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헌터 협회 동맹국 정상회담.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행사의 마지막 일정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제 남아 있는 식순은 개최지인 한국 대표의 폐회사와 폐회식뿐.
화합을 다지는 영상이 끝나고 장내가 밝아졌다.
사회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어서 한국 헌터 협회장님의 폐회사가 있겠습니다.”
짝짝짝-.
장내가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
정우철 협회장이 올백으로 된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첫날, SSS급과의 사건이 있긴 했지만, 막강한 자금력과 천부적인 일 처리 능력으로 일주일간 진행된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친 정우철의 평판은 한층 더 올라가 있었다.
절제된 미소를 보이며 천천히 무대로 오르는 정우철.
정우철이 단상에 서자, 박수 소리가 점차 사라졌다.
“우선 일주일간 진행된 이 행사에 참여해주신 각국의 협회장님들과 대표로 오신 능력자분들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정우철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짝짝짝-.
또다시 장내를 가득 채우는 박수 소리.
“또한 이 행사에 도움을 주신 많은 기업들과 협회 직원분들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이 행사는 저의 힘만으로 진행된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힘써 주신 많은 분들이 있었기에, 성공적으로 행사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회장 전체를 눈에 담으며 시선을 움직이는 정우철이었다.
자신을 낮추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력한 인원들을 챙기는 리더.
마땅히 칭찬받아야 하는 모습이었지만….
그것이 모두 계획된 가식적인 연기라면, 말은 달라진다.
‘병신 같은 개, 돼지 놈들. 너희의 박수 소리에 내 평판은 더더욱 올라간다고.’
겉과 속이 다른 미소가 번져갔다.
‘이쯤이면 암살 부대가 SSS급과 함께 간 학생들을 모두 죽였겠지. 행사가 끝나자마자 특보가 줄지어 올라오면… 나락으로 떨어진 너와, 성공적으로 행사를 진행한 내가 비교되면서 내 평판은 더욱 올라가겠지.’
정우철이 들뜬 마음으로 폐회사를 이어갔다.
“행사는 끝나지만, 일주일간 있었던 동맹국의 의지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약자를 보호하고….”
쾅!!!!!
정우철의 목소리를 지우는 폭발이 일어났다.
순식간에 장내가 아수라장이 되었다.
“꺄아악!”
“뭐야!”
“무슨 일이야?”
자리에 앉아 있던 귀빈들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 각국을 대표할 정도의 실력 있는 능력자였기에 도망은 치지 않았지만, 출처를 알 수 없는 폭발음에 모두 당황한 감정은 숨길 수 없었다.
“저… 문이….”
누군가의 목소리에 장내의 있는 모든 시선이 출입구로 향했다.
보안 요원들이 일제히 문 앞으로 이동해 전열을 정비했다.
누군가는 화기를 겨누고 있었고, 누군가는 양손에 이글거리는 화염을 들고 있었다.
큰 폭발음이 울린 출입구에 자욱한 연기가 가득했다.
긴장감이 감도는 행사장에 일정한 소리가 울렸다.
턱.
턱.
턱.
연기가 자욱한 출입구에 사람의 형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서 있던 보안 대장이 오른손을 들었다.
사격 준비 신호였다.
보안 요원들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공격을 준비했다.
연기를 뚫고 나오는 그림자.
거수자의 신원을 확인한 보안 대장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중지!”
보안 대장의 목소리가 울리고 장내를 감돌던 긴장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출입구를 통해 들어온 사람의 정체는 최한이었다.
장내에 있는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단 한 사람.
단상에 있던 정우철만이 새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겁에 질려 있었다.
보안 대장이 행사장으로 들어오고 있는 최한을 향해 말했다.
“신원은 확인되었지만, SSS급. 왜 이런 소란을 피우며 오신 겁니까?”
최한의 시선이 단상에 서 있는 정우철에게 향했다.
“겨우 이 정도로 소란이라고 하면 곤란한데. 나 저기 있는 협회장 죽이러 왔거든요.”
