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최수혁이 민섭에게 거의 도착한 최한을 향해 소리쳤다.
디버프를 걸던 헌터 협회장 지경태가 최한과 바통을 터치해 티르를 공격하고 있었다.
그 짧은 시간, 지경태의 트레이드마크이던 붉은 모자와 선글라스를 최한에게 건네고 눈속임을 했던 것이다.
티르의 분노가 얼굴을 뚫고 나왔다.
“어째서 나와의 전투보다… 그 녀석을 더 신경 쓰는 것이냐….”
차분하게 내뱉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내었던 그 어떤 말보다 더욱 살기를 띠고 있었다.
인내심이 한계점에 도달한 티르가 고개를 돌려 민섭을 눈에 담았다.
예언의 반역자.
이놈 때문에 오랜만에 만난 적수와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팟!
최수혁과 길드장들의 앞에 있던 티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몸을 빠르게 움직인 것이 아니다.
“이건….”
“최한!”
최수혁의 외침이 최한의 귀에 닿을 무렵.
최한은 최수혁의 목소리에 담긴 급박한 신호를 이해하는 것보다 더 빠르게….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마주했다.
“이 녀석이 그렇게 신경 쓰여서… 나와 전투를 못 하겠다면… 더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게 해주겠노라.”
9척이 넘는 거대한 신이 민섭의 앞에 서 있었다.
가장 중요한 카드.
유일한 희망이 산산이 조각나기 직전이었다.
최한뿐만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던 길드장들의 시선이 모두 그곳으로 향했다.
“큰일이야!”
“대체 언제….”
“안 돼….”
걱정과 두려움 섞인 말 한마디밖에 내뱉지 못했다.
이미 빛의 검을 손에 들고 있는 외팔의 신 티르는 민섭을 죽일 수 있는 사정 범위 안에 있었고.
티르가 민섭의 앞에 나타났다는 걸 인지하게 되었을 때는 이미 티르의 검이 민섭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으니까.
당사자인 민섭조차 티르의 존재감에 이미 온몸이 굳어 어떤 반응도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민섭아!!!”
유일하게 포기하지 않은 움직임이 있었다.
최한이 속도를 줄이지 않고 민섭에게 날아가고 있었다.
분명 날아가고 있었지만, 시간의 흐름이 다른 것인지.
신의 시간만 빠른 것인지.
최한이 아무리 빠르게 움직이고 날아가도 최한의 손은 민섭에게 닿지 못했다.
티르의 손에 들린 빛의 검이 민섭의 심장을 향해 나아갔다.
민섭이….
죽는다….
최한이 손을 뻗으며 절규했다.
“제발…. 안 돼!”
푹!
검이 살점을 찢고 몸을 관통하는 소리가 울렸다.
그곳에 있던 모든 시선을 집중시키는 소리였다.
인류의 희망이 산산이 조각나는 순간이었다.
단지, 민섭에게 온 신경을 쏟고 있던 그 한 사람이 없었더라면.
“뭐야? 이 벌레는.”
티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분명 자신은 예언의 반역자를 죽이기 위해 팔을 뻗었다.
그러나 자신의 검이 꿰뚫고 있는 이의 얼굴은 다른 이의 얼굴이었다.
죽음의 문턱에 있었던 민섭의 시야가 가려져 있었다.
어둠에 가려진 것이 아닌, 누군가의 등에….
자신 대신 검에 몸을 찔린 그 등만이 보였다.
살았다는 안도감보다, 지켜줘서 감사하다는 미안함보다, 가장 먼저 민섭의 모든 감정을 지배한 것은 슬픔이었다.
“왜… 또… 또 구해준 거야, 이 바보야.”
민섭 대신 검에 찔린 이는 장부기였다.
이런 순간이 올 것 같아 민섭의 바로 뒤에서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자신은 S급이나 최한처럼 저 괴물들과 싸울 수 없으니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지킬 수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해.
계속해서 민섭의 주위에 붙어 있었다.
장부기의 입술에서 피가 뭉텅이로 쏟아져 나왔다. 피를 닦을 새도 없이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내가 그랬잖아…. 벌 받겠다고. 아무리 시켜서 한 짓이더라도 우리 반… 그리고 너를 괴롭혔던 벌은 받아야지.”
주위에 있던 D반 아이들의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민섭이 고개를 저었다.
“그게… 언제적… 언제적 얘기인데….”
장부기의 힘겨운 목소리가 어깨를 타고 넘어왔다.
