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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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아인을 끌고 와 그의 목덜미에 송곳니를 처박고 싶었다. 바지를 벗겨내고, 구멍에 좆을 처박아서 잔뜩 정액을 싸지른 후 노팅을 할 것이다. 아인은 그 누구의 가이드도 아닌 알렉세이만을 위한 가이드였다.

그림에 희미하게 묻어난 페로몬만으로도 전혀 잘 수 없었던 그가 기절하듯 잠들어버렸다. 한계에 도달해 금방이라도 끊어질 고무줄처럼 팽팽해진 감각들이 느슨하게 이완되었다.

아인 페르디안의 그림을 목도한 순간, 알렉세이의 세상은 백팔십도로 달라졌다. 에스퍼로 각성한 이래, 오랫동안 그 어떤 것도 고통으로 다가오지 않은 적이 없었다.

옷자락이 스치는 작은 부스럭거림마저 큰 북을 두드리는 소음 같았다. 음식을 먹으면 혀로 맛을 느껴야 하는데 바늘 수백 개를 삼키는 듯했다. 하다못해 태양 빛마저 각막을 인두로 지지는 것처럼 아팠다.

알렉세이에게 이 세상은 그리 잔인했다. 숨을 쉬는 것처럼 그를 좀먹어가던 광활한 에테르가 지금은 온순했다. 단지, 아인의 그림에 묻어난 페로몬 조금 맡았다고. 흐흐흐. 실성한 사람처럼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가 느낀 대로 진짜 몸이 변했는지도 확인해볼 필요가 있었다. 전시회에서 아인 페르디안의 신작을 구매해 마차에 실었다. 그림과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같이 있으니, 전혀 아프지 않았다.

이런 적은 정말 오랜만이라 신기했다. 이사벨라를 공작저에 내려주고, 그는 조세핀을 만나러 마탑으로 갔다. 거대한 그림을 들고 나타난 알렉세이의 모습에 조세핀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게 안색이 좋아 보이십니다?”

“그래 보여?”

아프지 않으니 마음에도 여유가 생겨 웃음이 절로 나왔다. 조세핀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설마… 드디어 실성….”

“그래, 찾았어. 내 가이드.”

“정말입니까?”

S급 가이드가 나타났다는 사실에 조세핀이 잔뜩 흥분했다. 알렉세이를 구원해줄 가이드를 만났다는 소식에 그는 속사포처럼 물었다.

“어디서요? 누구입니까. 왜 같이 안 오신 겁니까.”

“전시회에서. 이 그림을 그린 화가 아인 페르디안. 아직 못 만나서.”

질문에 꼬박꼬박 친절하게 답해주는 낯선 주군의 모습에 조세핀은 놀라 뒤로 자빠질 뻔했다. 그러나 뒤이은 알렉세이의 말은 더 놀라웠다.

손을 잡는 것과 같은 신체 접촉조차 없었는데 가이딩을 받은 효과를 얻었단다. 마도구를 가져와서 에테르 오염도를 측정했다.

“헉! 말도 안 돼.”

역대 최저치였다. 73%. 이 정도만 되어도 살겠다는 알렉세이의 말에 조세핀은 눈물을 글썽였다.

“매칭 검사를 안 해봐도 이 정도면 분명 그분께서 1황자 전하의 매칭 가이드일 겁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어서… 어서 그분을 황궁으로 모셔 와야… 아…!”

“왜 그래?”

잔뜩 신이 난 조세핀의 얼굴에 먹구름이 끼었다. 덩달아 심각해진 알렉세이다.

“10년 전 사건 기억하십니까. 페르디안 백작이 기디언 백작을 살해한 일 말입니다.”

“그래… 유명하지. 그런데 그게 어떻다고.”

“그때 아인 페르디안의 나이가 무척 어리지 않았습니까. 비록 미수였다고 할지라도 충격이 컸던 모양입니다….”

조세핀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 사건 이후 페르디안 백작저는 문을 걸어 잠그고 알파의 출입을 전면 금지했습니다. 또한 아인 페르디안은 어렸을 때의 트라우마로 백작저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게 되었고요.”

관심 밖의 일이라 무심하게 넘겼던 사건이 갑자기 알렉세이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불길함이 스멀스멀 뒷덜미를 스산하게 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알렉세이는 제 가이드의 일이랍시고 조세핀을 견제하려고 들었다. 조세핀은 외알 안경을 추켜올리며 답했다.

“유명하니까요.”

“왜? 유명하지?”

“그야 가주를 잃고 몰락해가던 페르디안 가문을 일으켜 세울 만큼, 아인 페르디안, 엄청난 화가거든요. 다른 나라에서도 그의 그림을 사러 방문할 정도로 말입니다.”

알렉세이는 전시회에 방문했던 엄청난 수의 귀족들을 떠올렸다. 그림을 보기 위해 그렇게 많은 인파가 몰린 건 그도 처음 보았다. 정말 명성만큼 부족함이 없는 실력이었다.

처음 본 순간, 페르디안 백작저 풍경에 압도당해 반해버렸지 않는가. 만일 제 가이드의 페로몬이 묻어 있지 않았다 할지라도, 분명 마음에 들어 하며 그림을 구매했을 것이다.

“1황자 전하께서는 알파, 그중에서도 우성 알파이신데 과연 순순히 아인 페르디안이 만나 줄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한 번도 저택 밖으로 나오지 않았대?”

쓸데없는 희망을 가져봤지만, 조세핀이 무참하게 짓밟았다.

“네, 한 번도요.”

알렉세이는 당황하지 않은 척 호언장담했다.

“하. 하. 내가 이 나라 황자인데 명령하면 제까짓 게 와야지, 어쩔 거야? 명색이 이 나라 1황자인데 불복하겠다 이거야?”

어색하게 웃으며 자신 있다는 듯 말했지만, 알렉세이의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알렉세이는 진작 기디언 백작이 살해되었음에도 그의 무덤을 파내 다시 죽여 버리고 싶었다. 감히 자신의 가이드를 건드리다니! 절대 용서 못 한다.

“일단 편지를 보내보도록 하죠. 최대한 아인 페르디안에게 호감을 살 수 있도록 다정한 문체로 황궁에 초청해보세요. 괜히 알파 무서워하는 사람한테 밉보였다가 평생 못 만나게 되면 어떡합니까.”

“그, 그래. 당연하지. 걱정 말라고.”

다정한 문체? 문체가 다정할 수도 있나?

조세핀과 헤어진 알렉세이는 제 침실로 돌아와 만년필을 들었다. 그는 용건을 적어서 편지를 썼고, 답장이 왔다. 히트사이클 중이라 못 온다는 답변이었다. 그래, 그렇군.

알렉세이는 아인의 페르몬이 묻어난 편지에 코를 박으며 목덜미는 물론, 얼굴과 귓등까지 새빨갛게 물들였다. 억제제를 먹으면서 힘겹게 히트사이클을 견디는 자신의 가이드를 상상하니, 자지가 아플 정도로 발기했다.

그는 아인을 기다리는 동안, 그의 그림을 사들이며 간접 가이딩을 받았다. 1황자인 그가 천재 화가 아인 페르디안의 그림을 사들이자 귀족들이 덩달아 아인의 그림을 수집하려고 해서 가격이 폭등했다.

그 때문에 안 그래도 그림을 구하기가 어려워졌는데, 그에 더해서 미술계의 견고한 카르텔 인맥과 정보력에 밀려서 그림을 사지 못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땐 칼 들고 쳐들어가서 ‘그림 내놓을래? 병신 될래? 그림 내놓을래? 죽을래?’ 하곤 했다. 그러면 다들 순순히 아인의 그림을 내줬다.

하루 수면 시간 18시간. 조세핀은 갓 태어난 신생아도 알렉세이보다 덜 잘 거라고 뭐라 했지만, 그도 자신도 마냥 기뻐 웃을 뿐이었다.

에테르 오염도는 아인의 그림을 스물다섯 점 샀을 때 42%까지 떨어졌다. 에테르 안정 단계에 돌입하자 아인의 페로몬을 맡고 기절하며 자는 일이 사라졌다.

