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협회의 기자 회견이 있던 다음날.
대한민국 5대 길드장들이 한곳에 모여 있었다.
브로스 길드 서울 본사.
길드장 최수혁의 집무실에 침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소파에 앉아 있던 최수혁이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협회의 입장에서 볼 때는 기둥이 되어야 할 우리가 두 번이나 패배했으니, 보여주기식으로 징계를 줄 수밖에 없었을 거야.”
건너편에 앉아 있던 검성 길드장 장왕윤이 팔짱을 낀 채 낮은 어조로 이어 말했다.
“길드장들의 직무 정지야, 부길드장들이 어느 정도 대신 업무를 봐줄 수 있으니 상관은 없지만….”
장왕윤의 시선이 바로 옆에 앉아 있던 디스 길드장 지경태에게 옮겨졌다.
장왕윤의 시선을 따라 다른 길드장들의 시선도 한곳으로 향했다.
“길드 해체는 너무 심한 거 같은데.”
“왜 디스 길드만 콕 집어서 이렇게….”
다른 길드장들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디스 길드장 지경태의 입에서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한 달의 직무 정지를 받게 된 다른 길드장들과 다르게, 디스 길드는 말 그대로 길드 해체 통보를 받았다.
자신만 징계를 받는 것이 아니라, 길드에 소속되어 있는 능력자들과 직원들 모두 일자리를 잃는 타격을 받게 되었다.
지경태가 어떠한 말도 내뱉지 않고 연신 한숨만 쉬어댔다.
5대 대형 길드에 속해 있던 자부심도 있었지만, 길드장이 A급이라는 것에 대한 잡음이 끊이지 않고 나왔던 터라 지경태도 나름의 고충을 끌어안고 어렵사리 길드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길드장들이었기에 자신의 일이 아님에도 오늘 이렇게 다 같이 자리해 대책을 강구하려 하고 있었다.
최수혁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는 지경태를 보며 말했다.
“어느 정도의 징계라면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길드 해체 같은 사항은 아무리 생각해도 도를 넘은 것 같아.”
장왕윤도 최수혁을 거들었다.
“아무리 협회의 결정이라 해도, 정도가 지나쳤어.”
아레나 길드장 이정은과 청룡 길드장 이창식도 지경태를 보며 말했다.
“그래. 이 정도 가지고 길드 자체를 해체하는 건 너무 심한 처사야.”
“맞아. 설마 협회장, 예전 그 일 때문에 일부러….”
탁!
최수혁의 집무실 문이 열리며 멀끔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일부러라니요. 그 말은 제가 권력을 부당하게 이용했다는 겁니까?”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울리고, 자리에 앉아 있던 길드장들의 시선이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에게 향했다.
못 볼 것이라도 본 것처럼, 얼굴의 이곳저곳이 구겨진 길드장들의 얼굴이었다.
“아니… 당신이 대체 왜….”
“정우철 협회장….”
당황한 표정의 길드장들과 다르게 정우철 협회장은 여유로운 표정과 걸음으로 길드장들이 앉아 있는 소파로 다가갔다.
“님 자를 붙이셔야죠. 길드장님들. 다들 위치도 있으신 분들이.”
미소까지 보이며 소파에 도착한 정우철 협회장이 남은 자리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최수혁에게 말했다.
“손님이 왔는데, 의자도 주시지 않습니까?”
거슬리는 말투에 최수혁의 한쪽 눈썹이 떨렸다.
“손님이라…. 난 협회장님을 초대한 기억이 없는데요?”
“내가… 오라고 했어.”
작게 울리는 지경태의 목소리.
지금까지 꾹 다물고 있던 입이 처음으로 떼졌다.
지경태의 말에도 길드장들의 표정에는 경계심이 지워지지 않았다.
자신을 향한 거부적인 반응에도 정우철은 당당한 표정과 미소를 고수했다.
“뭐… 그냥 서서 얘기하죠. 오래 걸리지도 않을 거 같은데.”
정우철이 딱딱하게 고정된 머리를 손으로 한 번 쓸어 넘겼다.
