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너무도 순식간이었다.
마치 번개가 치는 것처럼, 엄청난 빠르기로 무언가가 지나가더니.
툭.
한재석이 힘을 잃고 바닥으로 꼬꾸라졌다.
몸을 가누지 못하고 얼굴부터 바닥에 처박는 모습에 김민섭이 빠르게 다리를 움직였다.
작은 미동도 없는 한재석의 몸을 앞으로 돌려세웠다.
주먹이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로 몸을 관통한 큰 상처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민섭이 천천히 한재석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살아 있어….”
흔들리긴 하지만, 숨결이 가늘게 느껴졌다.
하지만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하필 이럴 때 성녀가….”
“미… 민섭아…. 위… 위에….”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D반의 것이었지만, 누구의 것인지 모를 그 목소리에 한재석의 앞에 앉아 있던 민섭의 고개가 천천히 하늘을 향했다.
고개를 살짝만 올렸는데도 시야를 가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보라색 다리.
초록색 다리.
붉은색 다리.
신발이 아닌, 피부 그대로의 발이 보였다.
그것은 민섭의 뇌리에 박힌 그 감정을 빠르게 불러왔다.
공포.
민섭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티르 님은 또 어디 간 거야….”
“여기에 예언의 반역자가 있는데.”
“그러게 말이야. 선발대가 먼저 예언의 반역자를 죽여 놓기로 했으면서.”
“뭐… 어디서든 인간들만 죽이면 되잖아.”
“그런데 그놈이 안 보이네? 예언의 반역자를 지키는 그놈. 인간의 왕이었던가?”
천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지금까지 만난 천사들과 다르게 금색의 날개를 펄럭이고 있었다.
공중에서 민섭을 내려다보고 있는 5명의 천사.
중 2급 직위의 역천사였다.
인간 형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천사의 등장에 김민섭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S급이라 알려진 한재석이 한 방에 당했다.
‘S급…. 아니, SS등급은 될 거야. 최한이 오지 않는 한… 이기지 못해.’
가장 앞쪽에 있던 붉은 몸의 천사가 천천히 날갯짓을 하며 민섭에게 다가갔다.
“이놈이군, 예언의 반역자가. 평범한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군. 대체 이놈이 무슨 능력을 가졌기에 오딘 님이 그리도 경계하시는 건지….”
뒤쪽에 있던 천사들의 목소리가 울렸다.
“조심해라, 무리엘. 하찮은 인간 종족이지만, 그 녀석은 신을 끌어내릴 수 있는 존재. 숨겨둔 능력이 있을 거야.”
“어쩌면 신에게만 통하는 기술이 있을 수도?”
“그건 우리의 알 바가 아니야. 우린 그저 신을 거스르는 인간을 죽이면 된다. 예언의 반역자는 그 시작일 뿐이야. 어서 죽이고… 미드가르드에 사는 모든 인간을 죽이러 가자.”
붉은색 피부를 가진 역천사 무리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민섭에게 시선을 옮겼다.
바로 앞까지 와서 날갯짓을 하고 있었지만, 민섭은 어떤 움직임도 취하지 못했다.
‘도망쳐야 하는데….’
몸이 먼저 경고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움직이면 죽는다.
민섭의 눈동자가 세차게 떨려왔다.
“너무 두려워하지 마라, 인간이여. 어차피 죽음은 곧 새로운 시작이니라. 미드가르드의 모든 인간이 죽어야… 다른 세계가 살 수 있다.”
무리엘의 몸 앞으로 빛이 모여들었다.
그 빛은 점점 모습을 갖춰가기 시작하더니 이내 천사의 몸통만 한 검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무리엘이 빛의 검을 손에 쥐었다.
“잘 가라, 예언의 반역자. 너는 신에게 닿지 못해.”
하늘 높이 들어 올려진 빛의 검이 허공을 가르며 민섭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여기서 죽을 수 없어…. 최한에게 그걸 전달해야 하는데….’
마음속 민섭의 바람을 외면하듯 허공을 가르던 빛의 검이 민섭의 눈앞에 도착했다.
민섭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중력… 100배.”
쾅!!!!!
얼굴을 지나는 묵직한 감각과 큰 폭발 소리에 민섭의 눈이 빠르게 떠졌다.