알렉세이는 이제 히트사이클이 끝났겠구나 싶어 아인에게 다시 편지를 보냈다. 아인이 당연히 1황제인 그의 부름을 받고 오겠다고 할 거라 믿었다. 가이드와 에스퍼는 혼자일 때는 날개가 한 쌍밖에 없는 불완전한 새이지만, 함께 있으면 하늘을 날아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존경하는 알렉세이 유르한 1황자 전하께.

황궁으로 초대해주신 건 몹시 감읍하오나 소신이 현재 계단에서 굴러 바깥출입이 불가하옵니다. 몸을 제대로 건사할 수 있는 때가 온다면, 입궁을 하여 1황자 전하를 찾아뵙겠습니다.

아인 페르디안 올림.」

전에 받은 답장과 단어 몇 개만 다르고 완전히 똑같은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눈에 콩깍지가 제대로 낀 우성 알파는 제 가이드를 걱정하며 치유 능력 에스퍼를 페르디안 백작저로 보냈다.

알렉세이는 다알리아가 황궁으로 복귀하자마자 그녀에게 달려가 물었다.

“아인은 많이 다쳤나? 그동안 얼마나 아팠을까. 이제 괜찮아졌겠지? 날 보러 언제 오겠다고 해?”

“그… 1황자 전하.”

다알리아가 곤란한 표정으로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아인 페르디안은 멀쩡했습니다.”

“….”

“거짓말을 들킨 그는 크게 당황하며 솔직히 털어놨습니다. 우성 알파인 1황자 전하를 만나러 오기 무섭다고. 자신은 죽을 때까지 백작저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고, 알파는 그 누구도 마주하지 않을 거라 했습니다. 만일 자신을 처벌할 생각이시라면 가문의 명예를 위해 자결하겠으니, 가문은 벌하지 말아달라고… 1황자 전하, 진정하세요.”

“으아아악. 기디언! 기디언!”

더 이상 아인 페르디안의 그림을 구할 수 없었다. 국내에 뿌려진 그림은 다 회수해 페로몬에 담긴 아인의 닉스를 써먹었다. 그런데 자신의 가이드는 그가 우성 알파라는 이유만으로 만날 줄 생각이 없단다. 널 만나느니 차라리 자결하겠단다.

알렉세이의 오른손에는 얼음덩어리가 생겨나고, 왼손에는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는 기디언 백작의 무덤으로 공간 이동했다. 하늘에서 무차별적으로 얼음 송곳을 폭격해 무덤을 파손하고, 기디언 백작의 가족들이 있는 백작저에 갔다.

기디언 백작저가 붉게 불타올랐다. 지붕을 받치는 기둥이 손짓 한 번에 무너져 내렸다. 사람들이 살기 위해 저택 밖으로 뛰쳐나갔다.

알렉세이는 무차별적으로 손에서 불을 뿜어내 던졌다. 매캐하게 타는 냄새가 고약했다. 눈알이 뱅그르르 뒤로 넘어갔다. 관절마다 이상한 방향으로 꺾였다. 붉은 피눈물이 볼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힘을 남용한 부작용이었다.

가이드가 없으니 능력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평생 기다려온 자신의 가이드는 그가 보고 싶지 않단다. 자신의 가이드가 말한다. 자신 없이 죽으라고. 그래서 공격을 가하는 건 알렉세이지만, 정작 이곳에서 가장 위협을 받는 존재는 그다.

“아아아악. 으아아악.”

괴물처럼 근육이 부풀어 오르고, 혈관이 불거지다 못해 터져서 온몸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에테르가 그를 완전히 잠식했다. 은회색의 머리카락과 눈이 오염된 에테르로 뒤덮여 하얗게 물들었다.

불길은 가구, 장식품, 귀금속 등 가리지 않고 모조리 불살랐다. 그러나 알렉세이의 불길도 단 하나 태우지 못하는 게 있었다. 귀한 그림인지 보호 마법을 걸어둔 그 그림만이 이 폐허 속에서 고고히 존재했다.

알렉세이는 홀린 듯이 그 그림으로 다가갔다. 아인 페르디안의 미공개 작품이었다. 눈꺼풀을 감았다. 눈물인지 피인지 분간 안 되는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그래서 보지 못했다. 벽에 걸린 그림에서 금빛 실이 가닥가닥 피어나는 걸.

그림에는 화가의 영혼이 깃든다는 말이 있다. 정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페로몬이 묻어나는 건 확실했다. 아인의 페로몬이 알파 페로몬을 만나자 개화하는 꽃처럼 그림에서 뻗어 나와 고치 형태로 에스퍼를 감쌌다.

폭주하려는 알렉세이의 심장 주변에 무언가가 띠를 만들더니 빠르게 회전했다. 에테르가 그의 힘을 끌어다가 폭파하려던 때, 그의 몸이 빠르게 회복되기 시작했다. 심장 주위를 회전하는 미지의 힘이 에테르 역류를 완전히 봉쇄했다.

폭주가 멈췄다. 알렉세이는 눈을 떴다. 제 몸을 감싸고 있는 금빛 실이 그림과 연결되어 있었다. 에스퍼의 폭주를 저지하는 데 페로몬이 쓰이면서 더 이상 그림에는 아인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알렉세이는 자신 안에서 저를 저지한 힘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으흑흑흑. 흑흑.”

한참 억울함과 함께 눈물을 쏟아낸 알렉세이는 고개를 들었다. 두 눈에 독기가 가득했다. 최선을 다해 제 가이드를 사냥할 것이다. 그를 굴복시키지 못하면 죽는 건 알렉세이였다.

그는 모든 게 다 불에 타 재로 변해버린 기디언 백작저에서 유일하게 멀쩡한 아인의 그림을 챙겨서 그곳을 벗어났다. 재와 피가 엉겨 붙어 화산에서 기어 나온 악귀와 같은 몰골로 알렉세이는 페르디안 백작저를 방문했다. 아인이 어디 머물고 있는지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아인의 방은 3층이었다. 작은 테라스에 화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붉은 봉선화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나를 건드리지 말아요. 꽃이 말한다. 꼭 저 같은 꽃을 키웠다.

커튼 너머로 보이는 실루엣이 몹시 우아한 오메가였다. 어이없게도 그림자도 예쁘다 싶었다. 한 번도 알파를 만나지 않았다고 하더니만 그래서 그런지 페로몬을 컨트롤하는 능력이 형편없었다. 이렇게 페로몬을 풀어놓고 사는 오메가는 처음이었다.

만일 아인의 사정을 알지 못했다면 아무 알파한테나 구멍을 벌리고 다니는 천박한 남창이라 오해했을 테다. 코를 킁킁거리며 그의 페로몬을 들이마셨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가 빠져나가 추웠는데 몸이 따뜻해졌다.

아인은 한참 동안 소파에 앉아 책을 읽은 뒤, 잠자리에 들었다. 테라스로 쫓겨난 개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던 알렉세이는 제 가이드의 숨소리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가 완전히 깊은 잠에 빠졌을 때, 테라스에서 방 안으로 능력을 사용해 들어갔다.

아인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자고 있었다. 얼굴 보고 싶었는데 아쉬웠다. 그는 기디언 백작저에서 가져온 아인의 그림과 함께 황궁으로 사라졌다.

***

우우우웅. 우우우웅.

무소뿔로 만든 나팔 소리는 엄청나게 컸다. 이른 아침, 아직 잠들어 있던 백작 가족들과 조용히 일하고 있던 고용인들은 예고 없는 방문에 놀라 허겁지겁 현관으로 달려 나갔다.

양복을 차려입은 시종장이 현관문을 활짝 열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황제의 전령이 황명을 가지고 저택을 방문하였다. 샤를과 레이나 또한 허리를 숙인 채 전령을 예우했다.

아인은 원작 소설에서 보지 못했던 전개에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전령이 두루마리를 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위대한 유르한 제국의 페도로프 유르한 황제 폐하께서 아인 페르디안에게 말씀하십니다.”

예법 수업에서 이런 상황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배우긴 했지만, 얼떨떨해서 믿기지 않았다. 간신히 가출한 정신줄을 챙겨서 대답했다.

“아인 페르디안, 위대한 페도로프 유르한 황제 폐하의 황명을 받잡고자 합니다. 하명하시옵소서.”