“징계에 대해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도 있으실 것 같은데, 이건 제 독단적인 결정이 아니라 협회 고문들과 회의를 통해 내려진 결과라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언뜻 보면 사과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우철의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미안한 감정이 섞이지 않은 표정과 말투.
오만한 성격이 그대로 눈빛을 통해 전해졌다.
하나 길드장들 또한 그가 내뱉은 말이 진심이 아닐 거란 것쯤은 알고 있었다.
아마도….
최수혁이 다음에 내뱉은 정우철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이제 진짜 이야기를 꺼내겠지.’
정우철이 팔짱을 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무리 헌터가 자유로운 직업이긴 하나… 다른 능력자도 아니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5대 대형 길드의 길드장. 전세계에서도 몇 없는 S급 능력자가 수장으로 있는 길드라면… 얼마나 많은 관심과 기대를 받고 있는지도 알고 계시겠지요.”
길드장들은 들끓는 기분과 다르게 차분히 정우철의 말을 듣고 있었다.
“정부 직속인 브로스길드만이 아니라 아레나, 검성, 청룡, 디스… 여러분들의 길드 앞에 대한민국 5대 길드라는 수식어가 붙은 그 순간부터 책임이라는 것이 따라다니게 된 겁니다. 당신들의 한 걸음에 국민들이 열광하고, 당신들의 패배에 국민들이 불안해하기도 하지요. 뭐 대의를 떠나서도 솔직히 말하면… 여러분들 대형 길드라는 이유만으로 정부에서든 협회에서든 지원을 많이 받았잖아요. 물질적인 것부터 시작해서 자잘한 특혜까지….”
다소 공격적인 언행으로 바뀌었지만, 정우철의 목소리에 길드장들은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다.
사실이었으니까.
다른 길드는 꿈도 못 꿀, 천문학적인 금액과 신인 드래프트의 우선권, 등급이 높은 던전의 우선 지명권까지….
이 밖에도 ‘5대 길드’라는 이유로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특혜를 받고 있었으니까.
정우철 협회장이 한숨을 길게 내쉬고 말을 이어갔다.
“그런 특혜에 비해… 여러분의 요즘 행보는 어땠습니까? 전국으로 송출되는 방송에서 처참할 정도로 패배하고… 다른 나라는 잘만 막던 던전 브레이크를 막지도 못했지요. 한 번의 실패도 용납받지 않는 당신들이 두 번이나 패배했습니다. 아직도 당신들이 받은 징계가 과하다 생각하십니까?”
최수혁의 주먹이 떨려왔다.
모두 맞는 말이었다.
반대 입장이었다면 자신도 분명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책임을 당사자에게만 지게 할 때이다.
잠자코 듣고 있던 최수혁이 입을 뗐다.
“징계에 대해서는 저희도 같은 마음입니다. 더 큰 벌을 주었어도, 달게 받았을 것입니다.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저희 길드장에게 책임을 물었을 경우이지요. 디스 길드의 경우는 길드장이 아닌, 길드 전체가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최수혁의 목소리에 정우철이 인정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맞지요. 프로 스포츠에서도 패배가 계속된다면 선수를 갈아엎는 게 아니라 감독을 바꿔야 문제가 해결되니까요. 브로스 길드장님의 말씀 이해합니다. 그래서 온 겁니다. 제가.”
정우철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는지 길드장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유독 디스 길드에게만 해체라는 과한 징계를 내린 것은, 국민들의 여론을 반영한 결과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다른 길드에 비해 디스 길드의 평판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니까요. 그것 말고도 국민들도 지금은 말은 저렇게 하지만, 큰일이 닥쳤을 때 먼저 떠올리는 이들은 여기 있는 S급 능력자들일 것입니다. A급이 아니라요. 그래서 협회에서 지금 이 결정이 나온 겁니다. 새로운… 미래를 위해. 국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심어주려면 도태된 박힌 돌을 빼내고 그 자리에 새로운 버팀목이 들어와야 하니까요.”
청룡 길드의 길드장 이창식이 더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니까, 네 말은 디스 길드가 총알받이 돼서 사라지고, 그걸로 길드장들 패배한 사건 다 덮는다는 의미잖아!”
정우철이 박수를 치며 이창식에게 말했다.
