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어둠이 찾아온 늦은 저녁.
최한과 백설이 수많은 인파들로 북적이는 청계천에 도착했다.
밤까지 계속되는 열대야를 피해 나온 사람들도 많았지만, 오늘 이곳에 많은 사람이 모인 이유는 바로 1년에 한 번 있는 등불 축제가 열리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사람들과 거리 곳곳에 자리한 푸드트럭. 축제임을 실감하게 해주는 등불로 만든 조형물까지.
낮과 달리 더위에 지쳐 짜증 내는 표정도 보이지 않았고, 모두 웃음만이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커다란 현수막 아래 마련된 벤치에 최한과 백설이 나란히 앉았다.
“그래서 그 이동 마법을 쓰는 길드장이랑 오지훈 박사의 실험은 아직 진전이 없는 건가?”
“어. 원래부터 안 될 거라 생각하고 최대한 도전해보자는 식으로 시작한 거니까.”
“걱정할 필요도 없었군. 아무리 고위 이동 마법이라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그 효력이 발휘되는 건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니까. 차원을 이동할 수 있는 마법은 신들조차 극히 일부밖에 쓰지 못한다고.”
“그때 그 천사 놈들인지 뭔지는 쓰지 않았냐?”
“그 용 새끼들은 마력 수치가 인간의 몇백 배는 된다고. 거기다 고대 마법까지 쓸 수 있으니까. 하나 지금까지 나타난 그 정도 레벨의 용 새끼들은 원래 차원 이동술까지는 쓰지 못해. 아마 차원 이동을 할 수 있는 신들이 힘을 빌려준 거겠지.”
“그럼 그 천사 놈들이나 잡아놓을 걸 그랬네. 그놈들 이용하면 차원 이동 할 수 있을 텐데.”
백설의 눈이 화살촉 모양처럼 변해 최한을 향했다.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리는 것이냐! 겨우 네까짓 놈이 쳐들어가서 될 일이 아니라니까.”
“알았어, 알았어. 네가 무슨 엄마냐. 똑같은 말을 몇 번이나 하는 거야. 나도 그 방법은 이제 최대한 마음 비우고 있다고.”
사실이었다.
간신히 설득한 이정은의 도움으로 일주일 동안 잠도 포기하면서 실험을 계속했지만, 작은 실마리는커녕 성공하지 못할 과학적 이유들만이 계속해서 늘어났다.
S급의 고위 이동 마법도, 몬스터나 신들이 쓰는 포탈이나 차원 이동 마법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다.
천재라 불리는 오지훈이 며칠 밤을 새우며 매달리고 있었지만,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방식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자신의 능력인 스킬 빼앗기로도 차원 이동을 할 수는 없었다. 고유특성을 가진 스킬이 아닌 것도 한몫했지만, 신이 사는 세계가 어디인지도 몰랐기에 스킬을 사용할 수 없었다.
한 번만 쓸 수 있었지만, 이 방법이라도 된다면 최한은 무조건 가려고 했었다.
자신 혼자만 갈 수 있다면 돌아오지 못해도 괜찮았다.
“후…….”
최한의 짙은 한숨 뒤로 백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래도 어찌 보면 다행일 것이다. 만약 그 방법이 성공했으면 넌 진작 죽임을 당하고 쳐들어온 신들 때문에 인간은 멸망당했을 테니까.”
무슨 짓을 하든 되돌이표다.
‘정말 방법이 없는 걸까? 민섭이도 죽지 않고, 세계를 인간들을 구할 방법은…….’
무언가 떠오른 최한이 백설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그랬었지? 방법을 찾아본다고…. 내가 죽지 않게….”
오지훈의 실험실에서 흥분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진심이 튀어나와 버렸던 그때가 떠오른 백설이었다.
“그… 그건….”
그때.
나란히 앉아 있던 최한과 백설의 앞으로 서로 다른 색색의 신발이 나타났다.
“여!”
“많이 기다렸지.”
전지현과 장부기가 손을 들어 보이며 인사했다.
그 뒤로 홍철과 성녀의 모습이 보였다.
최한이 성녀를 발견하자마자 그녀에게 소리쳤다.
“안 돼! 날아오지 마. 여기 사람들 너무 많아서 한번 이목을 끌었다가는 우리 축제도 제대로 못 즐길 거야.”
추진력을 얻기 위해 몸을 웅크렸던 성녀가 다시 몸을 세웠다.
“칫.”