전령이 근엄하게 전언하였다.

“그대는 황명을 듣는 즉시, 황궁으로 입궁하여 1황자 알렉세이 유르한과 매칭 검사를 하라. 이상. 페도로프 유르한 황제 폐하의 전언이었습니다. 그럼 아인 페르디안 공자는 저희와 함께 입궁하시죠.”

아… 안 돼. 그 미친 새끼가 어떻게 자신을 알고 자꾸 만나려는지 모르겠지만, 분명 자신은 끔찍한 짓을 당하고 죽을 것이다. 휘청거리며 넘어지려고 하는 걸 시종장 존이 부축해줬다.

열심히 노력해 악역수 스토리에서 벗어났지만, 결국 이야기를 바꾸지 못했다. 소설에서 본 끔찍한 악역수의 최후가 자신의 미래인 양 머릿속에 생생하게 펼쳐졌다.

이 집착광공으로 말할 것 같으면 좆이 사람 허벅지만 하다고 나와 있었다. 자연의 순리를 거부하고, 물리법칙 따위 소설 개연성과 함께 개나 줘버리는 광광 작가가 무슨 생각으로 알렉세이에게 다리를 세 개 줬는지 모르겠다. 사람의 항문 크기는 한정적인데 거기에 사람 다리만 한 거시기를 넣는다니? 그게 가능해?

과거 유행하던 공대 개그가 있다.

1. 냉장고 문을 연다.

2. 코끼리를 집어넣는다.

3. 냉장고 문을 닫는다.

이론상 냉장고에 코끼리를 넣을 수 있다는 거였다. 광광 작가가 쓴 소설도 이 막 나가는 논리와 같았다.

‘오랫동안 매춘을 한 아인의 그곳은 평상시에도 엄지손톱만큼 벌어져 붉은 속살을 드러냈다. 알렉세이는 바로 아인에게 박아 넣었다. 퍽퍽퍽! 허벌창난 오메가 구멍이 애액을 뿜어냈다. 자지가 맛있다고 쩝쩝 입을 다시는 구멍의 천박함에 알렉세이가 혀를 찼다. 아인은 자기 허벅지만 한 알렉세이의 좆을 게걸스럽게 구멍으로 받아먹었다.’

왜 자신이 악역수에 빙의해서 냉장고가 되어야, 아니 구멍을 개통 당해야 한단 말인가. 버블티 빨대에 자신이 다리 한 짝을 집어넣겠다고 하면 다들 미친놈이라고 할 거면서, 이딴 말도 안 되는 내용이 베스트 셀러였다.

“엄마~ 엄마. 살려주세요. 무서워요. 흑흑. 무서워. 아인이 죽어요. 나 죽어. 날 죽일 거야. 나 죽이러 괴물이 왔어요.”

바닥에 주저앉아서 아이처럼 울었다. 두 팔을 간절히 내밀어 레이나의 치맛자락을 잡아당기며 애원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괴물이 나타나 그를 잡아먹으려는 것처럼 발을 버둥거리며 바닥을 기었다.

아인 페르디안이 어렸을 때 겪은 일로 큰 트라우마가 생겨 바깥출입을 못 한다는 걸 알긴 했지만, 이 정도인 줄 몰랐다. 시종들은 아인이 필사적으로 살려달라며 외치는 모습에 눈시울을 붉혔다.

단순히 페르디안 가문에 고용되어 일하는 시종들조차 그런데 부모 심정은 오죽할까. 레이나가 아인을 꼭 끌어안고 전령에게 빌었다.

“제 아이가 많이 아픕니다. 부디 황제 폐하께 흑흑, 황명에 불복하는 것이 아니라, 특수한 사정으로 그럴 수 없다고 잘 말씀드려 주시겠습니까. 흑흑.”

레이나가 다 큰 아들을 끌어안고 오열했다. 그녀의 품에서 아인이 계속 오들오들 떨며 괴물이 자길 죽일 거라고 중얼거렸다. 샤를은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기디언 백작을 죽여 10년 동안 면회도 안 되는 섬으로 보내져 감옥살이를 했지만,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그 새끼는 죽어 마땅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제가 직접 왔으니까.”

“으아아악. 아아악. 살려줘. 살려주세요. 엄마 아빠, 살려주세요.”

알렉세이가 황실에서 온 무리를 헤치고 나타났다. 그를 본 아인이 기겁을 하며 꿱꿱 비명을 질렀다. 울면서 소리를 지르는 중간중간 헛구역질까지 했다.

오메가이지만 덩치가 좋은 시종들이 일제히 도련님 앞을 가로막아 알렉세이의 접근을 막았다. 알렉세이가 숨넘어가기 일보 직전인 아인을 위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1황자가 평범한 백작의 아들을 보기 위해 말이다.

“아인아, 안녕. 나는 너랑 친구가 되고 싶어서 온 거야. 난 절대 괴물이 아니야. 알파가 다 나쁜 존재는 아니란다. 나처럼 착한 알파도 있어.”

성질 괴팍하기로 유명한 알렉세이가 아이 달래듯 아인에게 사탕을 내밀었다. 어떻게든 시종들 다리 사이로 아인의 얼굴을 보고 싶었으나 철통 방어벽을 뚫지 못했다.

아인이 울음을 멈추고 멈칫했다. 성공인가 싶었으나, 아인이 벌떡 일어나 2층 계단으로 도망쳤다. 1차 시도 실패였다.

***

페르디안 백작저에서 대대적인 공사가 시작되었다. 응접실에 가벽을 세워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만한 통로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알파를 무서워하는 아인과 알렉세이를 만나게 해주기 위한 장치였다.

“엄마, 1황자 전하 만나러 가기 싫어요~, 네? 제발요~.”

아인이 레이나의 팔을 잡아당기며 어리광을 부렸다.

“안 돼.”

단호한 거절에 아인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레이나는 마음이 약해져 얼른 아인을 달랬다.

“우리 아인이 착하지?”

아인이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터덜터덜 응접실로 들어갔다.

***

새롭게 공사한 페르디안 백작저 응접실에 들어서자 벽에 그림이 빼곡하게 걸려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테지만, S급 에스퍼인 알렉세이에게는 초상화 속 눈동자에 뚫린 구멍이 보였다. 비밀 통로에서 아인이 알렉세이를 관찰하기 위해 만들어진 외시경이었다.

“안녕, 아인아.”

대답은 없었다. 알렉세이는 눈이 뚫린 그림 중 유일하게 금안을 가지고 있는 초상화에 가까이 갔다.

“으아악. 다가오지 마세요.”

겁먹은 아인이 비명을 지르며 화냈다. 알렉세이는 한 걸음 물러났다.

“나한테 원하는 게 뭐예요. 왜 자꾸 찾아와요.”

“네가 내 가이드야. 아인아, 우린 태어날 때부터 서로의 짝이 되기 위해 태어난 한 쌍이라고.”

“아니에요. 1황자 전하의 짝은 다른 사람이에요.”

“매칭 검사를 해보자. 그럼 네가 내 가이드라는 걸 믿을 수 있을 거야.”

“그… 그런 거 안 해요. 날 잡아가서 고문하려고 그러는 거잖아요. 난 안 속아요.”

콩콩콩콩.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울리더니 더 이상 벽 너머에서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알렉세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씨발, 기디언 백작 새끼 무덤을 너무 쉽게 파괴한 듯했다. 그 새끼 시체를 꺼내서 열 받을 때마다 가루가 되도록 밟아야 하는데… 자신의 가이드는 완전 말이 안 통했다. 답답한 마음에 소파에 털썩 앉았다.

아픈 머리를 손으로 짚은 채 시름겨워하다가 응접실 벽에 걸린 그림들을 보게 되었다. 다음 만남에는 그림을 주제로 대화를 나눠봐야겠군.

그는 테이블에 놓여 있었으나 전혀 손을 대지 않았던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홍차를 한 모금 마시자마자 얼굴이 활짝 피어났다. 아인의 페로몬이 응축되어 있었다. 그가 알렉세이를 위해 차를 타 놓은 거였다.

