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난 분명 말했어. 네 입으로 이야기할 때까지 고통은 계속될 거야.”
최한이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정우철을 내려다보았다.
“이 악마….”
정우철의 바지 밑단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부러진 정강이뼈가 살을 뚫고 나온 것 같았다.
정우철이 엉덩이를 질질 끌며 뒤로 도망쳤다.
“제발! 누가 좀, 누가 좀 살려줘!”
정우철이 최한의 뒤쪽으로 보이는 능력자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하나.
정우철과 눈이 마주친 능력자들 모두 시선을 피해 허공을 바라보았다.
고통만을 표현하던 정우철의 얼굴에 분노가 깃들었다.
“이 개새끼들! 사람이 당하고 있는데! 처보기만 해! 그러고도 너희가 능력자냐!”
참아왔던 분노가 드디어 터졌다.
몬스터와의 전투에서도 이 정도로 상처를 입은 적 없던 정우철이었다.
관절이 아닌, 정강이뼈의 정중앙을 발로 지르밟아 부러트린 고통은 칼로 살점을 도려내는 고통보다도 훨씬 더 아프게 느껴졌다.
“고작… 그게 그렇게 아파?”
최한의 목소리가 울렸다.
정우철의 눈매가 사선이 되어 최한의 얼굴을 향했다.
“정강이가 반으로 쪼개졌는데 너 같으면 안 아프겠냐! 이 미친노….”
정우철의 목소리가 멈췄다.
최한이 자세를 낮춰 주저앉아 있는 정우철과 눈높이를 맞췄다.
“겨우 다리 부러진 것도 그렇게 아픈데. 목숨이 끊기려면 얼마나 고통스럽고 아파야겠냐.”
최한의 얼굴이 정우철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인간의 눈이 아니었다.
흘러나오는 목소리도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마지막이야. 정말 잘못한 거 없냐?”
겨우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하고 있는 것뿐이었지만, 정우철의 몸속 모든 기관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본능을 따르라.
몸속에서 그렇게 외치고 있는 것 같았다.
“미안하다! 내가 잠깐 정신이 나갔었던 것 같다. 그러니 목숨만 살려줘!”
두 다리를 쩍 벌린 채 그 사이로 고개를 숙이는 정우철이었다.
마음 같아선 무릎이라도 꿇고 싶었지만, 두 다리가 부러져 이게 최선이었다.
순식간에 태도를 바꾼 정우철의 모습에 최한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하….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을까?”
정우철이 곁눈질로 주위를 살피며 말을 이어갔다.
“너한테 무시당한 것 때문에, 내가 정신이 어떻게 됐었나 보다. 그래도 이것만 알아줘. 난 겁만 주려고 했어. 절대 진짜로 다치게 하려고 한 건 아니야. 그리고 네가 같이 있는데 당연히 지켜 줄 거라 생각하고 한 거야.”
이 와중에도 주위를 의식하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어떻게든 살 궁리를 하고 있었다.
미수에 그쳤으니, 어떻게든 상황만 모면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차분히 듣고 있던 최한이 몸을 세워 누군가를 찾았다.
“어디… 어! 아저씨! 마지막으로 할 말 있어요?”
최한과 눈이 마주친 디스 길드장 지경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옮겼다.
정우철의 앞에 도착한 지경태가 눈을 감고 깊은 날숨을 내뱉었다.
몇 달을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잠이 들지 않아도 계속해서 떠오르는 그때의 기억이 일상생활조차 힘들게 했었다.
그럼에도 견뎌야 했고, 자신이 짊어져야 했다.
기꺼이 받아야 할 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몇 년을 묵혀 두었던, 그날의 진실을….
이제야.
찾으려 하고 있었다.
지경태의 눈이 떠졌다.
“재원이… 정말 네가 죽였냐?”
나지막이 내뱉은 진심.
정우철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하지만 이내 격양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내가 재원이를 왜 죽여! 재원이가 죽은 건 당신 탓이지. 당신이 지키지 못했잖아. 나와 차이수가 길드를 나온 것도 당신 때문에 재원이가 죽어서였어. 지금 상황이 이렇게 됐다고 나한테 덮어씌우려고 하지 마!”
지경태가 마른침을 삼키고 다시 물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이제 알게 됐어. 공간단절 마법. 그걸로 나를… 재원이와 떨어지게 만든 거지?”