최한의 목소리에 얼굴이 파리해진 보안 대장이었다.
보안 대장의 오른손이 빠르게 다시 올려졌다.
그리고.
“지금부터 SSS급을 사살한다.”
보안 대장의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탕! 탕! 탕!
뚜두두두두!
총성이 울리고, 보안 대원들이 일제히 최한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펑!!!!
펑!!!!!
“파이어 월!”
“챠지!”
능력자인 보안 대원들이 특성을 사용해 최한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공격에 장내에 있던 귀빈들이 얼어붙었다.
S급과 A급이 주로 된 인원들.
벌어진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통역을 할 시간도 없었고, 무슨 이유에서 보안 요원들이 SSS급 능력자를 공격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각국의 대표로 뽑힐 만큼 강한 능력을 가진 그들이기에 한 가지는 알고 있었다.
SSS급을 적으로 간주했다면….
이제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쉬지 않고 공격하던 보안팀이 공격을 멈췄다.
탄환을 교체하거나, 딜의 형태를 바꾸기 위한 잠시의 틈.
뿌옇게 피어오른 연기 속에서 최한이 걸어 나왔다.
작은 상처 하나 없는 모습.
“보안팀이니 한 번은 봐 드릴게요. 그러니… 끝날 때까지 이대로 있어요.”
최한의 눈빛이 보안 요원들을 향했다.
콱!
콱!
콱!
공격을 준비하던 보안 요원들의 무릎이 일제히 땅에 처박혔다.
움직일 수 없었다.
숨을 쉬는 것조차 힘겨웠다.
마치 중력이 몇 배나 늘어난 것 같았다.
눈을 마주친 것만으로 투쟁심을 공포로 바꾸어 놓았다.
최한이 보안 요원들을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그때, 민섭과 백설이 연기를 뚫고 걸어 나왔다.
“총성에 놀라긴 했는데… 이거 완전 최한이 악당인 거 같은데….”
“물러. 나였으면 이 녀석들도 다 죽였어.”
민섭과 백설이 최한의 곁에 도착했다.
“악당처럼 보여도 상관없어. 다른 사람들 말려들지 않게 하려면…. 목표만 조져야겠네. 다녀올게.”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던 최한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몇몇 S급 인원들만이 어딘가로 고개를 돌렸다.
“어이… 복수하러 왔다.”
어느새 단상 앞쪽에 서 있는 최한.
최한과 눈이 마주친 정우철이 다리가 풀려 바닥에 쓰러졌다.
어째서 SSS급이 이곳에 있는 것인지.
암살 부대는 실패한 것인지.
그럼 살인을 사주한 범죄가 들통 나는 것인지.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정우철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살려주세요! 제발! 제발 좀! 살려 주세요!”
죽음.
턱밑까지 당도한 죽음이 모든 것을 잊게 했다.
도움을 청해야 했다. 신이건 사람이건, 종교건 사람은 죽음 앞에선 형체가 없는 것에도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살려주세요!”
정우철이 미친 듯이 소리쳤다.
사람을 죽이려 했던 사람이 살려달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지금의 상황으로만 본다면 충분히 피해자의 모습이었다.
“내가 악역인가?”
최한이 허탈한 한숨을 내뱉었다.
그때, 주위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최한의 시선으로 정우철의 앞을 막아서는 얼굴들이 여럿 보였다.
노란 머리.
초록눈.
파란눈.
얼굴도 본 적 없던 외국인들.
다른 나라의 협회장과 S급 능력자들인 것 같았다.
“귀찮아지네….”
최한의 앞을 막아섰던 외국인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소리쳤다.
“주에르 뫄!”
“주륵코! 오바몌양!”
“싹따로 오수마르!”
“로어 라이프 구슈타표!”
최한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을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대충 감은 왔다.
최한의 뒤쪽에 서 있던 통역관들이 자신들이 맡고 있는 내빈들의 목소리를 한국어로 통역해주었다.
“아무리 SSS급이더라도 왜 이런 짓을!”
“헌터가 협회장을 때리려 하다니!”
