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진짜 여기 맞아?”
짜증 섞인 최한의 목소리에 한재석의 미간이 구겨졌다.
“아! 그만 좀 물어봐! 맞다고! 맞아! 방금 물어봐 놓고 뭘 자꾸 물어!”
“아니, 아까부터 같은 길 빙빙 돌고 있는 거 같으니까 그러지! 이거 봐봐! 이 꽃 아까도 봤다니까.”
최한의 손이 동굴 벽에 피어 있는 보라색 꽃을 향했다.
지구에서는 본 적 없던 세모난 꽃잎을 가진 보라색 꽃이었다.
생김새 말고도 지구에서 봤던 꽃들과 확연히 다른 점이 또 있었는데, 꽃잎이 자체적으로 빛을 내뿜어 동굴을 밝게 비추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까부터 말했잖아! 여기 이 꽃 천지야. 내가 길 안다고! 그냥 잔말 말고 따라와!”
“그 말도 한 열 번은 했겠다! 배고프다고 이제! 너 설마 천 년 넘게 잠만 자서 까먹은 거 아니야?”
빠직-.
최한의 목소리에 선두에 서서 걷고 있던 한재석의 걸음이 멈췄다.
“천 년 동안 잠만 자? 이게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떠올리게 하네. 봉인이 잠자는 건 줄 알아!”
쿠당탕!
최한과 한재석이 바닥을 나뒹굴며 싸우기 시작했다.
뒤따르던 백설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신이 돼도, 둘 다 여전히 바보잖아.”
“그러게 말입니다. 만나면 싸우기만 하고….”
성녀도 최한과 한재석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때, 가장 뒤에서 걸어오던 강진철이 앞쪽으로 손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 저건가?”
강진철의 목소리에 투덕거리던 최한과 한재석의 고개가 동시에 움직였다.
저 멀리 커다란 문이 보였다.
꽃들이 밝혀주는 동굴보다 확연히 환한 공간.
문이 밝게 빛나고 있다고밖에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한재석이 최한을 바닥에 내팽개치며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진짜 다 왔잖아! 내 말이 맞지?”
자신의 눈으로도 보이는 문의 입구에 최한이 어떤 말도 내뱉지 못하고 뚱한 표정만 지었다.
그런 최한을 보며 한재석이 히죽 웃더니 걸음을 옮겼다.
“가자. 저 문 앞부터는 지도를 보면서 가면 될 거야.”
바닥에 주저앉은 최한을 제외한 인원들이 한재석을 따라 문으로 이동했다.
“쳇….”
최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의 뒤를 따랐다.
“오… 여기가 차란투스카로 가는 입구입니까?”
성녀의 목소리에 한재석이 대답했다.
“그래. 이 문을 지나면 내가 만든 미로가 나와. 엄청 어렵게 만들어서 나조차 길을 잃을 수도 있어. 그러니까 절대 혼자서 멋대로 움직이지 마. 지도 보고 내가 안내할 테니까. 꼭 내 뒤만 따라와.”
한재석의 신신당부에 아이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자.”
한재석이 문을 통과함과 동시에 최한의 시선으로 퀘스트 창이 나타났다.
띠링!
「퀘스트 NO. 003
함정이 가득한 미로를 지나 드워프 마을을 찾아내라.
보상
레벨 + 1
차란투스카의 보물」
‘함정이 가득하다고?’
쿵!
최한과 아이들 모두 문의 안쪽으로 들어오자마자 큰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야… 저기….”
퀘스트창에 나타난 함정 이야기를 하려 최한의 입이 떨어짐과 동시에….
쿠르르….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뭐… 뭐야!”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판단할 겨를도 없이 최한과 아이들이 서 있던 바닥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달려!”
한재석의 목소리를 시작으로 아이들이 본능적으로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쿠쿠쿠쿵!!
아이들이 밟고 지나간 땅이 끝도 없는 구덩이가 되어 있었다.
“으아악!”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미친 듯이 내달렸다.
최한이 뒤쪽으로 고개를 돌려 방금 밟고 지나온 땅으로 시선을 돌렸다.
땅에 균열이 나타남과 동시에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그 자리엔 어두컴컴한 무저갱만이 보였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떨어지면 죽는다.
마른침을 삼킨 최한이 앞서 달리고 있는 한재석을 보며 물었다.
