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요툰의 여왕이라 불리는 앙그르보다는 로키의 부인이자, 유일하게 로키와 호각으로 싸울 수 있는 존재였다.
어린 시절을 같이 보낸 그들은 요툰헤임의 미래라 불리며 선의의 경쟁 속에서 점점 더 강해져 갔다.
로키는 천성이 게으르고 장난이 심했지만, 머리가 좋고 약한 것들을 사랑할 수 있는 깊은 포용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반해 앙그르보다는 강한 신체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강해지기 위해 마법을 연구하고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여행을 다니며 요툰이 아닌 전 차원을 보고 싶어 하던 로키와 다르게 앙그르보다는 어릴 적부터 고향인 요툰을 지키며 이곳에서 평생을 살아가고 싶어 했다.
그렇게 완전 반대의 성향을 가진 요툰의 미래들은 성인이 돼서도 라이벌이자, 친구의 관계로 요툰을 지키기 위해 끝없이 정진해 나갔다.
다른 차원의 여행을 마친 로키가 맛있는 술을 가져오기 전까지는….
“내가 그때 그 술을 마셨으면 안 됐는데! 아, 짜증 나!”
앙그르보다가 윤기 나는 붉은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짜증을 냈다.
무릎을 꿇고 있던 한재석이 앙그르보다를 올려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무슨 소리야. 술판을 깐 거는 너였는데…. 그리고 술에 취해서 힘을 쓴 건 내가 아니라 너… 읍!”
앙그르보다의 손이 한재석의 입을 강하게 막았다.
“닥쳐. 한 마디만 더하면 턱 가루로 만들어 버릴 줄 알아.”
목소리로 전해져오는 살기에 한재석이 어색한 눈웃음을 지으며 재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바위 거인 베일리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꿀꺽.
‘부인이라서가 아니라 어쩌면 앙그르보다 님이 더 강할 수도….’
멍하니 한재석을 지켜보고 있던 베일리의 귀로 앙그르보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꼬맹이.”
꼬맹이.
성벽을 지키는 7번 문지기이자.
몇천 년을 살아 낸 거인에게 꼬맹이라 부를 수 있는 자가 몇이나 있겠는가.
하나.
수많은 전투를 해온 실전 감각과 거인족의 본능이 말해주고 있었다.
말대꾸하면 죽는다는 것을.
바위로 된 얼굴에서 멍한 표정을 지운 베일리가 입을 헤벌쭉 벌렸다.
“네. 앙그르보다 님.”
굽신굽신.
베일리가 머리를 조아리며 앙그르보다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앙그르보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래. 착하다, 착해. 이 못난 놈을 모시는 놈치고는 괜찮은 놈이구나.”
베일리가 얼굴 가득 큰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내가 지금 이 녀석 목소리를 들으면 열이 뻗칠 것 같아서 그러는데. 어떻게 된 건지 설명 좀 해봐라. 여기는 왜 들어왔고, 누구랑 온 건지.”
유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엄청난 살기를 내뿜고 있는 앙그르보다의 모습에 베일리가 마른침을 삼키며 무릎 꿇고 있는 한재석에게 시선을 옮겼다.
자신을 향한 시선을 발견한 한재석이 눈을 찡긋거리며 눈으로 대답했다.
괜찮다.
솔직히 말해라.
안 그러면 너 죽는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한재석의 눈은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바위 거인 베일리가 앙그르보다를 보며 말을 이어갔다.
“로… 로키 님은 친구분들과 함께 이곳에 오셨습니다. 친구분이 퀘스트인지 뭔지를 해야 한다고 해서 그분을 도와주기 위해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성벽을 지키고 있는 저를 만나 우트가르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백성들을 위해 우트가르트 로키를 없애기 위해 성으로 향하고 계신 겁니다.”
“친구? 이 녀석이 친구라고? 이 녀석 친구는 재수 없는 오딘 새끼밖에 없는 걸로 아는데?”
앙그르보다의 눈이 화살촉처럼 변해 한재석에게 향했다.
