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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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계를 지배하기 위해 마계에서 포털을 열고 마물을 보내기 시작한 지 벌써 수천 년. 인류는 에스퍼를 앞세워 그들의 터전을 지켜나가고 있었다.

마계 포털은 던전 형태로 인간계에 나타났다. 일주일이란 기간 동안 보스를 처치해 던전을 클리어하지 못하면, 던전 안에 있는 마물들이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마물을 처치할 수 있는 에스퍼가 추앙받는 풍토가 세상에 자리 잡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때문에 능력자로 각성하면 높은 직위와 어마어마한 수입을 얻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존재가 되었다. 물론 모든 능력자들이 그렇게 사는 건 아니었다. 제이콥은 길드 나달에 소속된 C급 가이드인데, 흔한 등급과 별로인 외모 때문에 그다지 인기 있지 못했다.

물론 C등급도 다 같은 C등급인 건 아니었다. 같은 등급이어도 가이드의 외모가 좋으면 에스퍼들이 선호했고, 수입 또한 좋았다. 운이 좋으면 C등급이어도 상위 에스퍼를 만나 각인을 하고, 결혼을 할 수도 있었다. 물론 그것들 모두 제이콥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미드셀라 숲에 F등급 던전이 나타났다는 소식에 제이콥이 소속된 팀이 던전에 투입되었다. 마물들을 죽이고 나오는 보물과 아이템들은 고가에 거래되었다.

그들의 임무는 최대한 마물들을 많이 죽여 그것들을 습득하고, 보스를 처리하는 거다. 아무리 F등급이라지만, 에스퍼들은 던전 마감일이 앞으로 하루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만만하게 여겨 여유를 부렸다.

보스를 무찌르지 않는 한, 던전 안의 마물들은 무한으로 재생됐다. 보물과 아이템에 눈이 멀어 최대한 던전 클리어를 질질 끄는 거였다. 6일 내내 에스퍼 다섯을 가이드를 해야 하는 제이콥만 죽어 나갔다.

“윽윽.”

마물 사냥을 끝낸 다섯은 돌아가며 제이콥의 구멍에 좆질을 했다. 제이콥이 소속된 팀 에스퍼들은 그를 사람이 아닌 욕망 배출구 정도로 여겼다. 다른 가이드 같으면 절대 그들과 같은 팀에 소속되어 가이딩해 주지 않았을 테지만, 제이콥은 아니었다.

제이콥은 그런 쓰레기 대우를 받으며 제가 피해자인 걸 즐기는 피학성애자였다. 알몸으로 흙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섹스를 해서 무릎과 팔꿈치가 죄다 까져 피가 났다. 에스퍼들은 제이콥의 외모를 비하하며 그의 몸에 정액을 뿌리고 더럽혔다.

“씨발, 야, 근육 돼지. 뭐 하냐? 너 때문에 내 좆이 더러워졌는데. 빨리 청소해야 할 거 아니야.”

제이콥의 목구멍에 좆을 처박고 펠라를 하던 에스퍼1이 사정을 하고, 제이콥의 얼굴을 좆으로 때렸다. 뒤에서는 다른 에스퍼가 그의 질펀한 엉덩이를 붙잡고 손으로 때려가며 좆질을 했다.

제이콥은 펠라를 해서 더러워진 좆을 혀로 할짝거려 남아 있는 정액을 깨끗이 먹었다. 뒤에서 에스퍼2가 몸을 푸르르 떨더니 그 직후 제이콥의 배 속에 거센 물보라가 몰아쳤다.

“아아, 안 돼. 안 돼요. 오줌 싸지 마세요. 으흑흑흑.”

“킥킥. 얘 뭐래. 야, 변기한테 오줌을 싸지, 그럼 어디에 싸.”

제이콥은 두툼한 허벅지를 끌어당겨 몸을 웅크렸다. 피둥피둥한 엉덩이와 붉게 부어오른 구멍에서 지린내 나는 오줌이 흘러내렸다. 근육과 지방이 적절히 섞인 이 완벽한 몸매를 가지기 위해 제이콥은 혹독한 식습관을 유지하고 있었다.

튼튼한 팔뚝으로 몰캉몰캉한 가슴을 한껏 끌어모아 가리는 척했다. 팔뚝 위로 솟아오른 붉은 젖꼭지가 참으로 음란하였다.

“야! 다음은 내 차례인데 더럽게 오줌 싸고 지랄이야. 이게 죽으려고.”

차례를 기다리던 에스퍼3이 오줌을 싼 에스퍼2의 머리통을 때렸다. 그들이 치고받고 싸우는 틈을 타, 처연하게 우는 제이콥을 따먹기 위해 여태 사용할 구멍이 없어 손 빨고 있던 에스퍼4가 움직였다.

그가 오줌이 흘러내리는 구멍에 좆을 박았다. 그러자 에스퍼5가 합세해 제이콥의 구멍에 자지를 넣었다. 구멍은 하나인데 자지는 둘이라 제이콥의 쾌감 또한 몇백 배 뛰었다.

“아앗. 앙. 안 돼~. 흑흑. 안 돼~.”

던전을 클리어하러 왔는지, 아님 떡을 치러 왔는지 모를 에스퍼 다섯과 가이드 하나였다. 결국 사고는 방심하다가 일어났다. 어이없게 섹스하느라 F급 던전을 C급 에스퍼 다섯이 클리어하지 못해 던전 게이트가 열리고 만 것이다. 마물들이 던전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씨발, 좆 됐다. 이걸 어쩌지?”

에스퍼1이 통신 마도구로 길드 나달에 지원 요청을 보냈다. 그러나 던전 보스는 비행형 마물인 가고일이었다. 가고일은 순식간에 미드셀라 숲을 날아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사라졌다. 빼도 박도 못할 징계감이었다.

아니, 이 정도면 길드에서 퇴출되고도 남았다. 에스퍼 다섯 명은 뒤늦게 보스 가고일을 잡기 위해 숲을 쥐 잡듯이 뒤졌다. 가이드여서 신체적인 능력이 일반인과 같은 제이콥은 그들을 뒤쫓을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혼자 뒤처져서 마물을 피해 도망쳤다.

에스퍼에게는 별것 아닌 마물들이었지만, 그에게는 생명의 위협을 느낄 만큼 위험한 존재들이었다. 일주일 내내 다섯 명과 섹스를 하느라 구멍도 성치 않은 몸으로 제대로 도망갈 수 있을 리 없었다. 결국 제이콥은 얼마 가지 못해 넘어지고 말았다.

머리가 세 개 달린 새, 나베리우스가 그의 주위를 에워쌌다. 이대로 죽는구나 싶었다. 제이콥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살점을 파헤치는 새의 부리 대신 뜨거운 액체가 얼굴을 뒤덮었다. 제이콥은 눈을 뜨고 확인했다.

수십 마리의 마물들이 순식간에 목이 잘려 죽어 있었다. 이 압도적인 힘은 절대 같은 팀 에스퍼의 능력이 아니었다. 제이콥은 마물을 죽인 자가 누구인지 뒤돌아보았다. 그는 은회색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진 미남이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S급 에스퍼 알렉세이 유르한이었다.

“아…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재수 없는 새끼가 감사 인사를 들은 척도 안 하고, 마물이 떨어트린 비단을 주웠다. 1황자에게 가이드가 없어서 능력을 사용하지 못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뭐지?

“1황자 전하 맞으시죠? 저는 길드 나달에 소속된 C급 가이드 제이콥이라고 합니다. 혹시 제가 주제넘지 않는다면 생명의 은인인 1황자 전하께 감사 인사를 올리고 싶은데, 괜찮으실까요?”

“아니, 주제넘어. 하지 마.”

알렉세이가 나베리우스의 비단을 다 줍고 그냥 가려고 했다.

“1황자 전하, 제발 마을이 나올 때까지만 같이 가주세요.”

제이콥은 큰 가슴을 출렁이며 달려가서 알렉세이에게 바짝 따라붙었다. 혐오스럽다는 듯 내려다보는 눈빛이 무지 재수 없었다.

‘눈깔 봐라. 완전 쌍욕 나오네. 왜 이렇게 재수 없어? 생긴 게 좆같이 예뻐서 봐주마. 새끼야, 네가 지금은 날 개무시하지만 결국 너도 나중에 나한테 함락돼서 내 구멍 없으면 못 살걸?’

제이콥은 제 속내와 달리 울먹이는 눈망울로 알렉세이를 올려다봤다.

“난 마물들 다 잡을 때까지 마을에 갈 생각 없으니까, 살고 싶으면 너 혼자 숲을 벗어나도록 해.”

알렉세이가 못 볼 것 봤다는 양 헛구역질을 하며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자존심 상한 제이콥은 이놈을 꼭 제 주인놈으로 삼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가만 보자. 알렉세이를 낳은 오메가 황후가 C급 가이드였다고 했던 것 같은데. 어디 잘 엮어서 이야기 만들어 봐?’

알렉세이를 낳은 제논은 C급 가이드이지만 외모가 몹시 아름다워 황제와 연애 결혼을 했던 열성 오메가였다. 그러나 현재 황후가 된 헬링턴이 황제 눈에 띄면서 황제의 총애를 잃게 되었다.

헬링턴은 우성 오메가이자 A급 가이드였다. 황제는 헬링턴과 재혼하기 위해 제논에게 바람을 피웠다는 누명을 씌워 죽이고, 헬링턴을 새로운 황후로 받아들였다.

참으로 비겁한 황제였다. 그냥 이혼하고 재혼할 수도 있는데, 제 잘못으로 이혼하면 S급 에스퍼로 각성한 아들을 빼앗길까 봐 한때 사랑했던 오메가를 살해한 것이니 말이다.

그렇게 자신을 낳은 오메가를 잃게 된 1황자이니, 얼마나 억울하고 황제에 대한 원망이 크겠는가. 그래놓고는 가이드가 없어서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자 황제는 알렉세이를 버리고 2황자만 대놓고 총애했다.

제이콥은 넓은 어깨를 최대한 오므린 채 훌쩍이며 울었다. 이런 불우한 어린 시절을 가진 사람은 한번 마음을 함락당하면 상대에게 집착을 심하게 부리기 마련이었다.

자신 있었다. 알렉세이가 저한테 집착하게 만들기. 그간 경험으로 보건데 일주일이면 충분했다.