“야! 이게 뭐야?”
“뭐긴 뭐야? 함정 처음 봐?”
너무도 당당한 태도에 최한의 미간이 구겨졌다.
“아니! 왜 들어오자마자 함정이 있냐고!”
“왜긴 왜야. 장난의 신인 내가 만들었으니, 당연한 거 아니냐? 그리고 함정 없는 미로가 어디 있냐? 미로 이퀄 함정. 국룰이잖아?”
“에휴. 너랑 멀쩡한 대화를 하려고 한 내가 바보지.”
“뭐, 걱정 말라고.이 몸이 로키란 거 잊고 있었냐?”
선두에서 달리던 한재석이 몸만 살짝 돌려 마법진을 만들어냈다.
“멈춰라!”
고대의 문자로 이루어진 마법진에서 푸른 기운이 나아갔다.
샤르륵-.
밝게 일렁이며 나간 파란 기운이 무너지고 있는 땅에 스며들었다.
빠르게 무너져 내리던 땅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가장 뒤쪽에서 달리고 있던 강진철이 말했다.
“멈춘… 건가?”
강진철의 목소리에 다른 아이들의 발이 멈췄다.
쿠르르….
쿠쿠쿠쿵!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이 다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아…. 맞다. 내가 어떤 마법도 통하지 않게 만들었지. 하… 하….”
태평하게 웃고 있는 한재석의 모습에 아이들의 미간이 구겨졌다.
쿠구구궁!!
다시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땅의 균열이 어느새 아이들이 있는 곳까지 다다랐다.
“달려!”
강진철의 다급한 목소리에 아이들의 발이 다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최한이 한재석에게 소리쳤다.
“잘난 척 소리치더니 이게 뭐야! 멈춰라! 이건 왜 말한 거야!”
“마법 사용할 때만 해도 될 줄 알았지, 나도!”
후미에서 달리던 강진철이 한재석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로키는 무슨. 그냥 미로에 이상한 함정이나 파놓은 애새끼였네. 자기가 오게 될 거란 생각은 안 하나?”
“…….”
한재석이 대응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깨물었다.
“노닥거릴 시간 없다. 힘으로 없앨 수 없다면 빨리 탈출해야지.”
백설의 뼈를 때리는 소리에 한재석이 들고 있던 지도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안 그래도 보고 있다고. 기다려봐…. 입구… 입구에서 쭉 나왔으니….”
지도에서 무언가 발견한 한재석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얼음 석상에서 오른쪽으로!”
한재석의 목소리가 울리자마자 아이들의 시선으로 늑대의 모습을 한 얼음 석상이 보였다.
빠르게 달리던 아이들이 얼음 석상 앞에서 오른쪽으로 몸을 돌려 새로운 통로로 몸을 던졌다.
쿠쿠쿠쿵!!
늑대의 모습을 한 얼음 석상이 무저갱으로 떨어졌다.
다행히 아이들이 밟고 있는 땅은 무너지지 않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이제야 한숨을 돌렸다.
“하아….”
“진짜 죽을 뻔했네.”
“이런 곳에서 어이없게 죽었으면 쪽팔려서 성불도 못 했을 거야.”
“그건 그렇고…. 야! 한재석!”
최한의 목소리에 아이들의 모든 시선이 한재석에게 쏠렸다.
“아니, 대체 왜 미로에 함정을 설치해서 이 고생을 하게 만들어!”
날 선 눈매가 모두 자신을 향하자, 한재석이 눈을 피하며 애꿎은 땅만 발로 찼다.
“아니… 뭐…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나…. 침입자가 쉽게 미로를 통과하지 못하게 하려고 그런 거지….”
“침입자는 무슨. 우리도 이렇게 고생했는데, 드워프들은 처음 올 때 진짜 개고생했겠다, 인마.”
최한의 목소리에 한재석의 표정이 멈췄다.
“아….”
한재석의 머릿속으로 드워프들이 이 미로에서 고생했을 모습이 떠올랐다.
이마에 식은땀이 나기 시작한 한재석이 최한과 아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그냥… 돌아갈까? 차란투스카 가도 좋은 소리 못 들을 것 같은데. 하하하하…….”
아이들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아이들이 혀를 차며 한재석을 지나쳤다.
“에휴…. 강하면 뭐 해 바보인데.”
