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급 에스퍼의 수면제가 되었다 1권
목차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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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입을 틀어막는 거대한 육봉에 숨을 쉴 수 없다. 어떻게든 코로 공기를 들이마시려고 했지만 사타구니 털들이 콧구멍을 간지럽히며 방해했다.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살려달라는 비명은 목구멍을 점령한 사내에 의해 말살되고, 아인의 질척한 구멍에 좆이 처박힌다.
“으으으읍. 으읍.”
잘못했다고 살려달라고 아무리 이제 와 용서를 구하려고 해도, 아인을 윤간하고 있는 알파들의 우두머리 알렉세이는 짓밟히는 그의 모습을 보며 비웃을 뿐이다.
알파들이 뿜어내는 지독한 페로몬이 짜증 난다는 듯 알렉세이가 은회색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올린다. 그의 시선은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 도움을 요청하는 아인을 조금도 담지 않는다.
퍽퍽, 퍽퍽. 볼기짝을 두들기는 듯한 매타작 소리가 계속된다. 좆질을 하던 알파는 돌연 구멍에서 좆을 꺼냈다.
하얀 엉덩이에 걸레 남창이라고 쓰인 글자들이 드러났다. 뾰족한 만년필로 살갗을 찌른 뒤 검은 잉크를 주입해 색소 침착하여 새긴 그것은 치유 능력을 가진 에스퍼에게 치료받지 않는 한, 영원히 회복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유르한 제국의 에스퍼 중 유일하게 치유 능력을 가진 에스퍼는 알렉세이의 충실한 심복이니, 아인이 아무리 백작 직위가 있는 귀족이라 할지라도 그의 도움을 얻을 순 없을 터다.
아인은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 우성 오메가로 태어난 아인은 S급 가이드로 발현하였다. 당연히 어려서부터 우성 알파이자 S급 에스퍼인 알렉세이의 짝이 될 거라고 믿었다. 자신은 그의 유일무이한 반려였다.
그러나 알렉세이는 그에게 집착을 보이는 아인을 혐오하다 못해 그가 싫다는 이유만으로 C급 가이드 따위와 각인해버렸다.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네 짝은 나라고, 알렉세이를 정신 차리게 해주고 싶었다. 유르한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우성 오메가를 내버려 두고 열성 오메가이자 천한 평민인 제이콥을 사랑한다고?
자신을 골탕 먹이기 위한 괴롭힘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인은 힘 좋은 알파들을 사서 제이콥을 강간하려고 했다. 그러나 알렉세이에게 계획을 들켰다. 그 결과 제이콥은 혼내주지도 못하고 도리어 아인이 이렇게 역공을 당하게 되었다.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바닥에 무너져 내렸다. 아인의 입에서 좆이 빠져나갔다. 거미줄과 같은 투명한 침이 은사처럼 길게 늘어지다가 끊겼다. 아인은 콜록콜록 숨을 급히 내쉬며 도망치려고 했으나 날개뼈에 올라온 묵직한 발에 짓밟혔다.
“으으으으으.”
“야, 궁금하지 않냐? 알파 둘이 동시에 노팅하면 과연 누구 아이를 임신하게 될지.”
“킥킥. 당연히 내 애지. 내 정액이 더 세.”
“미친. 내기해볼래?”
아인이 고개를 저으며 거부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알렉세이.”
피를 토하는 듯한 절규였다. 알렉세이가 얼음처럼 차가운 은회색 눈으로 그런 아인을 내려다봤다. 그의 눈은 더러운 벌레를 보듯 아인에 대한 경멸을 뿜어냈다. 아무런 감정 없는 인형처럼 아인을 보던 알렉세이가 입꼬리만 올린 채 차갑게 웃었다.
“잘 어울리네. 이안 백작.”
아인은 그제야 알아차렸다. 그가 진정으로 제이콥을 사랑해 각인한 것이었음을. 그는 수년간 가이딩을 해준 아인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다.
S급 에스퍼인 알렉세이의 폭주를 막기 위해 아무리 아인이 그의 좆을 받아냈어도, 그건 가이딩이었을 뿐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행위였던 것이다.
“아아아악.”
부우욱, 구멍을 칼로 찢는 듯한 소리가 났다. 두 개의 페니스가 하나의 구멍에 들어왔다. 아인이 숨을 쉴 수 없어 꺽꺽 숨넘어가는 소리만 내는데 알파들이 사정을 하기 시작했다. 두 명분이나 되는 정액이 자궁을 터트릴 듯 가득 차올랐다.
“안 돼. 안 돼! 아아아악.”
노팅이었다. 고통으로 대리석 바닥을 긁던 손톱이 뒤집혀 뽑혀 나갔다. 열 가닥의 핏자국이 바닥에 선명하게 그어졌다.
아인 페르디안. 20세. 우성 오메가이자 S급 가이드였던 그의 생은 이렇게 끔찍하게 끝을 맺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렉세이는 끝까지 마음에 안 들게 바닥을 더럽히고 죽은 아인의 존재가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치워.”
그의 한마디에 시종장은 시종을 시켜 짐짝처럼 시체를 들고 나가게 했다. 화가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의 피조물이라 칭송했던 이는 그렇게 황실에서 버려진 비운의 황태자, 알렉세이 델리칸 공작 가문의 쓰레기 소각장에서 불태워졌다.
***
“미친. 이, 이걸 나보고 그리라고?”
아인은 소설을 읽다가 역겨워 헛구역질을 했다. 하필 끔살당하는 악역수와 이름이 같아서 더 불길하고 재수 없게 느껴졌다. 이런 개쓰레기 같은 내용이 베스트 셀러라니 믿기지 않았다. 도대체 BL 독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살기에 이런 걸 읽는지 모르겠다.
이번에 아인이 웹툰 작업을 하게 된 <집착광공은 능욕을 멈춰!>는 인터넷 누적 조회수 160만을 기록하는 히트작이었다. 전혀 동의할 수 없는 사실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엄청난 하드코어 장면만 나오는 19금 소설이었다. 소설 후반부에서는 아인이 그렇게 죽고 나자 가이딩을 제대로 못 받은 알렉세이가 미쳐서 제이콥을 감금하고 계속 가이딩 받는답시고 강간하는 장면이 나왔다.
충격적이게도 그 결말이 해피엔딩이란다. 전혀 이해 못 할 전개였다. 어떻게 자길 강간한 새끼를 사랑할 수 있지? 제이콥은 또 은근 M이라 그 상황을 즐겼다.
남자가 남자랑 붙어먹는 것도 용납할 수 없건만 내용이 워낙 쓰레기 같아서 도저히 작업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인도 이런 BL 소설 따위를 웹툰으로 그리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아인의 작품은 데뷔 때부터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 망하기만 했다.
오죽하면 독자들 사이에서 글 작가를 두고 그림만 그리라는 말이 나올까. 그런 아인이 보기에도 <집착광공은 능욕을 멈춰!>는 엄청난 괴작인데, 이게 무려 올 상반기에 가장 많이 팔린 연재작이란다.
정말이지 이 세상을 알 수 없었다. 아인은 제가 연재하는 사이트에 접속해 독자들이 제 웹툰에 뭐라고 코멘트를 달아놓았는지 봤다.
고양시고양이: 노잼.
제주도유배: 하차. 그림 예뻐서 여태 봤는데 너무 지루하다.
파테크: 작가님, 세상은 이런 걸 재능 낭비라고 해요.
스파게티맨: 환경오염으로 아스트랄 결계가 붕괴해 차원이 열리면 다차원과 현실이 연결된다는 설정이었는데, 왜 주피터가 녹음의 심장으로 지구를 회생시켰는데 계속 프레데터들이 넘어오나요? 설정 미스인 거 같은데요? 하아, 그동안 의리로 봤는데 이제 하차할 때가 온 것 같다.
젠장. 이럴 땐 진짜 다 때려치우고 싶었다. 웹툰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자기가 전문가인 척 까면서 하차한다는 새끼들이 제일 꼴불견이었다. 아인은 아이디 ‘지구용사’로 접속해 제 웹툰에 딴지를 건 댓글에 대댓글을 달았다.
지구용사: 전 화에서 주피터가 녹음의 심장으로 지구 회생 못 시키고 끝났어요. 녹음의 심장 파괴되었어요.
댓글을 달자마자 보는 사람도 얼마 없는 작품에 댓글이 달렸다.
창조신: 지구용사님, 저희 세계를 도와주세요.
아이디를 바꾸기라도 해야지, 계속 이 드립이 달렸다. 창조신이라는 새끼도 너무했다. 자신이 댓글만 남기면 따라다니며 이 지랄을 떨었다.
대꾸하지 않으려고 했다가 BL 소설의 웹툰을 그리게 된 제 처지가 짜증 나 마구 욕설을 써 내려갔다.
광광 작가한테는 미안하지만 진짜 토 나와서 못 그릴 것 같았다. 굳이 인기 없는 자신을 꼭 집어서 웹툰 작가로 쓰겠다고 했다는데 전혀 고맙지 않았다.