“흑흑. 1황자 전하. 사실 전 바람난 에스퍼한테 속아서 이 숲에 버려진 거예요. 저랑 결혼하기로 약혼한 에스퍼한테 새로운 가이드가 생겼는지, 비싼 예물 다 받아놓고선 헤어지면 돌려줘야 하니깐 사고로 위장해 죽이려고 했어요.”

금방이라도 버리고 갈 것처럼 굴었던 알렉세이가 멈춰 섰다. 야호! 제대로 걸려들었다.

“저 혼자 다니다가 그 사람이랑 다시 만나게 될까 봐 두려워요. 같이 있어 주세요.”

“….”

알렉세이는 대답하지 않았으나 제이콥이 따라잡을 수 있는 속도로 걸었다. 제이콥은 그걸 허락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금방 보스 가고일을 마주쳤다. 에스퍼 다섯이 달라붙어 공격을 퍼붓느라 엄청난 소음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혹시 저놈들 중에 있어?”

“네! 맞아요.”

대답하자마자 에스퍼 다섯의 목이 바닥으로 데구루루 굴러떨어졌다. 가고일은 단단한 비늘이 뚫리고 배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보스가 죽자 금색 보석이 그 자리에 떨어졌다. 알렉세이가 보석을 주웠다.

목적을 완수한 그는 순식간에 능력을 사용해 미드셀라 숲을 빠져나갈 수 있었지만, 제이콥을 배려해 천천히 걸어서 그곳을 빠져나왔다. 또한 제이콥을 마을까지 데려다주는 친절을 베풀기까지 했다.

첫인상과 달리 의외로 싹수가 있었다. 잘 재활용하면 좋은 주인놈이 될 것 같은 재목이었다. 제이콥은 ‘이제 됐냐?’ 하는 표정으로 아니꼬워하며 떠나려는 알렉세이의 손목을 붙잡았다. 거칠게 떨쳐내는 손길에 상처받은 척하니, 알렉세이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 새끼, 혹시 동정 아니야? 왜 이렇게 순진해? 이런 놈들은 같이 자면 바로 정복되는데, 어떻게 자빠트리지? 한 번만 넘어트리자. 한 번만. 이제 인생 피고 살자, 제이콥.’

“저…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은데… 괜찮으세요? 너무 감사해서 그래요. 1황자 전하는 제 생명의 은인이시니까. 별다른 의도는 없어요.”

제이콥은 팔을 뒤로 보낸 채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수줍은 척했다. 한쪽 발로 바닥을 긁다가 콩콩 가볍게 두드리기도 하면서 그를 올려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야.”

“네?”

“존나 너한테서 정액 냄새나. 밥은 나중에 처먹고, 일단 씻기나 해.”

수치심에 제이콥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대로 이 대어를 놓치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알렉세이가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기다려줄게. 됐냐?”

“네! 네! 1황자 전하! 빨리 여관 가서 씻고 나올게요.”

“야! 그… 새끼가 너 숲에 버릴 때, 혹시 같이 있던 놈들이랑 돌려 먹었어?”

“아….”

제이콥이 마른침을 꼴깍 삼기고 고개를 끄덕였다. 왜 알렉세이가 에스퍼 다섯을 보고서 누가 자신을 배신한 연인인지 묻지 않고 그들을 다 죽였는지 알겠다. 그는 제이콥에게서 나는 정액 냄새를 맡고 나름 앞뒤를 맞춰보다가 그런 오해를 하게 된 거였다. 생각보다 괜찮은 남자였다. 제이콥은 알렉세이가 마음에 들었다.

그들은 함께 여관에 들어갔다. 제이콥은 2층 방에서 목욕을 하고 식당이 있는 1층으로 내려갔다. 일부러 머리카락 물기를 덜 말려서 촉촉한 모습을 한 채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알렉세이의 시선이 흠뻑 젖어서 투명해진 셔츠 위로 도드라진 제이콥의 젖꼭지에 맺혔다.

1황자가 프록코트 단추를 풀 때만 해도 제이콥은 자신의 계획대로 그가 발정 나서 옷을 벗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어깨 위로 살포시 내려앉은 프록코트가 주는 따스함에 제이콥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무심하게 제자리로 돌아가 맥주를 들이켰다.

체격이 우람한 제이콥에게조차 헐렁하게 큰 겉옷이었다. 제이콥은 발가락을 꼬물거리며 프록코트를 매만졌다. 기분이 이상했다.

“야, 넌 어떻게 그거 당하고 멀쩡해? 혹시 비법 있으면 말해봐.”

그거? 비법? 뭔가 싶어서 의문을 담아 쳐다봤다. 알렉세이가 거칠게 은회색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씨발, 내 가이드가 어릴 때 조금 안 좋은 일이 있었거든. 근데 걔는 미수였는데도 아직 극복을 못 해서. 근데 넌 돌림빵을 당하고도 어떻게 괜찮은 거냐고. 뭔가 특별한 비법이 있으니까 그런 거 아니야.”

능력을 실컷 써대서 이상하다 싶었는데 가이드를 찾은 모양이었다. 제이콥은 입술 사이에 불만과 초조를 끼운 채 씹었다. 눈치 없는 알렉세이가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내가 자기 자화상을 그려달라니까 뭘 그려준 줄 알아? 글쎄 검은 덩어리가 녹아내리는 형체를 자기라면서 주더라고. 하아~, 젠장. 조세핀이 트라우마가 너무 심각해서 그런 거라던데. 이러다가 나 평생 섹스 못 하면 어쩌지?”

알렉세이가 꼭 섹스하고 싶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바늘로 찌르면 피 한 방울 안 날 조각상 같은 외모와 달리 그는 변태 쪼다였다.

제이콥은 두 팔로 테이블을 짚어서 가슴골을 깊게 만들었다. 이두박근에 힘이 들어갔다. 웬만한 사내의 허벅지만 한 팔뚝 때문에 어깨에 걸친 프록코트가 답답하게 몸을 옥죄었다.

“저도 아직 힘들어요. 그냥 괜찮기 위해 노력하는 거지.”

보통 이렇게 큰 가슴이 눈앞에 있으면 한 번쯤은 쳐다볼 만한데 이 먹을 거에 미친 새끼는 감자튀김만 처먹었다. 반면 여관에서 식사를 하는 알파들의 시선은 다 제이콥의 가슴에 몰려들었다.

“1황자 전하, 괜찮으시면 제가 그분의 곁에서 도와드려도 될까요?”

“뭘 도와?”

“아픔을 가진 동지끼리 마음을 의지하다 보면 그분께서도 괜찮아질지 몰라요.”

어떻게 해서든 1황자와 연결고리를 만들어야 했다. 평민에 불과한 제이콥이 다시 그를 만날 확률은 전혀 없었다.

“그럴까? 하긴 네가 뭔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지만, 시도조차 안 해보는 것보단 낫겠지. 야, 다 처먹었어? 그럼 얼른 가자.”

알렉세이는 자기 혼자 실컷 맥주랑 감자튀김을 먹고선 제이콥에게 다 먹었냐고 물었다. 제이콥은 성질내려다가 근육과 지방이 적절하게 섞여서 말랑하게 큰 가슴을 테이블 위에 걸쳤다. 몇몇 알파들이 거칠게 콧김을 뿜어냈다.

“히잉~. 아직 제이콥은 하나도 안 먹었단 말이에용.”

“뭐야. 어디서 혀 반 토막 내는 소리야. 너 그렇게 혀 잘리고 싶어? 언제든지 말해. 나 칼 있으니까.”

알렉세이가 허리춤에서 단도를 꺼냈다. 제이콥은 얼른 자세를 바로 했다.

“가자. 오크.”

‘쓰으벌. 진짜 이렇게까지 해서 꼬셔야 하나? 지금이라도 포기할까? 아니야. 인생 한 방이야. 하자, 제이콥, 제대로 빨대 꽂아서 가이드계의 역사를 새로 쓰자.’

순간 주변이 일렁이더니 순식간에 두 사람은 다른 곳에 있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공간 이동이구나 싶어 신기했다. 제이콥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아인 페르디안의 그림을 이렇게 한 자리에서 많이 보게 될 줄이야.’

미술관에 온 것 같았다. 어느 미술관인지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대박 전시회인데 관람객이 한 명도 안 보였다. 아인 페르디안 작품만 있다면 개떼처럼 몰려가는 귀족들인데 말이다. 그러다가 벽에 걸린 검은 형체가 녹아내리는 그림을 보게 되었다. 얼굴에 하얀 토끼 가면을 쓰고 있는 모습이 미친 살인마처럼 보였다.

‘이건… 아인이 1황자의 가이드였어? 아! 그 사건을 말하는 거였구나. 기디언 백작 사건.’

제이콥이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뒤에 1황자가 바짝 다가왔다. 페로몬을 완벽하게 감추고 있어서 맡을 수도 없는데, 그에게서 위험하면서도 섹시한 냄새가 나는 기분이었다.

“귀엽지?”

“네? 저요?”

“야. 오크. 정신 차려. 내 가이드 말이야. 검은 게 꼭 초코 케이크 같아.”

“풋.”

비웃음이 뿜어져 나와 얼른 웃지 않은 척했다. 초코 케이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흉물스러운 그림이었다. 아인 페르디안의 자화상이라고, 그를 추종하는 귀족들 앞에 가져다 놓으면 사기꾼 취급 받으며 믿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어느 정도로 정신이 빠지면 이렇게 심각한 콩깍지가 씌나 궁금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분한테는 왜 자화상을 달라고 한 거예요?”

“아직 얼굴을 못 봐서. 내 가이드가 토끼처럼 겁이 많거든.”

알렉세이의 이야기를 들은 제이콥은 천재는 과연 평범한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구나 싶었다. 응접실에 가벽을 세워서 비밀 통로 안에 들어가 대화를 나눈다니.

보통 심각한 정신병자가 아니었다. 알렉세이도 심각한 정신병자고, 그쪽도 심각한 정신병자이니 아주 끼리끼리 만난 듯싶었다. 물론 S급 에스퍼와 결혼을 하려는 입장에서는 그다지 반가운 소식은 아니었다.

“앞으로 제가 그분을 잘 보살펴 드릴게요. 걱정 마세요.”

