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호라이슨은 예쁜 걸 좋아한다. 그래서 한때 알렉세이를 사랑한 적 있었다. 그를 따르는 귀족들은 호라이슨이 이복형인 알렉세이 유르한에게 어렸을 때부터 핍박당한 줄 알았지만, 진실은 정반대였다.
전생의 기억을 떠올린 뒤, 호라이슨은 계획적으로 알렉세이를 조졌다. 그가 아끼는 곰인형을 망가트리고, 황제와 그 사이를 이간질해 그를 고립시켰다.
아름답고 강한 그가 어린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찰흙처럼 뭉개지고 망가져 형체도 알아볼 수 없었으면 좋겠다. 실제로 S급 에스퍼로 태어난 알렉세이의 운명은 가이드를 만나지 못해 그렇게 될 뻔했다. S급 가이드 아인 페르디안을 만나기 전까지 말이다.
행복하게 웃을 수 있는 건 호라이슨의 특권이었다. 오직 호라이슨만이 누려야 했다. 그런데 알렉세이가 지금 감히 주제에 걸맞지 않게 그러고 있었다.
보석 상점을 운영하며 든든한 자금을 지원해주던 아놀드 후작이 실종되었다. 분명 저 혼자 충성심이랍시고 일을 저질렀다가 알렉세이한테 처리된 것이리라. 증거는 없었지만, 심증을 넘어서 확신했다.
호라이슨은 주체할 수 없는 분노를 케인에 담아서 가이드에게 내리쳤다. 쫙쫙 피부가 갈라지며 피가 흘러내렸다. 예전에는 이런 가학적이고 잔인한 취미 따위 없었다. 호라이슨을 이렇게 망가트린 건 다 알렉세이다. 그가 자신을 괴물로 만들어버렸다.
“아악. 아악. 아아. 흐흐흑. 흑흑.”
잿빛 머리 가이드가 비명을 지르고 울면서 살려달라고 빌었다. 알렉세이와 머리색이 비슷해서 데려온 것뿐인 D급 가이드였다. 어차피 이런 허접한 등급의 인간 따윈 이 세상에서 없어져도 전혀 문제 될 게 없어서 오늘 희생양으로 삼았다.
등이 너덜너덜해지도록 케인을 휘두르느라 사방으로 튄 핏방울이 하얀 얼굴에 맺혔다.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뺨을 쓸어 피를 닦아냈다. 성당에 있는 천사처럼 선한 인상의 미인이 웃었다.
“많이 아파?”
“흑흑. 네, 흑. 아파요. 제발 가이딩만 하게 해주세요.”
“안 됐네. 더 아파야 되는데.”
예전에 알렉세이가 자주 사용하던 대사였다. 그가 전생의 자신을 찍어 누르고, 거칠게 범할 때마다 자비를 구하는 이에게 그리 말하곤 했다.
단검을 잡은 호라이슨은 가이드에게 다가갔다. 다정하고 자상한 황자님이라는 소문과 달리 그는 미친 살인마였다.
***
시체 해부를 끝마친 호라이슨은 피에 젖어 제 색을 잃은 장갑을 벗었다. 그리고 능력을 사용해 그것을 불태웠다.
제법 좋은 가죽을 얻어 알렉세이의 가이드에게 선물로 줄까 싶었다. 화가라니 캔버스로 만들어 선물하는 게 좋겠다.
가이드 시체에서 피부 가죽과 머리카락만 빼고 다 불태워 없애버린 후, 현장을 깨끗이 정리했다. 피해자의 머리카락은 언제나처럼 도자기 인형을 만드는 데 쓰일 것이다.
시종을 불러서 치우게 하는 짓 따윈 하지 않았다. 호라이슨의 본모습을 아는 이가 적을수록 그는 완전 범죄를 저지를 수 있었다.
황자인 그가 직접 걸레로 피가 묻은 테이블을 닦고, 청소도구를 사용한 뒤 불태워 증거를 인멸했다. 깨끗하게 변한 집무실을 보자 흡족했다.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책상에 앉았다. 가이드를 만난 알렉세이가 잘 잔다는 소리에 흥분한 나머지 집어 던졌던 서류를 도로 주워 가지런히 정리했다.
“풋. 푸흐흐흐.”
웃음을 참느라 혼났다. 손에 잡은 서류 첫 장이 거지 새끼와 병신 새끼들을 구휼해줄 빈민 기구를 만들어달라는 요청안이었던 것이다.
그 누구도 자신을 돌봐주지 않았다. 오히려 젊어서 좋다며 짓밟고 망가트렸다. 오래전 알렉세이는 충분히 자신을 구할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지옥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자신을 보며 더럽다고 경멸하기나 했었지.
약하면 죽어야 한다.
만일 호라이슨이 황제가 되면 제일 먼저 노인과 병자, 장애인, 고아부터 죽여 버릴 거다. 나라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인력은 필요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지금 귀족들에게 상냥한 2황자였다. 서류에 서명을 하고, 빈민 기구를 설립하기 위한 예산안을 작성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약속 시간이 되었다.
어두워진 실내를 밝히기 위해 마법등을 켰다. 창문이 열리고,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가 들어왔다. 남자는 집무실에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도자기 인형에 흠칫 놀랐다. 인형의 머리카락이 진짜 사람 머리카락이라는 걸 알아본 것이리라. 하여간 눈치가 좋았다.
그는 유르한 제국에서 죽은 사람으로 통하는 기디언 백작이었다. 샤를에 의해 심각한 부상을 입은 기디언은 가족들에게 자기 장례식을 치르게 해 제 생존 사실을 감췄다.
샤를은 억울한 누명으로 10년이나 되는 세월을 날렸다. 샤를에게 맞은 기디언이 앙심을 품고 제대로 엿 먹였다.
그러나 호라이슨은 이 사실을 알게 되었어도 어디에도 진실을 밝히지 않았다. 샤를이 감옥에서 10년을 살든, 100년을 살든 마음에 맺힌 응어리는 계속 불타올랐다.
기디언이 어떻게 자기 정체를 알아차렸는지 몰라 몹시 경계했다. 얼굴의 흉측한 화상 흉터는 얼마 전 기디언 백작저에 일어난 화재 사건으로 생긴 것일 테다.
기디언은 지난 세월 동안 뻔뻔하게도 자기 집의 시종장으로 들어가 주인 행세를 하며 살았다. 그 집에서 일하던 기존 고용인들은 죄다 해고되고, 시골에서 데려온 촌뜨기들만 모아놓고 일을 시켜서 아무도 시종장이 백작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피해자 아버지인 샤를 백작은 면회도 안 되는 감옥에서 온갖 고생을 한 반면, 가해자 기디언은 편하게 살았다. 귀족 사회에 속한 귀족이 아닌 이상 그가 범죄자라는 사실을 평민들은 알지 못했다. 자유롭게 외출했고, 범죄를 저질렀다.
참으로 이 세상은 허술하게 굴러갔다. 이런 쓰레기 새끼들이 아무렇지 않게 잘만 돌아다녔다. 이러니 호라이슨이 황제가 되어 이 나라를 잘 관리해줘야 하는 거였다.
“우리의 목적이 같은 것 같아서 그댈 불렀어. 기디언 백작, 아인 페르디안을 가지고 싶어 했지?”
그의 눈에 열망이 맺혔다. 기디언 백작가가 페르디안 갤러리에 막대한 후원금을 쏟아부어 아인의 그림 하나를 샀다고 들었다.
그 사실을 통해 호라이슨은 기디언을 추적할 수 있었고, 끝내 그가 아직도 아인을 노리고 있음을 눈치챘다.
전생에서 자신이 겪은 일의 범인이 샤를이란 확신이 없었다면, 호라이슨은 이 자를 마주하지 않았을 거다.
“그 얼굴을 치료하려면 힐링 포션이 필요하지 않겠어?”
아무리 귀족이어도 힐링 포션과 같은 아이템은 아무나 가질 수 없었다. 마물을 해치운 에스퍼들이 가끔 힐링 포션을 습득할 때가 있다. 그럼 그들은 그걸 자기 부상을 치유하기 위해 써먹지, 돈을 주고 팔아먹지 않았다.
