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 * *
대한민국 명동.
헌터 협회의 본사 건물 최상층.
고급 라운지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넓은 공간에 정우철의 모습이 보였다.
긴 소파에 쓰러지듯 몸을 기댄 정우철이 낮에 있던 일을 떠올렸다.
‘이 재수 없게 생긴 새끼는 누구야?’
‘디스 길드와 관련된 사항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죠, 협회장님.’
치욕스러운 감정이 온몸을 잠식해 갔다.
테이블 위에 놓인 재떨이를 그대로 들어 바닥에 던져 버렸다.
“X발! 감히 나에게 그런 모욕을! 개 같은 놈들! 대한민국 헌터 협회장인 내게… 감히 내게….”
재떨이가 산산이 조각났음에도 정우철의 분노는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최한과 최수혁의 목소리가 떠나지 않았다.
‘이 재수 없게 생긴 새끼는 누구야?’
‘디스 길드와 관련된 사항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죠, 협회장님.’
“그만해! 그만하라고! X발!”
앞에 있던 테이블을 발로 강하게 찼다.
빡!!!!!
쪼개지는 소리와 함께 대리석으로 된 테이블이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쿵….
폭발하듯 튀어 올랐던 테이블이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고풍스러운 자태를 뽐내던 대리석 구조물이 산산이 조각나 바닥을 뒹굴었다.
“개자식들… 개자식들….”
똑똑.
노크 소리에 정우철 협회장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문이 스르르 열리며 한 여성이 들어왔다.
귀밑을 넘어가지 않는 숏컷의 단발과 섹시하고 지적인 이미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금색의 뿔테 안경이 잘 어울리는 여자.
협회장의 개인 비서, 차이수였다.
무표정으로 들어온 차 비서는 엉망이 된 협회장실을 눈에 담고도 크게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또각또각.
날카롭게까지 느껴지는 구두 굽 소리를 내며 차 비서가 협회장이 앉아 있는 소파로 다가갔다.
협회장의 앞에 도착한 차 비서가 시선을 내려 박살 난 테이블을 한 번 쳐다보더니, 들고 있던 서류를 협회장에게 직접 건넸다.
아직도 얼굴에 분노가 남아 있던 협회장이 짜증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뭐지?”
“차량에서 부탁하시던 정보입니다. 브로스 길드를 포함한 나머지 길드들의 극비 정보.”
정우철의 얼굴빛이 밝아졌다.
차 비서의 손에 있던 서류를 낚아채듯 빠르게 집어 들었다.
서류를 넘기는 정우철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지어졌다.
차 비서가 안경을 고쳐 쓰며 보고했다.
“던전 브레이크 당시 검성 길드가 몰래 드래곤의 사체를 지하 연구실로 옮긴 것을 알아냈습니다.”
빠르게 서류를 읽고 있는 정우철의 눈이 광기에 사로잡혔다.
“길드에 속해 있지는 않지만, SSS급 능력자는 브로스 길드의 지원을 받으며 지내고 있습니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미림고 추천 입학을 제외하고도, 집과 생활비 등을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페이지 맨 아래 보시면….”
정우철이 들고 있는 서류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 녀석들은 누구지?”
“SSS급과 같은 미림고에 재학 중인 한재석 군과 김민섭 군입니다. 그 둘은 지금껏 발견된 적 없던 ‘리미트 해제자’입니다. 오지훈은 협회에 보고도 하지 않은 채, 그들의 연구를 계속해 오던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정우철의 얼굴에 만족한 웃음이 지어졌다.
“대단하군. 역시 차 비서야. 이걸로 날 무시하던 그놈들 코를 납작하게 해줄 수 있겠어. 멍청한 S급 놈들! 힘만 강하다고 진짜 강한 게 아니야! 반드시 내 발아래 무릎 꿇려주마.”
차 비서의 시선이 웃고 있는 정우철을 향했다.
이런 남자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함께 정상으로 올라가자고 세 명이 함께 다짐했을 때부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남자.
차 비서가 낮은 목소리로 정우철에게 말했다.
“협회장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됩니까?”
“뭐지?”
“왜… 디스 길드를…. 길드장님에게 그런 처사를 내리신 건지. 분명… 협회 고문들께서도… 그 정도까지는 안 해도 된다고….”
