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당신이 왜 여기에….”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는 팔라딘 토티였다.
“왜긴? 볼 일이 있으니까 왔지.”
토티를 발견한 최한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럼 설마….”
최한의 예상이 적중했다는 듯 토티의 거대한 몸집 뒤에 숨어 있던 성녀가 빠르게 최한을 향해 날아들었다.
“여기서 또 만나다니! 우린 운명입니다! 최한!”
슈우웅!
이제는 성녀가 공중부양 스킬까지 있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
작은 한숨과 함께 최한이 몸에 배인 습관처럼 몸을 살짝 비틀어 날아오는 성녀를 피했다.
꽝!!!!
협회장실에 있던 모든 시선이 서울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통창으로 옮겨졌다.
창에 얼굴을 부딪힌 성녀가 천천히 바닥으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끼긱….
끼긱….
쿵!!!
처음 보는 광경에 지경태와 차 비서의 얼굴 한쪽이 떨려왔다.
“서… 성녀 맞지?”
“괘… 괜찮으십니까?”
최한이 손을 내저으며 지경태와 차 비서의 눈길을 돌렸다.
“하… 신경 쓰지 마요. 금방 일어날 거예요.”
터벅.
터벅.
발소리가 울리고, 팔라딘 토티가 최한이 서 있는 곳에 도달했다.
“성녀가 몰라보게 밝아졌어. 모두 네 덕분이다.”
“지금 저 모습을 보고도 그 말이 나오냐…. 그런데 네가 한국 헌터 협회장실에는 무슨 볼일이 있어서 온 거야?”
“우리 바티칸도 헌터 동맹국 가입 절차를 밟으러 왔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의뢰할 것도 있고….”
최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 바티칸 대장 노릇 제대로 하고 있는데?”
“그럼. 누가 맡겨준 자리인데.”
팔라딘 토티와 최한의 얼굴에 가벼운 미소가 지어졌다.
“그럼 새로운 손님이 왔으니, 차 비서, 최한 군과 아이들을 그곳으로 안내해줘요.”
“그곳?”
최한의 목소리에 지경태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가보면 알 겁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진행은 차 비서가 도움을 줄 것입니다.”
차 비서의 뒤를 따라 최한과 아이들이 협회장실을 나갔다.
* * *
최한과 아이들이 차 비서를 따라 협회의 지하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로 갈 수 있는 최하층을 지나, 미로 같이 얽힌 통로를 수없이 지나쳤다.
차 비서가 없으면 일 층으로 돌아가기가 힘들 정도로 지하 깊은 곳에 다다랐다.
“도착했습니다.”
차 비서가 하얀색으로 된 문을 열었다.
“뭐야…. 지하가 본부였어?”
최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작은 문을 열자, 최신식 장비와 수많은 인원들이 보였다.
과학자들처럼 보이는,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과 화기와 갑옷으로 무장한 전투 인력들도 여럿 보였다.
최한뿐 아니라 함께 있던 민섭과 백설도 예상하지 못했던 장소의 등장에 시선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놀라움을 표현했다.
“이곳은 협회의 비밀 정보국이자, 헌터의 발전을 위해 협회에서 진행하는 연구를 하는 시설입니다. 뭐… 이 부서가 있다는 것은 비밀이지만요.”
차 비서가 특유의 똑 부러지는 말투로 최한과 아이들에게 설명했다.
차 비서가 문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최한과 아이들이 정보국의 내부를 눈에 담으며 차 비서의 뒤를 따랐다.
바빠 보이는 사람들을 지나, 몇 개의 문을 더 지났다.
“그런데 존재 자체가 비밀로 되어 있는 곳에 왜 우리를 데려온 거야?”
최한의 물음에 차 비서의 걸음이 멈췄다.
아니, 차 비서가 딱 걸음을 멈추는 시점에 최한의 물음이 나온 건지도 모르겠다.
“보여드려야 할 게 있어서요.”
나지막이 목소리를 낸 차 비서가 앞에 있는 문을 열었다.
끼이익-.
차 비서의 어깨 너머로 무언가를 발견한 최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 지하에 감옥도 있었네?”
최한의 뒤쪽에 있어서 문 안쪽이 보이지 않던 민섭이 최한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움직였다.
차 비서가 문안으로 몸을 옮기자, 통으로 된 유리창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어… 저 사람은?”
