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당신들은 아직 죽긴 일러.”
흐릿한 시선으로 보이는 익숙한 얼굴.
성녀의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는 오지훈 박사의 얼굴이었다.
“오지훈…… 박사님…….”
오지훈의 팔에 기대 간신히 쓰러지는 것을 막고 있었다.
“잘 버텼다. 이 정도만 해도 큰일을 한 거야. 너희의 힘만으로 오딘의 막내아들 발드르를 없앤 것은 정말 제 역할의 몇 배는 해준 것이다.”
헤니르의 목소리였다.
성녀의 곁으로 헤니르가 다가왔다.
“헤니르 님이 여기를 어떻게…….”
헤니르의 바로 옆에 호디의 모습이 보였다.
“호디가 와서 위험을 알리더구나. 뭐…… 오는 길에 만난 거긴 하지만. 이제 진짜 전쟁이 시작됐거든.”
헤니르의 고개가 하늘로 향하자, 성녀의 흐릿한 시선도 하늘을 향했다.
쾅!
쾅!!
콰과과광!!
엄청난 충격음과 천둥소리.
자세하게 보이진 않지만, 느낌으로나마 알 수 있었다.
천둥의 신 토르와 백설이 전투를 벌이고 있다는 것을.
먹구름으로 뒤덮인 서울 상공에 엄청난 벼락이 치고 있었다.
그 위로 보이는, 발할라의 앞에 서 있는 수많은 아스가르드의 신들.
그들이 헤니르를 발견하고는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음……. 이제 다른 신들도 공격을 시작할 것이야. 그 전에 너희들 먼저 치료를 해야겠군. 마기를 가진 신들을 치료하는 힘은 없으나, 마력을 가진 인간들은 다르지.”
헤니르의 손에서 붉은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마치 이글거리는 불꽃처럼 피어난 마기가 헤니르의 손을 지나 성녀에게로 옮겨졌다.
성녀의 몸을 뒤덮었던 마기가 뒤이어 장왕윤과 이정은에게도 옮겨졌다.
치료 마법을 주로 다루는 성녀이기에 알 수 있었다.
마력이 채워지고 있었다.
동시에 온몸을 뒤덮었던 상처들이 사라져 간다.
찢긴 상처. 관통된 상처. 부러진 뼈와 혈관까지도.
“내장마저…… 다시 재생되고 있어…….”
자신의 최상위 마법과 비슷할 정도의 힐이었다.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성녀의 상처가 모두 사라졌다.
기대 있던 오지훈에게서 떨어져 자신의 두 발로 제대로 섰다.
“이거 대단한데?”
“방금까지는 정말 죽을 것이라 생각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헤니르 님.”
이정은과 장왕윤이 상처를 회복하고 헤니르에게 고개를 숙였다.
성녀도 헤니르에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감사 인사는 됐어. 아마 이제부터는 이렇게 치료해줄 시간도 없을 거야.”
헤니르의 표정이 뒤바뀌었다.
살기 가득한 얼굴.
상공에 있던 수많은 신이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헤니르가 시야를 가득 채운 아스가르드의 신들을 보며 말했다.
“이거, 오랜만이군. 다들 오딘의 똥꼬나 빨며 잘살고 있었나?”
헤니르의 도발에도 공중에 떠 있는 신들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역시 최고 신이 이끄는 최강의 신들.
얄팍한 도발에는 끄떡도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뭐, 이 정도는 헤니르도 예상했었지만.
신들의 중앙에 있던 은색의 머리칼을 길게 늘어트린 신이 앞으로 나와 말했다.
“오랜만이군. 배신자, 헤니르.”
“이게 누구야. 개척의 신 미이르 아닌가? 얼굴을 보니 천 년 동안 잘 지낸 것 같군. 오딘의 똥꼬나 빨면서.”
지구에서 보기 힘든 옷감으로 만든 붉은 옷을 입고 있던 미이르가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딴 싸구려 도발에는 안 넘어간다네, 헤니르. 너야말로 천 년 동안 죽지도 않고 잘 살아 있었군. 배신자 주제에.”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내가 배신한 게 아니라. 오딘이 이치를 거스른 것이야. 무력으로 자신의 자리도 아닌 자리에 앉고, 다른 차원의 무고한 생명을 너무나도 많이 죽였어. 그래서 내가 떠난 것뿐이네.”
미이르의 은색 눈동자가 헤니르 주위에 있는 인간들을 눈에 담았다.