좌절도 잠시, 우성 오메가의 페로몬에 홀려 벌컥벌컥 홍차를 다 마셔버렸다. 전신에 기운이 샘솟고 탁하게 오염된 에테르가 투명할 정도로 정화되었다.

다음에 왔을 때도 아인이 자신을 위해 홍차를 타 줬으면 좋겠다. 알렉세이는 아쉬움으로 입맛을 쩝쩝 다시며 자리를 떴다. 그는 그 홍차를 통해 희망을 얻었다.

만일 그 사실을 아인이 알았다면 알렉세이가 방문하기 전, 시종장 몰래 테이블에 놓인 홍차 안에 침을 뱉는 짓 따위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친 변태 새끼, 나가 뒈져. 퉤퉤.’

집착광공 욕을 하면서 말이다.

***

그 어느 나라에서든 성인이 된 귀족이 부모를 엄마 아빠라고 부르는 경우는 없지만, 그녀의 아들은 특수한 사건을 겪었기 때문에 레이나는 아직도 아인을 어린아이처럼 품에 넣고 키우고 있었다.

평생 마음에 걸리고 신경 쓰이는 자식을 흔히 아픈 손가락이라고 표현한다. 아인이 그녀에게 딱 그랬다.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죽을 것처럼 울어댔다. 병에 걸린 줄 알고 주치의를 불렀지만 어떠한 병명도 알아낼 수 없었다.

모유도 먹지 않은 채 울기만 하는 갓난아기. 이대로 힘들게 얻은 아이를 잃은 순 없었다. 레이나는 베타인 반면, 남편은 우성 알파였다. 그런 부부가 아이를 갖는 건 칠십 먹은 노인이 임신하는 일만큼이나 힘들었다.

그녀는 아인을 잃으면 영원히 그들 부부 사이에 아이가 생기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반드시 아이를 살리고 싶었다. 페르디안 가문에 후계자가 필요해서가 아니었다. 후계자는 방계 가문에서 똑똑한 아이를 데려와도 되는 일이었다.

그냥 사랑하는 남편과 자신을 닮은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는 ‘어머니’가 되길 바라는 것뿐이다. 수소문 끝에 인간 세상에서 의원으로 활동한다는 엘프, 디디를 찾았다. 디디는 레이나의 부탁에 흔쾌히 페르디안 백작저로 와줬다.

그는 굶어 죽어가고 있는 아인을 진찰하고는 놀라워했다.

“맙소사! 내 생애 S급 가이드를 보게 될 줄이야.”

‘가이드라니? 그건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서 각성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S급 가이드라고? 내 아이가?’

“넘쳐나는 닉스를 갓 태어난 몸으로 가지고 있으려니 고통스러워서 계속 우는 겁니다. 레이나, 내가 아인에게 가이딩 받아도 될까요?”

레이나의 품에 안긴 아인의 입에 디디가 검지를 넣었다.

아인이 디디의 검지를 쪽쪽 빨았다. 한참 그렇게 편안한 표정으로 레이나에게 안겨 있던 아인이 검지가 빠져나가자 또다시 울었다.

“으아아앙.”

“어서 아인에게 다시 검지를 물려주세요. 디디.”

“그게 아닙니다. 이제 아인은 배가 고픈 거예요. 레이나.”

“아!”

이렇게 기쁠 수가. 디디가 자리를 비켜줬다. 그녀는 얼른 드레스 상의를 내리고 가슴을 드러냈다. 아인이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젖을 물리자마자 허겁지겁 먹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젖을 먹는지 육안으로도 배가 볼록하게 솟아오르는 게 보였다. 그동안 얼마나 배고팠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레이나는 아인이 늘 걱정되었다. 성격 나쁜 1황자가 S급 에스퍼라는 사실이 밝혀진 뒤로는 더욱. 매일 밤 알렉세이가 자신의 아이를 알아차려 훔쳐 가는 악몽을 꿨다.

샤를은 절대 그럴 일 없다고 그녀를 달랬지만, 아니다. 그건 샤를이 몰라서 할 수 있는 소리였다. 1황자가 악귀처럼 자신의 아이를 빼앗으러 올 것이다. 레이나는 알 수 있었다. 아인의 엄마니까.

아인이 점점 커 갈수록 닉스 또한 엄청나게 늘어나 앓아눕는 일이 많아졌다. 그때마다 디디가 가이딩을 받아 갔지만, 아이는 짜증과 화가 많아졌다. 말을 잘 하지 않았고, 어둠 속에서 혼자 인형만 가지고 놀았다.

디디는 끊임없이 1황자에게 아인을 보내야 한다고 그녀를 설득했다. 그것만이 아인을 더 이상 힘들지 않게 하는 일이라고.

레이나는 화가 났다. 디디는 아인이 제 아이가 아니어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였다. 1황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 시종의 손목을 잘랐다는데, 그런 끔찍하고 무서운 에스퍼한테 자신의 아이를 보내라니.

‘왜요! 디디가 계속 아인이 입에 검지를 넣어주면 되잖아요.’

‘레이나. 난 고작 C급 에스퍼예요. 아인의 닉스는 계속 엄청나게 늘어나는데, 제가 흡수할 수 있는 양은 한정되어 있다고요. 이러다가 언젠가 아인이 어둠에 잡아먹힐지 몰라요.’

‘아니야! 아니라고! 내 아이는 평범한 아이란 말이야!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어!’

에스퍼에게는 에테르라는 빛이 있고, 가이드에게는 닉스라는 어둠이 있다. 에스퍼는 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에테르가 오염되어 가이드의 닉스로 정화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염된 에테르가 폭발해 죽는다.

반면 가이드가 가진 닉스는 에테르에 비해 안정성이 높았다. 가이드들은 닉스를 주지 못해도 죽지 않았다. 다만 그 누구도 깨우지 못하는 잠에 빠질 뿐이었다. 자신의 에스퍼가 와서 마법의 키스를 해줄 때까지.

10살 생일을 일주일 앞둔 시점, 갑자기 아인이 고열을 내며 쓰러졌다. 디디가 아인에게서 오메가 페로몬 냄새가 난다고 했다. 발현을 하려는 거였다. 그는 해열제와 진통제를 아인에게 처방해줬다.

레이나는 아인이 누운 침대를 떠나지 않고 보살폈다. 어둠이 자신의 아이를 가져갈세라 등불을 절대 꺼트리지 않았다. 오메가로 발현하느라 약해진 아인이 3일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디디가 와서 아인의 입에 검지를 물려봤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하루 종일 끌어안고 있어야 했다.

발현열이 식은 아인은 놀랍도록 밝은 아이가 되었다. 더 이상 어두운 방에서 혼자 웅크리고 있지 않았고, 어린 시종과 함께 놀이방에 가서 인형 놀이를 했다. 그런 아인의 모습에 시종들이 흐뭇하게 웃으며 일하는 모습이 곳곳에서 보였다. 레이나는 이 행복이 영원할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건 단 하루뿐이었다.

아인의 생일날이 되었다. 아인은 생일 파티에 참석한 친구들과 어울려서 놀았다. 드디어 모든 게 제대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아인과 제일 친하다며 싸우는 노엘과 제나드에게 잠깐 한눈을 판 사이, 끔찍한 사고가 일어났다.

샤를이 사라진 아인을 찾기 위해 복도와 연결된 연회장 문을 열자, 거기에 지옥이 있었다.

“꺄아아아. 아니야. 아니라고.”

그녀는 기디언 백작에게 끌려가던 아인을 발견했다. 샤를이 주먹으로 기디언 백작의 얼굴을 뭉개버렸다. 머리채가 잡힌 채 끌려가는 기디언 백작의 시선은 여전히 자신의 아이에게 꽂혀 있었다.

얼른 아인을 끌어안고 도망쳤다. 복도 바닥을 굴러 더러워진 아인을 욕실에 데려가 씻겼다. 언제나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노라 자신했건만, 그날은 그렇지 못해 아이 앞에서 울어버렸다. 아인이 그런 레이나를 위로해줬다. 그녀는 어느새 큰 품 안의 자식이 고마워 눈물을 흘렸다.