유리 건너편으로 의자에 묶여 있는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최한과 아이들이 차 비서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최한과 아이들이 유리에 바짝 붙어 결박당해 있는 암살자를 눈에 담았다.
“저놈 공간 단절 능력자 아니야?”
“맞는 거 같은데? 그때 최한 네가 던전 안에다 묶어 놓지 않았냐?”
“물러 터진 게 쓸모가 있을 때도 있군.”
차 비서가 기계 장치를 만지고 있던 연구원에게 몇 마디를 건넨 후 아이들에게 말했다.
“당신들이 던전을 떠나고 얼마 후 도착한 협회장님과 다른 길드장님들의 도움으로 이곳으로 데려올 수 있었습니다. 던전 밖에도 이들과 관련된 자들이 있었던 거 같은데 모두 도망친 것 같았습니다. 기다리고 있던 흔적은 있는데 아마 당신들이 나오는 것을 보고 도망쳤겠지요.”
설명을 마친 차 비서가 기계 장치에 달려 있는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이봐. 들리나? 손님이 좀 와서 말이야.”
의자에 결박당해 있던 암살자가 고개를 움직이더니 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여기가 안 보이나?”
민섭의 목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차 비서가 연구원에게 말했다.
“오프해 주세요.”
삑-.
버튼이 눌림과 동시에 의자에 결박당해 있던 암살자가 최한과 아이들의 모습을 발견하고 몸을 사정없이 흔들어 흥분한 모습을 보였다.
“워… 이제 보이나 보네.”
최한이 신기한 듯 유리를 만져 보았다.
“신기하다. 꼭 범죄 영화에 나오는 그런 거 같아.”
민섭도 최한을 따라 유리를 만져 보았다.
“참나… 이딴 게 뭐가 신기한 건지. 어린 애들이란.”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백설도 손가락으로 유리를 만져 보고 있었다.
“읍!!!! 읍!!!!!”
강제적으로 입을 막고 있는 장치 때문에 암살자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차 비서가 마이크에 대고 말을 이어갔다.
“반응을 보니 네가 더 보고 싶었던 것 같네. 입에 있는 장치를 잠시 풀어주마. 대신 한 번 만 더 저번 같은 짓을 하면 다시는 풀어주지 않을 거야.”
연구원이 버튼을 누르자, 암살자의 입을 막고 있던 장치가 해제됐다.
“하… 하… 하….”
장치가 빠지자, 오랜만에 입으로 숨을 쉴 수 있게 된 암살자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그리고.
“이 개 같은 SSS급! 네 녀석만 아니었어도!!! 내가 이딴 수모를 겪을 일은 없었을 텐데! 당장이라도 나가서 네 목의 목을 잘라 버리고 싶구나.”
입맛을 다시듯 혀로 입술을 핥는 암살자였다.
“해 봐.”
낮게 울리는 최한의 목소리.
“내 목소리도 들리지? 할 수 있으면 해봐. 내 목이 잘리는 게 빠를지, 네 몸이 터지는 게 빠를지. 할 수 있으면 해 봐.”
자신감 가득한 최한의 눈동자가 암살자를 향했다.
최한의 눈빛에 압도당했는지, 창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던 암살자의 고개가 풀썩 숙여졌다.
“흐흐….”
웃음소리와 함께 암살자의 어깨가 작게 떨려왔다.
“역시 대단해. 아무리 해도 넌 못 이기겠다.”
비릿한 웃음을 보였지만, 그의 목소리는 진심이었다.
“잡담은 그만하고. 이제 네놈들의 보스와 본거지를 부는 게 어때? 내가 감형은 못 시켜줘도 감옥에서 먹는 반찬은 고기로 바꿔 줄 수도 있는데.”
차 비서의 목소리가 암살자에게 향했다.
차 비서의 딜에도 암살자가 코웃음을 쳤다.
“훗… 질리지도 않고 또 협상을 하는구만. 지금까지도 그렇고 앞으로도 내 대답은 언제나 하나야. 조직을 배신할 바엔 명예롭게 죽는다.”
말을 마친 암살자가 입을 크게 벌려 자신의 혀를 깨물려 했다.
“안 돼! 입마개 빨리!”
차 비서의 급박한 목소리에 연구진이 빠르게 기계 장치의 버튼을 하나 눌렀다.