“아쉬워해도 소용없어. 그것보다 너만 왜 이렇게 캐릭터가 변했냐? 바티칸에서는 안 그랬잖아.”
성녀의 시야에 최한과 나란히 앉아 있는 백설의 모습이 보였다.
빠직!
“몰라! 말 안 해줄 거다!”
성녀가 팔짱을 낀 채 몸을 돌렸다.
뭐에 삐친 것인지 최한만 모르는 눈치였다.
“왜 삐지고 난리야. 참… 그건 그렇고.”
최한의 시선이 장부기에게 닿자 기다렸다는 듯이 장부기의 입술이 떼어졌다.
“민섭이는 못 왔어. 아프다던데? 여름 감기인가 봐.”
“며칠 전에 연락했을 때도 아프다고 했는데. 독한 감기 걸렸나 보네. 병문안 가봐야 하는 거 아닌가?”
최한의 목소리에 장부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까 통화할 때 민섭이가 그러더라. 병문안 안 와도 된다고. 좀 쉬면 괜찮아질 거래.”
“그래?”
최한의 눈동자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사람 모형의 등불에서 멈췄다.
‘일부러 피하는 건가…. 아니면… 그 꿈 때문에 뭔가….’
전과 다르게 행동하는 민섭이 신경 쓰여 대화를 해보려 했지만, 방학식 이후로 민섭을 만날 수 없었다.
약속을 잡으려 해도 몸이 안 좋다는 이야기만이 돌아왔고, 어느새부터인가는 최한의 전화를 받지 않는 민섭이었다.
‘그 녀석도 같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최한의 짙은 한숨이 흘러나와 허공으로 사라져 갔다.
“민섭이 병문안은 다음에 다 같이 가도록 하고 오늘을 즐기자고. 다들 어렵게 시간 냈는데, 모인 사람들이라도 축제를 즐겨야지.”
전지현의 목소리에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까?”
최한이 무릎을 치며 벤치에서 일어났다.
뒤따라 일어난 백설이 어딘가를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저것은 무엇이냐.”
최한의 시선이 손끝으로 향했다.
“푸드트럭?”
“아니. 차 앞에서 사람들이 받고 있는 저거.”
아이들의 시선이 푸드트럭 앞으로 향했다.
팔보다 더 긴 붉은색 꼬치가 눈에 들어왔다.
“저거? 닭꼬치잖아?”
“백설이 너 닭꼬치 안 먹어봤어?”
아이들의 목소리에 백설이 말없이 고개만 위아래로 움직였다.
“닭꼬치를 시작으로 축제를 즐겨보자고!”
최한의 목소리에 아이들이 푸드트럭으로 이동했다.
닭꼬치.
챱스테이크.
슬러시.
핫도그.
…….
축제는 역시 길거리음식이지.
“이… 이게 무엇이냐! 혀가 타들어 가는 것 같구나.”
닭꼬치를 한입 베어 문 백설의 얼굴이 제 머리 빛깔처럼 붉어졌다.
“무슨 조선 시대 사람이냐? 매운 걸 무슨 혀가 타들어 간다고 표현해….”
“그거 핵불닭맛 닭꼬치라서 매운 거야.”
아이들의 설명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백설이 날을 살피는 칼잡이처럼 긴 닭꼬치를 허공에 이리저리 돌려 가며 눈에 담았다.
“이렇게 혀를 아프게 하는 음식은 처음이지만…. 그래도….”
백설이 닭꼬치를 한입 더 베어 먹었다.
씁.
하는 소리가 여전히 들려왔지만, 백설의 얼굴에는 이전과 다른 표정이 지어져 있었다.
“이렇게 맛있는 것은 처음이구나. 그 바나나우유랑 견주어도 우열을 겨루지 못할 정도로….”
“근데 처음 보네? 백설이 웃는 거?”
장부기를 시작으로 다른 아이들도 백설의 웃는 표정을 보며 한마디씩 거들었다.
“진짜입니다.”
“그러네. 맨날 똑같은 표정만 짓더니….”
아이들을 바라보던 백설이 손을 들어 얼굴을 만졌다.
“내가… 웃고 있다고…?”
‘악마인 내가… 인간처럼… 웃고 있다고?’
허공을 바라보던 백설의 눈동자가 빛을 잃고 어둠에 먹혀 갔다.
마치 시체처럼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굳어진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아이들이 머리를 긁적이며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아이들의 어색한 분위기를 감지한 최한이 백설에게 다가갔다.
최한이 백설의 눈앞까지 다가갔을 때 백설의 눈동자에 색이 칠해졌다.
