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방학.
모든 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
어쩌면 선생님들조차 그 단어를 들으면 설렐지도 모른다.
미림 고등학교에 여름방학이 찾아왔다.
여름 방학식.
“에…. 그러니까. 방학 기간에도 미래를 위해 정진 또 정진하고…….”
방송으로 최원석 교장의 목소리가 각 반에 전달되었다.
“한 달 동안 자유다.”
“한 달은 무슨 정확히는 29일이지. 어째 방학이 한 달이 안 되냐….”
“방학 때 수영장 놀러 갈래?”
“여름엔 바다지. 바다 가자. 바다.”
이미 마음이 들뜬 아이들에게는 최원석 교장의 목소리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교실 한켠에 틀어진 텔레비전에서 최원석 교장의 모습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D반에 있는 아이들 중 누구도 그곳에 시선을 두는 이는 없었다.
“진짜… 끝나 버렸네.”
최한이 들뜬 아이들을 눈에 담으며 자신의 눈앞으로 떠오른 홀로그램을 바라보았다.
「튜토리얼 퀘스트 NO. 666
Last
미림고에서 삶과 죽음을 동시에 선물해 줄 검집을 찾아내어 죽여라.
(Time out - 29일)
보상
경험치 + 1,187,263,337
검집의 심장 (EX)
획득 칭호
인간의 왕 (EX)」
[실패 시 페널티 부과]
- 이세계 강제 전송
- 멸망
이제 한 달도 남지 않은 타임 리미트.
이제 29일만 있으면 세상은 대격변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아마 그것은 민섭이 죽든 안 죽든 피하지 못할 사건일 테니까.
“후….”
최한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시선을 움직여 교실에 앉아 있는 아이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기말고사 전교 꼴등을 차지해 풀이 죽었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이들과 즐겁게 이야기하며 축제 이야기를 하고 있는 홍철이.
전학 사건에, 납치 사건까지 있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친해져 함께 쇼핑 이야기를 하고 있는 성녀와 전지현.
자신이 오기 전까지 괴롭힘을 당하는 가해자와 피해자였지만, 지금은 그 누구보다 서로를 위해주는 친구가 된 장부기와 김민섭.
그리고.
누구보다 밝아진 아이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질 수 있었던 건 모두….
최한의 덕이었다.
최한의 시선이 교실 가장 앞으로 향했다.
“선생님도 많이 변하셨네.”
아이들을 집중시켜 억지로 방송을 듣게 하는 것이 아닌, 그저 교탁에 서서 들뜬 아이들의 표정을 하나하나 담고 있는 조일환 선생의 모습이 보였다.
2학년 D반.
이 교실.
이것이 그토록 바라던 것이었다.
이세계에서 몇백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힘이 들어 발버둥 치는 것을 포기하고 편해지고 싶을 때에도.
이것만을….
이 순간을 상상하며 버텼었다.
이 냄새.
이 느낌.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지난 몇 개월이 최한에게는…….
“최고로 행복한 날이었다.”
최한이 이 순간을 잊지 않기 위해 눈으로 사진을 찍듯 교실과 아이들의 얼굴을 눈과 머리… 그리고 가슴 속에 깊이 새겨 넣었다.
‘마지막이니 잘 기억해두자.’
다시는 이 교실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다시는 창가에 앉아 흘러가는 구름을 멍하니 바라볼 수 없을 것이다.
우연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퀘스트의 마지막 날이 2학기 개학식 날이었다.
개학식 때는 운동장에서 개학식만 진행한다고 했으니 아마 이 교실에서 이렇게 다 같이 앉아 있을 수 있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일 것이다.
아쉽긴 하지만, 자신의 욕심으로 1학기 학교생활을 보냈으니….
이제, 퀘스트와 자신의 과거에 집중할 때이다.
그리고.
자신을 100년 동안 이세계에 가둔 놈들과 민섭을 죽이는 이딴 퀘스트를 만든 그놈을 찾아 얼굴을 한 대 패줄 것을 다짐했다.