정우철이 날숨과 함께 들고 있던 서류를 옆으로 툭 던졌다.
“차이수.”
정우철의 입에서 차 비서의 이름이 나온 것은 디스 길드를 나오고 처음이었다.
정우철이 차 비서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벌써 잊은 거야? 그 녀석 때문에 죽은 재원이를?”
2년도 더 지난 이야기였지만, 차이수는 재원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했다.
같은 팀이자, 전 애인이었던 재원의 이름에 차비서가 견디기 힘든지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정우철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차 비서를 보며 미소 지었다.
‘조종하기 참 쉬운 여자야.’
진정이 됐는지 차 비서가 고개를 들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다음 주에 있을 헌터 협회 정상 회담에는 누구를 데려가실 생각이신지….”
차비서의 목소리에 정우철이 올백으로 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생각에 잠겼다.
능력자 산업의 강대국들만 모이는 헌터 협회 정상 회담은 기본적으로 협회 회장과 그 나라에서 가장 강한 S급 능력자가 함께 참석하는 것이 관례이다.
나라의 강함을 내보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자리였기에, 일종의 보디가드를 겸해서 가장 강하고 유명한 S급을 데려가 보이지 않는 경쟁을 하는 것이다.
생각에 잠겨 있던 정우철의 얼굴에 재미있는 표정이 지어졌다.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어. 내일 미림고에 연락해. SSS급 그 녀석… 내 꼭두각시로 만들어야겠어.”
* * *
이른 아침.
최한이 교문을 지나며 기지개를 켰다.
“아… 어제 검사 많이 했더니, 피곤하네.”
다른 학생들이었다면, 하루 학교 쉬고 편하게 검사만 받는 것을 더 즐거워했을 테지만, 최한은 아니었다.
한 시간가량 몸을 움직이지 않은 채 있어야 하는 검사도 좀이 쑤셨고, 온몸에 장치를 붙이고 있는 것도 불편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최한은 지금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친구들과 어울리고 교실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기만 해도 행복하다 느끼고 있기에.
이 행복감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
하루하루가 아쉬웠다.
“남들은 이해 못 하겠지만, 역시 나는….”
최한의 시야에 퀘스트창이 나타났다.
「튜토리얼 퀘스트 NO. 666
Last
미림고에서 삶과 죽음을 동시에 선물해 줄 검집을 찾아내어 죽여라.
(time out - 54일)
보상
경험치 + 1,187,263,337
검집의 심장 (EX)
획득 칭호
인간의 왕(EX)」
[실패 시 페널티 부과]
- 이세계 강제 전송
- 멸망
새롭게 나타난 칭호에 가장 먼저 시선이 멈췄다.
인간의 왕.
“퀘스트를 완료하면 인간의 왕이… 되는 건가….”
그다음으로 보이는 페널티.
멸망.
인류를 멸망하게 할 수는 없으니 대의를 위해서든 자신을 위해서든 꼭 클리어할 수밖에 없는 퀘스트였다.
하지만.
“아마… 예언에서 말한 날도 내 퀘스트 마지막 날이겠지. 그리고… 검집을 죽이는 것도…. 인류가 멸망할 정도의 큰 사건이 일어날 거야….”
최한이 손을 들어 한 번 휘젓자, 퀘스트창이 사라졌다.
최한이 한숨과 함께 학교로 걸음을 옮겼다.
“학교는 다닐 수 없게 되겠지. 어쩌면 학교가 사라질 수도….”
터벅.
터벅.
한눈에 봐도 힘없는 걸음걸이였다.
정신없이 걸음을 옮기다 보니, 2학년 D반 교실 문 앞에 도착했다.
최한이 날숨을 깊게 내쉬고는 손을 들어 볼을 짝짝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쳤다.
“우울해하지 말자. 걱정한다고 바뀌는 건 없으니까. 즐기자. 오늘을.”
탁!
최한이 앞문을 열며 교실로 들어갔다.
“요! 좋은 아침!”
자리에 앉아 있던 아이들이 최한을 보며 반갑게 인사했다.
“하이.”
“좋은 아침.”
“어서 와, 대마왕.”
최한이 아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담으며 기분 좋게 웃었다.
‘그래. 걱정은 그때 가서 하자.’