날카로운 눈빛을 확인한 한재석이 한쪽 입꼬리만 말려 올라가는 어색한 웃음을 보이며 베일리를 향해 눈짓했다.
자신이 목소리를 내면 앙그르보다가 화를 낼 것을 뻔히 알아 말을 아끼고 있었다.
눈길을 확인한 베일리가 앙그르보다를 보며 말을 이어 갔다.
“네. 로키 님의 친구분들은 미드가르드에 사는 인간들이었습니다. 두 명의 남자 인간과 두 명의 여자 인간과 함께….”
여자라는 단어에 앙그르보다의 미간이 잔뜩 구겨졌다.
팍!
앙그르보다의 손이 다시 한재석의 얼굴을 움켜쥐었다.
“여자? 또 바람피운 거냐, 너?”
한재석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아… 아냐. 내가 무슨 바람을 피운다 그래? 그냥 친구야, 친구.”
“우리도 친구였다는 거 잊었냐? 그리고 에시르 신족인 시긴도 처음에는 친구라고 하고서는 걔랑도 바람피웠잖아.”
시긴의 이야기에 한재석이 더는 앙그르보다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허공만 쳐다보았다.
“그… 그건… 미안.”
최선의 선택.
그것은 바로 빠른 사과였다.
하지만.
“그런데 너 누가 말하랬냐. 내가 분명 네 목소리 듣기 싫다고 했지?”
합-.
한재석의 입이 단숨에 다물어졌다.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던 앙그르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베일리를 향했다.
“그 인간들, 진짜 친구 맞냐? 이 녀석은 믿을 수가 없어서.”
찬찬히 지난 시간을 떠올린 베일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정말 그냥 동료였습니다. 모두 한 가지 목적의식을 가진 그런 동료. 그들을 바라보는 로키 님의 눈은 절대 이성을 보는 눈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남자 중 한 분은 미드가르드의 왕이었습니다.”
앙그르보다의 한쪽 눈썹이 떨렸다.
“미드가르드의 왕이라고?”
아주 오래전.
정확히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옛날에 로키의 입으로 자주 들었던 이가 있었다.
미드가르드의 왕.
신기한 인간이 있다고.
이그드라실에 매달린 9개의 차원 중 가장 나약한 세계이자 약한 종족들이 산다고 전해지는 미드가르드.
그곳에서 만난 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
끝없이 윤회하며 언젠가 올 신의 종말. 라그나로크를 준비하고 있는 인간이 있다고.
유일하게 오딘을 이길지도 모르는 힘을 가진 존재.
앙그라보다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보고 싶군. 그 인간의 왕이라는 놈이. 그런데 그놈은 어디 있지? 다른 길로 향한 건가?”
“네. 성으로 연결된 진짜 문을 찾기 위해 두 명씩 짝을 지어 세 갈래 길로 나뉘었습니다. 아마 이 정도로 시간이 지났으니 한 팀은 분명 진짜 문을 찾아 들어갔을 겁니다. 그리고… 확실한 건 아니라 제 짐작입니다만… 아마 그 진짜 문을 열고 들어간 분이 인간의 왕이라 생각되옵니다.”
“짐작이라….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그냥… 이유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만… 그렇게 느껴집니다. 무언가 준비된 느낌. 그를… 성장케 하려는 운명 같은 게 느껴진다고 할까요….”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원래 주인공이라는 것은 남들보다 몇 배나 되는 고난을 겪는 법이니까. 그건 그렇고… 그 인간의 왕 강한가?”
앙그르보다의 목소리에 베일리가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 느껴지는 마기는 엄청났습니다. 삼천왕과 견줄 수 있을 만큼….”
“그래? 그럼 큰일이군. 그 정도밖에 안 된다면 문을 지키고 있는 아이스 울프를 이기지 못할 거야.”
아이스 울프의 이야기에 베일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알고 있다.
세 갈래 길에 들어서기 전 자신도 같은 이야기를 했으니까.