아인은 열심히 창조신에게 욕을 썼다가 내용을 몽땅 지우고 새롭게 글을 적었다. 자신의 처지는 처지이고 전혀 상관없는 다른 사람한테 화풀이하려니 마음이 안 좋았던 것이다.
지구용사: 창조신 님 저 따라다니며 댓글 남기지 마세요.
그러자 바로 댓글이 달렸다.
창조신: 죄송해요. 워낙 다급해서. 지구용사 님이 오신다면 제가 시간을 되돌려볼게요. 어떻게 안 될까요?
제대로 미친 새끼였다. 아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핸드폰을 꺼버렸다. 배가 고파 싱크대 상부장을 뒤졌다. 라면 한 개 정도는 남은 줄 알았는데 바퀴벌레 한 마리만 있었다. 씨발.
억울해 죽겠다. 비싼 돈 주고 글 작가님 모셔다가 그림을 그렸는데 이번 작품도 망해버렸다. 담당 편집자한테 이만 작품 마무리하라는 소리를 들으며 어제 삼겹살에 소주를 얻어먹었다.
그런데 뱃가죽이 등에 붙은 자신은 작품 망해서 내리는 주제에 오랜만에 삼겹살 먹어서 기뻤다. 그만큼 생활고에 찌든 주제에 19금 BL이라며 거절할 생각을 하고 앉아 있으니, 아주 굶어 죽어야 정신 차리지 싶다.
아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초라한 원룸을 둘러봤다. 냉장고 문을 열어봤자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 정말 돈 한 푼 없었다.
나일론 머스크가 짹짹이에 핫도그코인 뜬다며 설치지만 않았어도 일러 외주 뛰는 자신이 이 정도까지 몰리지 않았을 것이다. 대출까지 땡겨서 전 재산 몰빵했는데 나일론 머스크만 돈 벌고, 그를 믿고 코인 산 개미들은 다 죽었다.
분통이 터지고 자다가도 열 뻗쳐서 미국으로 달려가 나일론 새끼 멱을 따고 싶지만, 세계적인 부호를 죽일 방도가 없으니 이렇게 신림동 원룸에 있을 수밖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핸드폰에서 빛이 번쩍 나왔다. 뭔가 싶어서 확인하니 웹툰에 새로운 댓글이 달려 있었다.
창조신: 배고프세요?
뭐야? 어떻게 안 거지? 우연…이겠지?
창조신: 지구용사 님이 오신다면 매 끼니 최고의 만찬을 드실 수 있는 몸에 넣어드릴게요.
보통 또라이가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이건 당장 정신병원에 처넣어야 할 정도로 심각했다. 계속 상종하다가 이상한 일에 엮일까 봐 핸드폰에서 시선을 뗐다.
배가 고픈데 수중에는 돈이 없어서 어떻게 하나 좁은 원룸 안만 훑었다. 혹시 지금 종로에 가면 무료급식소에서 뭐라도 얻어먹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아침 일찍 탑골공원에 가면 노인과 노숙인들을 위해 복지 단체와 종교 단체가 도시락을 나눠주곤 했다.
아인은 원룸을 나왔다. 교통비가 없어서 종로까지 1시간 걸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무료 급식소 앞에 줄을 서서 도시락을 받고 있었다. 다행히 노인들은 아인의 몰골을 보고 젊은 놈 꺼지라는 소리를 안 했다. 지금 자신의 꼴이 딱 봐도 노숙인처럼 생겼나 보다.
아인은 꼬르륵거리는 배를 움켜잡고 무료 도시락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하고 도시락 먹을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탑골공원은 이미 선배님들이 꽉 잡고 있는 장소여서 접근하지 못하고, 다른 장소를 찾아야 했다. 아인은 사거리에서 신호등이 파란불이 되는 걸 보고 횡단 보도를 건넜다.
씨발. 운도 지지리 없지. 아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도시락이 손에서 떠나 공중에서 포물선을 그렸다. 자신의 몸은 아스팔트 위를 데굴데굴 구르다가 멈췄다.
자신을 친 자동차는 잠깐 멈추는 듯싶더니 꽁무니가 안 보일 만큼 빠르게 도망쳤다. 눈앞이 붉었다. 더 이상 배가 고프지 않았다. 아프다. 아파. 아파서 죽겠다. 아니, 지금 죽어가고 있으니 ‘죽겠다’가 아니라 ‘죽는다’인가?
아인의 입에서 마지막 숨결이 빠져나갔다. 원룸 침대 위에 올려두고 온 핸드폰이 반짝 빛을 내며 켜졌다. 웹툰에 댓글이 달렸다.
창조신: 감사합니다. 지구용사 님, 저희 세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
“배고파.”
“어머, 우리 아기. 배고프니?”
아인은 누가 서른 살이나 먹은 자신을 아기라고 부르나 싶어 눈을 떴다. 그러자 금발의 아름다운 미녀가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 아기라고 부르다가 여보 되는 건 순식간이지.
그녀의 아름다움에 넋이 나가서 멍하니 바라보는데 몸이 붕 떴다. 아니, 그렇게 안 봤는데 힘이 장사이신가 보네.
금발 미녀 무릎에 앉혀졌다. 뭔가 심하게 이상해서 제 손을 봤다. …꿈. 꿈인가 보다. 그래, 교통비 없어서 1시간이나 걸어 힘들게 도시락 받아놓고 죽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하지. 빨리 깨어나서 출판사에 웹툰 그리겠다고 하자. 사람이 돈이 중요하지, 무엇이 중요하겠어. 할 수 있어. 할 수 있을 거야! 게이 섹스 그리기!
꿈에서 깨어나기 위해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지만 더욱 정신만 명료해졌다. 침대 주위에 세기말 왕자병 환자를 위해 주렁주렁 매달은 듯한 레이스 휘장이 걷히고, 검은 머리 사내가 등장했다.
“레이나.”
레이나? 금발이니까 당연히 외국 이름이겠지. 그런데 왜 자신이 알아듣는 거지? 아! 그래, 꿈꾸는 중이었지?
다시 한번 꿈에서 깨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검은 머리의 사내가 그런 아인의 뺨을 쓰다듬었다.
“아가. 일어났니?”
“….”
누구신데 저한테 아가라고 하세요? 소오름.
아인은 금발 미녀의 품에 안겨서 부르르 떨었다.
“어머, 우리 아기 아직도 아프니? 여보, 주치의 선생님 좀 불러주세요.”
졸지에 병자 취급 받으며 침대에 눕혀졌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되지 않아서 아인은 멀뚱멀뚱 눈만 동그랗게 떴다.
“어쩜 내 아들이지만 이렇게 천사같이 예쁠 수 있을까. 이러니 우리 아인이가 우성 오메가로 발현하지.”
‘아들이라고? 내가?’
금발 미녀가 하는 말에 아인은 제 귓구멍에 치명적인 결함이 생겼음을 깨달았다. 우성 오메가라니? 그건 광광 작가가 쓴 <집착광공은 능욕을 멈춰!>에서 본 BL 용어였다.
불길함이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주치의라고 온 초록 머리를 보고 너무 놀라 혀를 깨물었다. 실제 사람이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머리카락 색이었다.
염색을 했을 수도 있겠지만, 염색으로는 속눈썹까지 녹색으로 물들일 순 없었다. 거기다가 주치의 선생이라는 자, 귀가 판타지 영화에서 본 엘프처럼 뾰족했다.
“아인, 어디 불편해요?”
“….”
이불 안에서 손을 꼼지락거렸다.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봐도 어린아이 손이었다. 정말로 자신이 이들의 아이가 된 것일까. 뭐라고 질문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레이나, 아인은 단순히 배가 고픈 거라고요. 이런 일로 저 좀 부르지 마세요. 이제 발현열 다 내려서 멀쩡하다니까. 도대체 몇 번을 말해.”
엘프가 투덜거리면서 침실을 나갔다. 레이나가 시종을 불러 어서 식사를 가져오라고 했다. 곧이어 이동식 트레이에 따뜻한 음식이 담겨 왔다. 레이나가 직접 수저로 수프를 떠서 자신에게 먹이려고 했다.
아인은 금발 미녀가 드는 수발에 기뻐하며 입을 벌려서 받아먹었다. 검은 사내도 침대에 올라와 자신한테 달라붙어 음식 시중을 들려고 했다. 남자한테 받아먹으려니 부담스러워서 얼굴을 돌려 피했다.
그가 슬퍼하는 척해 아인은 슬쩍 입을 벌렸다. 남자가 잽싸게 삶은 완두콩을 입에 밀어 넣었다.
“우리 아인이 편식 안 하는 거 보니까 이제 형아네.”
아인은 자신을 아기 취급하는 부모님의 행동에 제 나이가 무척 어린가 보구나 싶었다. 네 살? 다섯 살? 그쯤 되려나?