“오크….”

감동받은 척해도 제이콥은 그가 자신을 오크라고 불러서 재수 없을 뿐이었다.

“그래, 부탁한다. 이 일만 잘 해결되면 섭섭지 않게 사례할게. 일단 넌 오메가니까 페르디안 백작저에 위장 취업해 들어가.”

1황자가 황실 시종장을 불러서 추천장을 쓰게 했다. 제이콥은 그것을 받아들고 마차를 얻어 탔다. 굳게 닫힌 페르디안 백작저 앞에 마차가 섰다. 마차에서 내려서 초인종을 눌렀다. 집 안에 있는 사람 목소리가 대문에 달린 나발을 통해 나왔다.

“누구십니까.”

“안녕하세요. 황실에서 일하던 시종인데, 추천장을 받아서 오게 되었습니다.”

“저희 사람 안 뽑습니다.”

좆같네. 열 받아서 대문을 걷어찼다.

“재물손괴죄로 고소하겠습니다. 거기 계세요.”

저 멀리서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제이콥은 팔짱을 끼고 제 자랑인 우람한 가슴통을 모았다가 얼른 풀었다. 오메가밖에 없는 곳에서 가슴으로 유혹해봤자 소용없었다.

“뭡니까. 도대체 누가 추천장을 써줬어요.”

“황실 시종장이십니다. 저 오늘부터 여기서 일하기로 했으니까 비키세요.”

살짝 밀쳤을 뿐인데, 워낙 덩치가 크고 근육질인 제이콥의 힘에 남자가 휘청거리며 넘어질 뻔했다. 제이콥은 그렇게 비밀에 싸인 페르디안 백작저에 드디어 입성했다.

집 안을 살피니, 과연 아인이 돈을 많이 벌었는지 거실에 걸린 커튼부터 시작해 테이블까지 고급 자재를 사용하지 않은 게 없었다.

소란에 3층에서 1층까지 계단으로 내려온 아인이 제이콥과 마주쳤다. 제이콥과 아인의 눈이 동시에 커다래졌다. 그들은 서로를 보며 이렇게 생각했다.

‘좆 됐다. 왜 이렇게 예뻐? 너 녹아내린 초코 케이크라며?’

‘저 범상치 않은 외모는… 메인수?’

시종장이 급히 달려와 제이콥과 아인 사이를 막아섰다. 헐떡이는 숨을 몰아쉬고 급히 도련님께 해명하였다.

“하아, 하아~. 죄송합니다. 도련님, 갑자기 황실에서 이상한 정신병자를 보내서 그만. 얼른 처리하겠습니다.”

시종장은 사람을 시켜서 오늘부터 백작저에서 일하겠다고 우기는 근육 돼지를 끌고 나가려고 했다. 아인인 고개를 저으며 도도도 뛰어왔다.

“아니야. 존. 황실에서 보낸 시종인데, 괜히 돌려보냈다가 밉보이면 어떡해. 가문이 큰 해를 입을지 모르니까 그냥 들여.”

“도련님~.”

언제 우리 도련님이 이렇게 컸나 감동하는 시종장을 내버려 두고 아인은 제이콥을 챙겨서 끌고 갔다.

“안녕, 내 이름은 아인 페르디안이라고 해.”

“안녕하세요, 도련님. 저는 제이콥이라고 합니다.”

아인은 넝쿨째 굴러 들어온 메인수를 이대로 놓칠 수 없었다. 어떻게든 집착광공과 이어줘서 능욕을, 아니 사랑을 하게 만들어야 했다.

“앞으로 제가 도련님을 가까이서 모셔도 될까요?”

수줍게 웃으며 묻는 얼굴이 참 선해 보였다. 하지만 소설로 읽었던 제이콥 이미지는 이렇지 않아서 다행히 아인은 속지 않았다.

분명 속으로 엄청 뭐라 하고 있을 것이다. 왜 가이드인 그가 페르디안 백작저에 시종으로 나타났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스토리가 원작대로 흘러가지 않아 광광 작가가 보내준 게 틀림없다 생각했다.

소설에서는 하도 못생겼다고 해서 진짜인가 싶었는데 그 정도는 아니었다. 역시 메인수라 이건가?

아무튼 제이콥은 떡대수여서 그런지 우연히 헬스장에서 만났으면 ‘형, 저 헬린이인데 운동 좀 가르쳐주세요.’ 했을 체구와 관상이었다.

운동은 숨쉬기 운동만 하는지라 벌크업 한 헬창 제이콥이 몹시 부러웠다. 어쩐지 너튜브로 헬창 채널 보고 바짝 운동하겠다며 방바닥에서 윗몸 일으키기 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앞으로 열심히 운동을 하고 닭가슴살을 먹어야겠다고, 3분 만에 깨질 결심을 하며 물었다.

“미안한데 팔뚝에 한 번만 매달려 봐도 될까?”

“예, 그러세요.”

“와~. 대박.”

메인수의 팔뚝에 대롱대롱 매달린 악역수는 BL 소설에서 자신이 처음일 거라 확신했다. 역시 이 정도 체력은 있어야 절륜한 집착광공이랑 쉬지 않고 일주일 내내 섹스할 수 있는 거겠지 싶었다. 과연 변태 작가가 점지한 메인수였다.

뽀빠이 팔뚝에서 내려와 도저히 만져보지 않을 수 없는 갑빠를 실수인 척 눌러봤다. 손가락 하나 들어가지 않을 돌덩이 같을 줄 알았는데 푹신푹신하고 말랑한 느낌이라 이상했다.

“아앙!”

제이콥은 평범한 남자라면 가슴이 찔렸을 때 절대 내지 않을 신음을 내뱉었다. 무지 신기하다. 마음 같아서는 손으로 계속 가슴을 조물조물하며 병맛 터지는 반응을 보고 싶었지만, 나중에 성희롱 당했다며 알렉세이한테 고자질하면 골로 갈 수 있어 얌전히 손을 뗐다.

“미안. 실수였어.”

“네에~. 괜찮아요.”

말끝을 늘이며 귀여운 척하는 모습에 감탄했다. 이런 곰 같은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행동에 원작 광공이 반한 거겠지? 얼른 그 새끼가 준 제나 쿠키를 둘한테 먹여서 불지옥 관광 댄스를 추게 해야지 싶었다.

흡사 애완 사마귀가 있는 곤충 사육통에 죄 없는 바퀴벌레를 넣어주는 기분이었지만, 자신이 살고 봐야 할 일이었다. 어서 내일이 왔으면 좋겠다. 얼른 알렉세이랑 제이콥을 이어주고 이 둘 사이에서 빠지게.

앞으로 ‘감금·능욕·화간’ 3종 세트를 섭렵할 제이콥의 미래가 약간 걱정되기는 했지만, 소설 보니까 본인도 무척 그 상황을 좋아했다. 아인은 양심 따위 살포시 화장실에서 밑 닦은 휴지처럼 버리기로 했다. 시종장이 뒤쫓아 와 제이콥에게 일을 시켜야 한다며 끌고 갔다.

끌려간 제이콥이 성실한 시종은 소처럼 일하는 법이라는, 페르디안 백작저 시종장 존의 명강의를 듣고 있을 때 아인은 작업실로 들어갔다.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는 오르골을 열어두고 아까 벗어둔 앞치마를 둘렀다. 느릅나무 나뭇가지에 앉은 두 마리의 종달새를 그리다가 달려 나간 거였다.

참새보다 몸집이 조금 크고 붉은 갈색 깃털에 검은 가로무늬가 있는 새는 화려하진 않지만, 울음소리가 아름다웠다.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소리를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들이 느낄 수 있도록 바람에 하늘하늘 날아다니는 나뭇잎을 그렸다.

나뭇잎은 연두색과 노란색 같은 밝은 계열을 사용하고, 그 사이 사이에 햇살 조각들을 심었다. 꼭 나뭇잎인 척하는 요정이 꽃잎 사이에서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

완성된 그림이 마를 동안, 새로운 걸 그리기 위해 다시 붓을 잡았다. 샤를이 새로 시작한 사업이 부흥할 때까지 기계처럼 쉬지 않고 일해서 돈을 벌어야 했다. 분명 원작 소설에서 뛰어난 사업가라고 나와 있었으니, 이제 자신은 금수저로 밥 먹는 부자가 되겠지?

후후. 메인수에 빙의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제이콥이 나타났으니 앞으로 병신 짓만 안 하면 자신의 앞에 꽃길만 열릴 것이다.

실물로 제이콥을 만나보고 절실히 깨달았다. 저 정도 덩치와 힘과 근육은 있어야 알렉세이와 너끈히 떡 방앗간을 개시할 수 있는 거구나. 광광 작가가 개연성을 아주 날려먹은 줄 알았는데 의외로 하이퍼 리얼리즘 소설을 쓰고 있었다.

제이콥의 등장으로 마음에 여유가 생긴 아인은 장밋빛 미래를 꿈꿨다.

“작가님, 감사합니다. 저는 부디 이만 잊고 새로운 악역수 찾으세요. 메인수와 메인공 만나게 하시어 19금 대박 나시길 바라겠습니다.”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는 광광 작가에게 제이콥을 보내줘서 감사하다고 꾸벅 인사를 올렸다. 빨리 알렉세이가 우리 집에 왔으면 좋겠다.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그림 작업을 마무리하고, 태엽이 다 감겨 멈춰 있는 오르골 뚜껑을 닫았다. 기름으로 유화 물감이 묻은 손을 씻은 뒤, 서재로 향했다. 이미 그곳에는 샤를이 와 있었다.

“아빠!”

“우리 아들 기분이 좋아 보이네. 무슨 일 있어?”

“히히. 아무것도 아니에요.”

자신이 ‘위기 탈출 넘버투’에서 항문 파열편에 출연할 뻔했다가 벗어났다는 사실은 비밀이었다. 아인은 입을 가린 채 혼자서 키득거리며 웃었다.

“우리 아인이 기분 좋으니까 아빠도 기분 좋네.”

샤를이 정수리를 쓰다듬어주고 머리꼭지에 입을 맞췄다. 10살 때 헤어져서 그런지, 아직도 아인을 어린아이로 아는 그였다. 그렇지만 굳이 이제 어른이 되었으니 이러지 마쇼, 하지는 않았다.