툭툭.
홀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최한의 어깨에 누군가의 손길이 느껴졌다.
최한이 고개를 뒤로 돌렸다.
“뭐냐? 네 자리 원래 여기 아니지 않냐?”
최한의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강렬한 붉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 있는 백설이었다.
“장미한테 잠깐 바꿔달라고 했다.”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하는 백설과 다르게 최한의 얼굴에는 작은 미소가 번져 있었다.
“뭐지? 그 웃음은.”
“너도 많이 변했네. 애들 이름도 부르고.”
백설의 볼이 붉게 물들어 갔다.
“벼… 벼… 변하긴 무슨. 난 그대로다.”
처음에는 친구들의 이름도 부르지 않고, 쌀쌀맞게만 보였는데. 아직도 말투는 살짝 딱딱하지만, 분명 백설도 조금은 D반에 녹아든 것 같았다.
당황해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있는 백설이 귀여운지 최한이 백설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알았어, 알았어. 안 변했다. 아직 얼음 공주다, 그래.”
백설이 이제는 완전히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또다시 최한의 얼굴에 겹쳐진 27번째 옥황의 얼굴 때문에 더는 얼굴을 들지 못했다.
“그건 그렇고 뭔 말하려고 그런 거야?”
최한의 물음에도 백설이 얼굴을 들지 못하고 작게 대답했다.
“그… 저번에 한 얘기 때문에.”
“저번에?”
최한이 전주에 있었던 백설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민섭이 이야기?”
“아니…. 그거 말고….”
“그럼… 뭐지?”
최한이 떠올리지 못하고 고민만 계속하자, 백설이 표정을 다잡고 고개를 들었다.
붉었던 볼이 이제는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작게 기어들어 가던 목소리도 원래대로 변해 있었다.
“전쟁 이야기?”
백설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모르잖아. 지구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전쟁을 할지도.’
백설이 말한 대화가 정확히 떠오른 최한이었다.
“그런데 그건 왜?”
“지구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전쟁을 한다는 네 말, 대체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한 거지?”
“그냥 말한 건데.”
최한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백설이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그때 그 표정은 헤벌레하던 원래의 네 표정과 달랐어. 뭔가 숨기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어.”
“내 표정이 헤벌레하다는 건 뭐야…. 뭐, 그건 넘어가고. 숨기고 있다라…. 뭐, 숨기고 말한 건 아니지만, 딴생각이 좀 있었지.”
“뭐지?”
“넌 내 퀘스트와 민섭이에 대한 것까지 알고 있으니 아마 다 알고 있겠지. 신들이 휴거를 위해 쳐들어오면 지구는 쑥대밭이 될 거야. 그러니….”
백설이 마른침을 삼키며 최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찾아보려고. 그 녀석들이 지구로 쳐들어오기 전에 내가 먼저 그 녀석들이 있는 곳으로 쳐들어갈 방법을.”
최한의 말이 끝나자마자 백설의 얼굴 전체가 구겨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네 주제를 알기나 하고 말하는 것이냐! 네 힘은 신들에 비하면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아! 나한테조차 약하단 소리를 듣는 녀석이. 한 번 실패해놓고 넌 또… 인간들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까지 하는 것이냐! 내가 그렇게 둘 것….”
감정이 격양된 목소리로 크게 소리치던 백설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교실에 있던 아이들의 시선이 모두 백설에게 쏠려 있었다.
최한이 머리를 긁적이며 작게 말했다.
“무슨 다 들으라고 광고하냐….”
백설이 자신을 향한 눈들을 바라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정적만이 흐르던 그때.
“그럼 이것으로 방학식을 마치겠습니다. 방학 잘 보내세요.”
최원석 교장의 목소리가 울리고.
백설의 눈치만을 보던 아이들이 때를 놓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쳤다.