식사 시중을 다 받고, 땀에 젖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어린 시종을 따라 드레스 룸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전신 거울에 예상보다 훨씬 큰 금발 아이가 보였다.
금발과 금안. 그리고 레이나라는 이름의 어머니. 왜 바로 떠올리지 못했을까. 그 아인 페르디안이잖아!
아무래도 자신이 광광 작가를 변태라고 너무 욕해서 벌 받은 것 같았다. 이 일을 어쩌나 싶었다.
이러다가 개호로 잡놈 새끼의 가이드가 되어 뒤를 개통 당하고 사랑에 빠지려나? (절대 그런 일 없을 테지만) 질투에 미친 나머지 악역수 노릇 하다가 돌림빵 당해서 죽고?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 버렸다. 다행히 아직까지 집착광공 알렉세이와의 접점이 없었다. 자신만 조심하면 데드 플래그를 피할 수 있었다.
원작 소설을 독파한 자신은 미래를 아는 예언자처럼 무척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아인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상황을 냉정하게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일단 백작 부인 레이나가 사고로 죽지 않은 시점이니 아직 희망이 있었다. 아인은 어린 시종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고 놀이방으로 안내받았다. 그곳에는 귀여운 동물 인형과 동화책, 나무로 만든 블록들이 있었다.
적당히 가지고 노는 척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왜 자신이 이딴 능욕물 하드코어 BL 소설의 악역수에 빙의했는지 모르겠지만, 살길을 찾아야 했다. 지금으로서 제일 중요한 건 레이나를 죽지 않게 하는 거였다.
샤를 백작은 아내를 몹시 사랑하는 사내였다. 그래서 레이나가 죽고 완전히 아들과 척을 지게 된다.
소설에서 악역수는 생일날, 선물이 마음에 안 든다면서 난동을 피운다. 레이나는 그 일을 마음에 걸려 해 생일 파티가 끝나자마자 보석 상점에 들러 아들의 선물을 다시 산다. 그런데 가게 문을 열고 나오는 그녀를 강도가 죽인다.
호위로 두 명의 기사를 데리고 있었음에도 그런 일을 당하게 된 것이다. 역시나 개연성 노답인 소설다운 전개랄까?
이에 샤를은 악역수 때문에 레이나가 죽었다고 생각해 자상한 아버지의 탈을 벗어던진다. 아역수는 어릴 때부터 성질이 보통이 아니었는지 아버지의 냉대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는 샤를을 아동 학대로 신고해 직위를 빼앗아 자기가 차지한다. 물론 무능한 악역수는 백작 가의 엄청난 재산을 지키지 못한다.
시종과 시녀들은 어린 주인을 무시해 집에 있는 돈 되는 물건들을 죄다 훔쳐 가고, 백작가의 재산을 빼돌려 악역수는 빈털터리가 되고 만다.
반면 샤를은 조그마한 자본금으로 사업을 시작한 뒤, 어마어마하게 성공해 부자가 된다. 악역수가 아버지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지만 그는 모멸을 주며 내쫓는다. 두 부자 사이는 절대 회복 불가능한 지경으로 치닫는다.
아인은 토끼 인형에게 당근 인형을 먹이는 척하다가 슬쩍 어린 시종 눈치를 보며 혼잣말을 했다. 처음 해보는 연기에 수치심으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빨리 생일 선물 받고 싶다~.”
“도련님. 생일이 그렇게 기대되세요? 후후. 레이나 님께서 얼마나 힘쓰셨는지 몰라요. 내일 기대하셔도 좋아요.”
식겁했다. 하마터면 빙의 시점이 조금만 늦었어도 헬게이트행 열차에 탑승할 뻔했다. 소설에서 악역수는 생일을 기점으로 인생이 구렁텅이에 처박힌다. 성인이 된 후에는 돈을 벌기 위해 알파들에게 몸을 팔며 남창 짓을 하러 다녔다고 나와 있었다.
알렉세이도 그렇게 해서 만나게 된 존재였다.
아인은 이왕 부잣집 아들놈 몸에 빙의한 김에 평안하고 무탈하고 평범한 삶을 살고 싶었다. 소소하게 그림이나 그리면서 삼시세끼만 먹을 수 있으면 만족이었다. 그러려면 일단 레이나를 구해야 했다. 그건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다.
재미없는 인형 놀이를 하다가 문득 의문이 생겼다. 보통 자식이 이 정도 나이가 되면 귀족 가문에서는 과외선생을 불러 교육을 받게 하지 않는가 하는.
그러다가 어린 시절의 악역수가 대단한 사회 부적응자여서 레이나가 안 불렀다는 대목을 떠올렸다. 아인은 동화책을 펼치고 혹시 자신이 글을 읽을 수 있나 확인해봤다.
역시나 전혀 못 읽겠다. 어린 시종에게 동화책을 읽어달라고 했다. 소년은 익숙하다는 듯 다가와서 동화책을 낭독했다.
“옛날 옛날에 창조신께서 세상을 만드셨어요. 첫째 날에 땅아, 있으라, 하니 땅이 생기고 둘째 날에 하늘아, 있으라, 하니 하늘이 생겼어요.”
아인은 이곳의 동화가 현실에 있는 성경 이야기와 비슷해 신기했다. 물론 그렇다고 노잼 동화책이 갑자기 재미있게 느껴지는 건 아니었다.
어린 시종에게서 관심을 끄고 나무 블록을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어린 시종이 그럴 줄 알았다는 양 몰래 웃었다.
‘야, 너 나 비웃었냐? 내 머리가 나쁜 줄 아나 본데? 아니거든? 이래 봬도 인서울 4년제 나왔다고.’
***
다음 날, 아침 해가 떴다. 원래대로라면 성질 더러운 아들놈의 새끼 때문에 레이나가 강도를 만나서 죽을 테지만, 자신이 악역수에게 빙의해 있는 한 그럴 일은 없었다.
아침 식사 후, 목욕을 하고 시녀들에게 둘러싸여 온갖 꾸밈을 받았다. 그녀들은 어린 악역수의 얼굴을 하얗게 분칠하고, 입술에 붉은 걸 찍어 발랐다.
머리카락에 보석을 매다는 등 ‘코디가 안티’ 짓을 했다. 또한 역겨운 레이스와 리본이 덕지덕지 붙은 블라우스를 자신에게 입히려고 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아인은 빡빡 우겨서 진줏빛의 고급스러운 실크 셔츠와 보라색 벨벳 바지로 합의를 봤다. 그러자 다들 포악한 악역수의 지랄에 욕이 터져 나올 것만 같은지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 거칠게 콧김을 뿜어댔다.
“도련님, 너무 아름다우세요.”
다들 먹고 살기 힘든가 보다. 고용주 아들 비위를 맞추기 위해 없는 말도 지어내려니 얼마나 세상이 엿 같을까.
언제나 을이었던 아인은 그들의 마음이 십분 이해되었다. 어쨌든 세수를 해 짙은 화장을 지워내고 원래 제 나이에 맞는 얼굴을 되찾았다.
어린 시종을 따라 파티장으로 향했다. 이미 아인 페르디안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많은 귀족들과 그들의 자제들이 와 있었다. 역시나 레이나의 미모는 눈부실 만큼 아름다웠다.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과장된 레이스와 어깨 뽕으로 안구 테러를 가했지만,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란 말대로 패션 테러를 저지르고도 요정처럼 청초했다.
그야말로 대단한 미모였다. 그녀와 결혼한 샤를 백작이 부러워 어디에 있나 찾아봤다. 그가 자신을 번쩍 안아 들고 뺨에 입맞춤했다. 악! 어딜! 얼른 뺨에 묻은 침을 손으로 문질러 닦아냈다.
“아인아, 생일 축하한다.”
“생일 축하합니다. 아인 공자!”
페르디안 가문의 가주인 샤를이 말을 꺼내자 게스트들이 일제히 손에 잔을 들고 외쳤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생일 파티가 시작되었다.
5단짜리 케이크 위에 초 10개가 꽂혀 있었다. 빙의한 악역수의 나이가 드디어 밝혀졌다. 아인은 시종장의 도움으로 공중에 들려 케이크의 촛불을 후 불어서 껐다.
다들 아주 대단한 일을 해낸 것처럼 박수를 쳤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라 부모도 못 알아보고, 개망나니 짓을 하다가 핵폐기물한테 반해서 데드 플래그 꽂히는 거지 싶었다.
절대 사람들의 칭찬과 감언이설에 속지 않기로 다짐했다. 아무튼 이딴 감상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미래의 자라나는 악역수를 위해 생일 선물을 줬다.
시종장이 선물 목록을 작성하며 시종들에게 선물 나르는 작업을 시켰다. 생일 파티 주인공인 아인은 얼굴 모를 게스트들과 일일이 악수하며 고맙다고 인사했다. 악역수와 정반대로 인성 바르고 착하게 살아 최대한 소설 내용과 달라지길 노리는 중이었다.
