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백설을 따라 옥상에 도착했다.
뜨거운 햇살과 탁 트인 풍경이 가장 먼저 최한을 반겼다.
“아따. 옥상 경치도 꽤 괜찮네.”
항상 교실 창 난간에 걸터앉아 교실 안 풍경, 그리고 운동장과 하늘이 반쯤 뒤섞인 창밖의 풍경을 감상하는 것을 좋아하던 최한이었다.
“가끔 옥상도 올라와야겠는데?”
여전히 최한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는 백설이었다.
교실부터 꽤 긴 시간을 나란히 걸었지만, 백설은 최한에게 작은 눈길도, 대화도 건네지 않았다.
옥상 중앙으로 나아가던 백설의 걸음이 멈췄다.
몸을 돌리는 백설.
최한의 시선으로 바람에 흩날리는 붉은 머리칼을 손으로 넘기는 백설과 눈이 마주쳤다.
“웬일이냐? 맨날 쌀쌀맞게 거절하더니?”
최한이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내가 언제 쌀쌀맞게 거절했다는 거냐. 나는 그런 기억 없다.”
백설이 표정 하나 변하지 않으며, 냉담하게 대답했다.
얼음이랑 대화해도 이것보단 낫겠다고 생각한 최한이었다.
“이 얘기는 그만하고… 진지하게 물어볼 게 좀 있어.”
진중하게 변한 최한의 목소리에 어떤 변화도 없던 백설의 표정 위로 감정이 드러났다.
담담한 척하려 하지만, 표정 위로 드러나는 기대에 찬 표정.
왜 기대하는 눈빛을 짓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최한은 자신이 궁금했던 것을 입 밖으로 꺼내 물었다.
“내가 던전 브레이크를 처리하러 가 있는 동안 천사들이 찾아왔었지? 정말 너 혼자 나머지 7마리의 천사들을 다 해치운 거야?”
최한의 목소리가 울린 뒤.
백설의 얼굴에 있던, 뭔가를 기대하고 있는 표정이 사라졌다.
다시 무섭도록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온 백설이었다.
“그딴 시시한 얘기를 하려고 날 여기까지 오게 만든 거냐?”
짜증이 난 듯 쏘아붙이는 백설의 목소리에 최한이 당황했다.
“아, 아니. 끌고 온 건 넌데…. 그것보다 이게 왜 시시한 얘기야? 내가 제주도부터 머릿속이 얼마나 복잡했는지 알아? 네가 나한테 말한 그 약하다는 말 때문에?”
손짓까지 하며 자신의 답답함을 설명하고 있는 최한이었지만, 백설은 여전히 전혀 관심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시시한 얘기지. 너는 알고 있었잖아. 그곳에 나 말고 그 녀석들을 이길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그리고 뭐가 문제지? 네가 약한 건 사실이잖아.”
조곤조곤 따지듯 말하고 있었지만,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보면 틀린 말도 하나 없는 백설의 답이었다.
“야, 나 SSS급이야. 나한테 약하다고 하는 사람 너밖에 없다고.”
“SSS급이라…. 겨우 인간들이 만들어 낸 그딴 등급 가지고 강하다 생각하는 것이냐?”
“인간들? 무슨 지는 인간이 아닌 것처럼 말하고 있냐! 너도 인간이잖아.”
떨리는 백설의 눈동자.
백설이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 몸을 돌렸다.
“이딴 시시한 얘기나 하는 줄 알았으면 나오지 않았을 텐데. 시간만 낭비했군. 나약한 놈….”
치마를 잡은 주먹이 떨리고 있었다.
‘왜 내가 이딴 감정을.’
백설이 최한을 지나쳐 문으로 향했다.
“그럼… 천 년 전에 우린 어떤 사이였지?”
백설의 걸음이 멈췄다.
온몸에 힘이 빠지듯 몸이 무거웠고, 심장이… 있을 리 없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듯했다.
천천히 몸을 돌리는 백설.
그곳에는 그토록 보고 싶었던 그 얼굴이 서 있었다.
“진지하게 생각해 봤어. 천사, 그리고 거인족들이 내게 한 말. 그리고 두통과 함께 떠오르는 너와의 기억들….”
다른 사람이 서 있는 양, 평소 최한이 보여주던 들뜬 분위기가 사라져 있었다.
