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알고 있었군.”
백설의 떨리는 목소리가 입 새로 새어 나왔다.
“그럼 이래 보여도 신이니까.”
헤니르가 측은한 눈빛으로 백설을 바라보았다.
“미드가르드에서도 이상했어. 엄청난 기운이 느껴지는데 왜 지켜만 보는 건지….”
“…….”
백설이 대답 없이 가만히 있자, 헤니르가 말을 이어갔다.
“뭐… 네가 말하기 싫어하는 것을 굳이 내가 꺼낼 필요는 없겠지. 하나 네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지금 그의 곁에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너도 천 년 전에는 옥황의 최측근이었지 않느냐. 그의 소원을… 그의 의지를 이은 저 녀석을… 도와주는 것은 너의 선택이니라. 강요는 하지 않으마.”
백설이 바닥에 누워 있는 최한을 눈에 담았다.
인간이었을 때보다 키도 조금 커지고, 머리카락도 훨씬 길어졌다.
그리고.
입고 있는 흰색과 금색이 어우러진 옷.
조금 나이 들게 변한 얼굴.
딱 천 년 전 그의 모습이었다.
백설이 눈을 감고 유일하게 사랑했던 인간의 얼굴을 떠올렸다.
바보처럼 실실 웃고 있는 얼굴이 나타났다.
‘인간을 너무 미워하지 마라, 설아.’
27번째 옥황의 얼굴이 백설의 눈을 멀게 했다.
백설의 고개가 떨어지자, 헤니르가 바닥에 누워 있는 최한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천 년 전. 오딘과 강경파에 의해 휴거가 결정되었다. 용족과 거인족 그리고 인간들이 힘을 합쳐 신에게 대항했지. 뭐, 지금은 천사라 불리는 용족이 배신을 해서 전세는 기울었지만… 그래도 단 한 명. 인간의 왕이라 불리는 그 존재는 끝까지 저항했어.”
헤니르의 시선으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최한의 모습 위로 27번째 옥황이 겹쳐졌다.
“그래…. 바로 저 녀석. 정확히 말하면 전생의 저 녀석. 끝없는 윤회를 거듭해 인간을 지키는 자. 아스가르드의 신보다 더욱 인간을 사랑하는 자. 미드가르드의 왕 옥황상제. 지금은 최한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너희의 친구다.”
성녀가 마른침을 삼키며 최한을 눈에 담았다.
“알겠어요…. 알겠는데… 왜… 하필 지금의 최한인 거죠?”
“예언에 28번째라고 적혀 있었으니까.”
“그게 무슨….”
성녀와 헤니르의 눈이 마주쳤다.
“최한이라서가 아니다. 28번째 옥황이라서…. 그 타이밍에 전설의 검인 수투르의 검이 나타나 옥황에 손에 쥐여져서…. 영겁의 시간 동안 준비했던… 거인족의 복수가…. 미미르가 오딘의 눈을 28번째 옥황에게 전해주어서….”
“…….”
성녀의 눈동자가 떨렸다.
아무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헤니르의 말뜻에 담긴 의미를 이해한 것도 한몫했지만, 입을 뗄 수 없던 또 다른 이유는….
“최한….”
바닥에 쓰러져 있던 최한이 어느새인가 일어나 탁자로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다.
날 선 눈매.
얼굴 곳곳에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묻고 싶은 게 있어. 스승님.”
낮게 울리는 그 목소리에 헤니르가 몸을 돌려세웠다.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는 헤니르였다.
“스승님은 모두 알고 있던 거야? 민섭이에 관한 것도… 미미르에 관한 것도… 내가 옥황으로 각성할 것도? 그래서… 나를 제자로 받아 준 거야?”
그 어떤 것보다 무거운 날숨을 내쉬며 헤니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빠득-.
“그럼! 나에게만 보이던 이 퀘스트도 다 스승님이 만든 거야? 나를 이세계에 가둔 것도 스승님이고. 나를 각성하게 하려고, 민섭이가 죽을 것도! 미미르가 죽을 것도! 모두… 모두 알고 있던 거야?”
최한의 몸 전체가 떨려왔다.
지난날의 기억이 최한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속으로는 아니라고 말해주길 바랐다.
그토록 저주하던 존재가….
자신을 가둬둔 존재가….
화살을 겨눠야 할 존재가 자신의 스승이라니.
최한의 바람과 다르게 헤니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한이 강하게 주먹을 쥐었다.