레이나가 마지막으로 그 문제의 선물을 건넸다. 포장지를 보자마자 범상치 않은 불길함을 느꼈다. 보통 엄마들은 10살짜리 남자아이한테 토끼 문양이 그려진 분홍색 포장지로 싼 생일 선물을 주는 걸까?
이건 솔직히 가출각이었다. 악역수가 왜 그렇게 삐뚤게 자랐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여기서 자신이 싫다고 거부하는 순간, 이 아름다운 금발 미녀가 집을 뛰쳐나가 보석 상점 앞에서 강도에게 살해당할 테지. 아인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파르르 떨리는 볼 근육은 ‘넌 웃고 싶지 않잖아!’ 하며 항명하였으나 어찌 됐든 무지 기쁜 척하며 포장지를 뜯었다.
“어?”
떨리는 손으로 상자 안에서 스케치북과 색연필을 꺼냈다. 레이나가 잔뜩 기대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봤다.
“너무 좋아요. 엄마, 감사합니다!”
“어머! 우리 아기가 어쩐 일로 엄마라고 불러줄까. 엄마도 아인이가 좋아해서 행복하단다.”
진심으로 마음에 드는 선물이었다. 악역수가 왜 깽판 쳤는지는 이해되지만, 아인에게는 그 무엇보다 귀중한 생일 선물이었다. 당장 그림을 그려보고 싶었다.
과연 타인의 몸으로도 예전처럼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 아직 덜 여문 손끝으로도 예전의 실력이 나올지 궁금했다. 얼른 스케치북을 펼치고 금색 색연필을 집어 들었다.
레이나의 얼굴을 보고 스케치북에 쓱쓱 빠르게 크로키했다. 뒤질랜드표 백설공주처럼 어깨 뽕이 대단한 분홍색 드레스는 분홍색 색연필로 그렸다. 초상화가 점점 완성되어 가자 자신의 주변에 모인 귀족들한테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맙소사! 천재 미갈리노가 환생한 게 아닐까.”
“충격적일 정도로 섬세한 연출법이야. 마치 백작 부인이 그림 속에 들어간 것 같아.”
“이건 도저히 10살짜리 아이의 실력이 아니야.”
“페르디안 가문에서 천재 화가가 탄생한 역사적인 순간을 직접 목격하게 될 줄이야.”
다들 권력과 돈에 환장해서 듣도 보도 못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얼른 귓구멍에 들어온 칭찬을 반대쪽으로 흘려보냈다.
물론 10살짜리 아이라고 보기엔 놀라운 실력이긴 한데, 그건 안에 들어간 영혼이 웹툰 경력만 10년인 베테랑 그림 기계이기 때문이었다. 분명 어른이 되어서는 ‘둔재’로 강등당해 ‘영재가 어떻게 저렇게 평범해졌을까’ 하며 뒷말을 들을 게 틀림없었다.
20살에 운 좋게 등단한 이후, 아무리 발버둥 쳐도 무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나마 그림 퀄이 좋아 일러 외주 뛰며 먹고 살았지, 아니었으면 진작 굶어 죽었을 것이다. 하늘이 아인에게 천재적인 재능 말고 노력하는 재능만 준 탓이었다.
“엄마, 생일 선물에 대한 제 감사 선물이에요.”
스케치북을 북 찢어서 레이나에게 줬다.
“흑흑흑. 아인아. 우리 아들, 훌쩍, 엄마가 그동안 우리 아기 재능을 알아보지 못해서 미안해.”
“아인아, 네가 너무 자랑스럽구나. 언제 이렇게 그림 실력을 갈고닦은 거니?”
샤를이 자신을 번쩍 들어 올려 뺨을 비볐다.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그렇지만 앞으로 돈 많은 아빠가 되어줄 이였기에 예쁨받고자 자본주의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늘 처음 그려본 거예요. 아빠. 부족한 실력인데 이렇게 과분한 칭찬을 해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부디 제가 겸손함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시겠어요?”
“아… 아인아.”
왜 감동받은 것 같지? 원래 악역수의 성격이 워낙 더러웠어서 그런가? 어린 시절 이야기는 자세히 나와 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악역수의 성깔은 대략 예상되었기에 부모님이 갑자기 아이의 성격이 바뀌었다고 느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걸 어떻게 변명하나 고민하다가 그냥 샤를의 목에 팔을 둘러 그를 끌어안았다. 일관적으로 행동하다 보면 그들 나름대로 이유를 생각해 내 끼워 맞추겠지. 뭐, 안 그러면 어쩔 것인가. 귀신 들렸다고 엑소시스트 신부 불러서 퇴마할 것도 아니고.
“아빠, 이제 내려주시겠어요? 제가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였더니 몹시 배가 고파서요.”
“어… 어. 그래. 얼른 식사하렴.”
아인은 샤를의 품에서 내려와 음식이 놓여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또래로 보이는 남자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정신 사납게 말을 걸었다. 꼴에 귀족이라고 향수를 들이부었는지 냄새가 지독했다.
“아인아, 안녕. 나는 노엘 라이틀리야.”
“안녕, 노엘.”
“아인아, 내 이름은 제나드 체이서야.”
“안녕, 제나드.”
냄새 때문에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인사를 걸면 꼬박꼬박 받아주고, 이름도 말해줬다.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만족스러워했다.
“아인아, 이것 봐. 네가 좋아하는 푸딩이야!”
“고마워.”
푸딩을 좋아한 적 없는데 원래 몸 주인의 취향인 듯해서 파란 머리한테서 받았다.
“그동안 네가 사교 활동도 전혀 안 하고, 생일 파티 때마다 백작 부인 뒤에 숨어 있어서 너무 궁금했어. 이렇게 너와 대화하게 돼서 기뻐.”
빨간 머리가 한 말에 의외다 싶었다. 분명 악역수라면 어린 시절에도 온갖 민폐를 끼치고 패악을 부리며 다닐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레이나가 아들을 이상할 정도로 아기 취급했던 이유가 이런 거였다니.
악역수가 어렸을 때,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해 가정교사를 못 불렀다는 소설 내용이 새롭게 다가왔다. 정말 예상 밖이었다. 사람 편견이 이렇게 무섭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빨간 머리와 파란 머리는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하는 소심한 아이가 불쌍했는지 자신의 껌딱지처럼 굴었다. 아인이 어딜 가든 졸졸 뒤를 쫓았다.
끊임없이 수다를 떠는 아이들에게 적당히 “응, 그렇구나. 와! 정말?” 같은 영혼 없는 추임새를 넣으며 칠면조 고기 한 조각을 잘라 입에 넣었다.
달짝지근한 마멀레이드 잼으로 껍질을 윤기 나게 코팅하고, 로즈마리와 타임과 같은 각종 허브를 뿌려 한국인 입맛에 전혀 맞지 않는 음식이었다. 조용히 다른 메뉴에 도전했다.
이번에 먹은 음식은 토마토소스에 해산물을 넣고 끊인 수프였다. 이건 제법 맛있어서 빵과 함께 다 먹었다. 접시를 들고 또 음식을 받기 위해 의자에서 일어났다.
“왜? 어디 가?”
“더 먹으려고.”
“내가 떠줄게. 뭐 가져다줄까?”
빨간 머리 노엘이 시종 노릇을 하겠다고 나섰다. 그러자 파란 머리 제나드가 주먹을 불끈 쥐고 “아니, 아인은 내가 떠주는 걸 더 좋아할걸?” 하며 괜한 시비를 걸었다.
둘이 갑자기 치고받고 싸우기 시작했다. 조용히 다른 테이블로 이동해서 튀김류를 접시에 담아서 먹었다. 어른들은 주먹다짐하는 아이들을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두 아이는 서로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며 난리였다.
“놔! 아인이는 내 친구야!”
“웃기시네. 아인이는 내 친구야!”
“너 이러다가 아인이가 네 오메가라고 우기겠어?”
“오! 잘 아네. 아인이는 내 오메가야!”
“웃기지 마! 너 오늘 처음 대화해봤잖아!”
“너도 오늘 처음 대화했잖아!”
소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식사를 마친 아인은 이만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과연 초딩이어서 그런지 말싸움하는 수준이 끝내줬다. 밥도 다 먹고, 선물도 받았으니 이만 방에 돌아가 그림이나 그려야겠다 싶었는데 갑자기 몸이 붕 떠올랐다.
사람들의 관심이 PK 뜨는 초딩들한테 온통 쏠린 틈을 타 모르는 남자가 자신을 데리고 어디론가 갔다.
“아저씨 누구세요?”
“….”
불안해서 뒤를 돌아봤다. 얼마나 발이 빠른지 벌써 파티장에서 떨어져나와 인적 드문 복도에 와 있었다. 퍽.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로 강한 충격이 머리에 가해졌다. 눈앞이 순간적으로 뿌예졌다. 원래 강도에게 죽었어야 할 레이나의 운명을 뒤틀어서일까?
남자가 바닥에 쓰러진 자신의 발목을 잡아 질질 끌며 빈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죽을힘을 다해 외쳤다.