“괜한 사람 잡지 마! 당신보다 내가 더 재원이와 친했어! 나도 구하고 싶었다고! 하지만 나도 이상한 공간으로 떨어졌다고!”
“아무리 이중 던전이라 해도 재원이는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탱커였어. 우리의 공격도 상처 없이 막아내던 그 녀석이… B급 몬스터한테 죽었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그 녀석 컨디션이 안 좋은 건지 그날, 몸통 부분 성질변 환을 제대로 사용 못 했어. 그래서 공격당해 죽은 걸 거야.”
지경태의 표정이 사라졌다.
“몸통 부분 성질 변환을 제대로 사용 못 했다는 걸 어떻게 알지? 그 녀석, 나와 계속 함께 있어서 그날… 나도 성질 변환 쓰는 걸 못 봤는데. 대체 어디서 본 거지?”
지경태의 목소리에 정우철의 표정이 무너졌다.
당황한 듯 손을 들어 얼른 입을 막았다.
“젠장….”
“겨우… 협회장 자리에 앉고 싶어서…. 겨우 나를 기권시키기 위해 친구를 죽인 거냐?”
지경태의 눈이 화살촉처럼 변했다.
모든 것이 탄로 난 정우철이 몸을 끌며 도망쳤다.
두 다리가 부러져 엎드린 채 손으로 땅을 짚어 도망치고 있었다.
“으아악!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이렇게 무너질 순 없어!”
손가락에 피가 맺힐 정도로 빠르게 도망가는 정우철.
턱.
정우철의 앞이 무언가에 가로막혔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는 정우철.
그곳에는 마지막 심판을 내려줄 악마가 서 있었다.
최한의 눈빛에 끝없는 허무가 보였다.
“아까 넌 변명이 아니라 사과를 해야 했어. 그래야 사람으로라도 벌을 받을 수 있었는데….”
최한의 목소리에 짓눌린 정우철이 목이 터져라 잘못을 빌었다.
“잘못했어! 제발! 내가 다 잘못했어! 벌 받을게! 협회장직도 내려놓고, 차 비서한테도 사과하고. 그… 그 녀석 묘에 가서도 용서를 빌게 그러니까….”
정우철의 목소리가 더는 이어지지 않았다.
최한의 손바닥이 정우철의 시야를 가렸다.
“아니…. 늦었어.”
최한의 발이 정우철의 양팔을 짓밟았다.
“으아악!!!”
양팔과 양다리가 부러진 것을 확인한 최한이 마지막 벌을 내렸다.
“신의 권능… 나락.”
# # #
신의 권능(나락) - 풍혈 LV 100
신의 권능
우주의 있는 모든 공간과 단절된 어둠뿐인 공간에 가둬 영원히, 끝나지 않는 시간 동안 벌을 받게 된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한다.
[Cool. 재사용 대기시간 24H]
# # #
최한의 오른손바닥 중앙에 검은 점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검은 점은 끝없는 소용돌이를 만들어 내며 정우철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시, 싫어…. 싫어!!!!”
최한의 마지막 목소리가 울렸다.
“팔과 다리는 절대 낫지 않을 거야. 그곳에서 넌 영원히 죽지 않을 테니… 만 년. 딱 만 년만… 그곳에서 움직이지 말고 용서를 구해라.”
뚝-.
정우철의 몸이 최한의 손바닥으로 연결된 심연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형벌의 시간이 끝이 났다.
어수선하게 마무리되었지만, 헌터 동맹국 정상 회담도 끝이 났다.
그리고….
모든 것이 마무리된 그곳에 디스 길드장 지경태의 울음소리만 끊임없이 울렸다.
* * *
정우철 협회장의 마지막 모습이 전 세계로 방송된 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정우철이 암살 부대를 이용해 경쟁자들을 탈락시키고 부당하게 협회장에 당선된 사실이 줄을 이어 보도됐다.
그가 협회장을 지냈던 기간 동안 숨겨왔던 뇌물 혐의와 비리들도 함께 폭로되었다.
협회의 고문들과 관계자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사과를 했고, 추후에 새로운 협회장과 함께 다시 잃었던 신뢰를 회복하겠다는 말만 남긴 채 시간이 흘렀다.
청색의 푸르른 나무들만이 가득한 깊은 산속.
작게 흐르는 냇물 옆.
작은 사과나무 한 그루가 보였다.