차분하면서도, 어딘지 느긋하기도 한.
여유롭고, 슬픔을 간직한 표정.
백설의 입술이 떨려왔다.
그때 그 표정이다.
천 년 전….
자신을 두고 떠나 버렸던 그때의 표정이었다.
“천 년 전 나는… 아니, 27번째 인간의 왕은 어떤 사람이었지?”
최한의 시선으로 백설과 퀘스트창이 겹쳐졌다.
「튜토리얼 퀘스트 NO. 666
Last
미림고에서 과 죽음을 동시에 선물해 줄 검집을 찾아내어 죽여라.
(time out - 56일)
보상
경험치 + 1,187,263,337
검집의 심장 (EX)
획득 칭호
### # (EX)」
[히든 퀘스트 ‘계승되는 의지’ 완료.]
[칭호 개방]
획득 칭호
### # (EX)
▶#&@##
…….
[칭호 열람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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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토리얼 퀘스트 NO. 666
Last
미림고에서 삶과 죽음을 동시에 선물해 줄 검집을 찾아내어 죽여라.
(time out - 56일)
보상
경험치 + 1,187,263,337
검집의 심장 (EX)
획득 칭호
인간의 왕 (EX)」
‘예언이 있었다. 신과 악마 그리고 인간의 전쟁. 신을 끌어내릴 인간이 태어날 것이다. 그는 신을 하늘에서 끌어내릴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니라. 28번째 인간의 왕이 나타나면, 세계를 끝낼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 * *
서울의 명동의 한 빌딩.
같은 선상에 있는 다른 빌딩들 중에서도 유독 우뚝 솟아 있는 초고층의 건물 외벽에 멀리서 봐도 한눈에 들어오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대한민국 헌터 협회.]
헌터 협회는 길드와 또 다른 방식으로 국민을 보호하고, 능력자가 나타난 시대의 흐름에 맞춰 능력자들을 위한 법률과 보호를 위해 만들어진 단체이다.
대한민국 헌터 협회의 본사 건물 2층에서 기자 회견이 진행되고 있었다.
수많은 취재진과 카메라가 향한 단상에 한 남성이 앉아 있었다.
흐트러짐 하나 찾을 수 없는 옷매무새와 한 올의 흔들림도 없는 올백의 머리.
수많은 취재진에도 긴장한 기색 하나 없이 수려한 말솜씨로 좌중을 압도하고 있는 남자.
대한민국 헌터 협회의 협회장이자, A급 능력자.
정우철이었다.
“먼저 바쁘신 와중에도 이곳에 모여주신 기자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정우철이 살짝 묵례하자, 카메라의 플래시가 여기저기서 터지기 시작했다.
다시 자세를 정갈히 잡은 정우철이 마이크에 대고 말을 이어갔다.
“오늘 이렇게 갑작스레 기자 회견을 열게 된 이유는, 요즘 뉴스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대한민국 5대 대형 길드에 관한 사항 때문입니다.”
노트북을 두드리던 기자들의 손이 바빠졌다.
협회에서 직접적으로 대형 길드를 지목하고, 기자 회견까지 열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이전에 있었던 ‘A10 탑 사건’ 그리고 저번 주에 있었던 ‘던전 브레이크’ 두 번의 사건 모두 대한민국 5대 대형 길드라 불리는 브로스, 아레나, 청룡, 검성, 디스 길드의 길드장들이 그 장소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우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의 감정이 목소리에 묻어 나오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을 지탱하다시피하고 있는 대형 길드의 길드장들의 패배. 두 번의 사건 모두 그들은 말 그대로 도움조차 되지 못했습니다. 그로 인해 국민들에게 심각한 불안감을 심어주게 되고, 많은 능력자들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기까지 했습니다. 항간에는 ‘길드가 과연 필요 있는가?’ 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퍼져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협회 차원에서도 더는 지켜볼 수만은 없기에… 지금까지의 틀을 버리고 국민의 안전을 위해 능력자와 길드의 혁신을 추구하기로 했습니다.”
쉬지 않고 말을 내뱉던 협회장 정우철이 깊은 날숨을 내뱉었다.
“그 첫 시작으로, 두 번의 패배로 국민에게 불안감을 조성한 길드장들에게 징계를 내리겠습니다. 현 시간부로 대한민국 5대 대형 길드, 브로스, 아레나, 청룡, 검성, 디스 길드의 길드장 다섯 명의 활동을 한 달 동안 정지합니다. 그리고….”
