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왜 친한 척이야, 미친놈이.”
회의장을 울린 한마디에 행사장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의 몸이 그대로 굳어졌다.
표정뿐 아니라 작은 숨소리조차 내뱉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카메라를 통해 전 세계로 고스란히 뻗어 나간 최한의 목소리에 중계를 보고 있던 시청자들 또한 행사장에 있는 사람들처럼 굳어졌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그 목소리가 향한 당사자.
한국 헌터 협회 협회장, 정우철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누구나 그랬을 것이다.
수많은 카메라.
공식적인 석상.
전 세계가 지켜보는 중요한 자리.
그 자리에서 이런 상스러운 말을 꺼낼 수 있는 인간이 어디 있으랴.
이 상황이 꿈이라고까지 생각이 들 정도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정우철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술을 뗐다.
“지금 뭐라고….”
“왜 친한 척이냐고. 미친놈아.”
꿈이 아니었다.
이것은 분명 현실.
자신의 눈앞에 벌어진 현실이었다.
그리고.
이 상황은 전 세계에 있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개무시를 당하고 있는 것이었다.
치욕스러운 감정에 정우철의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너 보러 온 거 아니야.”
최한이 정우철을 지나쳐 오지훈 박사에게 다가갔다.
“박사님. 그 어제 했던 검사 결과 때문에 물어볼 거 있어서 왔어요.”
뜬금없는 질문에 당황한 오지훈이 최한의 표정을 살피다, 무언가 깨달았는지 피식 웃음을 내뱉었다.
“참 대단한 사람이네요, 당신은…. 그래요. 뭐가 궁금했죠?”
“제 몸무게 몇 킬로인가요?”
오지훈이 더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제 몸무게 몇 킬로인가요?’
그 한마디가 정우철의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이명이 들렸다.
삐이-.
마치 이 세상 모든 소리가 단절되고 현실과 꿈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혼돈의 상태.
정우철이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눈이 풀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오지훈 박사가 미소를 보이며 최한의 물음에 대답했다.
“최한 군은 68킬로입니다.”
“아! 그렇군요. 그게 얼마나 궁금했던지. 그럼 답도 들었으니 가볼게요.”
최한이 오지훈에게 살짝 눈인사를 건네고 몸을 돌렸다.
턱.
턱.
턱.
그 넓은 회의장에 최한의 발소리만 가득했다.
걸음을 옮기던 최한이 정우철의 앞에서 멈춰 섰다.
“아! 맞다! 당신한테도 할 말 있었는데.”
아직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정우철이 크게 반응하지 못하고 눈동자만 움직여 최한을 바라보았다.
“지금 진행하는 이 행사 보디가드 겸, 대표로 참여해 달라고 했었지? 그거… 거절할게. 내가 재수 없게 생긴 놈이랑은 같이 일 안 하거든.”
“풉.”
작은 비웃음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최한이 정우철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역시 난… 사람이 덜된 놈 부탁은 못 들어주겠어.”
흔들리는 눈동자가 이제는 거의 죽은 사람의 것처럼 변했다.
어떤 반응도 보일 수 없었다.
이 수많은 눈앞에서.
이런 치욕적인 일을 당하는 순간에.
대체 어떤 표정으로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정우철의 고개가 떨어졌다.
그의 꽉 쥐어진 주먹만이 그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었다.
행사장에 있던 통역관들의 표정에 난처한 감정이 드러났다.
대체 무슨 말인지 통역을 해달라는 외국 협회장들의 목소리만이 여기저기서 들리기 시작했다.
최한의 머릿속으로 디스 길드장 지경태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왜 참기만 하는 거예요?’
‘그 녀석의 팀원 한 명을 지켜주지 못했어. 다른 조였어도, 내가 던전 공략 대장을 맡았으니… 나 때문에 죽은 거야.’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너, 복수를 대의처럼 포장하지 마.”
정우철의 눈동자가 떨려왔다.
최한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정우철의 바로 옆을 지나며 최한이 정우철만 들리게 작은 목소리로 마지막 말을 전했다.
“말로 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야. 한 번만 더 길드장들 협박하거나, 디스 길드장 건드리면… 더 이상 한국에 협회는 없는 거야.”
턱….
턱….
턱….
최한이 행사장을 가로질러 문으로 나간 뒤에도 행사장의 분위기는 전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 * *
최한이 행사장에 나타난 장면을 생중계로 보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
그중에는 정우철에게 협박을 받던 대한민국 5대 대형 길드 길드장들도 있었다.
길드장들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흘러나왔다.
청룡 길드장 이창식이 사무실이 떠나가라 호쾌하게 웃었다.
“하하하하! 역시 질풍노도의 고등학생! 젊음은 좋은 거여!”
함께 화면을 보고 있던 최수혁의 얼굴에도 웃음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X라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대단한 상X라이인 줄은 몰랐네.”
장왕윤과 이정은의 목소리도 이어졌다.
“저 녀석은 정말 대단해. 간이 큰 건지… 아님 성격이 괴팍한 건지.”
“협회장 우는 거 같은데? 통쾌하다, 정말.”
최한의 시원한 행동에 연신 감탄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너무 자극한 거 아닐까? 협회장 저 X라이 같은 성격에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갈 것 같지 않은데….”
디스 길드장 지경태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최수혁이 지경태의 어깨의 손을 얹었다.
“걱정 말라고. 이건 우리의 선전 포고이기도 해. 최한이 쏘아 올리긴 했지만, 우리도 그냥 당하고 있지만은 않아. 디스 길드 건도 우리 길드의 일들도.”
지경태의 얼굴에 걱정이 사라져갔다.
최수혁이 생중계 되고 있는 화면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눈으로 확인했잖아. 협회장 저 녀석은 절대 최한 못 이겨.”