“그래. 네 옆에 있는 인간들을 포함한 다른 차원에 있는 생명들을 많이 죽이긴 했지. 그런데 그게 어쨌다는 거냐? 우리는 신이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이 정의가 되는 존재. 인간들이나 힘없는 나약한 백성들은 그저 우리의 선택에 의해 삶의 존속이 정해지는 그런 존재일 뿐이거늘, 왜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거냐? 그딴 나약한 존재들을 지키는 것이 신의 역할이 아님을.”
“역시. 아스가르드에 있는 신들은 미쳤어. 오딘도 너희도 모두 다르지 않아. 미드가르드에 사는 인간들은 우리의 지배를 받지 않아도 되는, 그런 존재들이다. 다른 차원에 살고 있는 생명도 마찬가지야. 우리 신들에게 강한 힘이 있다고 그들을 몰살하고 그들의 세상을 파괴하는 것이 이치에 맞는 일일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네 녀석이 이상한 거다, 헤니르. 우리는 신이다. 신은 세상이 잘 돌아가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어. 인간들은 너무도 발전했다. 그들은 서로를 죽이며 쓸데없는 싸움을 계속하고, 나아가 이제는 이그드라실에까지 피해를 주게 되었어. 미드가르드와 연결된 가지가 썩어 가고 있는 것을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그것은 꼭 미드가르드의 탓만은 아니다. 인간들이 전쟁을 하고, 너무도 빠르게 발전하는 것은 맞지만, 비단 세계수 가지가 썩어 가는 것은 인간들 때문만은 아니야. 그리고 그게 우리가 하는 일이지 않나? 인간들의 잘못을 바로잡고, 차원이 잘 유지되게끔 관리하는 것. 이렇게 휴거를 진행하는 것이 신들이 해야 할 일은 아니란 말일세. 이것은…… 그저 오딘과 너희들이 두려움 때문에 만든 전쟁이야. 혹시 인간의 왕에게 너희의 자리를 빼앗길까 봐…….”
표정 변화 없던 아스가르드 신들의 얼굴에 균열이 발생했다.
차분했던 미이르의 얼굴이 잔뜩 구겨져 있었다.
“주제넘은 소리 하지 마라. 겨우 이딴 중간계의 왕 따위에게 우리 아스가르드의 신들이 두려움을 느낄 리가 없잖아.”
“그래? 내가 보기엔 아닌 것 같은데? 너희들이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지?”
빠직.
헤니르의 목소리에 미이르의 얼굴이 폭발할 정도로 붉게 물들었다.
이미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의 분노가 차올랐다.
“이 녀석……. 헤니르…….”
그때.
턱.
누군가의 손이 미이르의 어깨에 얹어졌다.
“참아라, 미이르. 예전부터 입만 산 녀석이었잖아. 저 교활한 입으로 평정심을 잃게 하는 게 특기였다고. 그래서 로키와 잘 맞았지.”
미이르가 손의 주인을 확인하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헤니르가 입을 크게 벌렸다.
“이거 놀랍군. 당신이 올 줄이야. 겨울의 신…… 다누.”
파란 얼굴을 가진 노파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주위로 공기가 얼어 가는 것이 보였다.
엄청난 빙결 마법.
역시 겨울의 신이라 불리는 신다웠다.
“당연히 와야지. 재수 없는 인간들을 모조리 죽일 기회인데.”
이름 : 다누
나이 : ∞
종족 : 신
칭호 : 겨울의 신 (EX)
능력치
근력 : (EX) S - 3,000
민첩 : (EX) S - 3,000
내구 : (EX) S - 3,000
체력 : (EX) S - 3,000
마기 : (EX) S - 3,000
특성 : 드루이드
최종 등급 : (EX) S
SKILL
드루이드
동물들을 조종할 수 있다.
고양잇과 동물들의 수호자.
빙결
태고부터 전해지는 빙결 마법을 전부 사용할 수 있다.
헤니르가 다누의 주위에 있는 신들의 얼굴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
‘브리이트, 브리안, 유하르, 아네, 게브네…… 고반까지 왔군.’
다누를 필두로 하는 그녀의 가족들이었다.
그녀의 남편과 자식들로 이루어진, 동맹.
가장 먼저 인간들을 모두 없애자고 주장한 강경파 신들이었다.
그들은 인간들을 싫어해 예전부터 인간들 틈에 섞여 인간들을 잡아먹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헤니르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어 갔다.
“역시 자네들과는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군. 긴말해서 뭐 하나……. 어서 시작하지. 오딘이 오기 전에 모두 죽여주마.”
