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펑!!!
펑!!!!
펑!!!!!
시원한 타격음이 울리고 최한의 공격을 버티지 못한 몬스터들의 몸이 터져 나갔다.
바닥에 쌓인 몬스터들의 사체를 보며 민섭이 말했다.
“진짜 언제 봐도 경이롭단 말이야. B급 던전 몬스터들은 손가락만으로 이기는구나….”
하마의 모습과 닮은 몬스터들이 이제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어 바닥에 쌓여 갔다.
몬스터를 모두 죽인 최한이 기지개를 켰다.
“으아… 꽤 많이 죽인 거 같은데… 끝이 안 보이네.”
그때, 말없이 따라만 다니던 백설의 입이 드디어 열렸다.
“이제 끝인 거 같은데?”
백설의 목소리에 최한과 민섭이 백설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대한 바위로 된 문.
두 개가 겹쳐진 바위에서 붉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눈에 보일 정도로 선명한 기운.
최한의 얼굴에 이제야 미소가 번졌다.
“드디어 보스 방이군.”
민섭이 바닥에 나뒹구는 몬스터의 정보를 모은 뒤, 바위 앞으로 이동했다.
티딕!
민섭이 서번트 워치를 바위에 가져다 댔다.
서번치 워치를 두드리는 민섭.
“웅. 이 안으로 들어가면 보스가 있는 것 같아.”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최한이 피로도 잊은 채 바위로 다가갔다.
바위 앞에 있던 민섭이 백설이 있는 뒤쪽으로 이동했다.
최한이 바위 앞에서 자세를 잡았다.
“자… 그럼 빨리 해치우고 돌아가자고. 슬슬 배고프기도 하고.”
말을 마친 최한이 활시위를 당기는 것처럼 주먹을 뒤로 당겼다.
작은 날숨과 함께 최한의 주먹이 바위를 깨트리기 위해 강하게 허공을 찢었다.
.
.
.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예상대로라면 바위가 쪼개지는 소리가 들렸어야 하는데….
바위 쪽을 바라보고 있던 민섭과 백설의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바위 앞에 있어야 할 최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
“뭐지?”
순식간에 사라진 최한의 모습.
귀신이 잡아갔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말 그대로 최한이 사라졌다.
민섭이 놀라 최한이 서 있던 자리로 달려갔다.
“최한!”
당황한 백설이 민섭의 뒤를 따랐다.
“어디 있어, 최한! 뭐지? 최한은 이동 마법 같은 거 못하는데….”
민섭이 있는 곳에 도착한 백설의 얼굴에 심각한 표정이 지어졌다.
희미하지만 마력의 잔재가 느껴졌다.
턱을 매만지던 백설이 고개를 들어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동굴처럼 생긴 던전의 구석구석 시선을 두던 백설의 얼굴이 구겨졌다.
“온다.”
팟!
벽과 땅을 디디는 소리가 여럿 울리고.
검은 두건을 쓴 의문의 남성들이 백설과 민섭에게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나타난 검이 살점을 찢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헉… 헉… 헉….”
거친 숨소리가 울렸다.
수많은 사람들을 지나치는 빠른 발걸음.
인간의 속력이 아니었다.
얼굴을 잔뜩 구긴 지경태가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전해야 할 것이 있었다.
도움을 청해야 했다.
길드장들이 최수혁의 집무실에 모두 모여 있을 것이다.
아레나 길드장 이정은의 힘이 필요했다.
그녀의 이동 마법이….
“젠장….”
입가를 타고 날숨과 뒤섞인 욕설이 튀어나왔다.
10KM가 넘는 긴 거리를 쉬지 않고 달린다면 능력자라도 지치긴 한다.
거기다 지경태는 디버프 서포트를 주로 하는 지원형 능력자다 보니, 다른 A급 능력자보다 근력과 체력이 월등히 낮았다.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 달렸다.
자신 때문에 아이들이… 최한이 상처 입는 것을 볼 수 없었기에.
거기다….
협회장의 계획이 성공한다면….
정신적 충격을 받은 SSS급이 날뛰기라도 한다면….
한국, 아니… 전 세계는 멸망이다.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안 돼….’
지경태가 쉬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몇 시간이 걸릴 거리를 십 분도 채 되지 않아 도착한 지경태였다.
지경태가 빠르게 최수혁의 사무실 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최수혁과 다른 길드장들이 모여 있었다.