“대체 왜! 스승님은 알고 있었잖아!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얼마나 강해지기 싫었는지! 매일 밤마다 이야기했잖아! 난 그저 친구를… 친구를 가지고 싶었는데! 내 손으로 친구를….”
“네가 바라지 않았어도… 너의 사명이다. 인간의 왕이 짊어진 피할 수 없는 숙명. 너도 이제는 알고 있지 않느냐…? 전 대 옥황들의 기억을… 의지를 전해 받았지 않느냐…?”
최한이 입술을 깨물었다.
맞다.
이제는 모두 알고 있었다.
그들의 기억을…. 몇십 번을 윤회하며 쌓은 그들의 노력을 이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친구를 죽이면서까지 강해지고 싶지는 않았어! 인간을 지키는 게 나의 사명인데! 인간을 지키기 위해 친구를 죽이는 것이… 가장 친한 친구를 죽이는 것이….”
“예언의 반역자. 수투르의 검집이자… 너에게 인간의 죽음과… 신으로서 새로운 삶을 준 그 녀석은… 온 우주의 희망이었다. 유일하게 아스가르드의 왕을 끌어내릴 수 있는 존재. 자신의 목숨과 바꿔 수투르의 검을 너에게 전해주는 임무가… 그의 사명이었다.”
“희망 따위 살아남은 녀석들의 말일 뿐이잖아. 자신들의 일이 아니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야. 자신의 목숨이 아니니까…. 자신의 목숨이 아니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라고!”
정적이 찾아왔다.
최한의 말이 맞다.
당사자가 아니니, 그렇게 포장해서 말하는 것뿐이다.
희생이라는 단어는 무엇보다 고귀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저 살아남고 싶다는 이기적인 마음을 그럴듯하게 포장한 것에 불과했다.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소리친 최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딴 임무 바라지 않았어…. 민섭이는… 민섭이는 그저….”
“네가 어떻게 아느냐…?”
최한의 고개가 들렸다.
최한의 시선으로 굳은 의지가 담긴 헤니르의 눈동자가 보였다.
“…….”
“그 아이의 마음을…. 그 아이가 무슨 마음으로 죽음을 받아들였는지…. 자신의 죽음을 알고도 인간들을 위해…. 너를 위해… 결정한 그 마음을 네가… 어떻게 아느냐…?”
최한의 입술이 떨려왔다.
‘그럼 스승님은 아십니까!’
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아무리 신이라도 사람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니까.
그러나 스승님의 눈을 보는 순간, 최한은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사실.
알고 있었다.
그 누구보다 민섭이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있던 이는 자신이었으니까.
민섭이의 목숨을 앗아간 이가 자신이었으니까.
뚝.
뚝….
최한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민섭이는… 누구보다 용감한 인간이야. 세계를 구한 영웅이고… 그리고… 그리고….”
성녀가 더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헤니르와 로키도 고개를 움직여 먼 곳을….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았다.
“민섭이는… 친구인 나를 위해…. 내가 사랑하는 인간들을 위해 자신의 희생한… 나의 자랑스러운 친구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는….”
최한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낡은 천장이 눈에 보였다.
하지만 최한이 진정으로 보고 있던 것은 감히 이 천장으로는 막지 못할 더 높은 곳.
그의 시선은 절대 닿을 수 없는 그 높은 곳을 향하고 있었다.
“내 친구가 열어준 이 길을 걸어가 볼게.”
* * *
한 시간 후.
마음을 추스른 최한과 아이들이 온천에 들어가 반신욕을 하고 있었다.
“아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있어? 무스펠헤임인가 하는데 가서 수투르의 검을 제대로 다룰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며.”
물속에 있던 최한이 물 밖에 앉아 있는 헤니르를 보며 말했다.
“분명 시간이 여유로운 건 아니다. 하나 이 온천수는 니다벨리르에서 유일하게 세계수의 묘수가 흐르는 전설의 샘. 너에게는 마기의 충전을, 마기가 없는 인간들에게는 마기의 혈을 뚫어줄 중요한 공간. 앞으로의 전투에 대비하려면 꼭 거처야 할 관문 같은 거다.”
근엄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지만, 헤니르의 눈은 그렇지 못했다.
고개는 최한을 향하고 있었지만, 헤니르의 눈동자는 성녀와 백설에게 향해 있었으니까.
촤아악-.
뜨거운 온천수가 헤니르의 얼굴 전체를 덮쳤다.
“으… 내 눈!”