유르한 제국에서 유일하게 치유 능력을 가진 에스퍼 다알리아는 1황자의 부하였다. 그녀는 자기 능력을 부상당한 에스퍼에게 써주지 않았다. 오직 알렉세이의 명령에 따라서만 제 능력을 썼다.
그녀에게 치료를 받을 수 없으니 자연히 힐링 포션은 에스퍼들 사이에서 소비되고 일반인에게까지 흘러들지 않았다.
호라이슨은 유르한 제국의 몇 안 되는 A급 자연계 에스퍼였다. 얼마든지 힐링 포션을 습득할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이었다. 저 흉측한 화상 흉터 따위 힐링 포션 한 병이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기디언의 얼굴에 희망이 어렸다.
“아인 페르디안이 10년이나 지났는데, 당신 얼굴을 기억하려나? 당신 때문에 여태 저택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는데 아주 뿌듯하겠어.”
호라이슨이 독이 든 힐링 포션 병을 짤랑짤랑 흔들며 기디언을 유혹했다. 독은 아무런 증상 없이 온몸으로 서서히 퍼져 기디언이 임무를 완수했을 때쯤 그를 죽일 것이다.
“기회를 봐서 마음껏 아인 페르디안을 짓밟아봐. 그게 당신 특기잖아.”
굳이 기디언을 찾아내 아인에게 보낼 필요는 없었다. 아인의 트라우마가 기디언이기에 번거로움을 감수하면서까지 찾아내 이 제안을 하는 것뿐이었다.
알렉세이의 가이드가 완전히 망가져 버렸으면 좋겠다.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못 나오던 등신은 어릴 때 자신에게 트라우마를 심어준 알파를 다시 만나게 되면 회생 불가능하게 될 테지. 짜릿하다.
‘너도 느껴봐야지. 안 그래? 아인아.’
알렉세이가 제 가이드를 끌어안고 울부짖는 멋진 미래가 눈앞에 그려졌다. 힐링 포션을 마신 기디언의 화상 흉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가 손으로 얼굴을 더듬거리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왜… 왜 저한테 이런 기회를 주신 겁니까.”
기디언은 호라이슨이 그에게 기회를 줬다고 하지만, 아니다. 언제나 사람들은 제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한다.
“그야 기디언 백작이 불쌍해서지. 별것도 아닌 일로 그동안 고생이 오죽 많았어? 최근에는 저택에 화재가 나서 재산을 몽땅 잃었잖아. 아, 아내랑 자식도 죽었나? 음. 안됐군. 안됐어.”
“흑흑흑흑.”
기디언은 진짜 억울하다는 듯 울었다.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거나 뉘우칠 생각 따위 전혀 없어 보였다.
“내 인생이 망한 건 다 아인 페르디안 때문이야.”
혼자 중얼거린 말이 어이없었다. 조무래기 범죄자이지만, 알렉세이의 가이드를 망가트리는 데에는 아주 훌륭한 역할을 해낼 터라 그의 말에 동조해줬다.
“맞아, 기디언 백작. 지금 그대 꼴을 봐. 파티를 돌아다니며 즐겁게 살아야 할 당신이 어떤 몰골이 되었는지. 이제 아무것도 없잖아. 돈도, 집도, 가족도.”
자기가 정리한 침대에 자기가 눕는다는 말이 있다. 결국 제가 뿌린 씨앗을 자기가 거둔다는 뜻이다. 기디언이 창문을 통해 다시 떠난 뒤, 호라이슨은 마법등을 끄고 집무실을 나왔다.
복도에서 그를 마주친 시종들은 얼굴에 호감을 가득 담아 허리 숙여 인사했다. 호라이슨도 수줍게 미소를 머금고 그들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이 모습은 전생에서의 원래 호라이슨과 똑같았다.
원래의 그는 대외적으로 자신이 밀고 있는 천사 이미지에 걸맞은 선한 사람이었다. 진짜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지만, 중요하지 않아 신경 쓰지 않았다.
침실로 돌아와 잠들기 전 씻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욕조에 걸터앉아 물이 받아지길 기다렸다. 고개를 들었다가 우연히 거울 속 제 모습과 눈이 마주쳤다.
더 이상 거울 속에는 아인 페르디안이 없었다. 죽고 나서 눈을 뜨니, 2황자가 되어 있었다. 운명은 예전과 달라져 레이나는 죽지 않았고, 아인은 샤를에게 버림받지 않았다.
아마 지금의 아인은 혼자 집에 있다가 침입한 괴한에게 강간당하지 않겠지. 그를 사랑하는 부모님이 있으니 인안나 신전로 끌려가 남창이 되지도 않을 거다.
저를 더럽게 쳐다보는 에스퍼를 만나 온갖 모멸과 비난을 들으며 짐승처럼 가이딩하지도 않을 테다. 또 다른 자신인데, 자신과는 다른 존재가 되었다. 욕조에 물이 가득 차올랐다. 옷을 벗고 발부터 물에 넣었다.
호라이슨은 알렉세이도 용서할 수 없지만, 자신과 달리 행복한 아인도 용서할 수 없었다. 자신이 불행했듯 지금의 아인 또한 그리되어야 했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전생에서 맺힌 응어리를 푸는 방법이었다.
***
알렉세이는 아놀드 후작을 고문한 뒤, 혹시라도 피 냄새가 날까 봐 아인을 만나기 전 먼저 씻었다. 자신의 침실에서 알렉세이만을 기다리고 있을 그를 생각하니 몹시 행복했다.
오메가가 임신하면 뭐가 먹고 싶어지는지 다알리아에게 물어봐야겠다. 그에게로 가던 중, 빈손으로 가기 뭐해 방향을 틀어 다알리아를 만나러 갔다. 그녀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부터 유난이냐며 깔깔 웃었다.
“1황자 전하는 정말 좋은 아버지가 되실 것 같아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상상이었다. 오메가 아버지 제논은 너무 어렸을 때 죽고 말았다. 알파 아버지는 다른 오메가한테 빠져서 반려를 모함해 죽인 미친놈이었다.
그렇게까지 S급 에스퍼 아들을 원했으면서 알렉세이한테 살갑게 대해준 것도 아니었다. 어렸을 때는 자신의 머리카락 색이 호라이슨처럼 완벽한 은발이 아니어서 예쁨을 못 받는 거라 믿었다.
이 망할 머리카락 색만 바꾸면 자신이 사랑받을 거라 착각했다. 그러나 황제는 은발로 염색한 알렉세이를 보고도 모른 척했다. 기대는 철저하게 깨졌다. 문제는 자신이 호라이슨이 아닌 알렉세이라는 거였다.
“글쎄. 좋은 아버지가 되기에는 보고 배운 게 나빠서 힘들지 않을까.”
다알리아가 그런 소리 말라며 손을 내둘렀다.
“꼭 좋은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만 좋은 부모가 될 수 있는 건가요? 그럼 저도 고아인데 좋은 부모 못 되게요.”
“그러네. 넌 좋은 어머니가 될 것 같아.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다알리아는 임신의 힘든 점에 대해 이것저것 이야기해줬다. 아직 임신 초기라 외형적으로 전혀 티 나지 않지만, 기분이 급격하게 우울해졌다가 좋아졌다 한다고 했다. 그녀는 아인의 사연을 알아 더 걱정을 표했다.
“그러니까 1황자 전하가 아인 공자를 잘 보살펴주세요.”
“응.”
“맛있는 밥도 실컷 먹이고.”
“응.”
“잘 때마다 이마에 키스해주고.”
“응.”
착실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알렉세이를 보며 다알리아가 웃었다. 덩치는 산만 한데 아직 20살밖에 안 된 그는 어린아이같이 순진한 구석이 남아 있었다.
제대로 또래들과 어울리고 대화했다면 좀 더 성숙했을지도 모르겠으나, 여태 폭탄 취급받았던 그다. 알렉세이가 파티에라도 참석하려고 하면 귀족들이 들고 일어섰다.
언제 폭주할지 모른다면서 이미 죽은 황후의 소생을 철저히 그들의 세계에서 배제해버렸다. 알렉세이 또한 그런 귀족들에게 날을 세우며 혹 친해지고자 다가오는 자들이 있으면 무섭게 굴었다.