최한이 미소를 머금으며 자신의 자리로 이동했다.
“왔습니까! 최한! 보고 싶었습니다!”
보라색 머리칼을 휘날리며 성녀가 최한을 향해 날아왔다.
날아왔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두 발 모두 공중에 떠서 미사일처럼 날아오고 있었으니까.
최한이 살짝 몸을 틀어 성녀를 피했다.
문을 통과해 그대로 날아가는 성녀.
콰과과광!!!!
최한이 아무 일 없던 것처럼 걸음을 옮겼다.
자리에 앉아 있던 아이들도 이런 모습이 적응이 된 것인지 아무도 이 상황에 대한 말을 꺼내지 않았다.
최한이 나란히 앉아 이야기하고 있는 부기와 민섭을 보며 아는 체했다.
“요!”
부기가 손을 올리며 인사했다.
“요! 어제 땡땡이 잘 쳤냐?”
“땡땡이는 무슨…. 난 차라리 학교 오는 게 더 좋다고.”
“너도 참…. 진짜 학교 좋아한다.”
멋쩍은 웃음을 보이던 최한이 부기와 민섭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그것보다, 쌤 오시기 전에 매점이나 갔다 오자. 배고파.”
장부기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침 안 먹었어? 웬일로?”
“집에 달걀이 떨어져서. 어제 브로스 길드 갔다가 집에 늦게 와서 장을 못 봤어.”
“달걀 없다고 밥 안 먹는 건 완전 초딩인데?”
“아이참. 시끄럽고. 가자! 가자! 내가 사줄게! 뭐 해, 민섭아. 너도 가자!”
“아… 나, 나는….”
민섭이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어물쩍댔다.
몸을 반쯤 일으킨 장부기가 민섭에게 말했다.
“뭐 해, 가자. 난 아침 먹었는데 따라가는 거라고.”
“그… 어! 백설아!”
민섭이 뜬금없이 지나가는 백설의 이름을 불렀다.
차가운 표정으로 미간을 구긴 백설의 얼굴이 민섭에게 향했다.
“뭐지?”
“백설아 안녕! 잠깐 이야기 좀 할까? 하하하!”
민섭이 백설의 팔을 잡고 빠르게 끌고 나갔다.
너무도 빠르게 일어난 어이없는 상황에 최한과 장부기의 시선이 그들이 빠져나간 뒷문에 고정되어 있었다.
“쟤가 왜 저러지?”
“그건 그렇고, 쟤네 둘이 저렇게… 친했었나?”
충격이 가시지 않는 듯 멀뚱멀뚱 뒷문만을 바라보는 최한과 부기였다.
그때.
찌지직-.
방송이 흘러나왔다.
“2학년 D반 최한 학생. 교장실로 내려와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알립니다. 2학년 D반….”
“뭐지?”
* * *
똑똑.
최한이 노크를 하고 교장실 문을 열었다.
아무것도 전달받지 못하고 온 것이기에 천천히 문을 열며 안에 누가 있는지 살폈다.
“에? 뭐야? 왜 다 모여 있어요, 또?”
최한의 시선으로 교장실에 앉아 있는 길드장들의 얼굴이 들어왔다.
브로스 길드 최수혁.
청룡 길드 이창식.
검성 길드 장왕윤.
아레나 길드 이정은.
파면당하긴 했지만, 디스 길드 지경태까지.
최한이 문을 닫고 길드장들이 앉아 있는 소파로 다가갔다.
“뭐야? 왜 다들 말이 없어요? 표정은 왜 또 다 죽어가고.”
길드장들의 낯빛이 어두웠다.
얼굴에 내비친 감정은 고사하고 움츠러든 몸에서 전해지는 기운조차 상당히 어두웠다.
최한이 인사도 없이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길드장들을 보며 안 좋은 예감을 느꼈다.
최한의 머릿속으로 어제 브로스 길드에서 만났던 협회장의 얼굴이 스쳐 갔다.
“무슨 일 있는 거죠? 설마 그 협회장 놈이 뭔 짓이라도 했어요?”
뼈를 치는 최한의 목소리에 조용히 앉아 있던 최수혁이 천천히 입을 뗐다.
“협회장이… 다음 주에 있을 협회 정상 회담에 함께 갈 보디가드로… 너를 지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