“살려주세요!”
황금빛 샴페인처럼 영롱한 샹들리에가 불을 밝히고, 비싼 양복과 드레스를 입은 귀족들이 오르골 속 인형처럼 춤을 추는 파티장이 바로 앞에 있는데 어둠 속으로 작은 몸이 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손톱으로 바닥을 박박 긁으며 버텼다. 얻어맞은 뒤통수가 아프고 무서웠다.
“아악. 살려줘! 싫어!”
발을 버둥거리며 사내를 발로 찼다. 방심한 사내가 발목을 놓쳤다. 벌떡 일어나 미친 듯이 뛰었다. 긴 머리채가 밧줄처럼 붙잡혀 쿠당, 큰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온몸이 아팠다.
“엄마! 아빠!”
비록 악역수의 부모이지만 그들을 진짜 부모님인 양 애타게 불렀다. 기적처럼 샤를이 생일 파티가 열리는 연회장 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다. 눈물범벅이 된 아인을 발견한 샤를이 주먹으로 사내의 얼굴을 가격했다.
“죽어! 죽어!”
샤를에게서 무서운 냄새가 났다. 냄새가 무서울 수도 있나 싶은데 진짜 그렇게밖에 표현할 말이 없었다. 샤를이 사내의 이목구비를 곤죽으로 만들고 손가락을 하나하나 부러트렸다. 사내의 비명에 연회장에서 흘러나오던 연주가 멈췄다.
귀족들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복도를 내다봤다. 그들은 엉망진창으로 다친 아인을 발견하고는 헉, 숨을 들이마셨다. 노엘과 제나드가 가까이 다가오려고 했지만, 아인은 몸을 웅크리고 모른 척했다.
샤를이 사내의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며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레이나가 아인을 안아 들었다. 복도 바닥을 굴러다니면서 더러워진 자신을 씻기기 위해 그녀가 방에 딸린 욕실에 데려갔다. 욕조에 따뜻한 물을 가득 받아 그 안에 자신을 담갔다.
“아가, 많이 놀랐지? 괜찮아. 앞으로는 절대 엄마 아빠가 우리 아인이한테서 눈 떼지 않을게.”
레이나가 아인을 달래다가 욕조 틀을 두 손을 꼭 붙잡은 채 오열했다. 잔잔한 수면에 떨어진 눈물이 파문을 만들었다. 그녀는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힘들어했다.
아인은 아무 일 없었다고, 조금 맞기는 했지만 괜찮았다며 레이나를 달래보았으나 오히려 그 말이 그녀를 더 울리고 말았다.
***
그 일이 있고 난 뒤, 페르디안 백작저는 굳게 문을 걸어 잠갔다. 오메가와 귀부인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방문이 허락되지 않았다. 심지어는 저택에서 일하는 알파 시종들까지 다 내보내고 오메가와 베타 여인들만이 주인댁 시중을 들게 했다.
샤를 백작은 기디언 백작을 살해한 죄목으로 섬으로 보내져 10년의 징역형을 살게 되었다. 레이나 백작 부인은 가주가 되어 가문과 어린 아들을 홀로 지켜야 했다.
귀족 사회는 고작 10살밖에 안 된 우성 오메가의 생일 파티에서 벌어진 비극이 마치 재미난 흥밋거리라도 되는 듯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다가 어느 순간,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바로 매일 매일 이야깃거리를 갱신 중인, 우성 알파이자 S급 에스퍼인 알렉세이 유르한의 불면증에 대한 이야기였다.
유르한 제국의 1황자 알렉세이는 초대 황제와 같은 우성 알파이자, S급 에스퍼였다. 에스퍼들이 보통 원소의 힘을 한 가지만 쓸 수 있는 반면, 그는 물질계·정신계·자연계의 모든 영역에서 힘을 발휘한다고 밝혀졌다.
그러나 인간의 몸에 가두기에 너무나 엄청난 신의 힘은 저주와도 같았다. 알렉세이는 불안정한 에테르로 인해 성격이 포악하고 불면증이 심했다.
에테르는 에스퍼 능력의 원천인 동시에 그들을 죽이는 사신이었다. 에스퍼들은 등급이 높을수록 많은 양의 에테르를 가졌고 부작용이 심했다.
‘일주일 동안 잠을 자지 못했다. 이번에는 한 달 동안 잠을 자지 못했다.’와 같은 S급 에스퍼 알렉세이의 불면증 기록 갱신은 언제나 귀족들 사이에서 화제였다. 백성들조차 언제 1황자가 죽을지 점치며 내기를 걸 만큼 그는 유르한 제국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대화 소재였다.
알렉세이는 세계 최강의 에스퍼였지만, 매칭 가이드가 없어서 사실상 황위 계승이 물 건너간 상태였다. 그의 막강한 힘은 동경의 대상이었지만, 동시에 그 힘을 전혀 통제할 수 없어 두려움과 기피의 대상이었다.
마탑은 알렉세이의 매칭 가이드를 찾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었으나, S급 가이드는 찾는다고 찾아지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몇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존재였다. 운이 좋으면 초대 황제처럼 가이드가 같은 시대에 태어나 그 힘을 안정적으로 발휘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알렉세이는 언제 폭주할지 모르는 시한폭탄에 불과할 뿐이었다.
관료들은 1황자 알렉세이가 폭주하기 전에, 그를 미리 죽여야 한다며 황제에게 주장했다. 그들의 말을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게 정말 알렉세이가 제 가이드를 찾지 못하면, 유르한 제국은 폭주한 S급 에스퍼로 인해 소멸할 수밖에 없었다.
성격이라도 좋으면 불쌍하다는 동정표를 얻었을 텐데, 신은 알렉세이를 만들 때 외모와 에스퍼 능력 같은 외적 요소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내면적 요소를 놓치고 말았다. 한 번이라도 알렉세이를 본 자라면 그를 쌍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언제나 이야깃거리를 제공해주는 알렉세이 덕분에 자연스레 페르디안 가문에서 벌어진 비극은 사람들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샤를 페르디안이 징역살이를 마치고 저택으로 돌아오게 되었을 때, 과거의 일은 다시금 끄집어내졌다.
사람들은 한자리에 모일 때마다 어린 우성 오메가가 죽을 뻔해 아버지가 살인을 저질렀던 일을, 당사자의 아픔은 생각지도 않으며 아무렇지 않게 소비했다.
‘그 왜 있잖아. 페르디안 백작. 이번에 출소했더라?’
‘페르디안? 그런 가문도 있었나?’
‘천재 화가 아인 페르디안 집안 말이야.’
‘아아~. 근데 언제 감옥에 들어가셨대?’
‘꽤 됐을걸? 아인이 은둔 생활하는 게 그 사건 때문이잖아.’
***
10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를 마중하기 위해 아인은 현관문 앞에 서 있다가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왈칵 그를 안았다. 샤를이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아인을 으스러지게 끌어안았다. 레이나 또한 부자의 포옹에 가세하였다. 셋은 눈물 어린 해후를 했다.
지난 10년 동안 아인은 자신 때문에 감옥에 간 샤를에게 일주일에 한 번씩 편지를 썼다. 그게 그를 위해 자신이 해야 하는 최소한의 도리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편지에는 언제나 아인과 레이나, 샤를이 함께 있는 초상화를 넣어서 보냈다.
가족 초상화 속 아인은 점차 어른이 되어 가고 레이나는 늙어 갔지만, 샤를만은 어릴 때 본 모습 그대로였다. 늙어 가는 샤를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샤를은 제 얼굴 어디에 주름이 생기고, 흰머리가 자랐는지 편지에 적어줬다. 아인은 그 편지를 바탕으로 초상화에 아버지를 그려 나갔다.
아인과 샤를은 그렇게 몸은 떨어져 있어서 서로의 시간을 공유해 나갔다. 아인은 샤를의 부성애에 그를 진짜 자신의 아빠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원래 세계의 친부라도 아인을 위해 그렇게까지 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아빠, 시장하시죠? 엄마가 아빠 온다고 식사 준비하셨어요.”
샤를은 빠르게 눈알을 굴려 저택 내부를 살폈다. 그가 떠나기 전처럼 고급 가구들과 예술품이 곳곳에 놓인, 변함없이 화려한 내부를 보며 안도하는 모습이 보였다.
사업을 하던 샤를이 사라진 후, 레이나가 가주로서 상단을 운영하였으나 번번이 사업을 말아먹었다. 샤를이 부재하는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제일 먼저 저택에서 일하는 고용인들의 인건비를 대폭 줄였다. 비용이 많이 드는 오메가 시종과 시녀들은 다 내보내고, 하인과 하녀들만 일하게 되었다. 그들의 수도 점점 줄어 어느 순간 레이나까지 집안일을 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인은 레이나에게 자신이 그린 그림을 팔아달라고 부탁했다. 조금이라도 집에 보탬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레이나는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계속 불어나는 부채 때문에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는 심정으로 아인의 그림을 팔았다. 그리고 뜻하지 않게 대박이 났다.
