것도 없잖아. 유명세로 인맥이나 늘리고, 돈이나 더 벌려고 던전 브레이크 따라간 거지. S급도 지는데 자기가 거길 왜가!”
“디스 길드장 항상 뒤에서 디버프만 걸지 제대로 싸운 적도 없잖아요.”
“그냥 SSS급 혼자서 우리나라 지켜도 될 거 같은데. S급 길드장들 약하던데요.”
쾅!!!
뉴스를 보던 최한이 더는 참지 못하고 책상을 내리쳤다.
“약하긴 누가 약해…. 5시간 넘게 비 맞으면서 길드장들이 얼마나… 개고생했는데….”
순식간에 부숴진 홍철의 책상.
아이들이 모두 최한의 행동에 놀라 최한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았다.
홍철이 휴대폰을 끌어안으며 최한에게 말했다.
“뭐든 하나는 부수는구만….”
아이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린 것을 확인한 최한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으아… 미안해. 내가 너무 감정이입이 돼서…. 미안하다, 홍철아…. 하하….”
아이들이 그런 모습에도 적응된 듯 최한의 어깨와 등을 툭툭 치며 한마디씩 하고 자리로 떠났다.
“괜찮아. 너는 현장에서 봤으니, 그렇게 느낀 거겠지.”
“너무 신경 쓰지 마. 저런 이상한 사람들은 소수일 거야. 길드장들이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는 사람들이 더 잘 알 거야.”
“물건은 부숴도 홍철이는 부수지 마라. 애는 착해.”
“길드장님들 이거 보면서 울고 있는 거 아니냐….”
“화이팅. 최한.”
아이들이 모두 자리로 돌아가고 최한도 자신의 자리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뉴스가 너무 의도적으로 길드장들을 깎아내리는 것 같단 말이야. 특히 디스 길드장은 완전 공격적으로 까는 것 같은데….’
천천히 자리로 가던 최한의 시선이 한곳에서 멈췄다.
자신의 자리를 지나 한참을 더 걸어가던 최한이 어느 책상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잠깐 얘기 좀 할까?”
망설임 없는 차가운 목소리가 돌아왔다.
“할 얘기 없다.”
최한이 멈춘 곳. 그곳은 백설의 자리였다.
여전히 차가운 반응만 보이는 백설의 모습에 최한이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천천히 입을 뗐다.
“대체 천 년 전에 무슨….”
최한의 목소리에 백설이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옥상으로 따라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