샤를은 그 사건으로 섬에 보내졌다. 감옥에서 10년 동안 면회도 못 하고 갇혀 살아야 했다. 레이나는 그의 형량을 줄이기 위해 황제 폐하께 알현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재판 결과를 인정할 수 없어 항소심을 준비했지만 변호사가 말렸다.

귀족을 살인하고 그 정도 형만 받은 건 샤를이 우성 알파이고, 귀족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판사가 아량을 베풀었는데 항소를 하면 밉보여서 오히려 형량이 늘어날 수 있단다. 할 수 없이 그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

10년. 정말 긴 세월이었다. 그 기간 동안 아인은 수없이 어둠에 삼켜졌다. 그때마다 디디가 잠든 아인을 찾아가 가이딩을 받았는데, 아인이 눈치챘는지 어느 순간부터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들었다.

샤를은 무사히 수감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고, 운명 또한 어느새 성큼 자신의 아이를 집어삼키기 위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1황자가 아인에게 자기를 만나러 오라는 초대장을 계속 보냈다.

디디는 아인의 닉스가 넘쳐나서 아이가 그리는 그림에까지 묻어나 1황자가 알아차린 걸 거라고 했다. 그러던 중 저택으로 황명이 날아들었다. 이른 아침부터 황제의 전령이 아인에게 황궁으로 당장 와 1황자와 매칭 검사를 하라는 말을 했다.

아인이 발작을 하며 두려워했다. 레이나를 찾으며 엉엉 울었다. 기디언 백작이 자신의 아이를 끌고 갔던 그날의 악몽이 또다시 눈앞에 펼쳐졌다.

‘아가, 너도 그 지옥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구나. 엄마도 그래. 엄마도 아직 그 지옥을 악몽으로 꾸곤 해. 아마 난 눈감는 날까지 널 지키지 못한 그날을 후회하겠지.’

절대 아인을 저택 밖으로 내보낼 수 없었다. 그런데 겁 많은 모자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1황자가 직접 나타났다. 아인과 더불어 사교 활동을 안 하는 레이나는 은회색 머리를 가진 그 사내를 그날 처음 봤다. 그는 소문처럼 몹시 위험해 보였다.

사람이 아닌 늑대가 자신의 아이를 잡아먹기 위해 몸을 낮추고 사탕을 내미는 줄 알았다. 아인은 경기를 일으키며 2층으로 도망갔다. 1황자 알렉세이가 그녀를 돌아보며 허리를 숙였다. 고작 백작 부인에게 말이다. 샤를 또한 놀라서 레이나와 함께 1황자에게 얼른 허리를 숙여 절을 올렸다.

“샤를 백작, 그리고 레이나 백작 부인. 괜찮다면 그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저택으로 초대해 주겠는가.”

“아… 네. 당연하죠. 이리 오시죠.”

시종장이 아닌 샤를이 직접 1황자를 모시고 응접실로 향했다. 1황자는 시종장이 차를 가져오는 잠깐도 참지 못하고 본론을 꺼냈다. 양탄자 위에 1황자가 무릎을 꿇고 백작 부부를 올려다봤다.

“1황자 전하. 이게 무슨! 어서 일어나십시오.”

샤를이 그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지만 그는 고집을 피우며 버텼다. 심지어 갑자기 존댓말까지 사용했다.

“백작의 아들과 정식으로 연애를 하고자 청합니다. 부디 허락해주십시오.”

“….”

“…아아.”

레이나는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감추고 막으려고 했으나 그녀는 그러지 못했다. 결국 만나야 할 자들은 만나고야 말았다. 잔혹한 성정의 1황자가 여린 자신의 아이를 상처 입힐까 겁났다.

1황자는 교제를 허락해줄 때까지 일어나지 않겠다며 엄포를 놓았다. 레이나는 과감하게 자리를 떴다. 마음씨 착한 샤를은 쩔쩔매며 1황자를 달래보았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레이나는 계속 1황자 곁을 지키려고 하는 샤를을 데리고 나왔다. 샤를이 방금 나온 응접실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냥 그대로 두세요.”

“하지만 레이나, 나중에 수틀려서 1황자 전하가 우리 가문을 처리하려고 들면 어떻게 해. 감정을 앞세울 일이 아니야. 예의를 다해 모시고 어떻게든 돌려보내야지.”

레이나도 그건 걱정되었다. 황실에서 폭탄 취급 받으며 권력에서 밀려난 1황자라 할지라도, 그는 이 나라 황자였다. 부부는 할 수 없이 응접실로 돌아가 1황자를 설득했다.

“1황자 전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어서 일어나주세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왜? 내가 나중에 꼬투리 잡아 그대들을 족칠까 봐서?”

섬뜩하다. S급 에스퍼가 부부의 대화를 들은 것이다. 1황자는 겁에 질린 그들의 얼굴을 보고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순순히 우리 연애를 허락하지 그래? 괜히 남의 순정 짓밟았다가 골로 가기 전에.”

‘아아, 아가. 이를 어쩌니? 어쩌다가 이런 미친놈의 가이드로 태어났어.’

레이나는 울음이 터져 나오려는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알렉세이가 입꼬리를 잔뜩 끌어 올리며 웃었다.

“방금까지 내가 뭘 하고 왔는지 알아? 내 가이드를 끌고 가려 했던 기디언 백작 무덤에 수백 개의 얼음 송곳을 던져 망가트리고, 그의 가족들이 살고 있는 저택을 찾아가 그곳을 다 불태워 버렸어. 너무 고마워할 필욘 없어. 자기 가이드를 위해 에스퍼가 그 정도도 못 해줄까.”

산뜻하게 말하는 태도와 달리 그 내용은 참혹하고 끔찍하였다. 그는 진정으로 레이나와 샤를이 고마워할 줄 알며 의기양양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녀가 어머니랍시고 1황자한테 걸 수 있었던 조건은 세 가지뿐이었다. 제멋대로 아인을 만지지 않을 것, 응접실에 가벽을 만들어 간접적으로 가이딩 받을 것, 흉포한 성정을 드러내지 않을 것.

1황자는 그 모든 조건을 수용했고, 아인이 태어나자마자 이뤄졌어야 할 그들의 만남은 그렇게 이뤄지게 된 거였다.

***

아인은 교무실에 끌려가는 불량 학생처럼 응접실에 들어갔다. 알렉세이가 오기 전, 먼저 이곳을 지나 비밀 통로에 들어가 있어야 했다.

성실하고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시종장은 오늘도 불청객을 위해 최고급 홍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솔직히 알렉세이한테는 차 한 잔도 주기 아까워서 속 쓰렸다.

“도련님,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종을 흔들어주세요.”

시종장은 자신을 걱정하는 주제에 혼자 두고 가버렸다. 테이블에 놓인 종을 당장 마구 흔들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대신 홍차에 침을 퉤, 뱉었다.

알렉세이가 아직까지 자신에게 해악을 끼친 건 아니었지만, 자신도 이유 없이 이러는 건 아니었다. 그는 대화하는 내내 볼록하게 바지춤에 텐트를 치는 상종 못 할 극악무도한 변태였다.

소름 끼쳐서 당장 우리 집에서 꺼지라고 내쫓고 싶지만, 자신은 고작 백작 아들에 불과한지라 1황자한테 대놓고 불만을 표할 수 없었다.

종을 챙겨서 얼른 비밀 통로로 들어갔다. 벽에 있는 외시경을 통해 응접실 안을 감시했다. 혹시라도 자위 같은 변태 짓을 하면 바로 종을 흔들어서 시종들을 불러 개망신을 줄 거다.

똑똑. 뻔히 이 시간에는 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 알렉세이가 문에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약속은 쓸데없이 잘 지켰다. 하루쯤 안 와도 뭐라고 할 사람 없는데 약속 시간조차 늦는 법이 없었다. 이 정도 성실함이면 개미가 형님 하겠다.

“안녕, 아인아. 잘 지냈어?”

“….”

“네가 제나 쿠키를 좋아한다고 해서 사 왔는데, 혹시 같이 먹을래?”

원래 약속은 벽을 사이에 두고 대화만 나누는 건데 알렉세이가 귀여운 곰돌이 모양 틴 케이스를 꺼내 자신에게 나오라며 유혹했다. 오메가 친구들이 가끔 사다 주는 존맛탱 가게의 쿠키였다.