반면 헬링턴 황후가 낳은 호라이슨은 어디서든 환영받았다. 2황자는 온화한 성품과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A급 에스퍼였다. 호라이슨이라면 평탄하게 집권 생활을 해나갈 거라고 모두들 기대했다.
물론 그것만으로 귀족들이 호라이슨을 대놓고 지지하게 된 건 아니었다. 황제 페도로프의 총애가 둘째 아들에게 온통 쏠려 있기 때문이었다.
대놓고 새로 맞이한 황후 사이에서 낳은 아들만 제 새끼처럼 구는데, 황제의 뜻에 반할 귀족이 있을 리 없었다.
제논이 바람을 피워서 황제가 죽였다는 명제에는 다른 뜻도 숨어 있었다. 귀족들은 알렉세이가 황제의 아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품었다. 알렉세이가 S급 에스퍼로 각성했기 때문에 황제가 그냥 자기 아들인 척 뻐꾸기 새끼를 품고 있는 것뿐이라고 말이다.
그렇지만 다알리아는 그녀를 구해줬던 제논을 믿었다. 그는 절대 결혼한 배우자를 두고 바람피울 존재가 아니었다. 제논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었고, 언젠가 황제가 된 알렉세이가 반드시 진실을 밝혀낼 거라고 믿었다.
다알리아는 제 가이드랑 본딩과 각인을 다 했다며 어린아이처럼 자랑하는 알렉세이가 마냥 기특하기만 했다. 언제 이렇게 다 커서 애 아빠가 된 건지. 믿기지 않았다.
알렉세이와 다알리아의 나이 차이는 고작 6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감히 1황자인 그를 제 아들처럼 여겼다.
“아인이에게 매일매일 선물을 주고 싶은데 어떤 걸 줘야 할지 모르겠어. 다알리아, 네 생각은 어때?”
“꽃을 선물해 보세요.”
“꽃? 먹는 것도 아니고 금방 시들잖아.”
“하여간 낭만이 없어. 원래 작은 게 감동이거든요. 매일 선물하고 싶다면서요. 한 송이라도 좋으니까 아인 공자한테 주세요. 전 베아트리체한테 그렇게 넘어갔거든요.”
이전까지 다알리아는 남자 알파만 좋아했다. 여성 알파는 자신의 반려로 전혀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 그러나 끈질긴 베아트리체의 구애에 결국 넘어가 그녀와 결혼을 하고 말았다.
알렉세이는 다알리아와 헤어져 복도를 걸으며 정원을 내다봤다. 그가 머무는 모래궁은 정원을 관리하지 않아서 호라이슨의 궁과 달리 예쁜 꽃들이 없었다.
바람을 따라 어디서부터 날아왔는지 모를 씨앗이 척박한 땅, 그것도 하필 돌 틈에 뿌리를 내려 꽃 한 송이를 피워냈다. 화려한 백장미와 달리 수수한 생김새의 들꽃은 작고 앙증맞았다.
알렉세이는 이런 초라한 꽃을 아인에게 선물해줘도 그가 좋아해줄까 고민해봤다. 이름 모를 작은 하얀색 꽃 앞에 쪼그려 앉아 꽃잎을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그러고 보니 제논은 알렉세이가 꽃이라며 뽑아온 잡초도 예쁘다고 해줬다. 아인도 자신을 사랑하면 제논처럼 말해줄 것이다.
그러나 알렉세이는 아직 아인이 그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주지 않았음을 알았다. 쓰레기처럼 버려질 들꽃을 생각하면 마음 아파 그냥 하염없이 바라만 봤다.
나중에 아인이 자신을 좋아하게 되면 꼭 이 꽃을 꺾어서 가져다줘야지 마음먹었다. 그때까지 이 꽃이 짓밟히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으면 좋겠다.
결국 고민은 많았지만 빈손으로 돌아온 알렉세이는 침실 문을 활짝 열었다. 오크가 아인과 놀고 있었다. 알렉세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릴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래도 오크가 약속대로 아인이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왔을 테니 질투하지 않았다. 잊지 말아야 할 게 제이콥은 생긴 건 우성 알파 같아도 불쌍한 오메가였다.
물론 오메가라 해도 완전히 안심해선 안 됐다. 페르디안 백작저에서 오메가에게 박아 넣는 특이한 오메가 시종을 봤다.
허튼짓을 하는 순간, 그 자리에서 알렉세이가 아인에게 붙여놓은 부하들에 의해 제이콥의 목이 떨어질 거다. 거대한 오크의 몸뚱이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아인을 찾기 위해 좀 더 그들에게 다가갔다.
“1황자 전하, 전에 소개했었죠? 저희 저택에서 일하는 시종 제이콥이에요.”
벌써 인사만 두 번째였다. 자신이 아인에게 보낸 오크인데 말이다. 그 사실은 비밀이라 모르는 척 인사했다. 아인이 이상하게 자꾸 제이콥을 보고 무슨 생각이 드는지 물었다. 혹시 다른 오메가를 자신이 좋아할까 봐 그러는 걸까?
“나한테는 너밖에 없어. 아인아.”
“…그게 잘 보라고요. 여기 턱살 좀 봐요. 엄청 귀엽죠?”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다. 귀여운 건 아인이었다. 헤이즐넛처럼 동글동글 작고 깜찍했다. 만일 머리통을 잘라도 안 죽는다면 손바닥에 올려다 놓고 하염없이 바라봤을 거다.
“뱃살 만져보실래요?”
둘 사이에서 무언가 이상한 거래가 오간 것 같다. 제이콥이 위풍당당하게 근육 위에 지방이 껴서 곰돌이 같은 배를 내밀었다. 아무래도 저렇게 불룩한 걸 보면 임신했나 보다.
“임신했어? 몇 개월이야?”
제이콥의 입술이 댓 발 나왔다. 아인이 발을 동동 구르며 안절부절못했다.
“제이콥이 왜 임신을 해요.”
절망적이었다. 원작에서 알렉세이가 반한 제이콥의 매력 포인트가 전혀 먹히지 않았다. 설마 정말 집착광공이 아인을 좋아하게 된 걸까? 아니다. 아니야. 절대 그래선 안 되지.
알렉세이가 계속 아인에게 집착하면 아인은 평생 이 침실에서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기필코 원작대로 스토리가 진행되어야 한다.
물론 원작대로 제이콥에게 못된 해코지를 하려다가 보복당해 죽으면 안 되겠지만, 그것 빼고 주인공들의 로맨스는 같을 필요가 있었다.
독자들이 그랬다. 원래 공 새끼는 초반에 지랄 떨며 입덕부정기를 거친다고. 알렉세이가 입덕부정기 증상을 보이는 걸 보면 생각보다 큐피드 짓이 수월하게 진행되는 것 같았다.
안도의 식은땀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이제 곧 공수가 눈맞아서 자신을 낙동강 오리알 취급할 거다. 힘겹지만 오메가의 신체 구조는 알파와의 그… 흠흠… 그걸 아주 수월하게 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자지 사이즈가 알렉세이보다 작은 알파를 만나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뒤로 하는 섹스는 좋았다. 적당히 알렉세이와 어울리며 그가 메인수와 눈 맞는 날을 기다리기로 했다.
아참, 중요한 걸 잊을 뻔했다.
“억제제 돌려주세요.”
“자.”
억제제 안 주면 제이콥에게 몸통 박치기를 시켜서 받아낼 작정이었는데, 선뜻 돌려줬다. 얼른 약통에서 억제제를 꺼내 먹었다. 안심되었다.
알파 페로몬 때문에 자꾸 의도치 않게 광공하고 자버렸다. 남자끼리 섹스는 뭐,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진짜 임신은 아니었다. 아이를 그곳으로 낳을 텐데, 그럼 죽을지도 몰랐다. 아닌가? 가능하려나?
알렉세이가 넣던 물건의 크기를 머릿속에서 아기 머리통과 비교해봤다. 어쩌면 가능할 것 같기도 했다. 앗! 안 돼. 무슨 생각이야. 정신 차려.
손바닥으로 양 뺨을 짝짝 두드리는데 하나도 안 아팠다. 알렉세이가 제 손으로 아인의 볼을 감싸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손등이 붉게 물들었다가 바로 회복되었다.