귀족들은 아인의 그림을 없어서 못 샀다. 그림을 사기 위해 페르디안 백작저에 사람을 보내 진을 치게 했다. 해고되었던 고용인들은 다시 저택으로 복귀하게 되었고, 저택은 낡은 커튼부터 시작해 이가 깨진 그릇까지 모두 새것으로 교체할 수 있었다
다행히 샤를은 감옥에 있어 그 힘든 과정을 지켜보지 못했고, 레이나와 아인은 가문이 기울 뻔했던 일을 샤를에게 끝까지 숨기기로 약속했다. 뒤늦게 알아봤자 속상할 테니 말이다.
식당으로 향하는 복도를 걸으며 레이나가 샤를에게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여보, 당신이 없는 동안 가업을 변경했어요.”
식당에 도착하자마자 샤를이 새로운 가업에 대한 자료를 받아보길 원했다. 준비했다는 듯 레이나가 갤러리에 대한 정보를 넘겼다.
“아인의 그림뿐만 아니라 다른 화가들의 그림을 사고파는 일을 해요. 촉망받는 신인을 발굴해 그들을 후원하고 전속 계약도 맺고 있어요. 지금은 고정 고객들이 많이 생겨서 안정기에 돌입한 상태예요.”
레이나는 제 손으로 일궈낸 갤러리 사업을 샤를에게 줘야 하는 상황에 속이 쓰려왔다. 원래 그가 하던 무역업을 정리하고 그 자본으로 시작한 사업이니, 당연히 그에게 돌려줘야 하는데 말이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던 샤를이 무릎에 놓인 레이나의 손등에 제 손을 겹쳤다.
“레이나, 갤러리 일은 당신이 이룩한 성과야. 그 일을 정말 나한테 맡겨도 되겠어?”
“…그렇지만… 당신 상단을 제가….”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날 기다려준 고마운 아내에게 내 인생 중 가장 작은 조각에 불과한 상단을 통째로 주지도 못할까? 난 내 사업을 다시 시작할 테니, 레이나 그대는 계속 갤러리 일을 해줬으면 해. 지금의 당신이 너무 빛나서 멋져 보이거든.”
레이나의 눈가가 감동의 눈물로 젖어 들었다. 아인은 이런 부모님의 아들로 지낼 수 있어서 행복했다.
이제 더 이상 끔찍한 집착광공이 나오는 BL 소설 속 악역수에 빙의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될 듯싶었다.
아인의 인생은 여태 화가로 성공하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알파니 오메가니 하며 남자끼리 붙어먹는 19금이 끼어들 틈이 없는 전체 이용가였다.
샤를이 감옥에서 10년 동안이나 고생한 걸 생각하면 이런 마음을 먹으면 안 되지만, 그날 있었던 일은 아인에게 큰 행운이었다. 레이나가 우성 오메가로 발현한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완벽하게 알파와의 접촉을 차단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종종 저택에 놀러 오는 오메가 친구들이 말했는데 다들 가문에서 선보라는 압박이 대단하다고 했다. 에스퍼나 가이드로 발현하기까지 하면 꼼짝없이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해야 하기도 했다.
친구들은 아인에게 그 힘겨운 기억을 극복해보면 어떻겠냐고, 세상 밖으로 나오라고 용기를 북돋아 주곤 했다. 하지만 아인은 저택에서 지내며 이대로 평화롭게 그림을 그리며 늙어 죽는 날을 꿈꿨다.
미친 또라이 사이코패스 알렉세이가 제이콥을 만나서 사랑에 빠지고 각인을 할 때까지는 전혀 외출할 마음이 없었다. 만일 꼭 결혼을 해야 한다면 베타 여성과 할 생각이었다.
아이는 낳지 못하겠지만, 아인은 완벽한 이성애자였기에 자신의 결혼 상대로 남자를 상상할 수 없었다.
그동안 편지를 통해 감정을 교류해나가서 그런지 샤를과는 10년의 공백을 느끼지 않고 친근하게 대화할 수 있었다. 식사를 끝마친 샤를은 레이나와 함께 침실로 향했다. 오랫동안 부부 관계를 맺지 못했으니 급할 만도 했다.
아인은 제 작업실로 들어와 요즘 하고 있는 작업을 이어나갔다. 최근에는 페르디안 저택에 있는 분수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는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물방울에 반사된 찬란한 햇빛을 머금은 물줄기를 표현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3시간 동안 집중해 그림을 그리고 물감이 덕지덕지 묻은 앞치마를 벗어던졌다.
“드디어 끝났다!”
이제 유화 물감만 말리면 됐다. 최대한 캔버스와 멀리 떨어져 그림을 감상했다. 녹음이 가득한 페르디안 백작저의 마당은 지상에 현존하는 곳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다. 아인의 눈으로 보는 제 집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분수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방울이 나뭇가지에 맺혀 보석처럼 빛났다. 금방이라도 물방울이 뚝 떨어질 것만 같아 진짜처럼 느껴졌다.
반면 물방울 주위는 붓 터치를 뭉그러트렸다. 바람이 불어 나뭇가지가 흔들리면 그 물방울들이 떨어져 사라질 것만 같아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유화이면서 수채화처럼 맑은 색감이었다.
작업실에서 나와 그림을 그리면서 묻은 유화 물감을 지우기 위해 기름으로 손을 닦았다. 화가의 손은 귀족이란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언제나 여러 색으로 얼룩져 깨끗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아인은 제 못난 손이 가족과 가문을 지켜냈기에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아무리 그림을 그려도 인정받지 못했던 원래 세계에 비하면 이곳은 천국이었다. 서재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던 때였다. 갑자기 시종장이 황실 인장이 찍힌 편지를 가져왔다.
“도련님….”
그가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아인을 바라봤다. 아인은 무슨 일인가 싶어 얼른 봉투를 뜯어 편지를 꺼냈다.
「아인 페르디안은 편지를 받은 즉시, 당장 황궁에 방문해 날 접견하도록.
알렉세이 유르한.」
“….”
어떻게 안 거지? 바깥출입을 전혀 안 하는데… 원작처럼 몸을 팔다가 알렉세이를 만나지도 않았다. 그가 어떻게 자신을 찾아낸 것인지는 모르지만 황자의 명에 불복할 순 없었다.
그렇다고 광공을 만나러 가는 위험한 짓 또한 할 수 없었다. 아인은 생각에 잠겼다가 저택에서 일하는 오메가 시종들 중 누가 자신과 제일 비슷한 이미지인지 추려봤다. 그리고 그중에서 최대한 체구가 비슷한 시종을 골랐다.
“시종장은 당장 린을 데려와.”
“예, 도련님.”
얼마 지나지 않아 린이 도착했다. 그는 아인과 비슷한 또래의 오메가인 데다 금발이었다. 눈까지 금안이 아니어서 아쉽지만 아인은 오랫동안 사교 활동을 일절 하지 않았다. 자세한 외형이 알려졌을 거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몰라 린의 앞머리를 내려 눈을 가려봤다.
“완벽해.”
린의 두 손을 잡고 간절히 물었다.
“린, 부탁이 있는데 하나만 들어줄래?”
“네, 말씀하세요. 도련님.”
“나 대신 황궁에 가서 나인 척 1황자님을 만나고 와줘.”
“…그… 도련님, 살려주세요. 제가 뭘 잘못했나요. 제발 살려주세요.”
린은 1황자가 미친 쌍놈의 새끼라는 걸 알고 있는지 무릎 꿇은 채 아인의 바짓단에 매달렸다. 아인은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어떻게 이 난관을 돌파해야 할지 모르겠다. 자신은 절대 알렉세이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울먹이는 린을 다독여서 내보내고 시종장에게 물었다.
“존, 내가 인장을 다시 감쪽같이 봉인해서 편지를 안 읽은 척하면 황궁에 안 가도 될까?”
“도련님, 큰일 날 소리 하지 마십시오. 황궁에서 전령이 와서 제가 편지를 받아드는 걸 지켜봤습니다.”
“그래, 그래. 여러모로 이것도 민폐 끼치는 짓이네.”
고민에 빠져 빠져나갈 구멍을 궁리해봤다. 아인은 이럴 때만 오메가인 척하며 치트키를 발휘하기로 했다.
「존경하는 알렉세이 유르한 1황자 전하께.
황궁으로 초대해주신 건 몹시 감읍하오나 소신이 현재 히트사이클 중이라 바깥출입이 불가하옵니다. 몸을 제대로 건사할 수 있는 때가 온다면, 입궁을 하여 1황자 전하를 찾아뵙겠습니다.
아인 페르디안 올림.」
***
“으아아악.”
어두운 방 안, 한 인영이 침대에서 몸부림치고 있다. 그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가 죽으려고 했다. 굵은 목에 핏줄이 곤두서 울퉁불퉁하게 용솟음쳤다.