‘진짜 문을 발견한 팀이 지하로 가 다른 문들을 열어줘야 합니다. 말로만 들으면 쉬워 보이긴 하나 문을 지키고 있는 아이스 울프는 엄청 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 여기서 이길 수 있는 존재는….’
베일리의 눈이 감겼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이 문이 진짜 이길 바랐습니다. 일행 중 아이스 울프를 이길 수 있는 존재는 아마 로키 님 밖에 없을 테니….”
한층 더 어두워진 표정의 베일리와 앙그르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아니. 그 녀석이라면 이길 수 있을 거야.”
한재석의 목소리에 베일리와 앙그르보다의 고개가 움직였다.
천천히 일어나고 있는 한재석의 모습이 보였다.
“로키 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 녀석, 랭글산의 수호신과 거인족의 자식이야. 반신이 강한 힘을 타고나는 건 너도 알고 있을 텐데.”
터벅.
터벅.
새하얀 눈을 밟으며 다가오는 한재석의 얼굴에 묘한 웃음이 지어졌다.
“강하겠지. 아마 아스가르드의 있는 신들보다도 강할지도 모르지, 그 반신 늑대. 하지만 최한 녀석이 이길 거야. 그 녀석 드디어 귀걸이의 사용법을 알아챈 것 같거든.”
* * *
붉은 피가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공격을 성공한 아이스 울프의 눈이 반달을 그렸다.
이빨 사이사이로 확실한 감촉이 있었다. 살점과 딱딱한 뼈가 으스러지는 느낌.
인간 놈의 머리통과 몸통을 정확히 물어뜯은 느낌이 들었다.
‘한 놈 처리했으니, 이제 한 놈만 더 처리하면….’
최한의 얼굴을 담고 있던 아이스 울프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미소.
자신의 편이 당했는데, 웃음을 보이고 있었다.
“어째서… 그런 표정을….”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입안의 감촉은 확실했다.
그런데 저 표정은 무어란 말인가.
“늑대가 아니라 똥개였잖아? 아니, 똥개도 아깝다. 자기 꼬리 물고 웃고 있는 녀석은 대체 뭐라 불러야 하냐?”
최한의 목소리에 아이스 울프가 빠르게 눈동자를 움직였다.
강하게 악물고 있는 자신의 입 주위로 얼음 가루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어째서 내 꼬리가 여기에….”
아이스 울프가 입을 벌리자, 잘린 꼬리가 힘을 잃고 땅으로 떨어졌다.
그제야 고통이 밀려왔다.
너무도 확신을 가지고 있어,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입을 다물기 전까지 인간의 모습을 확인했다.
아니, 입을 다무는 그 순간까지 인간이었다.
착각할 리가 없을 터였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1초도 안 되는 그 순간에 바꿔치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인간 놈은 어디 있느냐! 분명 내 입에 있었어야 했는데….”
“아! 저 녀석 말하는 거야?”
최한의 손이 한쪽 구석을 향했다.
아이스 울프의 고개가 그곳으로 움직였다.
그곳엔 자신의 입속에 있어야 했을 인간의 모습이 보였다.
그 인간조차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어떻게 이 몸이 눈으로 좇지도 못할 짓을….”
최한이 웃으며 귀걸이를 툭툭 쳤다.
“그냥 알려 줬어. 어떻게 하면… 너를 이길 수 있는지.”
아이스 울프의 시선으로 밝게 빛나고 있는 붉은 귀걸이가 보였다.
“그게 무슨 개소리….”
그때, 아이스 울프의 귀로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분석을 완료합니다. 아이스 울프의 약점은 왼쪽 앞 다리입니다.”
아이스 울프의 고개가 빠르게 움직였다.
“뭐냐! 대체 어디서….”
“어디긴 여기라니까.”
최한의 목소리에 아이스 울프의 시선이 다시 귀걸이로 향했다.
밝게 빛나는 붉은 귀걸이.
그리고.
아이스 울프의 눈을 멀게 하는 마지막 목소리가 들렸다.
“목표물의 제거 작업을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