“왜 자학해. 혹시 힘들어서 그래? 무서운 기억 떠올랐어?”
뭐래? 갑자기 뜬금없이.
알렉세이가 갑자기 기억나기라도 한 듯 부산스럽게 침실을 뒤졌다. 그가 붉은색 벨벳으로 만들어진 작은 보석함을 가져왔다. 그것을 열자 안에는 황금빛 커다란 보석 반지가 들어 있었다.
이만한 크기는 어린아이들이 사 먹는 사탕밖에 보지 못해서 ‘왜 저기 사탕을 넣었지?’ 생각하고 말았다.
“가고일의 눈이야. 악몽을 막아준대.”
“눈? 설마 눈코입 할 때의 눈이요?”
“진짜 눈은 아니고 가고일 죽이고 나온 보석이야.”
이걸 왜 주지? 혹시 프러포즈나 뭐 그런 건 아니겠지? 네 운명의 짝이 보는 앞에서 반지 같은 거 주지 마. 이 광공아.
자신이 안 받으려고 하자 알렉세이가 억지로 반지를 손가락에 끼워줬다.
“부담 가지지 마. 정말 별거 아니야.”
알렉세이는 보스로 가고일이 나올 때까지 던전 35곳을 뺑뺑이 돌았다.
“그냥… 그러니까….”
변명거리를 찾다가 벽에 걸린 아인의 자화상을 발견한 알렉세이가 말을 이었다.
“네가 그려준 자화상 그림값이라고 할 수 있지. 맞아, 이거 그림값이야.”
“치. 돈으로 주지.”
아인은 투덜거리면서도 반지를 받았다. 알렉세이는 이번에도 말없이 가버리는 제이콥의 듬직한 등빨을 보며 저놈이 참 눈치 좋네, 하고 태평하게 생각했다.
아인의 바람과는 달리, 제이콥을 알렉세이의 침실로 부른 건 큰 패착이었다. 두 번이나 사이좋은 두 사람을 본 제이콥이 알렉세이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접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아인이 하는 말에 혹시나 하고 기대를 걸었으나 역시 안 될 것 같았다. 아인은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 알렉세이가 제이콥을 좋아한다고 말이다. 배 아파서라도 제이콥은 아인의 착각을 정정해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새로운 알파를 찾아 결혼하기 위해 페르디안 백작저로 돌아간 제이콥은 짐을 챙겼다. 오메가들만 있는 이곳은 그리 좋은 만남의 장소가 아니었다.
제이콥은 시종장 존에게 부탁해 알파 귀족 중에서 부자이고 돈 많은 미혼이 있는 저택의 추천서를 받았다. 새로운 곳을 향하는 제이콥의 걸음은 가벼웠다.
***
“말도 안 돼! 이건 사악한 작가의 음모가 분명해! 분명 제대로 썸이 진행되고 있었단 말이야.”
메인수 제이콥이 탈주를 했다. 레이나에게 전화해 제이콥을 불러달라고 했더니, 다른 귀족 가문으로 떠났단다.
아인은 휴대용 통신 마도구가 없는 제이콥 때문에 힘들게 메인수의 새로운 직장, 안달리시아 공작저로 전화하고 나서야 그와 통화할 수 있었다.
“제이콥, 혹시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서운하게 했다면 미안해. 아빠한테 말해서 월급 올려줄게. 돌아와라, 응? 난 네가 필요해.”
“도련님 죄송해요. 저 여기서 제 운명의 알파를 만나버렸어요. 다시는 저한테 연락하지 마세… 아앗. 공작님, 아니에요. 아앙! 전 남친 아니라구요. 이만 끊을게요.”
다급하게 통화를 끝낸 제이콥은 이미 다른 남자의 오메가가 되어 있었다. 으흑흑. 도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아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이제 악역수와 제이콥의 대결 구도가 어그러졌으니, 알렉세이가 알파들 불러서 자신을 강간해 죽이는 결말은 일어날 수 없었다. 굳세게 마음먹고 눈물을 닦아냈다. 데드 플래그를 벗어났으니 축배를 들자.
알렉세이는 잘생기고, 몸이 좋으니 연인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는 개뿔. 그 새끼는 미친놈이었다. 하루 종일 껌딱지처럼 달라붙어 호시탐탐 자신의 구멍을 빨 기회를 엿보는 변태 새끼다.
러트가 끝났는데도 계속 그 짓을 해댔다. 혹시 몰라 억제제를 매일 철근같이 씹어 먹었다. 억제제가 자신의 생명줄이었다.
“풀어줘. 풀어 달라고. 이 납치범아.”
아인은 자신밖에 없는 침대에 엎드려 엉엉 울었다. 이러고 있으니까 꼭 BL 소설에 등장하는 굴림수 같아서 얼른 울음을 그쳤다.
최근에 알렉세이가 업무를 볼 때면 정원 산책을 해도 된다고 허락을 받았다. 얼른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비운의 주인공처럼 굴다가는 갑자기 주인공이 자신으로 바뀔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했다.
손에 스케치북과 연필을 들고 침실을 나섰다. 기사 다섯이 자신을 에워싸 호위했다. 사실 호위인지, 감시인지 구별되지 않았다.
모래궁 정원은 관리되지 않아 별로 볼 게 없지만, 방 안에 있어봤자 할 게 없어서 신선한 바람을 콧구멍에 쐐주며 스케치 연습을 했다.
기사 하나가 나무 그늘 아래 돗자리를 깔아줬다. 여기서 편히 그리라는 소리에 얼른 돗자리 위에 앉았다. 모래궁 정원에 간간이 있는 잡초를 그렸다. 그러다가 깨진 돌 사이에 피어난 작고 하얀 꽃을 발견했다. 캐모마일이었다.
예전에 웹툰 작업하면서 커피나 카페인 음료를 많이 마셨는데, 같이 일하는 어시가 건강 나빠진다면서 캐모마일 차를 선물해준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 캐모마일의 꽃말이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강인함’이라고 알려줬다. 언제나 망하는 무명 웹툰 작가를 위한 작은 위로였다. 참 마음씨 착한 어시였다. 그러니 성공한 것이지 싶었다.
어시 일을 그만둔 그녀는 포털사이트 공모전을 통해 웹툰을 정식 연재하게 되었다. 매주 업로드가 될 때마다 인기 순위 1등을 하는 걸 보면서 못난 마음에 얼마나 자괴감을 느꼈는지 몰랐다.
뭐 그때는 뭘 해도 잘 안 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림을 그리기만 하면 없어서 못 파니, BL 소설 세상이어도 잘 적응하고 살아야지 싶었다.
캐모마일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꽃을 스케치했다. 내일 왔을 때도 이 꽃이 무사하길 바라며 그림을 완성했다. 스케치북을 옆구리에 끼고 황무지 같은 모래궁 정원을 걸었다.
도대체가 1황자라면서 왜 이렇게 구린 곳에서 사는지 모르겠다. 취향이 독특해서 이런 데 사는 걸까?
정처 없이 걷다 보니 흑백 영화에서 갑자기 컬러 영화가 되듯 배경이 바뀌었다. 하얀 백장미들이 만발한 정원이 나타난 것이다. 2황자 궁 같아서 얼른 뒤돌아 돌아가려고 하는데, 은발의 아름다운 미인이 인사를 건넸다.
“저, 혹시 아인 페르디안 작가님 맞으신가요?”
“네… 그런데요.”
경계심을 품고 주춤 뒤로 물러났다. 얼굴을 드러낸 적 없는 자신인데 알아봐서 의심쩍었다. 기사들이 자신을 뒤로 숨겼다. 2황자의 잘생긴 얼굴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누가 형제 아니랄까 봐 굉장히 그리고 싶게 생겼다. 이따가 침실로 돌아가면 스케치해 봐야겠다.
“작가님 팬이어서 인사드리려고 왔어요.”
2황자나 되는 인물인데 자신에게 존댓말을 사용하고, 자처해서 자세를 낮췄다. 아인은 기사 뒤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호라이슨을 구경했다. 천국에서 살아야 하는 천사가 사람처럼 굴어서 신기했다.