“악마인가! 왜! 힘없는 사람을!”
“최강이라면 정의로워야 하지 않느냐!”
최한의 예상대로 전후 사정을 알 수 없는 이들은 피해자인 척 울고 있는 정우철 협회장을 보호하려는 것 같았다.
분명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들도 이런 행동을 취하진 않으리라.
최한도 그것은 알고 있었다.
구구절절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이 자신의 성미에 맞지 않았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뿐.
그때.
펑!!!!!
또다시 울리는 폭발음.
이번엔 출입문이 아닌, 행사장의 중앙.
내빈들이 앉아 있던 테이블이 박살 나 있었다.
장내에 있던 모든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으윽….”
“아이고 엉덩이야….”
박살 난 테이블 위로 장왕윤과 이창식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최수혁과 지경태가 테이블 앞에 서 있었다.
“도착했나 보군.”
“늦지 않았나?”
찌지직-.
길드장들이 있던 테이블 위쪽으로 허공에 균열이 발생했다.
공간이 일그러진 그곳에서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이는 이정은이었다.
“휴… 두 번 연속으로 써서 그런가… 통로가 너무 좁네….”
최한이 있던 새로운 던전으로 이동했던 길드장들이 자신들이 한발 늦은 것을 깨닫고 바로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최수혁의 시선으로 최한의 앞을 막고 있는 외국인들이 보였다.
최한은 누군지 몰랐지만, 최수혁은 단번에 그들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세르비아의 협회장. 트로비치.’▒
‘포루투칼의 협회장. 브루노.’
‘터키의 최강이라 불리는 S급. 노글루.’
‘네덜란드의 최강이라 불리는 S급. 파이.’
쟁쟁한 이름의 S급 능력자들이 최한과 대치하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최한의 눈빛이 평소와 다른 것을 발견한 최수혁이 소리쳤다.
“누가 빨리 통역 좀 부탁드립니다! 멈춰주십시오! 잘못한 사람은 한국 협회장입니다! SSS급은 친구들이 죽을 뻔해서….”
하지만.
그 소리보다도….
모든 것을 집중시키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뭐든… 상관없어.”
최한의 표정이 사라져 있었다.
순식간에 얼어붙은 사람들.
모든 S급들의 몸이 떨리고 있었다.
턱.
턱.
턱.
최한이 정우철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나만 명심해. 저 녀석 도와주거나, 지금부터 내 앞길 막으면… 그 나라는 멸망이야.”
분명 통역관들의 입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최한의 입에서 나온 한국어를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 또한 없었다.
그러나.
정우철의 앞을 지키고 있던 능력자들이건, 뒤쪽에서 구경을 하고 있던 능력자들이건, 모두….
이해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이 아닌 표정으로….
최한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그 기운으로.
최한이 유유히 협회장과 능력자들을 지나쳤다.
정우철의 앞을 지키던 능력자들 모두 작은 움직임도 보이지 못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목이 날아갈 것 같았다.
최한이 옆을 지나치는 동안 숨소리도 내지 않으려, 작은 눈동자의 움직임마저도 보이지 않으려 애썼다.
그들이 S급이 되고 이렇게 공포를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다.
SSS급의 능력을 가진 이 어린 능력자는 인간이 아닌 것 같았다.
최한이 정우철의 앞에 도착했다.
“사, 살려줘! 네가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우철의 발뺌에 최한의 미간이 구겨졌다.
콰직!
“으아악!”
정우철의 비명이 행사장 전체를 가득 채웠다.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
최한의 발이 정우철의 정강이를 밟아 부러뜨렸다.
뼈가 박살 난 고통에 정우철이 온몸을 비틀며 고통을 호소했다.
다리가 부러졌음에도 정우철은 아무것도 모르고 당하는 피해자인 척 연기했다.
“진짜 몰라! 왜…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아…. 아무 짓도 안 했구나.”
최한이 표정 변화 없이 다시 발을 들어 정우철의 반대쪽 정강이를 밟았다.
뚝!
“으아아악!!!!”
정우철의 비명이 또다시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