“이야! 방학이다!”
“자유다!”
“놀자!”
자연스레 백설에게 쏠렸던 시선들이 흩어졌다.
백설이 풀썩 자리에 앉았다.
“걱정 마. 전생의 기억은 안 나지만, 그때처럼 하려는 게 아니야. 인간들을 위해 희생하는 게 아니라 모두를… 민섭이를… 지키고 싶은 거야.”
백설을 보며 밝게 웃는 최한.
그런 최한을 보는 백설의 얼굴에는 전혀 웃음기가 없었다.
‘말은 그렇지만… 너는 또 그때와 같은 선택을 하겠지. 너는 자신의 목숨보다 다른 인간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니까.’
백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음대로 해라. 대신… 내일부터 단 하루도 네 곁에서 떨어지지 않을 거다. 쓸데없는 짓 할 생각 마라.”
백설이 자신의 할 말만을 남기고 유유히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그거 스토킹이야….”
교실 앞쪽에서 조일환 선생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럼, 방학들 잘 보내고. 건강해라.”
D반 아이들의 목소리가 하나로 합쳐졌다.
“네!!!”
원래라면 우당탕탕 하면서 교실 문을 비집고 나갔을 텐데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뭐지? 뭐가 남았나?’
최한이 교실을 나서지 않는 아이들에 의문을 품고 있을 때 전지현을 필두로 D반 아이들 전체가 최한의 주위로 다가왔다.
“야. 이렇게 헤어지기 아쉬운데 우리 오늘 D반 단합식 하는 건 어때? 전학생들 환영회도 할 겸.”
전지현의 목소리에 최한이 허탈한 웃음을 보였다.
“전학 온 지, 몇 달이 지났는데 이제 환영회를…. 너무 끼워 맞추는 거 아니냐….”
“그러니까 겸사겸사라고 했잖아! 주목적은 단합식이라고. 우리 반 다 같이 제대로 논 적 없으니까.”
“알았다. 알았어. 근데 다들 시간 괜찮아?”
최한의 물음에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명 빼고.
“난 우르르 몰려다니는 것은 딱 질색이다. 귀찮으니 너희끼리…. 윽!”
차가운 얼굴로 말하던 백설의 몸이 살짝 들렸다.
백설의 양쪽에서 팔을 붙들고 있는 남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장부기와 민섭이 백설을 포박하고 한 손으로 경례를 하고 있었다.
“백설이도 참석한답니다!”
“너무 함께하고 싶어서 하늘을 나는 기분이랍니다!”
백설이 얼굴을 붉히며 신경질을 내었다.
“하늘을 나는 기분은 무슨! 너희 때문에 하늘을 날고 있잖아!”
아이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하하하하하!”
누군가 최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단합식을 하는데 내가 빠질 수 없지. 풀코스로 대접하마.”
조일환 선생이 카드 들어 보이며 미소 지었다.
“와! 쌤!”
“대박!”
“감사해요!”
“선생님! 킹크랩이요! 킹크랩 먹고 싶어요!”
“홍철아, 눈치 챙겨….”
최한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럼 다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도 마지막일 테니….’
“그럼! 오늘 하루 제대로 놀아보자!”
“오우!”
최한의 외침을 시작으로 아이들이 모두 교실을 나서기 시작했다.
D반이 평안한 일상에서 다 같이 보내는 마지막 시간.
게임장.
노래방.
고급 뷔페.
등등….
너무도 즐거운 시간이었다.
한 번도 하교한 뒤에 친구들과 논 적 없던 최한에게는 꿈만 같은 하루였다.
무엇을 하든 재미있었고, 재미없는 말도 재미있게 들렸다.
능력자라는 것을 까먹을 만큼.
한 달 뒤면 세상이 멸망한다는 게 거짓말인 것 같은 그런 하루였다.
이 하루가 끝나지 않길 속으로 기도했다.
행복이 뭐냐 물어본다면 최한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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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