유명한 맛집이라 몇 시간씩 줄을 서지 않으면 사지 못하는 거라 가끔씩만 먹을 수 있었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홀린 듯이 비밀 문을 열고 응접실로 나갈 뻔했지만 얼른 정신 차렸다. 쿠키에 최음제를 뿌렸을 수도 있었다.

괜히 멀쩡하고 친절한 사람을 오해하는 게 아니었다. 다 원작에 나와 있던 광공의 만행이었다. 이 새끼는 악역수가 마시는 음료나 음식에 오메가 발정제를 섞어놓고는, 발정 나서 괴로워하는 악역수를 비웃었다.

“테이블에 올려둘게. 나중에 먹어.”

“…고맙습니다.”

잘 모셔뒀다가 나중에 제이콥 만나면 선물해줘야겠다. 메인수랑 메인공이 얼른 꿍짝꿍짝 떡을 쳐야 자신도 이 이상한 만남을 계속 이어나가지 않을 테니 말이다. 도대체 메인수는 언제 등장하는 걸까.

자신이 최음제 쿠키를 먹고 발정 날 걸 상상했는지 알렉세이가 음흉하게 웃으며 테이블에 놓인 찻잔을 들어 홍차를 마셨다.

바지를 무슨 히어로 영화에 나오는 쫄쫄이 스판처럼 강철로 만들었는지, 허벅지만 한 좆이 발기했는데도 용케 찢어지지 않았다. 하긴 코끼리도 냉장고에 들어간다는 류의 소설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선 안 됐다.

“아인, 여기 걸린 그림들은 네가 다 그린 거야?”

무슨 꿍꿍이인지 짐작할 수 없어서 쉽게 대답이 안 나왔다.

“…네.”

“너한테 그림을 의뢰해도 될까? 네 자화상을 갖고 싶은데.”

“…그… 명령이신가요?”

“응.”

상큼하게 1황자의 명령이니 하나 그려달라고 한다. 보통 제대로 된 인격체라면 ‘아니야, 그냥 부탁이었어. 네가 부담되면 그려주지 않아도 돼.’ 할 텐데. 역시나 인성 쓰레기란 명성은 그냥 생기는 게 아니었다.

“저는… 굉장히 평범하게 생겨서 굳이 그림으로 남길 만한 대상이 아니에요. 절 그리는 건 캔버스, 물감, 시간 아까운 일이에요.”

“괜찮아. 그냥 눈, 코, 입만 있으면 돼.”

왜 자신의 외모를 궁금해하는지 모르겠다. 거절하고 싶은데 명령이라고 말해서 그럴 수도 없었다. 상대가 싫어하는 걸 충분히 느꼈을 텐데도 알렉세이가 “부탁할게.” 하면서 확신 사살을 날렸다.

알렉세이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는 미술관 전시회를 관람하는 사람처럼 천천히 벽에 걸어둔 그림들을 따라 걸었다. 굳이 그를 따라 이동할 필요 없었지만 아인도 비밀 통로를 걸었다.

만일 광광 작가의 소설을 읽지 않았다면, 여자를 좋아하는 자신조차 반할 만한 외모였다. 왠지 모르게 손바닥에 땀이 차올라 바지에 문질렀다.

초상화의 텅 빈 눈동자를 자신의 금안이 채울 때마다 은회색 눈동자와 마주치는 기분이 들었다. 몇 번이고 그런 일이 반복되니까 뭐랄까.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두 뺨이 화끈거리고, 마른침이 꼴딱 넘어갔다. 잘생긴 변태를 봐서 많이 놀랐나 보다.

“아인아. 나는 그림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네 그림은 정말 멋진 것 같아. 네 덕분에 자연 풍경도 사람의 감정을 담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

인상주의 개념이 없는 세계에서 정확하게 제 그림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가 진지하게 자기 감상을 솔직하게 말해줬다. 가족 이외의 사람들한테 그림에 대한 날것의 감상을 들은 적이 없는지라 무척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이번에 열린 전시회, 무척 좋더라.”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할 정도로 막강한 당근이었다. 그가 무시무시한 집착광공이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움직였다. 그에 대한 안 좋은 소문과 소설 속 이미지를 걷어내고 보니, 알렉세이가 그다지 나쁜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큰일이었다.

슬그머니 경계심을 풀고, 알렉세이를 보았다. 결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황금비율이었다. 뜨겁게 달군 쇠를 수천, 수만 번 담금질해 만들어낸 명검이 만일 사람이 된다면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싶다. 날카롭고 차가우며 사람을 해하는 주제에 아름답다.

넋 놓고 알렉세이를 보고 있는데 그가 초상화로 다가왔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고, 그의 입술이 그림에 닿았다.

“그럼 내일 또 보자.”

뚜벅뚜벅 걸어가는 듬직한 뒷모습을 한참 지켜보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뭐야, 뭐냐고. 나 남자랑 키스한 거야? 아니지. 중간에 벽이 있었으니까 이건 전혀 입술이 닿지 않았어. 그런데 왜 이래. 내 심장.’

벌떡벌떡 뛰어대는 심장 때문에 숨이 벅차올랐다. 한참 넋 놓고 있다가 해파리처럼 흐물흐물 일어났다. 후다닥 방으로 도망쳐 침대에 그대로 다이빙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이게 다 그 변태 새끼가 잘생겨서 그래. 난 아무 문제 없다고!”

맞다. 아무리 이성애자라 할지라도 알렉세이는 주인공 버프를 받아 장님이 아닌 이상에야 반할 수밖에 없는 얼굴이었다.

허공에 동동 떠다니는 알렉세이의 머리통을 팔로 휘저어 없애버렸다. 절대 잊어선 안 된다. 알렉세이는 다리가 세 개라는 걸.

혹시 가능할까 싶어 바지에 손을 넣고 뒤를 만져봤다. 어림잡아도 절대 불가능한 도전이었다. 얼굴에 반해서 뒤를 내주기에는 무리다.

더군다나 알렉세이가 어떤 공이란 말인가. 바로 절륜공이었다. 그렇게 좆이 크면 성욕이라도 없어야 하는데 19금 BL 소설은 박히는 자에게 무자비했다.

알렉세이는 악역수와 처음 잤을 때, 일주일 동안 밥만 먹이며 좆질을 했다. 기절해도 좆질, 목욕하면서도 좆질, 잠잘 때도 좆질.

이쯤 되면 <집착광공은 능욕을 멈춰!>는 단순 BL이 아니라 섹스를 위해 만들어진 안드로이드가 공으로 등장하는 SF 소설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얼른 자신 안에서 깨어나려는 연애 세포를 죽여버렸다. 그런 건 19금밖에 내용이 없는 BL 소설에 빙의한 자신한테는 필요 없었다.

어느 정도 이성을 찾은 아인은 침대에서 일어나 작업실에 갔다. 1황자에게 자신의 자화상을 받고 싶다는 말을 들었으니, 적당히 그려서 줘야 했다. 거울을 가져와 얼굴을 살피고 캔버스에 옮겼다.

금발과 금안, 햇빛을 못 봐서 창백한 하얀 피부, 복숭앗빛 뺨, 붉은 입술. 이쪽 세계에서는 무척 흔해 빠진 외모였다. 그런데 작업실에 간식을 가져다주러 온 시종장이 호들갑을 떨며 사람을 불안하게 했다.

“도련님, 너무 아름다운 자화상입니다. 미의 여신 디페트리아께서 보시고 질투하시면 어쩔까 두려울 정도입니다. 그래도 역시 실물만 못 하네요.”

아무래도 본래 모습보다 너무 잘생기게 그린 듯했다. 나름 똑같이 그린다고 했는데 역시 남자란 성별과 자뻑 필터는 떼려야 뗄 수 없는가 보다. 시종장이 돌아가고 자화상을 다시 봤다.

턱에 살을 붙이고, 눈을 작게 고쳤다. 코 주위를 하얗게 칠해 콧대를 평평해 보이게 하고, 날렵한 몸체에 뱃살을 추가했다. 이 정도면 되려나?

어쩐지 자신보다 제이콥을 떠올리게 하는 외모였다. 알렉세이의 미적 취향은 아주 독특했는데, 두턱이랑 뱃살을 좋아했다.