“어! 디스 길드장님.”
가장 먼저 지경태를 발견한 이는 오지훈 박사였다.
지경태가 인사도 제쳐 둔 채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며 소리쳤다.
“이정은! 어서 빨리… 이동 마법을…. 어서 빨리…. 아이들이 위험해!”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았지만,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들을 설득시키고 이동해야 한다.
이정은의 이동 마법을 한시라도 빨리 발동시켜야 한다.
그래야.
그래야 살릴 수 있다.
“이정은! 빨리…. 제발 빨리 좀….”
이해할 수 없는 지경태의 행동에 사무실에 있던 길드장들이 당황해 말했다.
“무슨 일이야?”
“갑자기 이동 마법이라니….”
“진정해. 우선 진정하고 이야기를….”
길드장들이 지경태를 향해 모여들었다.
“아니! 한시가 급해. 어서… 빨리 가지 않으면, SSS급이 위험해!”
지경태의 입에서 나온 최한의 이야기에 최수혁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이정은. 어서 이동 마법 준비해!”
최수혁의 목소리에 이정은이 손으로 마법진을 그리며 대답했다.
“하는 건 하는 건데. 아니…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급박한 일이 생긴 걸 간파한 최수혁이 우선 조치를 하고 지경태를 진정시켰다.
“어차피 공간 마법이 발동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니, 진정하고 천천히 얘기해 봐.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지경태가 호흡을 가다듬고 천천히 입을 뗐다.
“협회장이 일을 꾸민 것 같아. SSS급과 미림고 학생 두 명을 등록도 되지 않은 던전에 들여보냈어.”
냄새가 나는 이야기에 최수혁의 표정이 구겨졌다.
“협회장의 비서인 차이수가 와서 내게 말해줬으니 사실일 거야. 문제는 이게 예전 그때의 일과 똑같다는 거야. 너희도 알고 있지? 내가 협회장 선거에서 기권을 할 수밖에 없었던 그 사건….”
길드장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모두 알고 있었다.
당선이 확실시되었던 지경태가 협회장이 되지 못했던 이유.
기권표를 던질 수밖에 없던 그 이유를.
“이재원 헌터의 일 때문 아닙니까?”
오지훈의 목소리에 지경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어 말했다.
“그때 사실 나에게 이상한 일이 있었어. 분명 재원이와 붙어 있었는데 갑자기 이상한 공간에 갇힌 것 같은 느낌. 누군가 일부러 나를 떼 놓은 것처럼….”
오지훈의 눈매가 사선으로 변했다.
“공간 단절 마법… 능력자의 소행이었던 거군요.”
“그때와 똑같은 짓을 하려는 거야. 최한에게 복수하려고. 협회장 그놈은 최한이 아니라 함께 간 친구들을 죽이려는 거야. 친구를 지키지 못했단 절망감에 빠지게 하기 위해. 정신적으로 최한을 무너트리려는 거야.”
오지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최한 군이 이성을 잃는다면….”
공간에 있던 모든 길드장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최수혁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것도 위험하지만, 우선 아이들이 위험해! 우선 최한과 함께 간 아이들의 정보를….”
“그건… 내가 알아….”
지경태의 목소리에 길드장들의 모든 시선이 모였다.
“최한과 함께 간 미림고 학생들의 이름은… 김민섭과….”
오지훈과 최수혁이 머리를 움켜쥐었다.
두 가지 큰 이유가 있었다.
김민섭은 신을 끌어내릴 중요한 열쇠.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그리고.
김민섭은 최한과 가장 많은 유대감을 쌓은 인간.
가장 친한 친구였다.
‘민섭을 지키지 못한다면… 최한은 정말… 이성을 잃을지도 몰라.’
“하….”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지경태의 마지막 목소리가 울렸다.
“백설이라는 아이야.”
사무실을 채운 마지막 목소리에 극도로 흥분한 모습을 보이던 오지훈 박사와 최수혁의 표정이 사라졌다.
껌뻑껌뻑.
눈만 깜빡이고 있는 오지훈과 최수혁.
지경태의 시선으로 보이는 두 사람의 표정이 너무도….
차분하게 변했다.
“왜 그런 표정을…. 지금 얼마나 위급한 상황….”
최수혁이 지경태의 말허리를 잘랐다.