“어….”
톡.
최한의 손가락이 백설의 이마를 찔렀다.
“야. 멍때리지 마. 맛있는 거 먹다 멍때리면 귀신이 다 뺏어 먹는다.”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이 달라졌다.
백설이 바라보고 있는 세상은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아무 움직임도 보이고 있지 않았다.
백설의 멈춰진 시간 속에서 최한의 모습 위로 천 년 전 27번째 인간의 왕의 모습이 겹쳐졌다.
.
.
.
‘설아, 밥 먹을 때 딴생각하면 귀신이 다 뺏어 먹는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맨날 농! 농! 주인님은 대체 언제쯤 진지할 겁니까!’
그랬었지.
매일 농만 치는, 철없고 애 같은 사람이었지.
겉으론 화를 내도, 언제나 그런 순수한 모습으로 농만 치더라도, 그렇게만 내 옆에 있어 주길 바랐는데….
‘그 아이는 안 된다. 인간들도 안 된다. 내 눈앞에서건 내가 보지 않을 때건 무고한 인간들을 죽이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그러니 가서 너희 신들에게 전해라. 인간의 왕 #&*&의 이름으로 지금 현 시간부로 인간을 죽이려는 신에게 전쟁을 선포한다고.’
처음으로 본 당신의 진지한 얼굴을 잊을 수 없습니다.
나를 위해….
인간을 위해….
이기지도 못할 싸움을 거는 당신의 모습을….
그렇게 그 얼굴을 보고 난 뒤 얼마 되지 않아 당신은 자신의 목숨과 바꿔 인간의 시간을 벌었지요.
천 년.
‘내 목숨 하나로 천 년 동안 인간이 살 수 있는 조건이면 남는 장사가 아니냐? 설아. 천 년 후에는 다음 인간의 왕이 지켜주겠지.’
그때부터입니다.
내가 인간을 증오하기 시작한 게.
당신이 살린 인간과 이 세상을 증오하게 된 것이….
제게는….
‘제게는 당신 한 사람이 저의 세상이었으니까요.’
.
.
.
최한에게 겹쳐졌던 27번째 인간의 왕의 모습이 허공으로 흩날리며 사라졌다.
뚝뚝.
백설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최한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발견한 백설이 빠르게 몸을 돌렸다.
“이건 왜 이렇게 맵게 만든 것이냐. 참나. 바나나우유를 먹어야겠다.”
백설이 도망치듯 걸음을 옮겼다.
지현과 홍철이 백설의 뒤를 따라 이동했다.
“그냥 슬러시 먹지. 돈 아깝게….”
“무슨 네가 산 것처럼 말하냐? 최한이 사준 건데.”
최한이 멍하니 서서 백설과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설이 돌아서기 전 보였던 그것.
그것은 분명 눈물이었다.
‘대체 무슨 일을 떠올렸기에….’
어두운 표정으로 백설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는 최한이었다.
그때.
빡!
최한이 몸을 비틀어 등짝을 문질렀다.
“으…. 뭐야….”
최한의 등짝에 스매시를 날린 성녀가 콧바람을 내쉬며 최한을 지나쳐 갔다.
“흥!”
“뭐야…. 쟨 또 왜 저래…. 아이고 아파라…. 그것보다….”
멀어지는 아이들의 모습 위로 상태창이 겹쳐졌다.
「튜토리얼 퀘스트 NO. 666
Last
미림고에서 삶과 죽음을 동시에 선물해 줄 검집을 찾아내어 죽여라.
(Time out - 14일)
보상
경험치 + 1,187,263,337
검집의 심장 (EX)
획득 칭호
인간의 왕 (EX)」
[실패 시 페널티 부과]
- 이세계 강제 전송
- 멸망
“2주 동안 답을 찾지 않으면 정말… 민섭이를 죽이게 될지도 몰라.”
* * *
같은 시각.
민섭의 집.
“으… 으…. 죽고 싶지 않아…. 제발…. 제…. 으아악!”
침대에서 신음하던 민섭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민섭이 꾼 꿈은 최한과 같은 꿈이었다.
이미 열 번도 넘게 꾼 꿈이었다.
최한의 손에 들린 검에 가슴이 찔려 죽어가는 자신의 모습이 보이는 꿈.
하지만.
“하…하……. 아… 아니야… 아니었어….”
생생하게 떠오르는 꿈의 장면을 되짚어 보던 민섭이 식은땀으로 젖은 얼굴을 가로저었다.
“최한 때문에 죽는 게… 아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