제이콥의 두턱을 혀로 빨거나 뱃살을 손으로 조물조물하는 걸 좋아한다고 소설에 나왔었다. 섹스를 하도 해 제이콥이 날렵한 턱선과 가느다란 허리를 가지게 되자 얼마나 슬퍼했는지 모른다.

물론 알렉세이가 초반부터 그런 제이콥의 외모를 좋아했다고 나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것은 숨겨진 취향을 아직 깨닫지 못한 탓에 지랄했던 것뿐이니, 알렉세이가 다른 평범한 사람들과 같은 심미안을 가지고 있다고 오해하면 절대 안 됐다.

자신은 BL 초심자라 그런 알렉세이의 변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었다. 평범한 아저씨에 불과한 제이콥이 뭐가 좋다고 저렇게 잘생긴 공이 물고 빠나, 인터넷에 자문을 구해봤다. 독자들이 ‘입덕 부정기’란 용어를 설명해줬다.

입덕 부정기는 상대를 좋아하는 걸 자각하지 못해 괴롭히는 건데, 초반에 공에게 흔하게 나타나는 지랄병을 뜻했다. BL 소설에서는 자주 쓰이는 클리셰라 하였다.

그러니 제이콥한테 ‘추남. 돼지. 오크.’ 욕하던 알렉세이가 갑자기 UFO에 납치당했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내 콥콥이 예쁘다.’ 추앙하는 변화에서 개연성을 찾아선 안 됐다.

아인은 혹시라도 제이콥을 닮은 자신의 자화상을 보고 나중에 알렉세이가 자각하지 못한 제 취향을 깨닫고 ‘내 아인이 예쁘다’ 할까 봐 걱정되었다.

“으으. 끔찍해.”

얼른 자화상을 수정해야 했다. 그런데 원래 모습으로 되돌리면 실제 외모보다 잘생긴 자화상 때문에 아직 제 취향을 자각하지 못한 알렉세이가 호감을 가지게 될 터였다.

그렇다고 두턱 뱃살 버전으로 놔두면 나중에 새로운 취향에 눈을 떴을 때, 턱살성애자가 이 자화상을 자신의 실물인 줄 알고 호감을 가지게 될 터였다. 진퇴양난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결정을 내렸다. 검은 물감을 사용해 슬라임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인물을 만들어냈다. 설마 블랙 슬라임을 보고도 호감을 가지게 되진 않겠지?

***

“이게 뭐지?”

천재 화가 아인 페르디안이 자화상이라며 건넨 그림 속 검은 물질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금방이라도 검은 물질이 그림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이 생동감 넘쳤다. 쓸데없는 데 재능 낭비를 심하게 했다.

“1황자 전하가 제 자화상을 보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이게 너라고?”

“네.”

가벽 뒤에서 아인이 당차게 대답했다.

“넌 금발이잖아.”

“…그렇지만 저는 이렇게 생겼어요.”

“이건 사람이 아닌데?”

“절 보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그게 저예요. 전 엄청 음침하고 못생기고 세상에서 제일 하찮은 생명체예요. 그러니까 더 이상 저한테 신경 쓰지 마세요.”

아인이 검은 물질을 자기라고 우겨댔다. 슬라임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데, 계속 보다 보니까 귀여운 것 같았다. 품에 꼭 끌어안고 키스해주면 동화 속 왕자님처럼 사람으로 변했으면 좋겠다.

“너 괜찮은 거 맞지?”

“뭐가요?”

“아니야… 오늘은 과일 타르트를 사 왔어. 같이 먹어보지 않을래?”

역시나 오늘도 아인은 가벽 뒤에서 나오지 않았다. 알렉세이는 테이블에 타르트를 올려둔 채 아인의 자화상을 들고 응접실을 나왔다. 문 너머에서 소심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인기척은 작은 동물처럼 경계심을 가득 품은 채 테이블 주위를 팽팽 돌고 있었다. 아인이 “맛있어 보인다. 아니야, 먹으면 죽을지 몰라.” 하면서 혼잣말을 했다. 그가 타르트에 독극물을 타 놓았다고 믿는 듯했다.

알렉세이는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황궁으로 공간 이동을 했다. 침실에는 그동안 모아둔 아인의 그림들이 빼곡하게 걸려 있었다.

아름다운 페르디안 백작저의 자연 풍경과 다정하게 웃는 선량한 페르디안 시종들의 초상화 사이에서 검은 슬라임의 존재감이 어마어마했다.

알렉세이는 아인의 자화상을 벽에 걸어두고 그 앞에 한참 서 있었다. 이대로 아인이 괜찮을지 걱정되었다. 정신 건강이 많이 안 좋아 보였다.

몸이 아프면 치료를 받으면 되는데, 마음은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정신계 능력으로 아인의 과거를 살짝 지워줄 생각이었다. 때로는 없어도 되는 기억도 있는 법이라는 걸 알렉세이는 잘 알고 있었다. 그 또한 그런 기억이 있었다.

침실에 그림을 걸어두고 통신 마도구로 조세핀을 불렀다. 그는 마탑주랍시고 자기가 얼마나 바쁜 줄 아냐고, 사람을 왜 오라 가라 하냐며 툴툴거렸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조세핀은 한걸음에 알렉세이가 지내는 궁으로 건너왔다.

“헉. 이 기괴한 그림은 뭡니까. 자다가 꿈에 나올까 무섭네.”

조세핀이 기겁을 하며 그림을 흉물스러워하며 멀리 떨어졌다.

“왜 그래, 그러지 마. 우리 아인이가 그려준 자화상이란 말이야.”

알렉세이는 그림 속 검은 슬라임의 귀로 추정되는 부분을 손으로 막았다. 나쁜 소리는 듣지 마. 아인아.

“…드디어 미쳤나?”

“조세핀! 못 하는 말이 없어. 내 가이드가 왜 미쳐!”

“허. 혼잣말도 못 합니까. 정말 폭군이 따로 없네. 자기 가이드라고 편드는 것 봐.”

조세핀이 신기하다는 듯 아인의 자화상에 다가가 그림을 자세히 구경했다. 와, 대박. 제정신이 아니야. 본인 모습이 이렇게 생겼다고 믿는다고? 천재라서 미친 거야? 아님 미쳐서 천재인 거야?

이런저런 말들을 늘어놓던 조세핀이 무언가 생각하는 듯싶더니, 손바닥을 주먹으로 탁하고 쳤다.

“1황자 전하. 아직 기억 지우는 능력 사용 안 하셨죠?”

“어. 왜.”

“나베리우스가 죽으면 비단이 나오는데, 그 비단을 가지고 옷을 지어 입으면 엄청난 자기애가 생기거든요. 아인 공자한테 선물해주면 조금 정신 상태가 나아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베리우스는 학처럼 생긴 마물이었다. 강한 마물은 아니지만 던전에서 잘 발견되지 않는 편이었다.

“자기애만 문제인 건 아닌 것 같은데, 뭐 괜찮은 생각이네. 던전 자료 좀 보내줘.”

조세핀이 알겠다며 마탑으로 돌아갔다.

침실에 선물 받은 그림을 가져다 놓은 알렉세이는 다시 페르디안 백작저로 공간 이동했다. 저택 곳곳을 돌아다니며 아인의 생활을 관찰해 보고하는 임무를 맡은 첩자를 찾았다.

첩자는 창고에서 뒤로 팔이 묶인 채 같은 오메가한테 강간당하고 있었다. 불을 다루는 자연계 B급 에스퍼이고, 전문적으로 살수 훈련을 받아 몸이 무기인 첩자인데 말이다. 저 오메가가 보기와 달리 엄청난 강자인가 싶었다.

“아앙. 아앙. 싫어. 그만, 그만해. 제발.”

첩자에 비해 체구가 작고 선이 가는 오메가가 첩자의 근육질 엉덩이를 때리며 구멍에 좆을 쑤셔 넣었다. 도와줘야겠다 싶어서 모습을 드러내던 도중, 천장에 매달려 있던 알렉세이와 첩자의 눈이 마주쳤다.