정우철의 마지막 목소리를 들은 기자들의 표정이 사라졌다.
“디스 길드의 모든 던전 관리권과 길드 소유물을 박탈하고… 디스 길드를 해체하겠습니다.”
* * *
같은 시각.
미림 고등학교 옥상.
백설이 옥상 문을 열어 학교로 들어간 뒤, 바로 최한이 그녀를 따랐다.
텅 빈 옥상.
작은 바람 소리와 멀리서 들리는 매미 울음소리만이 가득했다.
그때.
“읍…. 아! 숨 막혀 죽는 줄 알았네….”
옥상의 구석에 숨어 있던 남학생이 모습을 드러냈다.
쓰러지듯 옥상 바닥에 엎드린 남학생은 김민섭이었다.
민섭의 옆으로 노란 머리를 늘어트린 남학생이 민섭과 같은 자세로 엎드렸다.
“아이씨! 내가 왜 숨어야 하는데!”
한재석이 짜증스러운 얼굴로 소리쳤다.
숨을 고르던 민섭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 그러게. 백설이랑 최한이 뭔가 너무 진지한 표정으로 들어오길래… 나도 모르게…. 하하….”
한재석의 눈이 화살처럼 변했다.
민섭을 쏘아 보던 한재석이 한숨을 내뱉었다.
“하… 됐다. 지나간 얘기는 그만하자, 짜증만 더 난다.”
“응… 미안…. 그런데 왜 나를 보자고 한 거야?”
민섭의 목소리에 한재석이 표정을 다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을 툭툭 털던 한재석이 민섭을 내려다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느낀 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너 장기 자랑 할 때….”
장기 자랑 했을 때 여장한 모습이 생각난 민섭이 부끄러운지 몸을 세우며 머리를 긁적였다.
“하하… 그건 마… 마지막으로 조… 좋은 추억 하나 만들고 싶어서. 내가 내성적으로 살아서 학교에서 추억이란 게 없거든. 하하….”
멋쩍게 웃고 있는 민섭과 다르게 한재석의 얼굴에는 더욱 어두운 표정이 지어졌다.
“마지막이라…. 그럼 내가 느낀 게 맞나보네. 너… 죽냐?”
뚱딴지같은 질문이었지만.
민섭의 표정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장난스러운 물음도 아니었다.
한재석의 목소리에 장난기 따윈 보이지 않았다.
진심으로 물어본 것이다.
“왜… 그런 질문을….”
눈도 마주치지 않고 대답하는 민섭이었다.
“너 하나도 즐거워 보이지 않았거든. 오히려 슬퍼 보였어. 그리고 가장 큰 확신을 준 것은… 사람은 자신의 죽음이 다가오면… 전혀 다른 행동을 보이거든. 그러다 예전에 들었던 열쇠 얘기가 떠올랐지.”
한재석의 정곡을 찌르는 목소리에 민섭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같은 ‘리미트 해제자’라서 그런 건지. 똑같은 붉은색 마력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언제부턴가 네가 꿈에 나오기 시작했어.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누군가의 칼에 찔려 있는 너의 모습이….”
한재석이 민섭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너… 다 알고 있는 거지? 결말을…. 이 세계가 어떻게 되는지. 네가 언제 죽게 되는지.”
민섭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들키지 않으려 했었다.
그중에서도 최한과 한재석에게만큼은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이 운명의 소용돌이.
그 중앙에 있는 이는 이 세 명의 인간이니까.
민섭이 떨리는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들켰으니… 어쩔 수 없지. 대신 약속 하나만 해. 절대 최한에게 말하지 않기로. 그럼… 내가 너에 대해 중요한 이야기도 해줄게.”
“나에 대한 이야기라고…?”
“우선 약속해. 절대 최한에게 말하지 않기로. 죽어도… 절대로….”
민섭의 목소리가 지금까지와는 달라져 있었다.
심각성을 인지한 한재석이 마른침을 한 번 삼켰다.
“그래. 비밀로 하지.”
“56일 후… 인간은 멸망하게 될 거야.”
민섭의 목소리에 한재석의 눈동자가 떨렸다.
“56일 후라고….”
“응. 그리고 그날 너와 나는 최한의 손에… 죽게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