그도 얼마나 감옥에서 어린 아들과 추억을 쌓고 싶었겠는가. 같이 공놀이도 하고 싶고, 책도 읽고 싶고 그랬을 터다. 아인은 자신 때문에 감옥살이를 한 샤를에게 잃어버린 시간을 보상해주기 위해 더욱 어리광을 피웠다.

샤를도 그런 아인의 마음을 알아차린 듯 ‘성인이 되어서 무슨 짓이냐. 귀족의 품위를 지켜라.’ 하지 않았다.

아인은 그의 옆자리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책상에 펼쳐진 서류를 보게 되었다.

“마정석 발굴 사업을 하시려고요? 이건 자본금이 많이 들지 않아요?”

악역수에게 배신당해서 작위를 박탈당한 원작 샤를은 자본금이 없어서 아주 작게 사업을 시작했다.

바로 포스트잇 사업이었다. 그런데 마정석 발굴이라니? 시간도 돈도 인력도 엄청나게 필요한 그런 사업을 왜 하겠다는 건가 싶었다.

“1황자 전하께서 자본금을 빌려주신다고 하셔서. 아무래도 한 번에 큰돈을 벌려면 큰 사업을 해야지. 그동안 아버지 노릇도 제대로 못 하고, 너랑 엄마 고생시켜서 미안해. 이제 아빠가 우리 아인이 고생 안 시키고 호강시켜줄게.”

아무리 봐도 사악한 1황자가 돈을 그냥 빌려줄 리 없었다. 이자가 얼마인지 꼼꼼히 살폈는데 이자율이 0%였다. 그리고 연체금도 없단다.

그한테 몸 바치고 마음 줬던 악역수를 알파들한테 돌려서 죽인 새끼의 머릿속에서 절대 나올 수 없는 발상이었다. 무언가 안 보이는 함정이 있을 것이다.

“아빠, 이 사업 안 하면 안 될까요?”

“왜 그러니?”

목구멍까지 ‘그야 1황자는 악역수가 더럽다고 혐오하면서 따먹기는 오지게 따먹다가, 돌림빵 시켜서 죽인 미친 사이코패스 살인마니까요!’ 하는 말이 치밀어 올랐다.

“1황자 전하는 나쁜 알파고 변태란 말이에요. 분명 수상한 음모를 꾸미고 우리를 망하게 하려는 게 틀림없어요.”

악역수만큼 억지 부리기 좋은 캐릭터가 없었다. 이 집안 사람들은 자신이 이유 없이 우겨도 들어줬다. 물론 속으로 ‘지랄 맞은 성질머리하고는’ 하고 욕하겠지만, 굳이 논리적인 이유를 찾지 않아도 다들 알아서 생각해주니 얼마나 편한지 몰랐다.

이번에도 무작정 우기기 작전을 펼쳤는데 샤를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인아, 아직도 알파가 무섭니?”

샤를이 자신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우울해했다. 우리 아인이 어떡하냐며 울먹였다. 왜 1황자를 욕했는데 거기로 불똥이 튀었는지 모르겠다.

‘혹시 그건가? 연애도 못 한 방구석 폐인 노총각 아들, 장가 못 갈까 봐 조바심치는 거?’

스무 살은 현대에서 무척 어린 나이였지만, 이곳에서는 조혼 풍습 때문에 그렇지 않았다. 미혼인 오메가 친구들이 추수감사절 때마다 본가로 돌아가면 부모님과 친척들한테 언제 결혼할 거냐며 조리 돌림 당한다고 했다.

설마 기디언 백작 일 때문에 결혼 압박 청정 지역에 있는 줄 알았던 자신도 이런 일을 당하게 될 줄이야. 하긴 페르디안 백작 가문에 후계자는 자신 하나뿐이었다.

나중에 자신이 베타 여자를 데려와 결혼하겠다고 하면 큰 충격을 받을 거다. 알파가 베타 여자랑 결혼하는 경우는 있어도, 오메가들이 베타 여자랑 결혼하는 경우는 없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샤를에게 지금 성 정체성을 밝히기로 했다. 샤를도 미리 알아둬야 차기 후계자를 데려와서 가문을 이어나갈 준비를 해둘 테니 말이다.

“아빠….”

“그래, 아인아. 아빠는 영원히 네 편이야. 알지? 무슨 일이 있어도 아빠가 구해줄게.”

자신이 무슨 말을 할지 어떻게 알고, 이런 말을 하는 걸까. 혹시 여자 좋아하는 거 티 났나? 하긴 자신이 굳이 숨길 생각을 안 하긴 했다.

“고마워요. 세상이 나한테서 등을 돌려도, 아빠만은 내 편이 되어줄 거라 믿었어요.”

“그럼, 그럼. 아빠는 항상 아인이 편이야.”

“나 여자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뭐?”

갑작스러운 아들의 커밍아웃에 샤를이 진짜냐고, 정말 네 성 정체성이 그러냐고 몇 번이고 확인했다. 아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은 여자가 좋다고 밝혔다.

“으흑흑흑. 내 아들이 여자를 좋아한다니. 으윽윽윽.”

“뭐, 뭐야. 혹시 몰랐어요?”

당황해서 샤를을 달래봤지만 이미 늦었다. 남자가 여자를 좋아한다는 소리가 부모님 가슴에 대못 박는 짓이라니. 망할 BL 소설! 돌아버리겠다.

“아인아, 아니야. 네가 알파를 무서워해서 뭔가 오해하는 걸 거야. 오메가가 어떻게 여자를 좋아해.”

“아빠, 제 성 정체성을 존중해주세요. 저 같은 성소수자들도 어딘가에 한 명쯤은 있을 거예요.”

과연 광기 어린 19금 BL 소설에 자신과 같이 제정신을 가진 존재가 또 있을까 싶기는 하지만, 샤를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말해봤다. 샤를이 이게 다 기디언 백작 때문이라며 책상을 손바닥으로 탕탕 내리쳤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아인은 얼른 서재 책꽂이에서 읽을 책을 빼낸 후 도망쳤다. 방으로 돌아가 <무소유의 아름다움>을 읽으며 혹시라도 함정을 판 알렉세이에 의해 페르디안 가문이 망할 때를 대비했다.

재산을 다 탕진하면 자신이 열심히 그림을 그려서 재기하면 된다. 그럼 뱃삯을 열심히 모아 가족들과 외국으로 떠날 것이다. 책을 읽고 할 일이 없어서 동화책 삽화 작업을 했다.

이번에 동화책을 출판할 예정인데, 하도 웹툰 연재할 때 독자들한테 스토리가 빻았다는 소리를 들어서 오리지널 동화 대신 원래 세계에서 사랑받았던 <피넛버터 래빗>을 그리기로 했다.

토끼들을 그리면서 출판사 직원이 자신을 천재라고 추앙했던 말이 떠올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역시 자신은 재능이 없었다. 그냥 그림 그리는 기계였다.

그래도 소설 속에서는 화가 대접을 받아서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빵 하나 훔치고 감옥에 들어가서 19년 동안 수감 생활을 했겠지.

아닌가? 장발장이 되기에는 너무 장르 격차가 심한가? 하드코어 능욕 19금 BL이니까 감옥 들어가면 간수들이 막 달려들어서 강간하는 거 아니야?

절대 불법 행위를 하면 안 될 듯싶었다. 색연필로 삽화를 그린 후, 침대에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디디가 가끔 자신이 잘 때 장난치려고 입에 손가락을 넣어서 잠자리에 들 때 단단히 방어를 해야 했다. 엘프도 나이가 들면 노망이 나는 것 같았다.

쿨쿨 자는데 무거운 무언가가 몸을 짓눌렀다. 가위에 눌린 듯 손가락 하나 꿈쩍할 수 없었다.

“으으으으.”

곰돌이가 꿀단지를 쏟은 것처럼 달콤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꽃에서 나는 꿀 향이 아닌, 얼음 조각으로 만든 얼음꽃에서 나는 향기 같다고 할까나?

참으로 이상한 표현이지만 냄새가 차갑고 날카롭고 매서웠다. 샤를에게서 나는 냄새에서 가끔 감정을 느낄 수 있었는데, 마치 그것과 같았다. 아마 잘은 모르지만 페로몬일 것이다.

어떤 알파의 페로몬이 자신의 방에 침입해 들어왔나 궁금하지 않았다. 느낌이지만 알렉세이 같았다.

‘여자? 베타 여자를 좋아해? 감히 네가 날 두고 여자를 만나려고 들어?’

이불 안으로 손이 들어왔다. 아인이 흑흑 흐느끼며 몸을 웅크렸지만 그의 손길이 거침없이 바지를 내리고 페니스를 잡아챘다.

‘안 돼. 하지 마. 하지 마세요. 싫어!’

‘말해. 베타 여자 싫어한다고 말하라고. 아니면 여자 못 만나게 여길 터트려 버릴 거야.’

‘아악. 안 만날게요. 절대 여자랑 안 사귈게요.’

아프게 움켜잡던 손에서 힘이 풀려나갔다. 흑흑흑 울면서 속으로 알렉세이 미친 시팔놈아 욕하는데, 바지가 축축해서 눈을 떴다.

다행히 개꿈이었다. 소중한 똘똘이가 잘 있나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내렸다. 좆 됐다.

‘흑흑. 아빠, 나 무서워서 오줌 쌌어요.’

***

러트가 왔다. 알렉세이는 아인의 방에 딸린 테라스에서 잠을 자다가 깨달았다. 알파 페로몬이 통제할 수 없는 수준으로 쏟아져 나왔다. 이런 상태면 방에 있는 아인까지 영향을 받을 것이다.

공간 이동으로 황궁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눈앞이 뿌옇고 집중이 안 돼서 능력을 사용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냥 3층에서 뛰어내렸다. 어디 부러지긴 하겠지만 죽지는 않을 높이였다.

머리가 깨졌는지 피가 철철 흘렀다.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 것 같았지만, 온몸에서 열기가 뿜어져 나와 기운이 없었다. 아름다운 페르디안 백작저의 정원을 지렁이처럼 기어 다니고 있는데, 오크 제이콥이 다가왔다.

“흐으응~ 1황자 전하. 어디가 불편하신가 봐요? 제가 편하게 해드릴까요?”

“닥쳐.”