사지를 비틀며 침대 시트를 엉망진창으로 밀어대고, 살려달라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흡사 악귀에게 빙의당한 사람 같은가 하면, 임종을 맞이하는 시한부 환자 같기도 했다.
그러나 실상은 그저 매칭 가이드가 없어서 역류하는 에테르에 고통스러워하는 에스퍼일 뿐이었다. 마탑 마법사들은 1황자의 침대 주위에 결계를 펼쳤다.
혹시라도 그가 폭주할 기미가 보이면 망설이지 않고 사살해야 했다. 그를 죽이지 못하면 대륙 지도에서 유르한 제국이 사라질 터다.
알렉세이의 목에 매인 굵은 목줄이 팽팽해졌다. 손목과 발목을 억압한 사슬 또한 끊어질 듯 당겨졌다.
“으아아. 죽여. 차라리 날 죽여.”
마탑 마법사들은 1황자의 발작에도 미동 없이 그를 지켜볼 뿐이었다. 그나마 그와 매칭률이 높은 가이드가 섹스를 통한 가이딩을 하기 위해 옷을 벗었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알몸으로 있는 일에 부끄러워할 틈 따윈 없었다.
당장이라도 급격하게 날뛰는 S급 에스퍼의 에테르를 다스리지 못하면 폭주가 일어날 것이다. 가이드는 알렉세이의 바지를 내렸다. 그가 눈을 부릅뜨며 가이드를 노려봤다.
“건드리기만 해봐. 다 죽여 버릴 거야.”
“1황자 전하, 지금 이럴 때가 아닙니다.”
“죽어! 죽어! 죽어!”
피눈물을 흘리며 퍼붓는 저주에 가이드는 기가 질려 알렉세이의 바지에서 손을 뗐다. 지금 억지로 섹스 가이딩을 한다 치더라도 그들의 매칭률은 23.5%였다. A급 가이드인 그가 목숨을 걸고 가이딩해 봤자 폭주를 며칠 늦추는 것에 불과했다.
가이드는 마탑주에게 시선을 보냈다. 지금 섹스를 해서 알렉세이를 살린다고 해도 그것은 근본적인 치료가 아니다. 또 억지로 섹스 가이딩을 받았다며 제정신을 차린 1황자가 가이드를 죽이려고 들면, 마탑주라도 말릴 수 없었다.
이 지상에서 가장 강한 에스퍼는 가장 큰 골칫거리이기도 했다. 마탑주는 한숨을 내쉬며 일단 포옹으로 가이딩해 줄 것을 부탁했다. 가이드는 사나운 짐승을 묶어둔 것처럼 결박된 알렉세이를 끌어안았다.
울컥. 입에서 피가 토해져 나왔다. 알렉세이의 에테르가 살의를 가지고 가이드를 갈가리 찢었다. 가이드는 제 조국을 위해서 참고 또 참았다.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었다.
굶주린 에테르가 입을 쩍 벌리고 가이드의 닉스를 통째로 집어삼켰다. 닉스는 더럽혀진 에테르를 정화하는 가이드의 힘이었다. A급 가이드가 가진 모든 닉스가 알렉세이에게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가이드는 억, 소리 한 번 내지 못한 채 바짝 마른 미라가 되어 죽었다. 흉측하게 혈관이 붉어졌던 알렉세이의 모습이 가라앉았다. 에테르가 날뛸 때 괴물처럼 끔찍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아름다운 청년이 되었다.
“풀어.”
1황자의 명령에 마탑 마법사들이 사슬을 풀었다. 침대 주위를 둘러싼 결계 또한 우우웅 소리를 내며 해제되었다.
“헤프게 옷 벗는 새끼 또 밀어 넣기만 해봐.”
“그렇지만 전하, 가이드들은 신체 접촉을 통해 가이딩을 합니다.”
“그러니까 그럴 필요 없다는 걸 설명해두라고.”
“A급이나 되는 가이드가 죽어달라는 말에 순순히 와주겠습니까. 일단 침실에 들이고 봐야죠.”
외알 안경을 낀 조세핀이 뒷공작을 펼치는 악당처럼 음흉하게 웃었다.
“이럴 때 보면 넌 정말 못된 것 같아.”
“전하에 비할 바 있겠습니까. 오염도 측정이나 하시죠.”
에테르의 오염은 오직 가이드의 닉스로만 해독할 수 있었다. 에스퍼는 숨만 쉬어도 에테르가 오염되었는데 능력을 사용할 때면 그 오염 속도가 가속화되었다.
아직 매칭 가이드가 없는 알렉세이는 능력을 전혀 사용하지 않아도 엄청난 에테르 양 때문에 오염 속도가 다른 에스퍼에 비해 월등이 빨랐다. A급 가이드의 닉스를 통째로 훔쳐 먹고도 알렉세이의 오염도는 87%까지밖에 내려가지 않았다.
조세핀은 심각하게 모시는 주군을 갈아타야 할 때는 아닌지 고민했다. 다음번에는 또 어떻게 A급 가이드를 속여서 1황자의 침실로 밀어 넣어야 할지 골치 아팠다.
과하면 모자란 것만 못 하다더니만, 알렉세이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었다. 차라리 2황자처럼 물리계 A급 에스퍼이면 손쉽게 A급 가이드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A급 가이드가 길가에 널린 돌멩이처럼 흔한 존재는 아니지만, 적어도 전설 속에나 등장하는 드래곤 같은 S급 가이드보다는 몇백 배나 찾기 쉬웠다.
호라이슨을 지지하는 수많은 귀족들은 2황자의 ‘안정성’을 높이 샀다. 조세핀은 오염도 측정 마도구를 정리해 가방에 넣으며 알렉세이에게 진통제를 건넸다.
“너무 과다 복용하지 마세요. 그깟 고통 못 참아서 에테르 오염 속도가 빨라지면, 약 먹는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네가 안 겪어봐서 그래. 산 채로 살갗을 벗겨내고 뜨거운 기름을 붓는 기분이라고.”
“네. 전 모릅니다. 그래도 그따위로 태어났으면 참아요.”
마탑주 조세핀은 겁도 없이 유르한 제국의 1황자를 함부로 대했다. 그럼에도 알렉세이는 그에게 벌을 내리거나 하지 않았다.
알렉세이는 다섯 살 때 S급 에스퍼로 발현했다. 처음에 그 일은 온 나라의 경사였다. 그러나 제대로 통제되지 않는 힘 때문에 폭주 직전까지 가길 여러 번.
황제는 슬그머니 알렉세이를 폐궁으로 보내더니, 그다음에는 오리하르콘 벙커에 가뒀다. 폭주를 할 거면 그 안에 갇혀서 하라는 거다.
평생 벙커에 갇혀 살 뻔한 알렉세이를 꺼내준 게 바로 마탑주 조세핀이었다. 그는 알렉세이의 스승이자 아버지였고 형이자 동시에 친구였다.
“목욕물 준비해.”
알렉세이의 명령에 시종장이 자리를 떴다. 눈, 코, 입, 귀, 구멍이란 구멍에서 다 피를 내뿜어서 더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려지지 않은 잘생김이라니. 조세핀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만 나왔다.
***
유르한 제국에는 오후 3시가 되면 흰 토끼조차 홍차를 마신다는 속담이 있다. 유리 온실 안은 이국적인 외래종 나무들과 꽃들이 가득해 숲속처럼 공기가 축축했다.
알렉세이를 낳아준 생물학적 오메가 아버지, 전 황후 제논의 여동생이자 공작 부인인 이사벨라가 조카를 발견하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그가 유일하게 가족으로 여기는 존재였다.
유리 온실로 들이친 햇살에 이사벨라의 미소는 더욱 빛났다.
“1황자 전하, 어서 오세요.”
알렉세이는 의자에 앉으며 시종에게 금장 단추가 달린 남색 프록코트를 벗어서 넘겼다. 그의 움직임에 근육질 몸에 딱 붙는 크림색 셔츠가 비명을 질렀다.
알렉세이의 셔츠 가슴팍이 터질 듯이 팽팽해졌다. 그뿐만 아니라 군마의 뒷다리처럼 튼실한 허벅지를 감싼 검은 슬랙스 바짓단이 짧아져 복숭아뼈가 드러났다.
“어째 저번 주에 봤을 때보다 키가 더 큰 것 같습니다.”
“제대로 보셨습니다. 가뜩이나 엿 같은 1황자인데, 매주 새 옷을 지어 입혀야 해서 황실 디자이너가 과로사로 죽으려고 하더군요.”
“씁! 말 험하게 하는 버릇 고치라 했습니다.”
엄한 척 호랑이 흉내를 내도 자그마한 오메가인 이사벨라가 무서울 리 없는 알렉세이였다. 그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하며 딴청을 피웠다. 그녀가 조카의 앞에 놓은 찻잔에 홍차를 따라줬다.
이 더운 날 정장을 갖춰 입고 홍차를 마시려니 가뜩이나 예민해서 짜증 많은 그는 이사벨라한테마저 고함을 지르고 싶을 지경이었다. 최대한 신경을 가라앉히기 위해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에테르가 그를 비웃듯 콰콰콰 번개처럼 심장을 찍어댔다.