암살자를 보내 사람을 죽일 것처럼 보이지 않는데, 뭔가 오해가 있었나?
“괜찮으시면 저랑 같이 차 한잔하시겠어요? 오후 3시예요.”
냉큼 좋다고 대답하려다가 그만뒀다. 어쨌든 호라이슨은 알렉세이와 황위를 두고 경쟁하는 후보자였다.
“죄송한데, 몸이 안 좋아서 이만 가볼게요.”
“아… 그러시면 함께 차 마시는 건 나중을 기약할게요. 어서 가보세요.”
호라이슨이 깔끔하게 물러났다. 은발에 푸른 눈동자, 그리고 선량하게 웃는 하얀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그를 의심하는 자신이 몹시 꼬인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보석 상점에 갔다가 죽을 뻔해서 조심하기로 했다.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모래궁으로 향했다.
가다가 혹시 몰라 뒤를 돌아보니, 호라이슨이 손을 흔들면서 웃어줬다. 자신도 모르게 따라서 손을 흔들다가 얼른 내렸다. 모래궁에 도착해 정원에 들어서는데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화려한 2황자 궁을 보고 왔더니 이곳이 더 황폐해 보였다. 여긴 흙밖에 없었다.
우연히 바람에 씨앗이 날아와 싹을 틔운 잡초와 캐모마일 한 송이, 새들이 먹다 버린 열매의 씨앗에서 자란 나무밖에 없었다. 2황자인 호라이슨의 궁은 화려한데, 알렉세이의 궁은 누가 봐도 초라해 보였다.
심미안이 아무리 나빠도 그렇지 황실에서 받는 대접이 좋았다면, 이런 궁에서 안 살았을 터였다. 아인은 세상과 등지고 살아서 알렉세이가 그동안 어떻게 지내왔는지 전혀 몰랐지만, 그동안 그가 받아온 대접이 어땠는지 이제 와 실감했다. 퍽퍽한 고구마를 먹은 듯 목이 멨다.
침실로 돌아와 통신 마도구로 레이나에게 연락했다.
“엄마, 혹시 통화 괜찮으세요?”
한창 갤러리 일을 할 시간이기는 했지만, 참을 수 없었다.
“무슨 일이니. 아인아.”
“물어볼 게 있어서요. 혹시 1황자 전하… 황실에서 많이 입지가 안 좋은가요?”
“…응. 혹시 네가 그분 가이드라고 누가 시비 걸었어? 엄마한테 다 말해. 혼쭐 내줄게.”
“아니요. 그냥… 제가 있는 궁이 너무 외로워 보여서요.”
아인은 레이나를 통해 현재 알렉세이의 상황을 전해 들었다. 원작과 달리 어릴 때 가이드를 만나지 못한 그는 폭탄 취급 받으며 박해당하고 있었다. 알렉세이가 필사적으로 페르디안 백작저로 자신을 찾아와 말을 걸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땐, 저 집착광공이 자신에게 어떤 해악을 끼치려고 자꾸 찾아오나 싶어 싫었는데 알렉세이는 그냥 언제 폭주할지 모르는 에테르 때문에 필사적이었던 것뿐이었다.
아인은 자신의 속 좁은 마음을 되짚으며 반성했다. 레이나가 망설이는 듯싶더니 입을 뗐다. 알렉세이가 그동안 페르디안 백작저에 뻔질나게 들러 부모님한테 아인의 안부를 전했다고 했다.
덕분에 부모님은 아인에 대한 걱정을 덜 수 있었다고, 통신 마도구로 매일 아인과 통화하게 된 것도 많은 안심을 줬다고 했다.
“생각보다 1황자 전하가 우리 아인이를 많이 생각해주는 것 같아서 한시름 놓았어. 그분께서 잘해주니?”
“…네. 그런 것 같아요.”
그런 사소한 배려가 뭐라고 단단히 닫혀 있던 마음의 문에서 자물쇠가 풀렸다. 스르륵 문이 열렸다. 레이나는 이미 그에게 넘어간 듯싶었다. 자꾸 알렉세이 칭찬을 했다.
자신이 서운해하자 아차 싶었는지, 레이나가 말을 바꿨다. 아무리 1황자 전하여도 우리 아들 눈물 보이게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자신의 편임을 드러냈다. 도대체 사람을 어떻게 구워삶았기에 이렇게 변했는지 궁금했다.
“엄마, 솔직히 말해요. 1황자 전하가 우성 알파라 내 상대로 좋은 거죠.”
“…흠흠. 그… 생각보다 나쁜 분 같진 않더라고. 엄만 우리 아인이가 여자 만나도 좋아. 좋은데… 알파면 더 좋지.”
부모님 앞에서 여자 좋아한다는 말을 꺼내선 안 됐었는데. 에휴.
“그래도 각인은 절대 안 된다. 아인아. 혹시라도 네 목을 물려고 하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불알을 차버려 알았지?”
“…왜요?”
“왜긴 왜야. 각인을 한 알파랑 오메가는 서로의 페로몬밖에 못 느끼고, 발정기도 각인자하고만 보내야 하니까 그렇지.”
그게 왜 심각한 일인가 싶었는데 레이나에게 설명을 들을수록 큰 사고를 쳤구나 싶어졌다. 각인자가 아니면 억제제로도 발정이 왔을 때 가라앉히지 못한단다. 그래서 나중에 사랑이 식어도 각인자랑 주기적으로 만나야 한다고 했다.
각인을 한다고 해서 부하가 되는 게 아니었다. 간악한 사기꾼한테 속아서 홀랑 잡아먹혀 버린 거였다. 아인은 제 목덜미에 새겨진 알렉세이라는 글자를 손으로 만졌다.
“저 엄마, 바쁘실 텐데 이만 끊을게요.”
“그래, 알았어. 아빠한테도 연락 좀 자주 하고. 엄마한테만 한다고 네 아빠 삐졌어.”
“네.”
“그리고 출판사에서 찾아왔더라. 동화책 삽화 받으러. 너 1황자 전하 궁에 있다고 했으니까 조만간 찾아갈 기세던데?”
“아직 마감일 많이 남았는데… 알았어요. 저 작업실에 삽화 그려놓은 것들 있거든요. 그것 좀 보내주세요.”
제일 좋은 건 집으로 돌아가 삽화 작업을 마무리하는 거였지만, 알렉세이가 집에 가겠다는 말만 들으면 귀가 안 들리는 척했다. 작업물을 받아서 여기서 완성하기로 했다.
출판사 직원이 찾아왔다는 말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스케치북에 당근밭을 열심히 그렸다. 집중하던 중 뺨이 따가울 정도로 시선이 느껴져서 고개를 들었다. 알렉세이가 돌아와 있었다.
“언제 왔어요?”
“얼마 안 됐어. 한 3시간 전?”
그 말을 듣고서야 집중하느라 한 자세로 오래 있었던 목과 허리가 비명을 지르는 게 느껴졌다. 허약한 멸치 몸뚱이로 끙끙 앓자 알렉세이가 자기 허벅지 위에 앉아보라고 했다.
보자마자 자신의 구멍에 넣으려고 하다니. 씩씩거리며 손으로 엉덩이를 가리니까 그가 크게 “푸하하.” 웃었다.
“그런 거 아니야. 너 근육 뭉친 것 같아서 풀어주려는 거라고. 하여간 누굴 짐승으로 알아.”
“아니었어요? 나 오늘 아침까지 엄청 힘들었거든요.”
“내 병약한 가이드 몸 축났을 때까지 그 짓 하진 않거든.”
이젠 제법 스킨십이 익숙해져 알렉세이에게 안겨도 전혀 창피하지 않았다. 딱딱한 근육질 몸이 그 어떠한 소파보다 안락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는 왜 자신과 각인을 한 걸까. 자기한테서 못 벗어나게 한 후 계속 가이딩을 받기 위해? 그럼 왜 원작 알렉세이는 악역수에게 각인을 하지 않은 거지?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알렉세이가 단단하게 뭉친 자신의 뒷목을 주물렀다. 힘을 풀고 그 손길에 몸을 맡겼다. 눈을 잠깐 감는다는 게 스르륵 잠들어버렸다.