“아이 참. 이러시면 꼭 제가 1황자 전하를 덮치려는 것 같잖아요.”

러트가 오니까 오크 새끼도 오메가랍시고 잘생겨 보였다. 제이콥의 바지를 까고 구멍에 자지를 박아 넣고 싶었다. 그런데 눈앞에 제 가이드가 잠들어 있었다. 절대 그럴 수 없었다.

페로몬의 노예가 되어 바람을 피우느니, 차라리 혀가 잘리는 게 나았다. 혀는 어차피 자기 치유 능력으로 다시 생기지만, 한번 순결을 잃은 헌 자지는 되돌릴 수 없었다.

오메가 아버지가 불륜을 저질렀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죽었기에 순결과 정절에 대한 알렉세이의 집착은 놀라웠다.

만일 오크 새끼한테 순결을 잃으면 그와 각인을 하고 결혼까지 해야 됐다. 그럴 순 없었다. 혼미해지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혀를 앞니로 깨물었다.

힘줘서 깨물어 혀가 반쯤 너덜거릴 때 기적처럼 날뛰는 페로몬이 조금 가라앉았다. 초록색 머리를 한 엘프가 알렉세이에게 알파 퇴치용 스프레이를 뿌린 거였다.

발정 난 알파들이 밤늦게 귀가하는 오메가들에게 접근하려고 할 때 사용하는 방범용 스프레이였다.

대부분 알파들이 성범죄를 저지르는 건 러트 때문인지라 스프레이에는 순식간에 페로몬을 감퇴시키는 기능이 있었다.

정신을 차린 알렉세이는 얼른 마탑으로 공간 이동했다. 제대로 착지하지 못하고 바닥에 쿠다다당 넘어졌다. 조세핀이 놀라서 달려왔다.

“어디 다치셨습니까.”

그새 맷집 좋은 S급 에스퍼의 찢어진 이마와 너덜거리는 혀는 다 회복되어 있었다.

“이건 별거 아니야. 러트 억제제. 러트 억제제나 가져와. 얼른!”

조세핀이 페르몬샘이 있는 목덜미에 바로 주사기를 꽂았다.

“윽.”

이 엿 같은 기분은 어째 나아지질 않는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된 알렉세이가 몸을 일으켰다. 바삐 움직이느라 외알 안경을 깨 먹은 조세핀이 보였다.

“나중에 안경값 청구해.”

“지금 안경이 문제입니까. 오늘 러트 기간 아니지 않습니까. 주기가 이 주나 빨라졌어요. 뭔가 건강에 이상이 있나 진찰받아 봐야죠.”

식은땀에 절어서 이마에 달라붙은 은회색 머리카락을 알렉세이가 손으로 쓸어 올려 떼어냈다.

“그런 거 아니야. 가이딩 받겠다며 아인의 페로몬을 너무 맡아서 그래. 아인이가 알파한테 노출된 적이 없어서 그런지 페로몬을 전혀 제어 못 해.”

페로몬에는 성 페로몬과 감정 페로몬이 있는데, 가족들끼리는 감정 페로몬만 느낄 수 있었다. 오메가끼리도 이 성 페로몬을 느끼지 못하니, 아인의 문제를 오직 알렉세이밖에 알아차리지 못하는 거였다.

얼굴도 모르는데 아인을 떠올렸다고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언제나 자기 전에 책을 읽고,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쓴 채 자는 그 아이의 그림자를 볼 때마다 심장이 너무 간질거렸다.

“그거 문제 아닙니까. 뭔가 대책을 마련해야죠.”

“어떻게? 너 잘 때 내가 테라스에서 자면서 가이딩 받고 있다고 말해? 가뜩이나 날 싫어하는 아이인데 그랬다가 테라스 없는 방으로 옮기면 어쩌려고.”

“하유. 하유~. 답답하다. 가이드만 찾으면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그건 알렉세이도 마찬가지였다. 알렉세이가 오랫동안 그를 기다렸듯, 그도 알렉세이를 반겨줄 줄 알았다. 배신감마저 느껴질 만큼 아인의 냉대가 서운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게 어린 시절 그가 겪었던 사고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마음 아프고 지켜주지 못해 슬플 뿐이었다.

주사를 맞은 알렉세이는 어느 정도 페로몬이 갈무리되긴 했지만 아직 바깥으로 나돌아 다닐 정도는 아니었다. 당분간 도둑 가이딩을 못 받겠구나 싶어서 괜히 지금 상황이 짜증났다. 그는 조세핀이 연구하는 방에 놓여 있는 소파에 누워서 체력을 비축했다. 얼른 러트가 끝나 아인을 만나러 가고 싶었다.

‘아인이가 타주는 홍차, 경계심 많은 고양이처럼 구는 아인이랑 대화할 수 있는 응접실, 커튼 너머로 아른거리는 무희 같은 오메가 그림자, 소파에서 책을 읽는 그림자, 누에고치처럼 잠을 자는 그림자….’

그가 요즘 좋아하게 된 것들을 떠올리며 발기한 자지와의 힘겨운 싸움을 했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내는 알렉세이에게 조세핀이 편히 자위하시라며 자리를 피해줬다.

혼자 남겨진 알렉세이는 곧바로 바지를 내리고 열에 펄펄 들끓고 있는 자지를 꺼냈다. 그의 손이 큰 편인데도 자지는 한 손으로 잡기 버거웠다.

우리 아인이가 보고 기겁하면서 무섭다고 울면 어쩌나 걱정될 지경이었다. 손으로 고리를 만들어 좆 기둥을 쓸어내렸다. 아인의 구멍은 어떨까 도무지 상상되지 않았다.

첩자가 페르디안 백작저에서 일하는 오메가 시종을 유혹해 자는 광경을 보고 배우긴 했지만, 알렉세이는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지 못해 섹스를 잘 알지 못했다.

오메가 아버지가 그의 죽음을 예견하기라도 한 듯 갑자기 어린 그를 붙잡고 성교육을 해준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자기가 없으면 아무도 알렉세이를 돌봐주지 않을 걸 알기라도 한다는 듯 그가 알려줬었지.

‘알렉. 마음에 드는 오메가라고, 목부터 물어뜯어서 각인하지 마. 그럼 그의 몸은 얻을 수 있어도, 마음은 절대 가질 수 없으니까.’

‘제논은 폐하한테 목을 물어뜯겼어요?’

‘…응.’

‘제논은 폐하를 안 좋아했어요?’

‘…응.’

‘제논은 알렉을 안 낳고 싶어 했어요?’

‘널 가진 게 내 의사가 아니었지만, 널 가진 걸 안 뒤로는 네가 내 세상의 전부였어. 알렉, 난 널 사랑해서 낳은 거야.’

알렉세이가 페로몬 조절에 미숙한 어린 오메가를 페로몬으로 정복하고, 그의 목을 물어뜯지 않는 건 제논이 한 말들 때문이었다.

그것들은 짐승 같은 알렉세이를 다스리는 목줄이 되어 그에게 쥐꼬리만 한 인내심을 쥐여 줬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가 아인의 냉대를 받으면서 참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는 없었다. 그는 너무나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폭탄 취급받으며 격리되고, 죽여야 한다는 소리나 들으면서 살아왔다.

알렉세이는 참고, 참고, 또 참았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위험한 존재가 아님을 증명하고자 노력했다. 그런데 유일한 희망이었던 제 가이드를 만났는데 아인도 그를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위험분자 취급했다.

제논이 죽은 뒤 조금씩 닳아 없어지고 있는 인내심이 언제 끊길지는 알렉세이도 몰랐다. 생각보다 오래 걸릴 수도, 당장 내일 터질 수도 있는 게 바로 감정이니까.

아무리 아인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이유로 알렉세이를 두려워한다고 하더라도, 그에게 타격이 없는 건 아니었다. 오른쪽에서 날린 주먹이든, 왼쪽에서 날린 주먹이든 똑같이 아프다.

너무나 오랫동안 외로웠다. 그 시간만큼이나 많이 상처받았고, 실망했고, 배신당했다. 아인은 제발 그러지 않았으면 했다. 알렉세이는 몇 시간째 주물러서 퉁퉁 붓고 아픈 좆에서 손을 뗐다. 내일쯤 몸이 괜찮아져서 아인을 찾아가 대화하고 싶은데 안 되겠지?

꿈에서 닫힌 테라스 창문을 봤다. 절대 열리지 않을 것같이 견고한 유리창이었다.

‘아인아, 창문을 열어줘. 날 네 안에 들여 보내줘.’

답은 없었다. 끝내 창문은 굳건하게 자리를 지켰다.

***

아인은 오줌 싼 이불을 처리하기 위해 완전 범죄를 계획했다. 제일 먼저 매트리스에서 시트를 벗겨냈다. 휑한 게 누가 봐도 밤사이에 큰일을 저지른 게 티 났다.

원룸에서 혼자 살면 쿨하게 시트를 세탁기에 처넣고, 새것으로 갈아 끼우겠지만 이곳은 그럴 수 있는 데가 아니었다. 새 시트를 찾으려면 시종에게 가져다 달라고 해야 했다.

일단 침대 밑에 시트를 숨기고 생각해 보자… 음… 어떻게 하지? 이번 생은 망했으니 번지점프를 해 후일을 도모할까? 스무 살이나 되어서 오줌을 싼 걸 들키느니 차라리 그게 나을 듯싶었다.

아니다. 아니야! 겨우 그딴 걸로 자살하기에는 운 좆망인 자신이 귀족 신분으로 다시 태어날 리 없어 망설여졌다. 다음번에 노예로 태어나면 어쩔 거야.

오줌 싼 시트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방 안을 빙빙 정신 사납게 돌았다. 그사이 아침 시중을 들기 위해 방에 들어온 시종이 침대 밑에 숨긴 시트를 가져가 버렸다. 어떻게 말릴 새도 없이 새 시트가 갈아 끼워졌다.

모르겠지? 눈치 못 챘겠지? 흑흑. 아니야. 누가 봐도 부자연스러운 상황이었다고. 세탁하려고 할 때 젖어 있는 거 보고 오줌싸개라고 시종들끼리 킬킬거릴 거야. 죽어. 죽자! 흑흑흑.

수치심에 아인이 방구석에 웅크렸다. 시종이 그런 아인을 잘 도닥이고 새 옷을 챙겨줬다.