“친구를 괴롭힌 양아치는 원래 이런 최후를 맞아야 하는 거야. 최한과 너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최한은 세상이 멸망하더라도 널 지킨다 했으니… 나도… 내 친구를 지키기 위해 이런 행동을 한 거뿐이야. 그뿐이야…. 그러니 죄책감 가지지 마.”
민섭이 참았던 눈물을 터트렸다.
“미안해…. 미안해….”
장부기가 살짝 고개만 뒤로 돌려 흐릿한 시야로 민섭을 눈에 담았다.
“이럴 땐 미안해가 아니라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거야.”
눈물 콧물 범벅이 된 민섭의 얼굴을 보고 있던 장부기의 시야가 초점을 잃어갔다.
마지막인 것을 감지한 장부기가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려 미소를 지었다.
“D반이라 진짜… 진짜… 즐거웠다….”
팍!
장부기의 몸이 폭발하듯 터져 버렸다.
폭죽처럼 장부기의 피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빛의 검만이 자리해 있었다.
장부기의 몸이 사라지자 민섭의 시야에 티르만이 가득 차게 되었다.
작은 가책조차, 인간을 죽인 죄책감조차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벌레 새끼가 무슨 말을 이리 구구절절해. 빨리 뒈져 버리지.”
민섭의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눈앞에서 친구를 잃은 슬픔과 충격이 뒤섞여 더 이상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였다.
민섭이 다리가 풀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티르가 민섭을 내려다보며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
“이번엔 제대로 죽여주마, 예언의 반역자. 네놈이 죽어야 인간의 왕이 제대로 싸울 것 같아서 말이야.”
티르의 검이 민섭의 머리를 향해 내리쳐졌다.
뚝.
허공을 자르며 떨어지던 빛의 검이 부러졌다.
티르의 시선에 최한의 얼굴이 보였다.
“호오… 이제야 싸울 마음이 생겼….”
쾅!
티르가 하늘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뭐야… 내가 왜….’
자신이 공격당한 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피부에 고통이 찾아온 것보다 빠르게 자신이 하늘로 솟구치고 있는 이유를 깨달은 것은 엄청난 속도로 자신에게 달려들고 있는 인간의 얼굴을 마주쳤을 때였다.
“개X식아!”
최한의 얼굴에 슬픔과 분노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잔뜩 찡그린 얼굴에 새겨진 주름에 슬픔이 끼어 있었다.
펑!
최한의 주먹이 솟구치던 티르의 배를 또 한 번 강타했다.
두 배로 가해진 충격에 방금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티르의 몸이 날아갔다.
‘인간이… 이런 힘을…. 모… 몸이….’
티르가 자신의 육체를 제어하지 못했다.
이것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딱 두 번째로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누구보다 강해지고 싶어, 전쟁의 신에게 기술을 배울 때.
대련이란 명목으로 처음 자신의 힘이 통하지 않는 상대와 싸웠을 때의 그 감각.
떠올리기 싫은 그 감각이 티르의 정신을 잠식해 갔다.
“이따위 공격이 나에게 통할 것 같으냐!”
티르가 마치 허공을 붙잡기라도 하듯이 양팔을 크게 들어 올렸다.
지지직-.
마찰음이 들리고 날아가던 티르의 속도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후… 이번 건 약간 아팠….”
티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직 안 끝났어.”
악마.
신은 담을 수 없는 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최한의 얼굴에 나타난 악마의 표정을 발견한 티르의 온몸이 굳어졌다.
최한이 또다시 티르의 복부의 주먹을 날렸다.
하나 이번엔 한 방으로 그치는 것이 아닌 연타.
한 방 한 방에 살의를 담은 혼신의 펀치를 날렸다.
펑!
펑!
펑!
둔탁한 폭발음이 연속해서 들렸다.
이미 학교에 있던 모든 시선들은 그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네가 뭔데…. 네가 뭔데!! 왜 내 친구를 죽인 거야!”
펑!
펑!
펑!
최한의 울분 섞인 목소리와 폭발음이 계속해서 들렸다.
어떠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티르의 몸이 반으로 접혀 하늘로 솟구치고 있었다.
“네가 아픔을 알아? 겨우 이딴 고통을 아픔이라 생각하지 마! 진짜 고통은 이제부터니까.”
펑!
지금까지보다 더 큰 폭발음이 울리고.
슈우웅-.
거대한 몸집의 티르가 하늘로 끝없이 날아갔다.