암살자가 앉아 있던 의자 뒤쪽에서 입마개가 장치가 빠르게 나와 암살자의 혀를 밀어 넣었다.
암살자의 이 사이에 늦지 않게 장착된 입마개로 인해 자살을 막을 수 있었다.
긴박한 순간이 지나고.
차 비서의 깊은 한숨이 흘렀다.
“계속 이런 식이야. 물어보면 자결을 하려고 해.”
충격이 큰 듯 머리를 긁적이며 인상을 쓰는 최한.
“하…. 심각하긴 하네요. 무슨 21세기에 혀를 깨물고 자결을 하려고 해.”
민섭이 주먹을 강하게 쥐고 유리를 때렸다.
쾅.
순식간에 모아진 시선.
“암살자들 주제에… 사람을 죽이는 사람들 주제에… 배신하지 않는다는 숭고한 척은…. 나쁜 놈들…. 그딴 조직…. 그딴 조직….”
벽을 친 민섭의 고개가 떨어졌다.
“이 녀석은 그렇다 치더라도 뭐, 성과가 아예 없는 건 아니야.”
차 비서의 목소리에 최한의 시선이 움직였다.
“역시 뭔가 있는 거죠? 여기까지 데려온 이유가.”
차 비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작은 상자를 들고 들어온 연구원이 상자를 차 비서의 앞에 내려놓았다.
차 비서가 상자를 열어 무언가를 꺼내 최한을 향해 들어 보였다.
“그건?”
“전 협회장 정우철의 휴대폰이야.”
“설마….”
“그래. 암살단의 본거지까지는 아니지만, 브로커의 위치는 알아냈어.”
최한이 민섭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미소를 보였다.
“그럼 그 녀석을 만나러 가면 되겠구만. 가자 민섭아. 우리의 첫 임무, 성공시켜야지.”
* * *
차 비서가 최한과 아이들을 데리고 나간 직후.
협회장실.
“그럼… 얘기를 들어볼까요?”
지경태의 목소리에 팔라딘 토티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무슨 얘기를? 헌터 동맹국 가입 절차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건 제가 이미 어느 정도 진행시켰습니다. 그런 형식적인 거 말고… 진짜 하실 말씀이 있던 거잖아요. 그러니… 바티칸을 벗어난 적 없던 팔라딘이 직접 이곳까지 온 거구요.”
정곡을 찔린 팔라딘 토티가 허탈한 웃음을 보이며 소파에 앉았다.
“역시 자리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군요. 개성 넘치는 겉모습과 다르게… 꽤 대단한 통찰력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지경태가 자랑스러운 듯 선글라스를 한 번 고쳐 썼다.
“그럼 얘기해 보시죠. 공문까지 보내면서 꼭 시간을 내달라고 부탁한 이유를….”
팔라딘 토티의 표정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한국에 온 이유는 어떤 사람을 한 명 잡기 위해서입니다.”
“잡으러 왔다고요?”
“네. 그놈의 이름은 아드레아 카사노. 몇 년 전까지 바티칸에서 활동하던 마피아이자… 원로들의 뒤를 봐주는 보디가드였습니다.”
“아드레아 카사노라…. 그 이름은 저도 들어 본 적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3대 마피아 조직 중 하나의 보스이자… 이탈리아에서 몇 안 되는 S급 아닙니까? 그런데 그놈은….”
“네. 죽었다고 발표됐죠.”
“그런데 죽은 사람을 왜 한국에서….”
“살아 있습니다. 아마도….”
팔라딘 토티가 갑옷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이리 와서 이것을 좀 보시지요.”
자리에 앉아 있던 지경태가 몸을 일으켜 팔라딘이 앉아 있는 소파로 이동했다.
소파 앞에 도착한 지경태가 테이블 위에 놓인 사진을 발견했다.
“이… 이것은….”
목이 잘려 있는 시체의 사진들.
지경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것은 분명 자신이 가지고 있던 사진과 같은 것이었다.
“표정을 보니 알고 있는 듯하군요. 지난 몇 년간 한국에서 발생한 미해결 살인 사건…. 그중에서도 목이 잘린 체 얼굴을 찾을 수 없던 시체들….”
“설마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은….”
팔라딘 토티의 시선이 지경태에게 향했다.
“이건 아드레아 카사노의 취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