“윽.”
알렉세이가 손으로 가슴께를 움켜잡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이사벨라가 걱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다.
“아직도 매칭 가이드를 못 찾았습니까.”
“그게 쉽게 찾아졌으면 제가 이렇게 살겠습니까. 전 그냥 이대로 계속 고통받다가 제 힘을 못 이겨 죽을 겁니다. 제가 폭주하면 제 육체가 갈가리 찢겨서 사방에 날아다니겠죠?”
가장 소중한 가족을 상대로도 공포의 주둥이는 멈출 줄 몰랐다.
“그러니 괜히 시신 수습해 묻어주겠다는 생각 마세요. 그냥 새나 짐승 따위가 주워 먹게 하거나, 빗물에 씻겨 사라지게 놔두세요.”
알렉세이가 신경질적으로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서 약통을 꺼냈다. 분명 조세핀이 과다 복용하지 말라고 했건만, 약통을 통째로 입에 가져가 진통제를 쏟아붓고 으적으적 씹어 먹었다.
그는 식은땀이 난 얼굴을 손으로 한 번 쓸어내리고는 자세를 바로 했다.
“그나저나 어쩐 일로 부르신 겁니까.”
“…1황자 전하의 기분이 요즘 안 좋다는 소리를 들어서요.”
“제가 언제 기분 좋았던 적 있습니까.”
“…그래서… 그래서 기분 전환 삼아 같이 전시회에 같이 가자고 불렀는데, 정 힘들면 그냥 돌아가셔도 됩니다.”
이사벨라는 그가 알겠다며 돌아갈 거라고 여겼다. 그러나 알렉세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심한 듯 다정하고, 차가운 듯 착한 조카였다.
이사벨라는 차라리 알렉세이가 능력자로 발현하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럼 이렇게 고통받을 일도 없었을 텐데….
티타임을 정리하고 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렉세이가 에스코트하겠다며 팔을 내밀었다. 그녀는 조카의 팔뚝에 손을 얹고 마차를 탔다. 다그닥 다그닥. 마차를 끄는 말의 말발굽 소리가 알렉세이에게는 귀청을 터트릴 듯 크게 들렸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별거 아닌 작은 소음이었지만 알렉세이에게는 그렇지 못했다. 그는 울렁이는 속을 달래고자 마차 창문을 내렸다. 깊게 호흡을 하다가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의 온갖 체취가 후각을 자극해 얼른 손으로 코를 틀어막았다. 점점 더 바늘 위에 서 있는 것처럼 신경이 예민해지고 있었다. 그는 이제 자신에게 남겨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느꼈다.
얼마 되지 않는 거리조차 힘들어하는 조카에게 이사벨라는 손수건을 내밀었다. 손수건에 은은하게 밴 오메가 체취가 여타의 알파들과 달리 기쁘게 다가오지 않아서, 알렉세이는 그것을 밀어내며 거부했다.
“괜찮습니다.”
이를 악물고 그리 대답해봤자 지켜보는 이는 걱정스러울 뿐이었다. 이사벨라는 지금이라도 돌아가자고 제안했지만, 알렉세이는 지금까지 참은 게 억울해 전시회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전시회. 수많은 귀족들이 입장하기 위해 줄을 서 있었다. 그동안 다닌 전시회와 달라 이사벨라를 쳐다봤다.
“아인 페르디안의 신작이 전시되었다는 소식에 다들 몰린 거랍니다.”
“아인 페르디안이요? 그 페르디안 백작?”
“예.”
꽤 오랜 시간이 지나기는 했지만, 어린 오메가 아들을 지키기 위해 살인을 한 페르디안 백작의 일화는 유명했다. 원래 귀족을 살해하면 교수형에 처해지지만, 그도 같은 귀족이라 10년의 징역살이를 지내게 됐다. 그러고 보니 이제 감옥에서 나왔겠구나 싶었다.
알렉세이는 그때까지 아무 생각 없이 이사벨라를 따라 전시회에 입장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마주한 아인 페르디안의 그림을 보고 순수하게 감탄하던 찰나, 말초신경을 전율케 하는 오메가 페로몬을 맡았다.
알렉세이의 거구가 뒤로 넘어갔다. 쿵!
“꺄악. 알렉세이!!!”
너무 놀란 이사벨라는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1황자를 감히 이름으로 불렀다. 전시회에 방문한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림 앞에 쓰러진 우성 알파에게 몰렸다.
“1황자다! 1황자야!”
“사람 살려!”
“도망치세요. 다들 빨리 빠져나가셔야 합니다.”
드디어 1황자가 폭주했구나 싶어 패닉에 빠진 귀족들이 우르르 전시회장에서 빠져나갔다. 전시회장을 벗어난 그들은 일제히 화재 현장에서 살아난 사람처럼 엉엉 울며 ‘이제 살았다’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사벨라만 끝까지 조카 옆에 남아서 그의 상태를 살폈다.
“알렉세이~. 알렉세이. 정신 차려요.”
아무리 흔들어 보아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조카가 결국 죽었구나 싶어서 그를 끌어안고 오열했다.
“으흑흑흑. 오라버니. 흑흑. 제가 알렉세이도 지키지 못했어요.”
그러나 그녀의 흐느낌은 어느 순간 뚝 멈췄다.
“드르렁.”
알렉세이가 코를 골았다. 기절하듯 자는 것뿐이었다. 유르한 제국민이라면 다 아는 불면증의 대명사 ‘그 알렉세이’가 말이다!
이사벨라는 이 황당하고도 기쁜 일을 어쩌나 싶었다. 어쨌든 오랫동안 잠을 자지 못한 조카가 잠을 잔다니, 좋은 일이었다. 사람이 생존하는 데 잠자기는 빼놓을 수 없는 요소였다. 그녀는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알렉세이의 머리통을 제 무릎 위에 올렸다. 곤히 자는 모습이 몹시 편안해 보였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렸는데 도무지 깰 기미가 안 보였다. 이사벨라는 다리가 저려 머리를 치웠다. 그래도 알렉세이는 잘만 잤다. 혹시 자는 게 아니라 어디 아픈 건가 슬슬 걱정되었다. 전시회장이 무너지지 않고 멀쩡하자 호기심에 귀족들이 슬금슬금 도로 기어들어 왔다.
그들은 1황자가 거지처럼 바닥에서 숙면을 취하는 모습을 신기해하며 구경했다. 수군거림이 점차 커졌다. 전시회장에서 사람을 내보내고, 이사벨라는 몸 좋은 시종을 시켜 알렉세이를 업게 했다. 공작저로 데려가 편하게 자게 해주려는 의도였다.
그런데 알렉세이가 전시회장에서 벗어나자마자 눈을 떠버렸다. 시종의 등에서 내려온 그는 기괴한 행동을 했다. 아인 페르디안의 전시회장에 뛰어 들어가 그림에 코를 박고 끙끙거린 것이다. 혀까지 길게 빼서 그림을 할짝거리며 제대로 미친놈 인증을 했다.
“1황자 전하, 진정하세요.”
이사벨라의 저지에도 들은 척 만 척이었다. 비싼 그림을 혓바닥으로 능욕하는 S급 에스퍼의 행동을 귀족들은 재미난 구경거리 삼았다. 페르디안 갤러리에서 그림을 대여한 미술관 직원들만 발을 동동거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1황자 전하,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림이 훼손될 수 있으니, 다섯 걸음 뒤에서 관람해주십시오.”
일주일 동안 쫄쫄 굶은 사자가 토끼 한 마리를 발견해서 뛰어들었는데 눈에 뭐가 보이겠는가. 바지 앞섶을 불룩하게 부풀린 채 하반신을 그림에 문대는 알렉세이는 꼭 발정 난 수사자 같았다.
“씁. 하아~, 못 참겠다.”
이 미친놈이 바지를 내리고 자위를 하려고 했다. 더 이상 망신살을 뻗칠 수 없었다. 이사벨라는 다급한 마음에 조카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겼다.
“알렉세이! 정신 차려. 지금 사람들 앞에서 무슨 짓이냐!”
이사벨라의 호통에 그제야 그녀를 돌아보는 알렉세이였다. 그는 맛이 간 눈으로 샐쭉하게 웃더니 고개를 도로 그림에 처박았다.
“크크크크. 크크크크. 크하하하하!”
광인 같았다. 아니 그는 광인이었다. 그 자리에서 알렉세이의 모습을 지켜본 모두는 그리 생각했다.
끔찍한 지옥 불에서 불타던 알렉세이를 구하겠다며 신이 가느다란 거미줄 하나를 내려보냈다. 그는 페르디안 저택 마당, 분수가 있는 아름다운 풍경화를 보며 결심했다.
“절대 놓치지 않겠어. 아인 페르디안.”
드디어 찾고, 또 찾았던 그의 가이드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