“어차피 처음 이곳에 온 드워프들은 다 죽었겠지. 뭐… 미로에서 고생한 것 때문에 성불 못 하고 귀신 됐을 수도 있지.”
“도착하면 한재석 악몽 꾸겠네.”
한재석이 땅만 바라보며 그들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차란투스카로 가는 보물 지도를 따라 걷고 또 걸었다.
미로 속은 마치 지구에서 들어갔던 던전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머리가 닿을 정도로 작은 통로였다가, 바다가 보일 정도로 큰 장소가 나타나기도 했다.
몬스터는 없었지만, 최한 일행의 속도를 늦추는 함정은 끝도 없이 나타났다.
여러 장소와 수많은 함정을 지난 끝에 드디어….
최한 일행이 태초의 차란투스카에 도착했다.
“와….”
감탄밖에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시선을 압도하는 황금 도시.
넓은 평야 지대에 성벽 없이 그대로 드러난 황금 도시의 위용에 최한 일행 모두 말문이 막혔다.
그때.
띠링!
[퀘스트 완료.]
[보상을 진행합니다.]
최한의 시선으로 거대한 황금 도시와 상태창이 겹쳐졌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이름 : 최한
나이 : ∞
종족 : 신
칭호 : 인간의 왕 (EX)
레벨 : 4
능력치
근력 : (EX) B - 2171
민첩 : (EX) B - 2160
내구 : (EX) B - 2160
체력 : (EX) B - 2190
마기 : (EX) B - 2360
특성 : 옥황상제
최종 등급 : (EX) B
< SKILL >
레벨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처음엔 도착만 하면 레벨 오른다길래, 꿀이라 생각했는데….”
최한이 미로 속에서 만났던 함정들을 떠올렸다.
“드레이크 잡은 거 생각하면 못해도 레벨 두 단계는 올라야 해, 이건….”
불평을 늘어놓던 최한의 앞에 인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수풀을 헤치고 나오는 그림자.
아이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누구냐! 이 미로를 어떻게 통과한 거지?”
난쟁이.
긴 창을 든 드워프 두 명이 나타났다.
[보상을 진행합니다.]
[문지기들의 안내를 받아 촌장을 만나십시오. 차란투스카의 보물을 건네줄 것입니다.]
‘이 녀석들이 문지기인가?’
지금껏 보았던 드워프들은 대부분 대장장이 일을 하고 있었기에 몸에 아무것도 두르고 있지 않았지만, 눈앞에 있는 드워프들은 전사들이 입는 로브를 두른 채 긴 창을 들고 있었다.
최한이 뭐라 말할까 망설이고 있는 사이 성녀의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이분이 누군지 알고 창을 겨누느냐! 이분은 너희 드워프들의 왕! 로키 님이시다!”
마치 자기가 엄청난 위업을 달성한 사람처럼 당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성녀였다.
“아… 얘 왜 이래? 부끄럽다니까….”
위풍당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성녀와 달리 정작 한재석은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있었다.
쨍-.
철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한재석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
조금 전까지 문지기들이 들고 있던 긴 창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저… 정말… 로키 님이십니까…?”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에 한재석을 포함한 아이들의 시선이 모두 갑옷을 두른 드워프들에게 향했다.
거친 표정을 짓고 있던 조금 전과 달리 드워프들의 얼굴에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이 지어져 있었다.
아이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옮겨졌다.
그 눈빛을 견디지 못한 한재석이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문지기들의 앞으로 나아갔다.
“내가… 이 미로를 만든 장본인이자, 헤아릴 수도 없는 먼 과거에 차란투스카와 드워프들을 지키려 이곳으로 보낸… 로키다.”
한재석이 드워프의 보물 지도를 들어 보였다.
“그… 그것은….”
“와… 왕의 증표.”
문지기 드워프들이 빠르게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하늘로 치켜들었다.
펑!!
삐이이이!!
폭죽이 하늘로 쏘아졌다.
그리고.
두두두두두두두두!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뭐… 뭐야?”
한재석이 당황해 중심을 잡으려 애썼다.
“저… 저기 봐!”
최한의 목소리에 아이들의 모든 시선이 마을로 향하는 입구로 옮겨졌다.
“뭐야… 저게….”
한재석의 시선으로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는 수백 마리의 드워프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