“서…… 선생님….”
민섭의 시야로 조일환의 얼굴이 들어왔다.
“빨리 움직여! 궤도를 바꾼 게 고작이야!”
민섭이 한재석을 들고 빠르게 조일환이 있는 곳으로 몸을 옮겼다.
결승선에 도착하는 것처럼 민섭이 몸을 날렸다.
그제야 자신이 있던 곳으로 시선을 두었다.
바닥에 검을 내려쳤던 무리엘이 천천히 검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대단하군. 인간 주제에….”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전혀 타격을 받지도, 놀라지도 않은 무리엘이었다.
민섭이 몸을 일으키며 조일환에게 감사를 표했다.
“살려주셔서 감사해요…. 선생님….”
“감사는 무슨. 선생이 학생 구하는 건 당연한 거야. 그래도… 큰일이구나.”
“네. 저놈들, 못해도 S급 이상. 혹은 SS등급 정도의 힘을 가진 것 같은데. 선생님 혼자…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그때, 누군가 민섭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응?”
민섭의 고개가 아래로 향하자 보라색 머리칼을 가진 여성의 얼굴이 들어왔다.
“혼자라니! 나 아까부터 선생님 옆에 있었는데?”
“…….”
조일환 선생의 옆으로 성녀의 모습이 보였다.
“다행이다. 선생님과 성녀가 왔어.”
“한재석을 치료할 수 있어.”
“이러면 최한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겠는데?”
D반 아이들이 성녀와 조일환 선생의 뒤로 모여들었다.
자신을 째려보는 성녀의 얼굴에 정신을 빼앗겼던 민섭이 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 진짜 미안! 내가 너… 너무 당황해서 못 봤어. 진짜 결코 네가 작아서 못 본 게 아니야.”
성녀가 혀를 차며 몸을 돌렸다.
“착하니까… 더 기분 나쁩니다….”
성녀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한재석에게 다가갔다.
조일환이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나서며 성녀와 한재석을 보호했다.
“내 힘으로 몇 분이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봐야지.”
조일환이 전투 자세를 취하며 아이들을 보호하자.
뒤쪽에 있던 천사들이 무리엘에게 다가왔다.
“다 잡아놓고 놓치면 어떡하냐?”
“혼자 멋있는 척 다 하더니….”
“조금 있으면 후발대가 도착할 거야. 그 전에 임무를 완수해야 해. 티르 님이 없는 지금 우리가 예언의 반역자를 죽이지 못한다면….”
“알아.”
짧게 울리는 무리엘의 목소리.
무리엘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실패는 곧 죽음. 우리가 죽지 않으려면 저 녀석을 죽여야지.”
살기.
대치하고 있는 조일환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일 분만이라도 버틸 수 있으면 좋으련만….’
장난이 아니었다.
진심이었다.
눈앞에서 대치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몸의 살점이 뜯겨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 정도의 살기와 그 정도의 힘의 차이.
절대 넘을 수 없는 갭이 조일환에게 느껴졌다.
“큰일입니다. 힐이… 통하지 않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
성녀의 목소리에 조일환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져 갔다.
“이건 제 능력으로는….”
S급 성녀의 힘으로도 한재석의 상처를 고칠 수 없었다.
최수혁 때와 마찬가지로 고위의 치유 불능 마법이 걸려 있는 것 같았다.
조일환과 성녀의 등장으로 잠시나마 안도의 마음이 들었던 아이들의 얼굴에 다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힐 따위 필요 없어.”
거친 목소리.
모든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한재석!”
“움직이면 안 됩니다! 상처가….”
민섭과 성녀의 만류에도 한재석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난 너희 같은 나약한 놈들과 다르니까, 신경 쓰지 마….”
한재석이 비틀거리며 불안한 모습을 보였지만, 천사들을 노려보고 있는 눈빛만은 강직했다.
한재석이 조일환 선생보다도 앞으로 이동했다.
“겨우… 너희 따위한테 죽을 내가 아니야. 난 오늘… 너희가 아니라 다른 놈한테 죽을 거거든.”
다시 일어난 한재석의 모습에 천사들의 얼굴에 지금까지와 다른 진지한 표정이 지어졌다.