“이봐. 디스 길드장. 더 이상 걱정… 안 해도 돼.”
“걱정 안 해도 된다니 무슨….”
“진짜로 걱정 안 해도 돼. 이제 협회장의 계획대로 되지 않을 거야. 공간 단절 마법? 암살자들도 있겠군.”
오지훈과 최수혁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제 걔네들 다 X됐어.”
* * *
푹!
푹!
푹!
검이 살점을 뚫고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팟!!!!
붉은 피가 하늘로 치솟았다.
검은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암살범들의 눈에 황홀한 웃음이 지어졌다.
“행복한가?”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칼을 박아 넣었던 암살범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째서… 분명 손에 감촉이 있었는데….”
“급소를 정확히 찔렀을 텐데….”
수백 번의 작전에서 단 한 차례도 실패를 한 적 없었던 그들이었다.
방심 따윈 하지 않았다.
상대가 능력자인 걸 감안해 검에 자신들의 마력과 특성도 주입했는데….
암살자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살에 박혀 있는 검을 사선으로 꺾으려 했다.
“안타깝게도… 그 정도로는 죽지 않아.”
백설의 목소리에 끝을 알 수 없는 공포가 묻어 있었다.
한기가 암살자들의 뼛속까지 침범해갔다.
움직일 수 없었다.
이미 몸에 명령을 내리는 주체가 바뀌어 있었다.
온몸에 검이 박혀 있던 백설이 암살자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거대한 그림자가 암살자들의 팔과 다리를 뜯어 먹기 시작했다.
우걱!
꽈지직!
기분 나쁜 소리가 울렸다.
암살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살점과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팔과 다리. 그다음은 몸통 순으로…. 한 번에 즉사시키지 않고, 최대한 고통을 느끼다 죽도록 하고 있었다.
그 바로 옆에서 주저앉아 있던 민섭이 마른침을 삼켰다.
백설의 힘을 통해 머릿속으로나마 이미 백설의 본 모습을 보았던 민섭이었다.
그럼에도….
“와… 최한 보다… 훨씬 센 거 같은데….”
눈앞에서 펼쳐진 살육의 현장에 민섭의 다리가 덜덜 떨려 왔다.
검을 쥐고 있던 손과 반쯤 사라진 얼굴들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백설이 인상을 찌푸렸다.
“맛이 없군.”
민섭이 어색한 웃음을 보였다.
“하하… 마, 맛도 느끼는구나….”
그때.
허공이 균열을 일으키며 공간이 찢어졌다.
반이 잘리며 다른 공간과 연결된 입구가 나타났다.
그곳에서 인간의 다리가 나오고 있었다.
“끝났어?”
한 치의 걱정도 없는 목소리.
공간을 찢고 나오는 사람의 정체는 최한이었다.
아직 다른 공간에 몸을 반쯤 걸친 채,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본 최한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으…. 뭔가 몬스터 사체 보는 거랑 사람 시체 보는 거랑은 느낌이 다르다니까. 으….”
최한이 백설에게 시선을 움직였다.
“내겐 사람이나 몬스터나 거기서 거기다.”
백설의 차가운 목소리에 최한이 고개를 저었다.
“어? 최한. 어디 갔었어. 찾았잖아.”
민섭의 목소리에 최한이 나머지 몸과 팔을 빼내며 말했다.
“이 녀석이 이상한 공간에 가둔 것 같아.”
최한의 손에 들려 있는 남자.
얼굴이 피떡이 되어 있었다.
“공간 단절 능력자인가?”
민섭의 목소리에 최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나와 너희를 떨어뜨린 다음… 너희를 죽이려는 계획이었겠지. 뭐… 바로 다른 공간에 가자마자 알긴 했는데. 백설이 같이 있으니까 걱정은 안 했어.”
“대체 누가 이런 짓을….”
백설이 끼어들었다.
“뻔하잖아. 여기로 보낸 사람이겠지.”
최한이 손에 들고 있던 능력자를 바닥에 던졌다.
“그럼 복수하러 가야지? 내 친구들을 죽이려 했으니….”
최한의 목소리에 민섭과 백설의 시선이 최한에게 향했다.
쿵….
민섭과 백설의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오랜만이었다.
최한의 이 표정….
“난 당신에게 기회를 줬어, 협회장. 사람을 포기한 건 너야. 지옥에 온 걸 환영해.”
최한의 얼굴에 악마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