꿈에서 맑은 개울이 흘렀다. 이번에도 요단강인가 싶어 뱃사공을 찾아봤다. 물줄기를 따라 거대한 분홍색 복숭아가 둥둥 떠내려오고 있었다. 어찌나 크고 예쁜지 저 복숭아를 꼭 가져야겠다 싶었다.
얼른 강물로 뛰어들어 복숭아를 건져 올렸다. 달콤한 향기가 훅하고 코를 자극했다. 한입 크게 베어 물려고 했는데, 저녁 먹으라는 알렉세이의 부름에 그만 깨버렸다. 아쉬워서 입을 쩝쩝 다시며 멍하니 꿈에서 본 복숭아를 떠올렸다.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차려진 만찬을 보면서도 오직 복숭아만 떠올랐다.
“복숭아.”
“응?”
“복숭아 먹고 싶어요.”
10년째 외국 음식에 적응하지 못해 입이 짧은 자신이 먹고 싶은 걸 말하자 알렉세이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떠올랐다. 그가 시종들한테 얼른 복숭아를 가져오라고 성화를 부렸다.
권력의 힘으로 복숭아 한 바구니가 잠시 뒤 자신 앞에 도착했다. 아인은 야무지게 복숭아를 먹었다.
그리고 이 복숭아 사건 이후, 식사에 후식으로 꼭 복숭아가 올라왔다. 먹고 또 먹어도 안 질려서 참 어지간하다 싶었다. 피넛버터 색의 토끼 그림을 다 완성하니, 출판사 직원이라는 자가 찾아왔다.
전에 만난 담당자가 아니어서 물었더니, 새로 바뀌었다고 했다. 명함을 받았다. noe diG. 특이하다 싶었다. 패밀리 네임 마지막 철자가 대문자로 쓰여 있었다. 명함을 인쇄하다가 오타가 났나 보다.
잠자리 눈처럼 렌즈가 커다란 안경을 쓴 중년 남자가 악수를 청했다. 손을 맞잡았는데 엄지가 손등을 오랫동안 쓰다듬었다. 사소한 거였지만 기분 나빴다. 그렇다고 문제 삼아서 따질 만한 일도 아니어서 그냥 넘기기로 했다.
“얼마나 만나 뵙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노에 디그입니다.”
“아, 네. 아인 페르디안이에요.”
“정말 아름답게 자라셨네요.”
“….”
어지간히 자신에게 잘 보이고 싶은가 보다. 덕담으로 노에 씨도 미중년이라고 헛소리를 해줬다. 완성한 삽화들을 그에게 건넸다.
“마감일이 빨라졌던데 동화책은 언제 나오나요.”
“출판사 사정으로 삽화를 빨리 받았을 뿐, 다른 책 출간일도 잡혀 있어 예정했던 대로 출간될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삽화를 받은 노에가 한참이나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 혹시 뭐가 빠졌나 살폈다. 제대로 다 건넸다.
노에가 거침없이 손을 뻗어 아인의 셔츠 목깃을 젖히고, 알렉세이 유르한이라고 적힌 목덜미를 확인했다. 아인은 깜짝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
“1황자 전하와 각인하셨나 봐요.”
“그게 제 책 출판하고 무슨 상관이죠?”
“하하. 책 출판하고는 상관없죠.”
노에가 귀여운 토끼 그림을 빠르게 넘겨보며 피식피식 웃었다. 등골이 서늘해지며 팔에 솜털이 쭈뼛 섰다.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 때문에 얼른 그에게서 삽화를 빼앗았다.
“제가 직접 출판사에 건넬 테니까 노에 씨는 이만 가보도록 하세요.”
“그건 안 되겠는데. 내가 너한테 접근하려고 얼마나 개고생했는지 알아?”
노에가 얼굴을 절반이나 가릴 만큼 큰 잠자리 안경을 벗었다. 처음에는 못 알아봤다. 워낙 오래전의 일이었고, 공포심 때문에 그 당시의 자신은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
“기디언.”
명함에 적힌 인쇄는 잘못된 게 아니었다. 자기 이름 첫 자를 일부러 대문자로 적었던 거다. 그는 자신을 대놓고 조롱했다. 자기 이름 철자를 거꾸로 배열해서 만든 ‘노에 디그’라는 가명으로.
샤를에게 죽은 줄 알았던 자가 뻔뻔하게 살아서 나타났다. 이놈 때문에 샤를은 귀족을 죽인 죄로 10년이나 감옥에서 썩었는데 말이다.
“어라. 예상하던 반응이 아닌데. 꼬맹이. 울든가 무서워하든가 아무거나 하라고.”
세상에는 아인이 기디언 백작 때문에 트라우마를 얻어서 저택에 갇혀 사는 거라고 알려져 있었지만, 전혀 아니었다. 샤를의 희생과 레이나의 사랑으로 아인은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살았다. 재수 없이 길 가다가 광공을 만날까 봐 외출을 안 한 것뿐이었다.
그렇지만 이제 자신은 그토록 무서워하던 광공의 어마어마한 그것도 잘만 구멍으로 삼켰다. 그런 자신인데 고작 어렸을 때 만난 범죄자 새끼가 무서워서 벌벌 떨 리 없지 않은가.
오히려 잘됐다. 샤를이 기디언을 죽이지 않았으니, 그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명예를 되찾을 때였다. 방문 밖에는 아인을 지키는 기사들 천지였다. 자신이 부르기만 하면 온단 소리다. 믿는 구석이 있는 아인은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비명을 질렀다.
“살려주세요!”
1분 대기조가 들어오지 않았다. 목소리가 작아서 그랬나 싶어서 다시 크게 외쳤다. 목구멍이 따끔거리며 아팠다. 기디언이 크크크 웃었다.
“야, 내가 한 번 실패했는데, 허술하게 왔겠냐.”
젠장. 좆 됐다. 재빨리 침실에 딸린 욕실로 도망치기 위해 달렸다. 머리채를 붙잡혀서 넘어졌다. 손에서 피넛버터 래빗 그림들이 날아갔다. 알렉세이 때도 느꼈지만, 이놈의 머리카락을 빡빡 밀어버려서 아예 못 잡게 만들어야 했다.
기디언이 페로몬을 못 맡아서 아쉽다며 자신의 목덜미를 혀로 핥았다.
“혹시 모르지. 이름이 새겨진 피부를 벗겨내면 각인이 깨져서 페로몬 냄새가 다시 날지. 크크크.”
“미친 새끼야. 당장 안 비켜.”
“아가, 왜 이렇게 순진하니. 내가 순순히 비켜주면 범죄자겠니?”
결국 메인수는 다른 남자를 찾아 떠났는데도, 악역수인 자신은 죽는 운명을 피하지 못하는 듯했다. 씨발. 억울해. 주먹을 꽉 말아 쥐고 등에 올라탄 기디언을 때려봤지만, 팔이 붙잡혀서 뽑히는 줄 알았다.
“악! 놔. 놓으라고!”
이놈의 옷은 무슨 종이로 만들어졌는지 알렉세이도 그러더니만, 기디언도 북북 찢어버렸다. 알파들 힘이 이렇게 좋으니 피라미드 지을 때 노예로 쓰면 좋겠건만, 이 소설에 불행히도 파라오가 없었다.
운명은 바꿀 수 없나 보다. 등에 올라탄 기디언이 아인의 바지를 내렸다. 드러난 엉덩이가 괜스레 추워 닭살이 돋았다. 기디언 새끼가 손등을 엄지로 쓸 땐 그렇게 싫었는데, 알렉세이는 초반부터 너무 좋아서 자신한테 세뇌 건 거 아닌가 의심할 정도였지.
이런 상황이 되어서야 자신이 처음부터 알렉세이를 싫어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바보 멍청이였다. 그러니 차에 치여 BL 소설에나 빙의하지.
“난 너처럼 간 큰 놈은 처음이야.”
아인의 눈이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크게 떠졌다. 눈물이 그제야 방울방울 맺혀 뺨으로 흘러내렸다. 아인은 안심하고 바닥에 얼굴을 파묻은 채 울었다.
등에 올라타 있던 기디언이 허공으로 붕 떠오르더니 벽에 처박혔다. 쿨럭, 피를 토하는 게 내상을 입은 듯했다.