파란 피부를 가진 다누가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마지막까지 인간의 편에 선 것을 후회하게 해주마.”
다누의 손에 들린 지팡이에서 눈보라가 퍼져 나갔다.
슈우웅!
칼바람과 함께 상암동 전체를 순식간에 뒤덮을 양의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정신 똑바로 차리거라. 총공격해 올 거야. 인간들은 일대일로 싸우는 것을 피하고 모두 한 놈만 집중 공격 해라. 호디는…… 젠장…….”
호디를 바라본 헤니르의 표정이 사라졌다.
“크아앙!”
호디의 눈이 온통 검게 칠해져 있었다.
그리고 머리 위로 나타난 각인.
푸른색 마법진이 호디의 머리 위에 떠 있었다.
다누의 웃음소리가 퍼져 갔다.
“잊은 것이냐, 헤니르? 나의 또 다른 이름, 드루이드를. 나는 동물들을 조종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고양잇과 동물들은 아주 쉽게 조종할 수 있지. 아무리 강한 힘을 가졌어도 말이야.”
“젠장…….”
펑!!
호디의 앞발이 눈 덮인 콘크리트 바닥을 깨부쉈다.
“뭐 하는 거야, 호디!”
“정신 차려!”
호디와 함께 팀을 이뤘던 성녀와 이정은이 호디를 향해 소리쳤다.
호디의 공격은 가까스로 피했지만, 곧바로 이어지는 후속타에 당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깡!
호디의 발톱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장왕윤이 호디의 공격으로부터 성녀와 이정은을 감쌌다.
“어이, 어이. 너희들 정신 차려. 저기 할망구 말 못 들었어? 이 녀석…… 조종당하고 있는 거야.”
호디의 발톱 공격을 막아 내고 있던 장왕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SSS급이 되긴 했지만, 역시 인간의 힘으로 신을 상대하는 것은 확실히 버거운 일이었다.
“오래 못 버텨. 헤니르 님! 이 녀석, 제정신으로 돌릴 방법은 없습니까?”
장왕윤의 목소리에 헤니르가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한 가지 있긴 하네만…….”
“그게 뭡니까! 어서 알려 주십시오. 저도 오래 못 버팁니……. 으악!”
장왕윤이 호디의 다음 공격을 방어하지 못하고 뒤쪽으로 날아갔다.
“장왕윤!”
이정은이 빠르게 장왕윤이 파묻힌 눈 속으로 날아갔다.
성녀가 하늘에서 전투 중인 백설과 토르를 한번 눈에 담고는 헤니르에게 시선을 옮겼다.
“백설이도 점점 밀리고 있어요. 이 상황에서 20명이 넘는 저 신들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더군다나…… 호디까지 저렇게 되었으니…….”
“호디는 구할 수 있어. 단지 호디를 조종하고 있는 저 다누라는 신을 죽여야 하지만…….”
“저렇게 많은 신을 뚫고 저 녀석을…… 대체 어떻게 죽이라는 말입니까……?”
다누의 주위로 모든 신이 방어진을 만들었다.
쉽게 뚫을 수 없었다.
아니, 지금의 인원들로는 다누는 고사하고 주위를 방어하고 있는 신들조차 죽일 수 없었다.
“젠장…….”
입술을 깨물고 있는 성녀의 귀로 큰 목소리가 들렸다.
“우선 방어조를 제외한 5명의 제1 공격조 인간들과 헤니르의 목을 가져오세요.”
다누의 목소리가 울리고.
제각각의 모습을 한 신들이 헤니르와 성녀가 있는 곳으로 빠르게 공격을 개시했다.
‘죽는다.’
적의 힘을 제대로 가늠하지는 못했지만, 지금까지의 싸움으로 성녀는 알 수 있었다.
아무리 헤니르 님이 있다고 해도…….
물량으로 밀어붙이는 신들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젠장…….’
성녀의 눈이 감겼다.
.
.
.
“으악!!”
“윽!”
“끄아악!!”
비명이 들렸다.
곧장 들리는 비명. 방향으로 보았을 때 자신을 향해 날아들던 신들의 비명이었다.
성녀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그리고.
“너무 쉽게 포기하지 마라, 인간. 우리에겐 아직 많은 동료들이 있잖아.”
헤니르의 밝은 목소리 뒤로 늠름한 뒷모습들이 시야에 가득 차 있었다.
“늦어서 미안하다.”
그 어느 때보다 듬직한 한재석의 목소리가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