“정답. 의외로 한 번에 말귀를 알아먹으시는군요.”
“이 자식이….”
“말조심하시죠. 전 이제 당신들이 알던 길드원이 아니라… 대한민국 헌터 협회 협회장입니다.”
디스 길드의 길드장 지경태가 자리에서 일어난 이창식의 손목을 잡았다.
천천히 고개를 젓는 지경태.
불필요한 싸움은 하지 말자는 의도였다.
“지경태… 너….”
이창식이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정우철이 콧방귀를 뀌며 말을 이어갔다.
“협회만을 위한 결정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길드를 생각해서 도출해낸 최상의 해결책이죠. 그리고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포함한 기자 회견 발표까지 지경태 길드장은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다른 길드장들의 시선이 디스 길드장 지경태에게 모였다.
“알고 있었다고?”
“너, 알고 있었으면서 대체 왜….”
“총알받이가 될 걸 알면서도 왜 잠자코 있던 거야! 너희 길드원들은 생각 안 하냐!”
길드장들의 높아진 언성에도 지경태는 어떠한 반응도 없이 묵묵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정우철의 시선이 디스 길드장에게 향했다.
“지경태 길드장님…. 아니죠, 이제는 길드장이 아니라 지경태 헌터라고 불러야겠군요. 지경태 헌터와는 어제 통화로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여러분들과도 상의는 해야 할 문제가 하나 있어서 함께 있을 때 불러 달라고 했습니다.”
최수혁의 정우철을 보며 말했다.
“상의라고?”
“네. 디스 길드는 해체될 것입니다. 하지만 죄 없는 길드원들을 하루아침에 실업자로 만드는 것도 협회의 입장에서는 못 할 짓이지요. 그래서 길드장님들이 모두 모여 있을 때 불러 달라고 했습니다. 디스 길드원들과 직원들을 받아줄 길드를 찾기 위해서.”
최대한 차분함을 유지하고 있던 최수혁의 얼굴 전체가 구겨졌다.
분노를 숨기지 않는 표정.
“협회장. 당신이 다 꾸민 거지…. 지경태를 협박해 책임을 지게 만들고. 길드원들이라도 모두 편입시켜 살려줄 테니… 혼자 다 뒤집어쓰라고.”
정우철의 얼굴에 지금까지 중 가장 큰 웃음이 지어졌다.
“탐정하셔도 되겠어요. 브로스 길드장님. 그래도 하나는 틀리셨네요. 협박이 아니라 제… 배려였습니다. 부하도 지키지 못한 능력 없는 길드장이더라도 제가 가입한 첫 길드의 길드장이었으니까요. 정으로 배려해 준 겁니다.”
최수혁이 더는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너… 이 자식….”
곁에 있던 검성 길드장 장왕윤과 아레나 길드장 이정은이 최수혁을 막으려 몸을 끌어안았다.
“안 돼…. 참아… 제발….”
“협회장을 때리면 파면 따위로 끝나지 않을 거야…. 우리도 네 마음이랑 같아.”
이정은과 장왕윤의 떨림이 최수혁의 피부로 전해졌다.
이들도 참고 있다.
이들도 견디고 있다.
대한민국 헌터 협회의 협회장.
어쩌면 자신들보다 더욱 영향력 있는 그 자리.
최수혁이 입술을 깨물었다.
침체된 분위기 속 유일하게 정우철 협회장만이 웃고 있었다.
자신의 힘에 취해.
자신의 권력에 취해.
대한민국 최고라 불리는 5대 대형 길드 길드장들의 무력함을 보며….
‘내가 대한민국 최강이다.’
그때.
팍!
끼이익!
문이 비명이라도 지르는 것처럼 강하게 열렸다.
그리고.
자신의 힘에 취해 있던 정우철의 시선으로 교복을 입고 있는 거친 표정의 남학생이 보였다.
“뭐야, 넌. 누군데 허락 없이 여길 들어와! 어린 새끼가.”
정우철의 목소리에 길드장들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이어.
“처음 봤는데… 욕하네….”
머리를 긁적이던 최한이 고개를 똑바로 들어 정우철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죽고 싶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