* * *
일주일간 진행되는 ‘헌터 동맹국 정상 회담’의 첫째 날 일정이 모두 끝났다.
겨우 첫날 일정이 끝난 것뿐이지만, 이미 전 세계의 뉴스 특보를 모두 독차지할 만한 기사가 나와 버렸다.
벌써부터 뉴스와 인터넷 기사가 협회장과 SSS급의 이름으로 도배되었다.
대한민국 헌터 협회장의 개망신.
“X발!!!”
찰진 욕설과 함께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온 정우철이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다 부수기 시작했다.
“으아악! 개자식! 이 개자식!”
와장창-.
쾅!!!!
물건들이 깨지는 소리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계속해서 울렸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박살 내도 정우철의 분노는 사그라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전 세계의 웃음거리가 됐어. 죽여 버리겠어! 죽여 버리고 말 거야!”
정신 이상자의 눈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초점이 맞지 않는 눈동자로 허공을 보며 욕을 내뱉고 있는 정우철이었다.
흔히들 ‘눈이 돌았다’라고 말하는 그런 상태.
보이는 것이 없었다.
분노를 아무리 표출해도 가슴에 불이 난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머릿속에 영사기를 틀어 놓은 것처럼, 굴욕적인 그 순간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정우철은 무슨 짓을 해도 화가 가라앉지 않자 목이 찢어져라 소리를 질렀다.
“개 쪽팔리게!!! 죽여 버릴 거야! 꼭! 꼭!”
괴성을 지르던 정우철이 방전된 인형처럼 몸을 축 늘어트렸다.
푹 숙인 고개.
잔뜩 처져 있는 어깨와 팔.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복수할 수 있을까.”
마치 다른 사람이 빙의라도 된 것처럼 순식간에 180도 뒤바뀐 감정과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정도로 초점이 나간 눈동자가 땅을 훑고 있었다.
“헤…헤….”
정우철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입이 비뚤어진 채 웃는 괴상한 표정.
얼굴 근육들이 웃음을 따라가지 못하고 경련을 일으켰다.
“아, 맞다…. 그거야…. ‘그때처럼…’ 그때처럼 민심이 돌아서게 하면 되는 거야.”
정우철이 들키지 않기 위해, 자신도 숨겨두었던 그때를 떠올렸다.
협회장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 후보를 탈락시켰던 그 사건.
자신의 길드장이었던 디스 길드의 지경태의 경력에 큰 스크래치를 냈던 그 일을.
“역시 최고의 고통은 역시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지닌 채 죽지도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지.”
정우철의 입을 가린 채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꺄르르.
꺄르르.
어른의 목소리로 태어난 그 웃음소리는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기괴했다.
“아… 벌써부터 기대되네. 뉴스에 도배될 너의 기사가. 전 국민에게 아니지, 전 세계인들에게 손가락질받을… 너의 표정이.”
정우철이 양손으로 볼을 움켜쥐었다.
행복에 취한 표정.
최한이 겪게 될 그 지옥 같은 현실이 너무나도 황홀한 느낌을 주었다.
“SSS급 빼고 전멸. 자만심에 빠진 SSS급. 낮은 던전에서 함께 간 친구 지키지 못하다…. 아니, 어쩌면 SSS급이 죽인 거 아니냐고 의심받을지도 몰라. 그럼 더 좋겠군.”
정우철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깊숙이 숨겨두었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오랜만이군. 사람 하나 보내줘. 들키지 않게 죽여야 하니까. 보이지 않는 능력자나, 공간이동 술사로….”
수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고 미소 짓는 정우철.
“아니야. 지경태 그 녀석은 이미 내 발아래 있어서 죽일 필요 없어. 이번에는 더 큰 사냥감이야. 보수는 두둑하게 준비해 두지.”
뚝.
정우철이 휴대폰을 내려놓고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흐흐흐흐…… 네가 얼마나 강하건 상관없어. 너를 직접 죽이지 않아도 지옥에 빠트릴 방법은 얼마든지 있거든. 모든 것을 잃은 네 표정이 벌써부터 기대되는군. 흐흐흐흐흐….”
* * *
다음 날 아침.
미림 고등학교 전체에 방송이 울려 퍼졌다.
“이상 호명된 학생들은 교무실로 내려와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알려 드립니다. 2학년 D반 최한 군과 심민섭 그리고….”
방송이 울리고 얼마 뒤.
교무실의 문이 열리며 최한과 아이들이 들어왔다.
최한과 아이들이 조일환 선생이 있는 자리로 걸어갔다.
조일환 선생이 아이들을 반겼다.
“그래, 어서 와라.”
민섭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쌤. 근데 무슨 일로 저희를 부르신 거예요?”
조일환 선생의 앞으로 나란히 선 아이들.
조일환 선생이 책상에 있던 서류를 집어 들며 아이들에게 보여주었다.
“협회에서 공문이 왔다.”
민섭이 얼굴을 들이밀며 서류를 확인했다.
조일환 선생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SSS급을 포함한 세 명이 팀을 짜서 새롭게 나타난 B급 던전을 돌고 오라는 내용이다.”
최한이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너무 뻔히 보이는 함정인데. 뭐… 우선 어울려줄까?’
서류를 확인하던 민섭이 조일환에게 물었다.
“그런데 신기하네요. 대체 무슨 기준으로 저희를… 뽑았을까요…?”
“그건 나도 모르지. 그래도 SSS급 최한도 있고, 민섭이 너도 B급이니 문제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저 너는 정확한 등급은 모르니 친구들 옆에 잘 붙어 있거라.”
협회에서 지목한 세 명의 학생.
조일환 선생의 목소리에 최한과 민섭의 옆에 서 있던….
백설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