“도련님, 이건 어른이 되어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이에요. 괜찮으니까 어서 씻고 오세요. 목욕물 받아놨어요.”

‘대박! 오줌 쌌는데 몽정한 줄 알잖아. 차리리 이게 낫나? 응. 둘 다 쪽팔리지만 그래도 몽정 쪽이 낫지. 적어도 몽정은 신체가 성장하면서 호르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자연 현상이니까. 그런데 오줌은 흑… 젠장. 이제 앞으로 자기 전에 절대 물 안 마셔.’

두더지 굴을 파서 그 안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바지가 찜찜해서 일단 씻으러 갔다. 앞뒤로 완전히 젖어 있었는데 쪽팔려서 시트 감추느라 바지 갈아입을 생각을 못 했다. 역시 바보는 구제할 수 없다.

따뜻한 물에 들어가 향긋한 꽃잎 향기를 맡으며 심신의 안정을 추구했다. 머리가 멍해지면서 그깟 지도 그린 것 따위 뭐 대수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물론 대수가 맞았다.

시무룩해져서 씻고 나와 아침밥을 먹으러 식당으로 내려갔다. 이미 와 있는 샤를과 레이나가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크흠. 음. 이거 좀 먹어보렴.”

식사를 하는 도중 샤를이 슬쩍 생선 살을 발라서 접시에 놔줬다. 아인은 고맙다고 하고 살을 집어 먹었다. 샤를이 레이나에게 눈치를 보냈다. 레이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인아, 네가 요즘 1황자 전하랑 만나느라 스트레스가 많다는 거 알아. 그래서 베타 여자가 좋아 보이고, 충분히 그렇게 느낄 수도 있는 거거든.”

“그런 거 아니에요. 오래전부터 저 여자 좋아했어요.”

“흡!”

레이나가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 눈물을 글썽였다. 엄마까지 눈물을 보이니 마음이 안 좋았다. 계속 여자를 좋아한다고 고집부려서 부모님을 슬프게 하는 게 옳은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 그렇지. 여자를 좋아할 수도 있지. 그런데 아인아, 네가 베타 여자랑 연애를 해본 것도 아니잖아. 그런데 왜 네가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니?”

그야 당연히 그게 자신이 살던 세계에서 정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이치라고 치면 BL 소설에 들어온 자신은 남자를 좋아해야 했다. 고민에 빠졌다.

그동안 자신이 여자를 좋아한다고 믿었던 게 진짜 자신의 생각인지, 세상의 관념 때문인지 모르겠다.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으니, 레이나가 얼른 말을 꺼냈다.

“아인아, 이참에 외출을 해보는 게 어떻겠니? 네가 집에만 있어서 그동안 아빠 말고 다른 알파들을 못 봤잖아. 어렸을 때 알파 친구들이랑 친하게 놀았던 거 기억하지? 눈으로 직접 보면 뭔가 다를지도 몰라.”

레이나의 말에 샤를이 지원 사격을 나섰다.

“맞아. 아인아. 아빠가 같이 외출해줄게. 다시는 무서운 괴물이 우리 아인이 괴롭히지 않게 꼭 옆에 붙어서 지켜줄게. 같이 외출하자.”

레이나와 샤를이 방구석 폐인 아들을 밖으로 내보내고 싶은지 간절히 바라봤다. 집에만 처박힌 채 그림을 그려서 베타 여자를 좋아한다고 믿고 싶은가 보다. 현대로 따지면 학교도 안 나고 방에서 게임만 하는 아들인데, 애니 캐릭터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한 경우이려나?

남자가 여자를 좋아한다는 말이 이렇게까지 문제가 되는 BL 소설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어쩌면 알렉세이를 제이콥과 이어주고도 남자랑 결혼해야 하는 끔찍한 일이 발생할지 모르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평생 혼자 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을걸. 괜히 긁어 부스럼만 만들었다. 단언컨대 자신을 금이야 옥이야 다루는 부모님이니, 어제 입을 함부로 안 놀렸으면 이대로 지내다가 결혼적령기를 놓쳤다는 핑계로 죽을 때까지 싱글 라이프를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왜 걱정거리를 쥐여 줘서 이 사달을 일으켰는지 과거 자신의 미련함에 열 뻗쳤다. 아인은 일단 부모님을 안심시켜주기로 했다.

부모님의 걱정과 달리 정신적인 문제로 외출을 안 했던 게 아니라, 알렉세이와 마주칠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 몸 사린 것뿐이라 상관없었다.

그렇게 숨어만 살았는데 공수를 다 만나는 걸 보면, 이제 자신의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비록 짧은 시간이겠지만 시한부(?) 아들로서 부모님께 효도하고 저세상 가야지 싶었다.

한없이 뻗어 나가는 망상 속에서 자신은 알파들한테 강간당한 후 싸늘한 시체가 되어 죽어 있었다.

“엄마, 아빠. 걱정 마세요. 저 이제 외출할게요.”

“아인아~.”

레이나가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린 채 울었다. 그동안 자신이 광공 피하려고 한 짓이 엄마를 슬프게 했구나 싶어 마음이 안 좋았다. 광공도 못 피하고, 부모님 마음만 찢어놓고. 나름 악역수 역할에서 벗어나 잘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식사를 끝내고 레이나가 십 년 만의 외출이라며 시녀들을 불러 모았다.

“자, 다들 집중! 드디어 우리 아인이가 십 년 만에 외출을 하게 되었어. 모두들 솜씨 발휘해서 멋지게 꾸며주기 바라.”

“네. 마님.”

시녀들이 무릎을 굽히고 인사를 올렸다. 레이나도 외출 준비를 하기 위해 본인의 드레스룸으로 사라졌다. 백작 부인의 부탁으로 시녀들이 의기투합해 자신을 꾸미려고 들었다. 어렸을 때도 느꼈지만, 시녀들이 자신에게 매우 불만이 많은 것 같았다.

나쁘게 대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고용주 아들과 고용인이 느끼는 바가 무척 달랐나 보다. 하얀 셔츠 소매에 달린 흉측한 레이스가 손등까지 내려왔다. 시녀들은 목도리도마뱀처럼 자신의 목에 커다란 반원형 레이스를 두르고, 붉은색 리본을 맨 후 보석 브로치로 고정시켰다.

하얀색 레깅스 위에는 암녹색 자가드 소재의 호박 바지를 입혔다. 조끼는 바지와 같은 소재였는데, 이쪽은 금사로 꽃들이 수놓여 있어서 몇 배나 더 끔찍했다.

구두는 앞코가 뾰족하고 굽이 높았다. 하얗게 얼굴에 가루를 바르는 시녀들의 손길이 즐거움으로 가벼웠다. 마치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중세 시대 배경의 영화에 나오는 변태 같았다.

“설마 나더러 이러고 외출하라고?”

“그럼요, 요즘 유행하는 옷이에요.”

아니다. 그럴 리 없다. 이건 그동안 호시탐탐 마음에 안 드는 고용주 아들을 엿 먹이고 싶었던 시녀들의 음모인 게 분명했다. 유행이라고 하기에는 샤를은 아주 정상적인 복장을 하고 다녔다.

“싫어!”

“아이참. 예쁘신데 왜 고집을 부리세요.”

“싫어! 싫어! 무조건 싫어! 난 절대 이런 옷 못 입어.”

“에휴, 도련님 너무 검소한 것도 안 좋아요. 이렇게 나는 귀족이다, 티를 내고 다녀야 바깥에서 안전하죠. 바깥세상에는 못된 범죄자들이 많아서 신분으로 깔아뭉개야 한단 말이에요.”

현대에서 안전 불감증에 걸린 아인에겐 전혀 공감되지 않는 이유였다. 입술을 삐죽 내밀고 언짢은 티를 냈다. 시녀들이 한숨을 푹 내쉬며 평소 입던 스타일의 단정한 무채색 계열 옷을 건네줬다. 아인은 세수를 해서 화장을 지우고 얼른 갈아입었다.

“혹시 모르니까 억제제 드시고 가세요.”

시녀장이 히트사이클도 아닌데 약을 건넸다. 이거 먹으면 멀미하는 것처럼 울렁거리고, 머리도 아프고, 하루 종일 우울해서 먹기 싫은데… 망설이는 아인에게 시녀들이 저택 밖은 위험하다고 주의를 주며 억제제 먹는 걸 확인한 다음에야 놓아줬다.

아인은 약을 먹는 척하고 혀 밑에 숨겨뒀다가 몰래 뱉었다. 비싼 약이라 버리지는 않고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이세계에서 처음으로 노는 건데 억제제 부작용으로 고생하고 싶지 않았다.

“엄마, 준비 다 되셨어요?”

레이나의 드레스 룸에 들러 치장을 마쳤나 살폈다. 노란색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화려한 컵케이크 같았다. 다이아몬드 목걸이는 굉장히 비싸 보였고, 머리를 틀어 올려서 여러 보석과 리본을 달아놓아 넘사벽 클래스 부자처럼 보였다.

“아인아, 엄마 예뻐?”

솔직히 말하면 웹툰 그리느라 면 티셔츠에 추리닝 바지만 입고 살았던 자신의 눈에 이곳 사람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패션 테러리스트로만 보였다. 단지 레이나의 미모가 오늘도 열일을 했다.

“네. 엄마는 언제나 예쁜걸요.”

“호호호. 얘는 참.”

외출 준비를 끝마친 샤를이 레이나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왔다. 금 단추가 달린 군청색 코트에, 하얀 슬랙스 바지를 입은 그는 잘생긴 군인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젊어 보였다.

단단한 체구를 가진 옷걸이 덕에 옷이 더 멋져 보였다. 상대적으로 하얀 셔츠와 검은 바지만 입은 자신은 그들을 따르는 시종처럼 초라하게 느껴졌다.

“나도 아빠처럼 입을래요.”

“어머, 이런 옷은 알파나 입는 거야. 아인이는 오메가처럼 입어야지.”

레이나의 차별 쩌는 발언에 충격 먹었다. 샤를은 아빠가 좋아서 뭐든지 따라 하고 싶어 하는 어린 아들을 보듯 자애롭게 웃었다.

“아인아, 아빠 옷은 나중에 입어보고 더 늦기 전에 외출하자. 시종장은 아인이한테 코트라도 제대로 입혀.”