가장 앞에 있던 무리엘이 비틀거리는 한재석을 보며 미소 지었다.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지 모르겠지만. 넌 좀… 다르군. 그 정도 상처를 입고도 덤벼올 줄이야.”
“이 정도 핸디캡은 있어야 너희같이 약한 놈들이랑 싸움이 되거든. 그러니까 제대로 덤벼. 난 너희 같은 잔챙이한테는 안 죽으니까.”
무리엘의 웃음소리가 옥상 전체를 울렸다.
“인간 주제에 대단한 자신감이구나. 다른 놈들과 다른 건 인정하마. 한데 우물 안 개구리가 어떻게 죽는지는 모르나 보구나.”
팟!
어느새 한재석의 앞으로 이동한 무리엘이었다.
그 짧은 순간.
한재석이 고개만 살짝 돌려 민섭에게만 들릴 정도로 말했다.
“그 녀석이 올 때까지. 지켜줄게. 약속… 했으니까…. 그러니 넌 힘 쓰지 마.”
무리엘과 한재석의 주먹이 부딪쳤다.
펑!!!!!
한재석이 서 있던 자리에 엄청난 바람이 일었다.
성녀를 포함한 아이들 모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눈으로 확인조차 하지 못했다.
펑!
펑!
펑!
바람이 잦아들고, 폭발음이 멀어지고 나서야 아이들의 눈이 떠졌다.
성녀와 조일환 선생의 시선만이 겨우 한재석을 쫓았다.
공중에서 무리엘을 포함한 5명의 천사들과 육탄전을 벌이고 있었다.
당연히 수적으로 열세이고, 부상까지 입어 불리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 해도.
“버티고 있어.”
“저 상처면… 움직이지 못해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5 대 1.
호각을 이루고 있었다.
민섭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강해졌다.
예전보다도 더욱.
그리고.
“지금도 성장하고 있어.”
가슴이 뻥 뚫린 상처를 입은 와중에도 엄청난 집중력으로 전투를 이어 가고 있었다.
S급의 힘이 아니었다.
탑에 나타난 천사들도 S급인 길드장들을 어린애처럼 쓰러트렸는데….
그보다 더욱 강한 힘을 가진 천사를….
그것도 5명이나 붙들고 호각으로 싸우고 있었다.
펑!
펑!
펑!
주먹이 부딪힐 때마다 엄청난 굉음이 전해졌다.
민섭의 주먹이 떨려왔다.
‘내가 도와주면…. 한재석과 힘을 합치면….’
이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했다.
각성한 자신의 능력이라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한재석에게 가세하면 저 천사들을 이길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민섭의 꽉 쥔 주먹이 스르르 풀렸다.
만에 하나….
잘못된 판단으로 죽게 된다면….
그것에 상처가 생기기라도 한다면….
최한에게 전달하지 못하게 된다면.
분명 인간을 살릴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
유일한 희망이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참아야 해…. 여긴 한재석한테 맡길 수밖에 없어….’
그때.
“꺄아악!”
“저… 저게 뭐야?”
뒤쪽에 있던 아이들의 비명이 들렸다.
잔뜩 상기된 얼굴로 하늘을 보고 있는 아이들.
민섭의 미간이 구겨지며 시선을 하늘로 올렸다.
하늘을 가리고 있던 해골 병사들이 길을 만들 듯 양쪽으로 갈라졌다.
가려졌던 하늘이 나타나 반가웠던 것도 잠시.
찌직-.
공간이 뒤틀리듯 하늘에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치 하늘이 찢어지듯 모습이 일그러지더니 이내….
콰과과광!!!!!
금색의 번개가 사정없이 내려치기 시작했다.
번개가 지나간 자리에 알 수 없는 문양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거대한 마법진으로 변해 갔다.
그리고.
“아… 안 돼….”
“지금까지는… 시작도 아니었단 건가….”
절망의 목소리가 울렸다.
쾅! 쾅! 쾅!
하늘에 나타난 거대한 마법진을 뚫고 성이 나오고 있었다.
그리스의 신전을 닮기도 한 그 거대한 요새가 반쯤 마법진을 통과하였을 때….
그곳에 있는 인간들은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끝이야.”
조일환의 얼굴에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