“아참, 죽이면 안 되지. 이건 내 몫이 아니라 장인어른의 몫인데 말이야.”
살인자 꼬리표가 붙은 샤를을 다시 사교계에 복귀시키기 위해 알렉세이는 기디언을 무턱대고 죽이지 않았다. 귀족을 죽인 귀족이라니.
아무도 그가 시작한 사업에 투자하지 않고, 그가 파는 제품을 사려고 들지 않았다. 하여 알렉세이는 샤를에게 돈을 조건 없이 빌려줬다.
마정석 사업으로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이 막대한 자산을 일구면, 샤를이 귀족을 죽였든 아니든 다른 귀족들이 알랑방귀를 뀌느라 달라붙을 테니까.
“그래도 팔다리쯤은 없어도 살 수 있잖아. 안 그래?”
알렉세이는 임신한 아인이 볼 수 없도록 기디언의 머리채를 잡고 욕실로 끌고 갔다. 공기를 압축했다가 팽창시켜 오른쪽 다리를 날려버렸다.
으악. 으악. 아아악. 크아아아. 끊임없는 비명 소리가 욕실에 울려 퍼져 시끄러웠다. 알렉세이는 수건으로 기디언의 입을 틀어막고, 욕조에 걸터앉았다.
부하들이 10분마다 아인의 안부를 수신호로 보내는데 연락이 없어 찾아왔더니, 보람이 있었다. 죄다 수면 향에 취해 자빠져 자고 있었다. 정말 큰일 날 뻔했지 뭔가.
고통 좀 느끼라고 가만히 내버려 두려고 했더니만, 과다 출혈로 죽을 것 같았다. 기디언의 주둥이에 힐링 포션을 물렸다. 잘린 사지가 서서히 재생되었다. 통신 마도구를 꺼내 샤를에게 연락했다.
“샤를 백작, 내가 기쁜 소식 하나 알려줄까 해. 기디언 새끼 잡았는데 여기 올래?”
“…예. 가겠습니다. 잡아두세요.”
어차피 힐링 포션 물리면 안 죽으니 샤를이 올 때까지 열심히 팔다리를 폭파시키고, 재생시키길 무한 반복하기로 했다. 나베리우스의 비단과 가고일의 눈을 찾느라 던전을 오지게 뺑뺑이 돌아서 힐링 포션이 넘쳐났다. 여유롭게 고문하면서 샤를을 기다렸다.
욕조 타일이 기디언의 뭉개진 살점과 피로 보이지 않을 만큼 더러워졌다. 샤를은 그동안 맺힌 게 많았는지 빨리 왔다. 욕실은 수십 마리의 가축을 해체한 도살장을 방불케 했다.
샤를은 욕실 안으로 선뜻 들어오지 못했다. 알렉세이가 피에 젖은 옷을 벗고 샤워를 하며, 기디언 주위에도 물을 뿌렸다.
“괜찮아. 저 새끼 멀쩡하니까 데려가.”
샤를이 기디언의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고 나갔다. 범행 흔적을 깨끗하게 씻은 알렉세이는 알몸으로 욕실을 나왔다. 무서웠을 자신의 가이드를 잘 달래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인이 보이지 않았다.
“또 나 버리고 도망갔어! 아인 페르디안! 이번에 잡히기만 해.”
광분해서 침실을 때려 부수다가 침대 모서리에서 웅크리고 있는 작은 덩어리를 발견했다. 거꾸로 솟았던 에테르가 제대로 순환하기 시작했다. 아인은 알렉세이가 살아있을 수 있게 해주는 심장이고, 유일하게 그를 죽일 수 있는 총의 방아쇠였다.
알렉세이는 기디언 때문에 우리 아인이가 많이 놀랐겠구나 싶어서 그를 끌어안고 달랬다.
“많이 무서웠지? 이제 괜찮아. 저 나쁜 새끼 다시는 세상 빛 못 보게 될 테니까. 귀족 작위도 빼앗기고, 섬에서 쥐새끼 잡아먹으면서 평생 고통스럽게 살 거야.”
“….”
아인이 여전히 오들오들 떨면서 무릎에 파묻은 얼굴을 들지 못했다. 알렉세이는 안쓰러운 마음에 정수리에 뽀뽀를 연거푸 내리 쪼았다.
요즘 그들의 사이는 매우 좋았고, 이대로만 가면 결혼도 한 달 안에 할 수 있을 분위기였다. 이제 기디언까지 무찔렀으니 아인이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기뻐할 거라고 여겼다.
“흡흐흑흑.”
“왜 그래? 응? 역시 무서워? 그냥 저 새끼 섬에 처넣지 말고, 죽여줘?”
“흑. 무서워.”
“알아, 우리 아인이 많이 무서웠지. 이제 다 끝났어.”
알렉세이는 눈물에 젖은 아인의 얼굴 곳곳에 뽀뽀를 퍼부었다. 그러자 아인이 팔을 휘저어 알렉세이를 밀쳐냈다.
“…아인아.”
“무서워. 무섭다고. 무서워. 흑흑.”
아인이 무서워한 이는 과거 그를 끌고 가려던 기디언 백작이 아니었다. 그를 아무런 감정 없이 난도질하고 재생시켜 다시 난도질하길 반복했던, 잔인한 행동을 한 알렉세이였던 것이다.
그를 위해 한 복수였기에 알렉세이는 제 행동에 선함과 도덕성을 부여했지만, 그 어떠한 고문도 선함과 도덕성을 갖출 순 없었다. 자신이 다 망쳐버렸다.
“미…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알렉세이는 알몸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자신을 두려워하는 아인에게서 도망쳐 침실을 나와 버렸다. 복도를 걸어가던 시종이 깜짝 놀랐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교체하느라 가지고 오던 침대 시트로 몸을 감싸줬다.
알렉세이는 시트로 몸을 휘감고 정원으로 향했다. 아인이 그를 보고 우는 장면이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언젠가 아인이 그에게 마음을 열면 꺾어서 선물하고 싶어 했던 그 꽃을 보러 갔다.
깨진 돌 사이에서 기적처럼 꽃을 피워낸 이름 모를 하얀 들꽃이 꺾여 있었다.
“아….”
그것을 보자 마치 아인에게 제 사랑을 거부당한 것만 같았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알렉세이는 줄기가 꺾인 하얀 들꽃 앞에서 엉엉 오열했다.
만일 자신에게 옳고 그름과 정상과 비정상을 제대로 가르쳐줄 오메가 아버지가 살아 있었다면, 아인은 자신을 무서워하지 않았을까?
***
10년 전 살해당한 기디언 백작이 멀쩡히 살아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당연히 유르한 제국의 귀족 사회는 발칵 뒤집혔다. 무고하게 옥살이를 한 샤를에 대한 동정표로 귀족들은 모임 때마다 수다를 떨기 바빴다.
귀족들은 선한 양 무리에 숨어든 늑대처럼 배척하던 샤를을 다시 그들의 파티에 초대해 반가이 맞이했다. 그가 더 이상 귀족을 죽인 자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샤를은 사업을 성공시키기 위해 귀족주의자에 대한 환멸을 숨긴 채 천연덕스럽게 ‘이제 귀족이 아닌 기디언의 부덕함’에 대한 그들의 궁금증을 풀어줬다.
아인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인상을 찡그려 다행히 과거의 일은 회자되지 않았다.
기디언이 진짜 귀족이면 그럴 리 없다는 꽉 막힌 사상에 갇힌 유르한의 귀족들은 어느 순간 그들과 동류였던 기디언의 출생의 비밀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불임인 백작 부부가 마구간지기의 자식을 훔쳐서 키웠다는 엉터리 소설을 써내더니, 그걸 믿었다.
“샤를 백작께서는 사실 전혀 죄가 없었죠. 귀족이 천한 마구간지기를 죽이는 건 죄가 아니니까요.”
“맞아요. 딱 봐도 신분을 속인 것 같았달까. 사고 친 후 시종장으로 위장해 엄청 잘 지냈다면서요? 귀족이 어떻게 시종으로 지내요.”