헤니르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성녀와 백설이 입고 있던 얇은 천을 위로 올려 상체를 더욱 꽁꽁 싸맸다.
“최한의 스승이라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신이 아니라 그냥 주정뱅이 변태 영감이었군.”
“그 스승에 그 제자입니다.”
자신까지 봉변을 당하자, 최한이 잔뜩 얼굴을 구기며 소리쳤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난 저런 변태 같은 짓 안 해! 너희의 그 초딩 같은 몸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고!”
빠직-.
쾅!
쾅!
머리 위로 혹이 두 개 솟아난 최한이 기절한 듯 물에 둥둥 떠 있었다.
“그게 더 기분 나쁘다.”
“신이 되었어도 최한은 바보입니다!”
돌 위에 앉아 있던 로키가 크게 웃었다.
“하하하! 여전하구만, 옥황상제. 역시 재밌는 놈이야.”
“그런데 진짜인가요? 우리가 사는 세계에 신이 쳐들어오지 못하게 했다는 게? 그… 어….”
성녀의 물음에 로키가 살짝 미소 지었다.
“그냥 편하게 불러라. 전 차원에서 가장 높은 아스가르드의 신이긴 하나… 난 지위나 권력 같은 거 싫어하거든. 미드가르드, 그러니까 지구는 안전해. 아스가르드는 신들이 사는 세계이니 보안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 그래서 입구를 단 하나만 만들어 놓았지. 다른 적들이 쳐들어오지 못하게. 그런데 반대로 생각하면 그들도 나갈 수 있는 입구가 하나뿐이거든.”
“그럼… 그곳을….”
“그래. 내가 장난 좀 쳐놨지. 천 년 동안 봉인해둔 복수 정도는 해야 하니까. 아스가르드신들이 다른 차원으로 넘어갈 수 있는 비프로스트라는 웜홀을 내가 막아놨어. 인간의 시간으로 한… 100일 정도? 그 정도는 움직이지 못할 거야, 그놈들.”
“오… 대단하군요…. 로….”
“편하게 로키라 불러도 된다니까. 아니면 네가 믿는 신이 아니라서 그런가?”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그게… 원래는 한재석이라는 저희 학교에 다니던 친구였는데….”
그렇다.
눈앞에 있는 로키라는 신은 한재석의 몸 안에 봉인되어 있던 로키의 영혼이 각성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신으로 각성을 했어도, 로키도 최한처럼 외형만 조금 변했지, 기본적인 생김새나 얼굴은 기존의 한재석 비슷했다.
단지.
머리 색이 검은색으로 바뀌고, 얼굴이 더욱 하얘진 정도.
제일 크게 달라진 것은….
표정.
까칠하기만 했던 한재석의 얼굴이 이제는 태연하게 애교 미소를 보일 정도로 여유로워졌다는 것이다.
“음…….”
성녀의 말을 듣고 고민하는 표정을 짓던 로키가 성녀를 바라보았다.
로키의 입이 떨어졌다.
“뭘 봐! 초딩.”
로키의 얼굴에 한재석이 나타났다.
아니, 완전 한재석이었다.
목소리와 표정까지도.
“와….”
성녀의 반응을 확인한 로키가 다시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이러면 안 어색하려나? 한재석은 사라진 게 아니야. 그는 그저 나의 영혼을 봉인하고 있던 껍데기가 아니라, 내 자신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은 오히려 한재석의 몸을 내 영혼이 빌린 거라고 해야 하나…. 내 몸은 분명 천 년 전에 사라졌으니까. 그냥 편하게 한재석이라고 불러, 너희는. 최한도 옥황으로 각성했는데 아직 최한이라고 부르잖아. 나도 똑같아.”
“네. 그냥 한재석이 조금 더 부드러워졌다고 생각할게요.”
“그래.”
성녀와 로키의 말이 끝나자 백설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건 그렇고, 최한을 지킬 기사는 4명이라고 하지 않았나? 한재석과 나 그리고 성녀. 또 한 명은 누구지? 헤니르 당신도 함께하는 건가?”
백설의 물음에 헤니르가 대답했다.
“아니. 난 따로 할 일이 있다. 오딘의 발이 묶였을 때 온건파들을 모아야 하거든. 최한을 지킬 또 한 명의 기사는….”
“으아악! 시체다!”
최한의 비명이 들리고.
다른 이의 시선이 모두 비명이 들린 곳으로 향했을 때….
최한의 옆으로 온몸을 까맣게 그을린 시체 하나가 떠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