샤를은 아들의 차림새를 문제 삼기보다는 좋은 코트를 그 위에 입혀 초라한 행색을 가려주는 방법을 택했다.

아인이 샤를의 옆에 딱 달라붙어서 왜 자기는 그런 옷을 못 입냐고 꿍얼거렸다. 제대로 된 사교 활동을 하지 못해 세상에 무지한 아들이 귀여운 한편, 안쓰러웠다. 샤를은 아인의 어깨를 한 번 강하게 끌어안았다가 놓아주고 마차까지 아내를 에스코트했다.

아인은 아주 어렸을 때 외출했던 이후로 오랜만에 저택을 나서는 거였다. 사실상 아이가 기억하는 첫 외출일 것이다. 창문에 매달려 열심히 구경하던 아인이 문득 샤를을 돌아보며 물었다.

“아빠, 우리가 외출하면 오늘 1황자 전하는 어떻게 해요?”

“1황자 전하께서 러트 기간이라 당분간 못 오신다더구나.”

“아, 아깝다.”

“응? 뭐가?”

“1황자 전하가 첫눈에 반할 만큼 멋진 시종이 어제 새로 왔거든요. 제이콥이라고, 아주 근사한 오메가예요. 딱 1황자 전하 이상형이랄까.”

“크흠. 그렇구나. 그래도 그들의 신분 차이를 생각하면 네가 나서서 소개해주는 건 보기 좋지 않으니까 조심하렴.”

“네~.”

아인은 오늘 제이콥이랑 알렉세이를 만나게 해줄 참이었어서 약간 서운했다. 도대체 제이콥은 황실에서 시종 노릇하면서 광공 하나 유혹하지 않고 뭘 했나 싶다. 제이콥을 따라서 애교 있게 말끝을 늘리며 대답하니, 샤를이 정수리를 쓰다듬어줬다.

샤를은 아들의 심미안이 매우 이상한데 어떻게 유명한 화가가 되었는지 신기할 뿐이었다. 제이콥이라면 그도 봤다. 희미한 오메가 페로몬을 맡지 않았다면 우성 알파라고 해도 믿을 만큼 덩치가 큰 사내였다.

아인이 왜 1황자 전하가 제이콥 같은 사내를 좋아할 거라 믿는지 모르겠지만, 아인의 눈에는 제이콥이 엄청 멋있어 보이나 보다. 천재는 뭔가 다른가 싶기도 했다.

페르디안 가문의 마차는 시내까지 천천히 달렸다. 제일 먼저 들른 곳은 레이나가 좋아하는 보석 상점이었다. 그녀가 지금 차고 있는 목걸이와 머리 장신구들도 다 이곳에서 산 제품이었다.

셋은 마차에서 내렸다. 아인은 고개를 갸웃하며 부모님을 따라서 보석 상점에 들어갔다.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그들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만화에 나오는 해적처럼 인중 양쪽으로 수염을 기른 남자가 웃으며 다가왔다.

“샤를 백작, 레이나 백작 부인. 어서 오십시오. 저희 아놀드 보석 상점에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샤를은 아인의 어깨에 손을 얹고 소개했다.

“여기는 내 아들 아인 페르디안입니다. 지배인.”

“하하하. 몰라봐서 죄송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아인 공자. 저는 이 아놀드 보석 상점에서 일하는 지배인입니다. 저를 통하면 이 세상에서 구하지 못할 보석이 없으니, 앞으로 필요하신 물건이 있으시면 편히 말씀해주십시오.”

보석을 살 일은 없었지만 알겠노라 고개를 끄덕였다. 지배인이 가게 안쪽으로 안내했다. 호위 기사들이 입구에 서서 대기했다. 그런데 보석 상점이라고 해놓고 보석이 하나도 안 보이는 밀실에 도착했다. 뭐 알아서 보석을 보여주겠지 싶어 소파에 앉았다.

직원이 쿠키와 홍차를 줘서 먹으려고 하는데, 때마침 누군가 방문해 손을 내렸다. 그는 커다란 로브를 쓴 채 신분을 감추고 있었다. 보석 상점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자였다. 이상함을 느낀 샤를이 벌떡 일어나 허리춤에 걸린 총을 빼 들어 쏴버렸다.

“아악!”

눈을 질끈 감고, 귀를 틀어막았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었다. 아무런 짓도 하지 않은 사람을 말이다. 샤를을 마음속으로 비난하는데, 샤를이 시체에서 로브를 벗겨냈다. 로브 안에 총이 있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그들 모두 죽을 뻔했다. 샤를이 손가락으로 고리를 만들어 휘파람을 불었다. 그 소리를 들은 호위 기사들이 달려왔다.

“아놀드 후작이 알아차린 모양이야. 우리 아인이가 1황자 전하의 가이드라는 걸. 지금 당장 저택으로 돌아갈 것이니, 마차 안에 혹시 폭탄이 설치되어 있는지 먼저 확인해.”

“예. 백작님.”

호위 기사 중 대장 격인 실비아가 부하 한 명을 먼저 보내 마차를 검사하게 했다. 호위 기사 넷이 총을 빼 들고 우리를 호위했다. 그들에게 둘러싸여 보석 상점을 벗어나며 깨달았다.

원작 소설에서 레이나가 보석 상점 앞에서 강도에게 죽었던 사고는 어쩌면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마차에 설치되어 있던 폭탄을 페르디안 백작 가문의 기사가 해체해냈다.

불안에 떠는 레이나를 다독이며 샤를이 가족들을 마차에 태웠다. 아인은 손을 덜덜 떨었다. 하마터면 우리 가족 다 죽을 뻔했다.

“아인아, 잘 들으렴. 이 유르한 제국에는 황자가 두 명 있어. 1황자인 알렉세이는 전 황후의 소생이고, 2황자는 현 황후 헬링턴의 자식이야. 그동안은 1황자 전하께 가이드가 없어서 견제를 안 받았지만, 네가 가이드라는 걸 2황자 측에서 알아차렸다면 이야기가 달라져.”

“…뭐가요? 왜 달라지는데요?”

“그야 1황자 전하는 S급 에스퍼잖아. 가이드가 있어 안정성만 증명되면 황태자로 책봉될 거야.”

자신은 그냥 피폐물 19금 악역수에 빙의해서 공과 수를 이어주려고 한 것뿐인데, 이건 소시민인 자신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스케일이 컸다.

“위기를 느낀 2황자가 이렇게까지 할 줄 몰랐는데… 그분이 만들어낸 착한 황자 이미지에 아빠도 속은 것 같아. 황족은 애초에 믿으면 안 됐었는데… 하아.”

샤를이 자신의 손을 꽉 잡아주며 다짐하듯 말했다.

“네가 1황자 전하의 가이드랍시고, 두 황자의 황위 쟁탈전에 휩쓸려 희생양이 될 필욘 없어. 아빠는 우리 가족이 제일 중요하고, 가장 소중해.”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레이나는 실신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녀가 머리를 손으로 싸맨 채 마차 벽에 기댔다.

“아인아, 앞으로는 지금처럼 못 살고 고생할지 모르지만, 엄마 아빠랑 다른 나라에 도망가서 살자. 그럼 계속 평범하게 살 수 있어.”

왜 샤를이 도망을 택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자기 아들의 행복을 가장 우선시하기 때문이었다.

현재 2황자가 이 나라의 황태자 유력 후보로 가장 부각되고 있었다. 2황자 편에 붙어서 기생하면, 더 이상의 공격은 안 당할 거다. 하지만 1황자가 가만있지 않을 거다.

그렇다고 1황자의 가이드가 되어서 알렉세이의 보호를 받기에는 아인은 우성 알파의 말 자지가 무서웠다. 자신이 알렉세이에게 가이딩(섹스)을 해주며 행복할 수 없다는 걸 샤를은 알고 있었다.

백작이 아닌 아버지라서 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그는 이곳에서의 모든 걸 버릴 걸 각오하고, 오직 자신을 위해 그런 결정을 내린 거다.

우습게도 이런 위급 순간에 동화책에 넣을 삽화 작업을 마무리하지 못한 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작업실에 가득 있는 자신의 그림들도….

“괜찮아요. 아빠. 사실 아빠가 감옥 들어가 있을 때, 우리 집 쫄딱 망해서 고생해본 적 있어요. 나 귀족 생활 못 해도 괜찮으니까 아빠 슬퍼하지 마세요.”

아인이 손으로 뺨을 문질러 샤를의 눈물을 닦아줬다. 그는 눈시울이 붉어져 그렁그렁 눈물을 매단 채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우리 아인이 장하네. 아빠 위로할 줄도 알고.”

***

마차가 페르디안 백작저에 도착했다. 샤를이 고용인들을 다 불러 짐을 최소한으로 싸게 했다. 현금화할 수 있는 고가의 보석을 가장 먼저 챙겼다. 고급스러운 외출복을 벗고, 고용인들에게 옷을 빌려서 허름하게 입었다. 디디가 백작 가족이 떠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오두막에서 건너왔다.

“꼭 지금 당장 떠나야 해요? 2황자가 대놓고 아인이를 죽일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충분히 재산 정리하고 떠나요. 너무 아깝잖아요.”

“1황자가 러트일 때 도망쳐야지, 안 그러면 그가 아인이를 붙잡으려고 추적할 거예요. 그럼 절대 그의 손에서 내 아이를 빼낼 수 없어요.”

“헤휴~ 복잡한 인간사.”

엘프인 디디는 이해 못 하겠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가 그럼 자신이 이 저택을 사용하겠다고 했다.

고용인들 틈바구니에서 덩치 큰 시종이 불안한 눈초리로 자신을 쳐다봤다. 제이콥을 떠올리게 하는 시종이어서 눈에 띄었다. 아인은 제이콥의 행방을 찾았다. 제이콥은 청소를 하고 왔는지 손에 걸레를 쥐고 있었다.

자신이 떠난 후 페르디안 백작저를 찾은 알렉세이가 제이콥과 마주치게 되면, 이 소설은 무사히 해피엔딩으로 끝나게 될 것이다. 아인은 걱정을 버리고 발걸음을 옮겼다.

백작 가족은 백작저로 식료품을 나를 때 사용하는 초라한 마차에 몸을 실었다. 도망치는 것이기 때문에 편하고 좋은 마차를 탈 수 없었다.