“이번에 출판사에 취업했다고 하더라고요. 역시 피는 못 속여요. 천한 피는 노동을 한시도 쉴 수 없는 거겠죠.”
“그놈은 처음부터 귀족이 아니었으니까 그런 거 아니겠어요.”
샤를은 귀족들이 떠드는 소리를 무감한 얼굴로 들으며 시중을 드는 시종들을 슬쩍 살폈다. 안달리시아 공작저에 모인 귀족들이 하는 이야기들은 그들을 위해 지금 봉사 중인 시종들까지 무시하고 모욕하고 있었다.
그는 용기를 내기 위해 샴페인을 쭉 들이켰다. 홀짝홀짝 샴페인을 조금씩 마셔야 술의 향과 맛을 제대로 느낀다며 고상을 떠는 귀족들의 식음 방식과 어긋난 짓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샤를에게 향했다.
다시 귀족 사회에서 배척당하게 될지라도 그는 제 할 말을 해야 했다.
“제가 노동해서 돈을 벌면 갑자기 평민이 되고, 평민이 하루 종일 먹고 싸기만 하면서 놀면 귀족이 됩니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창피해서 같이 어울릴 수가 없네.”
빈 샴페인 잔을 옆에 있는 시종에게 건네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수고하세요.”
샤를은 불쾌한 티를 내며 무리에서 빠져나왔다. 저택의 주인인 안달리시아 공작에게 먼저 돌아가겠노라 인사를 올리기 위해 발코니를 향했다가 깜짝 놀랐다.
오늘 열린 파티는 안달리시아 공작이 푹 빠진 피앙세를 위한 축하연이었다. 그런데 공작의 피앙세가 페르디안 가문에서 일했던 덩치 좋은 시종이었다.
아인이 제이콥을 엄청 잘생겼다고 추켜세웠던 게 떠올랐다. 그땐 아인이 독특한 예술 세계를 구축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지난 10년간 감옥에 있는 동안, 사람들의 미의식이 많이 바뀐 듯했다.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안달리시아 공작 각하. 파티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이만 집에 일이 생겨 먼저 돌아가 보겠습니다.”
거대한 오메가에게 키스를 퍼붓던 공작이 샤를을 배웅하기 위해 테라스를 벗어났다. 그는 제 오메가를 먼저 올려 보내고, 현관까지 샤를과 동행했다.
“살펴 가세요. 샤를 백작. 그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아닙니다.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샤를은 마차에 올라타며 생각에 잠겼다. 1황자의 도움으로 마정석 발굴 사업을 시작했으나 그 사업은 언제 빛을 볼지 몰랐다.
운이 좋다면 바로 내일 성공할 수도 있고, 아니면 평생 걸릴 수도 있었다. 광물을 찾아 캐내는 일이니 크게 돈을 벌 수 있지만 그런 단점이 있었다.
마정석을 발견하는 걸 기다리는 동안, 손만 빨고 있어서는 안 됐다. 적은 자본금으로 할 수 있는 소소한 사업을 병행해야 했다. 샤를은 기디언 백작에게 속아 무려 10년이나 징역살이를 한 보상으로, 기디언 백작 가문의 전 재산을 받았다.
그런데 말만 전 재산이지, 최근 저택이 전소되면서 사실상 수도에 있는 거대한 토지를 보상으로 받은 것에 불과했다.
그 땅을 팔고 보니, 우연치 않게 샤를이 감옥에 들어가기 전 가졌던 재산과 비슷한 금액을 얻을 수 있었다. 그 돈으로 다시 예전 직원들을 불러 모아 무역업을 재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외국으로 배를 보내 귀족들의 사치품을 사 오는 무역업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귀족들은 샤를이 진짜 기디언 백작을 죽인 줄 알았을 때, 사업을 새로 시작하지 못하게 은행에서 대출받는 일을 방해했다. 감히 귀족을 죽였다며 말이다. 그가 같은 귀족이라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고착화된 위계질서를 위협한 행위가 문제였다.
에스퍼도 가이드도 아닌 귀족들이 계속 권력을 유지하려면, 그들에게 향하는 그 어떠한 공격도 내버려 두어선 안 됐다. 예외 또한 있을 수 없었다.
10년 동안 샤를은 비싼 값을 치르고 인생을 배웠다고 믿었다. 만일 그때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그는 여전히 귀족주의자들과 똑같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봤을 터였다.
평범한 일상에서 쓰일 만한 물건으로, 가장 평범한 데서 성공하고 싶었다. 마차 안에서 창문 밖을 보는데 아이 하나가 연극을 홍보하는 전단지를 들고 다니며 벽에 붙이고 있었다.
그런데 전단지에 풀을 일일이 바르지 않았는데도 벽에 전단지를 가져다 대자 붙었다. 번쩍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지팡이로 천장을 두드려 마차를 세웠다.
마차에서 내려 아이에게 다가갔다. 아이는 허름한 벙거지와 멜빵바지를 입고 있었다. 제대로 씻지 못해 더러운 걸 보면 굉장히 가난한 집안의 아이 같았다.
청색의 프록코트를 날렵하게 입은 귀족이 다가오자 아이가 겁을 먹고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샤를은 직접 아이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혹시 그 전단지를 어디서 구했니?”
“마일리어스 극단에서 가져왔습니다. 나으리.”
“그곳에 가면 벽에 붙는 전단지를 구할 수 있니?”
“아닙니다. 이것은 제가 전단지에 미리 풀칠을 해둔 겁니다.”
“아… 그렇군. 넌 정말 똑똑한 아이구나.”
샤를은 아이의 영민함에 감탄했다. 왜 이렇게 별것도 아닌 걸 다들 떠올리지 못했을까. 그는 아이에게 혹시 부모님이 어디 계시냐고 물었다.
“저는 고아입니다. 나으리.”
“그래.”
샤를은 풀을 미리 발라 책처럼 들고 다니던 전단지를 아이에게 잠시만 달라고 했다. 아이는 의아했지만 조심스럽게 전단지를 넘겼다.
“풀이 끈적거리기는 한데, 아주 접착력이 약하구나.”
“예, 그래야 종이끼리 깔끔하게 떨어집니다.”
“그럼 이 풀이 너만의 기술이겠구나.”
샤를은 아이에게 전단지에 풀을 발라서 언제든지 다른 곳에 붙일 수 있는, 그 기술을 사고 싶다고 했다. 아이는 전단지를 사면 사는 거지, 기술을 산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그 기술을 사서 내 이름을 걸고 제품을 만들고 싶은 거란다. 네가 얼마를 원하든 이 기술을 사겠으니, 나에게 팔아주렴.”
특별한 발명을 한 아이이어서일까. 돈을 주겠다는 소리에 욕심을 부릴 만도 한데 학교에 보내달라는 말을 했다.
“정말 돈이 필요 없니?”
“돈은 필요합니다. 누구보다 절실히요. 하지만 제가 공부를 해 훌륭한 직업을 가진다면, 제가 나리께 지금 받을 수 있는 돈보다 미래에 더 많이 벌 수 있을 겁니다. 어차피 지금 제가 나리께 돈을 받아봤자 저는 그 돈을 지킬 힘이 없습니다. 그러니 아예 받지 않는 게 낫습니다.”
보통 아이가 아니구나 싶었다. 샤를은 아이에게 혹시 자신의 양자가 될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아인이 여자를 좋아한다고 고백을 했을 때, 많은 생각을 했다. 어쩌면 자신의 아들이 평생 후계자를 낳을 수 없을지도 모르겠노라고.
물론 지금은 아니었다. 1황자에게 납치가 되다시피 황궁에 끌려갔지만, 매일 통신 마도구로 연락해오는 목소리가 밝았다. 알렉세이에게 예쁨을 많이 받는 게 느껴져 안심할 수 있었다.
어쩌면 자신의 아들이 1황자와 결혼해 황족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여 샤를은 페르디안 가문을 존속하기 위해 아인이 아닌 다른 후계자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먼 방계 가문에서 후계자를 데려와도 되지만, 이 아이의 영특함이 마음이 들었다.
파티에서 마치 귀족 피는 파란색이고, 평민 피는 붉은색이기라도 한 듯 떠들어대는 말을 들어서 더 이런 결정을 내려버린 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