첩자의 엄청난 근육질 가슴을 오메가가 예쁜 손으로 찌부러트리듯 우악스럽게 움켜잡았다. 첩자의 거대한 페니스에서 정액이 뿜어져 나왔다.

알렉세이는 첩자가 지금 입으로는 싫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좋아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정신을 조작해 둘의 시야에서 자신의 모습을 지웠다. 둘에게 지금 그는 투명 인간이었다.

앞으로 아인과 섹스해야 하는데 마침 좋은 기회 같았다. 학습 자료로 그들의 정사를 보기로 했다. 오메가가 첩자의 볼기짝을 다시 찰싹 때렸다.

“걸레 새끼야, 제대로 조여.”

“흑흑. 훌쩍.”

첩자가 청승맞게 울었다. 만일 그가 강한 에스퍼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깜빡 속을 뻔했다. 좆에 박혀 흔들릴 때마다 큰 가슴이 출렁이는 모습이 굉장했다.

우리 아인이도 저렇게 큰 가슴을 가졌을까 궁금했다. 왠지 아닐 것 같았다. 커튼 뒤 그림자는 몹시 우아하고 가녀린 느낌이었다. 춤을 추는 무희처럼 선이 곱고, 팔다리가 길었다. 완전히 다른 유형이었다.

저 오메가에 자신을 대입하고, 첩자에 아인을 대입해서 섹스하는 모습을 상상해봤다. 상상 속 자신이 아인의 엉덩이를 때리며 걸레라고 말했다. 가뜩이나 자기 모습을 검은 슬라임이라고 우기는 아이였다. 맞는 걸 좋아하지 않는 이상 더 정신이 망가질 것이다.

그래도 삽입할 때 가볍게 엉덩이를 때리는 건 괜찮을 듯싶었다. 걸레라고는 하지 말고 예쁜이라고 불러줘야지 싶었다. ‘예쁜아. 구멍 조여.’ 하고. 하아, 씨발. 자지 터질 것 같아.

상상 속에서 검은 슬라임한테 박아 넣고 있는데도 기분이 좋았다. 이러다가 이상한 성벽이 생기겠다. 앞으로 던전에서 슬라임 볼 때마다 우리 아인이 생각나서 못 죽이면 어쩌나 걱정될 정도다.

알렉세이는 이제 어떻게 섹스를 하는지 방법을 배웠으니, 나중에 잘 활용해 먹기로 했다. 둘이 열심히 하라고 자리를 피했다.

한참 지난 후에 오메가가 먼저 창고를 빠져나갔다. 첩자가 팔을 묶은 밧줄을 불태워서 없애버렸다. 그가 알렉세이를 발견하고는 알몸으로 부복했다.

“1황자 전하 오셨습니까.”

“일단 옷부터 입지.”

“감사합니다.”

첩자가 얼른 시종 옷을 챙겨 입었다.

“이런 취미가 있는지 몰랐는데 놀랍군.”

“크흠. 아직 어린 군주께 이런 모습을 보여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나도 알아둬야 나중에 내 가이드한테 써먹지. 좋았어.”

처음으로 본 정사가 충격적이어서 자꾸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이곳에 온 본론을 상기했다.

“아인에게 옷을 선물하려고 하는데 치수를 몰라서.”

“아, 알겠습니다. 오늘 안에 조사해서 보고서를 올리겠습니다.”

“응. 수고해. 우리 아인이 잘 감시, 아니 보살피고.”

“넵. 살펴 가십시오.”

알렉세이는 태연스럽게 남의 저택을 제집처럼 돌아다녔다. 오메가 시종들이 눈을 사납게 치켜뜨고 계단 앞을 막아섰다. 자기 도련님을 보러 가지 못하게 막는 거였다. 웃으면서 현관으로 가자, 그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멍청이들이었다. 누가 말리면 못 가는 줄 알아? 3층에 있는 베란다가 이제 알렉세이의 침실이었다. 바닥에 두툼한 러그가 깔려 있어서 눕기도 좋았다. 커튼 안쪽에서 아인이 소파에 앉아 책을 읽었다.

그가 책을 읽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좋았지만, 가끔 무슨 책을 읽는지 직접 보고 싶긴 했다. 능력을 사용하면 첩자와 오메가를 속였듯 기억을 조작해 투명 인간이 될 수 있었지만, 알렉세이는 그러지 않았다.

아마 오메가 아버지, 제논이 살아 있다면 알렉세이의 이런 선택에 잘했다고 칭찬해줬을 거다. 책을 다 읽었는지 아인이 침대로 올라갔다. 꼬물꼬물 움직여서 침대 옆 마법등을 끄러 가는 행동이 몹시 귀여웠다.

만약 같은 침대에 알렉세이가 누워 있었다면, 그는 팔을 뻗는 것만으로도 마법등에 손이 닿아 아인이 풀잎에 앉은 애벌레처럼 귀엽게 굴지 않아도 됐을 터다. 알렉세이는 커튼을 향해 손을 뻗었다. 천천히 아인의 그림자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잘 자, 아인아. 오늘은 부디 악몽을 꾸지 말길 바라.’

***

밤새 베란다에서 도둑 가이딩을 받은 알렉세이는 아침이 되자 황궁으로 돌아갔다. 조세핀과 첩자에게 부탁해놓은 보고서가 책상에 있었다. 제일 먼저 아인의 신체 사이즈를 확인했다.

알렉세이의 키는 188cm다. 아직도 성장 중이라 얼마나 더 클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아인은 고작 172cm였다. 평균적인 남자 오메가의 신장이었지만, 그의 머릿속에서 아인은 하얗고 작은 아기 토끼가 되어 있었다.

검은 슬라임이어도 귀엽다고 할 때는 언제이고, 그 이미지는 저 멀리 기억 속에서 치워버렸다.

아기 토끼가 된 아인의 크기는 점점 줄어들어 어느새 손바닥에 올려둬도 되는 크기로 변해 있었다. 누가 훔쳐 갈세라 얼른 철장을 가져와 아인을 넣어뒀다.

몸무게는 알렉세이가 90kg인데, 아인은 고작 57kg이었다. 키도 몸무게도 너무 차이가 많이 나서 아인이 나중에 좆질 당할 때 많이 버겁겠다 싶었다. 또한 알렉세이는 아인의 어깨너비는 물론, 팔다리 길이와 허리둘레까지 알아냈다. 허공에서 두 손을 모아 아인의 허리를 가늠했다. 아직 손도 못 잡아본 주제에 어이없게도 허리 잡고 섹스했다가 부러지겠다는 걱정을 했다.

밤새 같이 있다가 왔는데도 또 보고 싶어서 죽겠다. 얼른 자화상으로 달려가서 그를 봤다. 아인의 페로몬이 남아 있는 그림이 안정감을 줬다. 에테르가 몹시 안정화된 상태이기 때문에 굳이 그림 속 닉스를 빼먹는 짓은 하지 않았다.

알렉세이는 멍하니 검은 슬라임을 보다가 시종에게 하얀색 물감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리고 천재 화가 아인 페르디안의 그림을 훼손하는 아주 대단한 짓을 해버렸다.

그는 하얀 물감으로 검은 슬라임 얼굴에 토끼 얼굴을 그려 넣었다. 예쁘게 그려지지는 않았지만 토끼 가면을 쓴 검은 슬라임이 예전처럼 음습하거나 우울해 보이지 않았다. 알렉세이는 나름 뿌듯해하며 조세핀이 가져다 놓은 던전 기록 보고서를 살폈다.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던전을 돌면서 나베리우스를 잡을 예정이었다.

알렉세이는 보고서에 적힌 좌표를 보고 공간 이동을 했다. 뜨거운 모래사막 위 광활한 모래 언덕과 태양밖에 보이지 않았다. 알렉세이는 던전을 은폐하고 있던 모래를 손짓 한 번에 날려버리고 그곳에 들어갔다. 큰 이빨을 가진 독사가 양날 검을 들고 있었다. 손에서 번개를 뿜어내 독사를 태워버렸다.

마구잡이로 번개와 불을 번갈아 던졌다. 전혀 힘들지 않았다. 이제 알렉세이에게는 그의 목숨을 저당 잡고 있는 사랑스러운 가이드가 함께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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