마차가 굴러갈 때마다 엉덩이가 통통 뛰어오르며 엉덩이뼈가 아팠다. 성문에 도착했다. 경비병은 형식적으로 마차 안을 살피고 보내줬다. 아직까지 위에서 내려온 명령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샤를은 마부꾼 노릇을 하는 내내, 마차 안을 들여다보며 레이나와 자신을 살폈다. 정말 좋은 아버지였다. 하긴 그는 어린 아들을 위해 10년 동안 감옥살이까지 한 존재다.

그런 부성애를 가진 이인데 샤를과 원수가 된 악역수도 참 재주가 좋았다. 밤새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멀미와 엉덩이 통증, 허리 결림, 어깨 뭉침 등으로 고생했다. 이렇게 빠르게 이동하는 이유는 최대한 빨리 해안으로 이동해 배를 타고 떠나기 위함이었다.

억제제를 먹지 않아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지금쯤 토하느라 정신없을 뻔했다.

“아, 맞다.”

짐을 뒤져봤지만 여분의 억제제가 나오지 않았다. 다른 나라에서 돈으로 바꿀 만한 값비싼 패물들을 챙기느라 바빠서, 거기까지는 생각이 닿지 못한 탓이었다. 바지 주머니에 있는 억제제 한 알이 지금 갖고 있는 억제제 전부였다.

“뭐 찾니?”

“…엄마, 나 억제제 한 알밖에 없어요.”

“여보, 배 타기 전에 아인이 억제제 사야 해요. 잠깐 마을에 들러요.”

곧장 목적지로 달리던 마차가 우회해 마을로 들어갔다. 샤를이 혼자 빨리 갔다 올 테니, 엄마랑 마차 안에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아직까지 무슨 일이 벌어지지도 않았는데 어두운 마차 안에 있으려니, 무섭고 눈물이 자꾸 났다.

레이나가 자신을 끌어안고 등을 쓰다듬어줬다.

“괜찮아. 아인아, 엄마 아빠가 있잖아. 다른 나라 가서도 잘 지낼 수 있을 거야. 거기서도 우리 아인이가 좋아하는 그림 잔뜩 그리고 재미있게 살자.”

“훌쩍. 네.”

그러고 보니 레이나도 아인 때문에 힘들게 성공시킨 갤러리를 버리고 떠나는 거였다. 망할 가이드. 도대체가 이딴 가이드라는 게 뭐길래 한쪽은 죽이겠다고 들고, 다른 한쪽으로 자꾸 싫다는데 찾아오냔 말이다.

걱정과 달리 샤를은 무사히 억제제를 사서 돌아왔다. 약이 30알이나 든 약통이 손에 쥐어졌다. 이제 히트사이클이 와도 걱정 없었다. 멈췄던 마차가 다시 달렸다. 밤늦게 백작 가족은 항구 도시에 도착했다.

샤를은 용병 길드에 들러 몸이 좋은 용병들을 세 명 고용해 우리를 호위하게 했다. 밤이 된 항구 도시는 치안이 좋지 못했다. 길거리에 몸 파는 사람들이 야한 옷차림새로 취객들을 유혹하기 위해 손을 흔들어댔다.

자신에게서 나는 오메가 페로몬을 맡고 빨간 코가 덤벼들려고 했다가 큰코다쳐 물러났다. 빨간 코는 용병들한테 얻어터져서 쫓겨났다.

샤를은 술집으로 들어가 안을 살폈다. 팔뚝에 문신을 한 사내들이 술을 마시며 포커를 치고 있었다. 담배 냄새, 술 냄새, 오줌 지린내로 가득한 실내 공기가 몹시 탁했다.

비행기 타다가 추락해서 정글에 떨어진 것처럼 모든 게 낯설고 두렵게 느껴졌다. 담배 연기를 입에서 뻐끔 뿜어낸 못생긴 아저씨가 자신에게 윙크를 해 얼른 레이나 뒤에 숨었다. 자신이 그녀를 지켜줘야 하는데 말이다.

얼른 정신 차리고, 레이나를 자신의 뒤에 숨겼다. 샤를이 포커 판이 벌어지고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당장 떠날 배를 찾고 있다.”

“푸하하하. 이 얼간이는 뭐야.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배를 타겠대.”

행색이 누추한 선원들이 샤를을 비웃었다. 바닥에 더러운 가래침을 뱉는 자도 있었다. 샤를은 무표정으로 그들을 보며 다시 말했다.

“당장 다른 나라로 가주면 30골드를 주겠다. 인원은 셋.”

“이야, 이거 보니까 돈 많은 귀족 나리인가 보네. 뭔 죄를 저질러서 이렇게 다급히 도망가려고 하실까나.”

배불뚝이가 일어나서 샤를의 가슴을 손으로 밀쳤다. 움찔, 달려 나가려다가 제동이 걸린 몸이 요동쳤다. 샤를이 아인을 돌아보며 가만히 있으라 했다. 그가 총을 꺼내 잠금을 풀고 배불뚝이의 머리통을 겨눴다.

“귀족인 걸 알면서도 모독했으면 죽어도 억울하지 않겠군.”

“히이이잇. 나리. 잘못했습니다… 할 줄 알았냐!”

고개 숙이고 비굴하게 비는 것 같았던 배불뚝이가 고개를 치켜들고 샤를에게 덤벼들려고 했다. 총은 망설임 없이 발사되었다.

샤를은 어차피 1황자에게 금방 자신들의 흔적을 들킬 걸 알아 몸을 사리지 않았다. 지금 당장 그들의 안전이 더 중요했다.

배불뚝이가 뒤로 넘어갔다. 테이블에 올려져 있던 싸구려 와인 병이 같이 넘어지면서 바닥이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그 붉은 웅덩이가 피인지, 와인인지 구별되지 않았다.

“이거 보통 분이 아니시구만.”

구레나룻이 진한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그가 바닥에 죽은 배불뚝이를 발로 차 옆으로 치웠다.

“목숨이 걸린 일 같은데 30골드는 너무 적어. 인당 30. 다 합해서 90골드면 당장 내 가주지.”

“사기도 적당히 쳐. 누굴 호구로 알아? 30골드도 네놈들한테는 돈벼락을 맞는 거야. 차라리 배를 사서 타는 게 더 싸겠군.”

“당신네들 당장 떠나려는 거 아니었어? 그럼 배를 사서 직접 다른 나라로 가시든가.”

“….”

샤를이 혀를 차며 총을 내렸다.

“원래 급하게 구하면 비싸지는 법이지. 가지. 어디로 모셔다드리면 되나?”

“실로니아로 가지.”

“도피 중이라면 탁월한 선택이야, 형씨.”

구레나룻이 진한 사내가 콧노래를 부르며 술집을 벗어났다. 백작 일행은 얼른 그를 쫓아서 선착장에 갔다. 사내의 배는 허름한 고깃배였고, 길이가 고작 3m 정도밖에 되지 않을 만큼 몹시 작았다.

이런 배를 타고 어떻게 바다를 건널 수 있을까 걱정되었다. 용병들은 호위 의뢰를 끝마치고 돌아갔다.

레이나가 배 위에 발을 올렸는데 배가 위아래로 크게 출렁였다. 샤를이 먼저 배에 타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레이나가 무사히 배에 올라탔다.

이제 아인 차례였다. 아인이 샤를이 내민 손을 잡고 배에 한 발을 올렸다. 그런데 뒤에서 머리채를 강하게 잡아당기는 힘 때문에 올라탈 수 없었다.

“아악.”

비명을 지르며 머리카락을 잡은 손을 떼어내려고 그자의 손을 잡는 순간, 몸에 소름이 돋았다. 빠르게 무언가가 빠져나갔다. 아!

본능적으로 자신의 힘을 게걸스럽게 갈취해가는 자를 알아차렸다. 뒷머리를 단단히 붙잡힌 아인에게 알렉세이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어둠 속에서 요요하게 빛나는 은회색 눈동자는 북극의 빙산처럼 경이롭고 아름다웠다. 심기가 뒤틀렸는지 그의 붉은 입술이 한쪽만 삐죽 올라가 있었다.

“안녕, 아인아. 어딜 그렇게 꼬랑지에 불붙은 쥐새끼처럼 도망가?”

“…흑. 흐윽. 아파. 아파요. 이거 놔주세요.”

“싫은데. 머리채 놓으면 저 배 타고 나 버리고 갈 거잖아.”

그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계속 웃었다. 샤를이 당황해서 배에서 짐을 내리고, 레이나 역시 내리게 했다. 배는 출항하지 못했다. 아인의 머리카락이 쥐어뜯길 듯 단단하게 알렉세이 손에 휘감겼다.

“악.”

짧은 비명을 내지르느라 벌어진 입 속으로 혀가 침입해 들어왔다. 버둥거리며 피해 보려고 했으나 그가 워낙 뱀이 똬리를 튼 것처럼 머리카락을 단단히 잡고 있어서 그럴 수 없었다. 키스를 끝낸 알렉세이가 눈꼬리를 접고 웃었다.

“예쁜아, 예쁘게 생겼으면 예쁜 짓만 하자. 사람 열 받게 하지 말고. 괜히 혼나면 아파요. 응?”

자상한 척 묻는 말은 사실상 협박이었다. 알렉세이가 낑낑거리며 배에서 짐을 다 내린 샤를과 레이나를 가리켰다. 손으로 권총 모양을 만든 그가 자신에게 물었다.

“질문 하나, 왜 아인 페르디안이 내가 러트라는 소리에 야반도주하는 것일까.”

“….”

“질문 둘, 내가 손으로 만든 권총을 쏘면 저것들이 죽을까.”

“….”

“정답을 알면 대답해. 아인아. 참고로 셋까지 셀 때까지 아무 대답도 못 하면 이 총 발사되는 거야.”

“…으.”

“하나. 둘.”

숫자 세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그에게 매달려서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었다. 알렉세이가 잘했다고 엉덩이를 토닥여줬다.

“그래, 무조건 나한테 매달려 있어. 거기가 네가 있을 데니까.”

그가 자기 목에 휘감긴 아인의 팔뚝에 입을 맞췄다.

“그런데 대답을 하나도 못 했네. 빵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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