최한이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냈다.
# # #
이름 : 마왕의 ‘헬룬’ 단검
등급 : 신화
공격력 : 근력 200%
신이 되려던 마물의 손톱을 가공해 만든 단검.
5개의 제련석과 1개의 룬이 박혀 있다.
- 패시브 효과 -
드워프의 축복
아이템이 파괴되지 않는다.
드래곤 학살자
용족에게 회복 불가 스킬 적용.
- 직업 효과 -
[???] ▼
# # #
최한이 단검을 두 손으로 쥐고 자세를 취했다.
검성 장왕윤이 알려준 방법.
양손으로 검을 잡으면 몇 배나 위력이 강해졌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최한이 아주 예전, 이세계에서 스승과 대련을 할 때를 떠올렸다.
단 한 번도 정타를 성공시키지 못했지만, 딱 한 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스승님의 표정을 진지하게 만들었던 때가 있었다.
대련이 끝나자마자 그 자세를 몇 번이나 연습하게 했는지….
‘그때를 떠올리자.’
최한이 천천히 손에 힘을 풀어, 파지법을 변경했다.
한 손으로는 검의 손잡이를 잡고, 나머지 손으로 검을 파지한 손의 밑부분을 감싸 쥐었다.
자세를 낮춰 검을 깊숙이 몸쪽으로 끌어당겼다.
“헤니르 사사. 검술 7초식….”
최한과 눈이 마주친 티르의 얼굴에서 표정이 지워졌다.
‘어째서 그 녀석의 얼굴이….’
최한의 얼굴에서 전쟁의 신 헤니르의 표정을 발견한 티르였다.
“만월 찌르기.”
최한의 목소리가 울리고.
슈우웅-.
작은 바람이 최한의 검에서부터 뻗어 나갔다.
허공을 찢으며 점차 앞으로 나아가던 그 바람이 몸집을 키워 태풍을 만들어 냈다.
콰과과광!
참격이 지나간 자리에 태풍이 휘몰아쳤다.
최한의 공격이 티르에게 명중한 듯 티르가 있던 자리에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힘을 이기지 못하고 하늘 곳곳에 균열이 발생했다.
끝을 모르고 뻗어 나간 최한의 찌르기 공격이 구름에 구멍을 내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하늘을 가리던 해골 병사들이 모여 있는 공간에도 구멍을 만들어 냈다.
적어도 1억에 가까운 숫자는 소멸되었을 것이다.
검에서 뻗어 나간 공격이 모든 것을 관통하고 달에 도착했을 즈음.
최한이 자세를 풀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확히는 티르가 있는 장소를 보고 있었다.
아직 폭발의 여파로 태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지금 할 수 있는 최고의 공격을 날렸다.
먼발치서 지켜보던 길드장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해치운 건가….”
“저 정도 검기면… 아무리 신이더라도 살아남지 못할 거야.”
평생을 검을 잡아 온 검성 장왕윤은 느낄 수 있었다.
제주도에서 봤던 그 공격들보다 훨씬 강력하다.
아마 방향을 땅으로 하고 저 공격을 펼쳤다면, 지구 반대편까지 뚫고 나갔을 정도의 파괴력이라 장담했다.
인간들의 표정에 차츰 미소가 지어지고 있었다.
이겼다.
해치웠다.
그렇게 생각했다.
최한의 공격.
그것도 지금껏 보지 못했던 파괴력이다.
분명….
해치웠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한 사람, 백설만이 아쉬운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태풍이 사라지지도 않았는데 마치 결과를 알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백설의 표정을 발견한 최한이 백설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딘과 토르의 모습이 보였다.
어떤 표정도,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는 모습.
“설마….”
그때.
파팟!!!!!!
엄청난 충격파와 함께 태풍이 소멸되었다.
태풍이 사라진 그 자리에 공간이 일그러져 있었다.
“아…. 아….”
인간들의 탄식이 흘렀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믿고 싶지 않은 광경에….
공간이 일그러진 곳에서 팔이 뻗어 나왔다.
팔 몸통, 그다음에는 얼굴.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티르가 공간을 찢고 나왔다.
“차원이동마법을 조금만 늦게 썼더라면 죽을 뻔했어.”
부상을 입긴 했지만, 치명상으로 보이는 상처는 하나도 없었다.
인간들의 얼굴에 절망이 피어올랐다.
그토록 표정을 숨겼던 최한의 얼굴에도 처음으로….
“끝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