그리고 그 나무 앞에서 고개를 떨구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붉은 모자, 검은 선글라스.
나이에 맞지 않는 똥 싼 바지.
지경태였다.
“너무 오랜만에 와서 미안해. 그리고 너무 늦게 진실을 알아서 미안해. 내가 조금만 더 용기를 내고 수사를 요청했다면….”
한없는 그리움이 묻어 있는 목소리였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그 사람을, 되돌릴 수 없는 그 시간을….
지경태는 후회로 물든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도.
감사하고 있다.
이제라도 자신의 길드원의 억울한 죽음을 밝혀줘서.
자신의 길드를 지킬 수 있게 해줘서.
“최한이라는 고등학생이 있어. SSS급 능력자인데, 어떨 때는 나처럼 철없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인간이 맞나 싶을 정도로 무거운 모습을 하는 놈이야. 그놈이… 벌줬어. 너랑 나 대신… 정우철한테 벌줬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지경태가 자세를 낮춰 나무 바로 아래 있는 작은 비석을 매만졌다.
이재원
1987.04.03 ~ 2019.05.15
누구보다 단단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청년 여기에 잠들다.
“거기서는 아프지 말고 잘 지내. 내가… 다시는… 다시는… 너처럼 억울하게 죽는 사람 없도록 만들게.”
지경태가 비석을 보며 한참을 추억에 잠겼다.
뒤쪽에서 목소리가 날아왔다.
“이제… 가셔야 합니다.”
먼저 인사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던 차이수의 목소리였다.
지경태가 몸을 돌려 밝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 가지.”
어디론가 이동하는 지경태와 차이수.
한참을 달리던 차량이 멈춰 섰다.
차량이 멈춰 선 건물은 명동에 있는 높은 빌딩이었다.
경호원의 보호 아래 어딘가로 향하는 문으로 들어서는 지경태.
찰칵-.
찰칵-.
지경태가 들어서자마자 수많은 카메라의 플래시가 터져 나왔다.
당당한 걸음으로 단상으로 올라가는 지경태.
“안녕하십니까. 전 디스 길드의 길드장이자 오늘부터 대한민국 헌터 협회의 협회장을 맡게 된… 지경태입니다.”
지경태가 이가 모두 보일 정도로 밝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 * *
7월의 어느 무더운 여름날.
미림 고등학교 운동장에 최한과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흙바닥에 먼지가 쉼 없이 일었다.
“발 끌지 말고! 아직 다섯 바퀴나 남았다!”
조일환 선생의 목소리가 운동장에 크게 울렸다.
“아… 쌤…. 진짜 더워요.”
“이러다 쓰러져요.”
“체육관도 있는데 왜….”
벌써 열 바퀴나 돌고 있는 아이들이 죽을상을 지었다.
조일환 선생이 구령대 앞 그늘에 서서 소리쳤다.
“능력자라면 운동장 열다섯 바퀴 정도는 쉽게 돌 수 있어야 한다고. 그리고 던전은 이것보다도 더 덥거나, 환경이 안 좋을 수 있다. 그 대비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뛰어.”
아이들이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다리를 움직였다.
그때.
“후! 후! 후!”
찬찬히 숨을 고르며 달리고 있는 민섭의 모습이 보였다.
지친 아이들의 시선이 선두로 달리고 있는 민섭을 향했다.
“와… 쟤는 지치지도 않나 봐.”
“진짜 저게 세계 최강 약골이었다고?”
“근데 어째 쟤는 볼 때마다 튼튼해지는 것 같지 않냐?”
“이제 B급이라 그랬지?”
아이들이 격차가 벌어진 민섭의 뒷모습을 보며 헥헥거렸다.
조일환 선생이 그런 아이들을 보며 말했다.
“잡담 그만하고 달리는 것에 집중해라. 빨리 완주하면 그늘에서 쉴 수 있다. 저기를 봐라! 너희도 쉬고 싶다면 빨리 완주해.”
달리던 아이들의 시선이 운동장 한편에 마련된 쉼터로 이동했다.
나무 그늘에 앉아 있는 완주자들.
“나약하군. 어떻게 겨우 이 정도 거리를 뛰는 데 5분이 넘게 걸리는 거지?”
“얘들아, 빨리 완주하고 와! 여기 천국이야!”
1분 만에 운동장 열다섯 바퀴를 완주한 백설과 최한의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