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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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디언은 재판 내내 끊임없이 본인의 무고함을 피력하며, 이 모든 일은 2황자 호라이슨이 시켰다고 외쳤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징역 300년, 사실상 무기징역이 선고되었다. 그는 노예처럼 손발에 사슬이 채워져 마차에 태워졌다.

그런데 섬에 있는 감옥으로 이송하던 중에 기디언이 죽었다. 죄인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죄로 담당자는 문책을 당했다. 호라이슨이 힐링 포션에 넣어둔 독이 때마침 효력을 발휘한 것이다.

결국 10년 전 죽었어야 할 기디언은 10년 늦게 죽은 것뿐이었다.

***

2황자가 아인의 앞으로 캔버스를 선물로 보냈다. 아인은 하얀 천이 아닌 가죽으로 된 캔버스가 특이하다 싶었다.

진짜 출판사 직원과 연락해 피넛버터 래빗 삽화를 무사히 건넨 아인은 짧은 휴식 기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기간 동안 2황자가 준 캔버스에 그림을 그려야지 싶어서 붓을 들었다.

그런데 수채화 물감이 캔버스에 스며들지 않았다. 유화 물감으로 그림을 그려도 됐지만, 가죽 캔버스가 돼지가죽이나 소가죽처럼 표면이 고르지 못했다. 이건 그냥 물감 낭비일 뿐이었다.

2황자씩이나 되면서 이런 하품을 선물로 보내나 싶어 마음에 안 들었다. 팬이라고 했는데, 그게 안티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가죽을 사용했는지 알 수 없는 캔버스를 치워버렸다. 대신 스케치북을 들고 정원에 나갔다. 깨진 돌 사이에 핀 캐모마일을 여러 각도에서 그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꽃이 사라져 버렸다.

별것도 아닌데 괜히 속상했다. 시종한테 캐모마일 씨앗을 구해달라고 했다. 모종삽으로 열심히 땅을 파고 씨앗들을 뿌렸다.

지금이야 흉한 황무지지만 싹이 트고 나면 많이 달라질 것이다. 하얀 꽃이 피면 더더욱 모래궁의 분위기가 달라 보일 거고 말이다.

모래궁에 돌아온 알렉세이가 그 광경을 보면 깜짝 놀랄 게 분명했다. 아인은 알렉세이의 웃긴 표정을 상상하며 키득키득 웃었다.

열심히 노동을 하고 점심을 먹었더니 꿀맛이었다. 요즘 음식들이 죄다 맛있어서 큰일 났다. 누가 보면 자신이 황제 감금당하고 있다고 생각할 거 아닌가.

앙상하던 팔다리에 보기 좋게 살이 붙고, 얼굴에 개기름이 좔좔 흘렀다. 누가 봐도 억지로 끌려와 응응 당하는 사람으로는 안 보였다. 억울하지만 밥은 맛있으니까 단식 투쟁은 안 하기로 했다.

아인은 일부러 더 씩씩하게 굴고, 하루를 알차게 보냈다. 그런데 잠들 때가 되면 눈시울이 축축해졌다. 그날 이후 알렉세이가 돌아오지 않았다.

시종장은 알렉세이가 가이드를 만났기 때문에 여기저기 불려 다니느라 바쁜 거라고 했다. 유르한 제국 곳곳에 나타나는 던전을 다니며, 그동안 못 했던 1황자의 의무를 다하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아인 생각에는 그가 자꾸 자신을 피하는 것만 같았다. 그날은 정말 무서워서 알렉세이를 밀쳐낸 것뿐이었다. 해명하고 싶은데 그가 돌아오지 않아 답답했다.

그는 이제 자신에게 흥미가 떨어진 걸까?

솔직히 자신이 알렉세이와 무얼 하고자 하는지는 아직 정확히 모르겠다. 그냥 자기 침실인데 안 돌아오니까 마음이 안 좋고, 혼자 있으려니 외로웠다.

아인은 서러움과 불안을 꾹꾹 눌러 담으며 알렉세이를 기다렸다. 만일 그가 계속 자신을 피하면 자신도 이곳에 있을 필요가 사라진다. 집으로 돌아가 버릴 거다.

***

알렉세이는 예전처럼 아인이 잠들 때, 침대 밑에 누워 도둑 가이딩을 받았다. 세뇌 능력을 사용해 자신을 무서워하지 않게 만들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아인의 부하가 되기로 약속하고 각인했으니까. 그가 싫어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도 아인이 잠에서 깨기 전, 이르게 침실을 나섰다.

요즘 그는 황제의 명에 따라 던전에 마물 사냥을 다니는 틈틈이 호라이슨을 처리할 계획을 꾸몄다.

호라이슨이 알렉세이의 가이드인 아인을 죽이려고 했던 건, 황위 때문이었다. 그러니 그가 황위 쟁탈전에서 승리하면 아인은 안전했다.

그런데 귀족 대부분이 호라이슨의 추종자였다. 그 추종자 안에서 호라이슨의 눈에 띄기 위한 경쟁도 치열했다. 페르디안 가문 사람들에게 암살자를 보냈던 아놀드 후작이 그 단편적인 예였다.

호라이슨의 추종자들은 저들이 알아서 주인의 길을 닦아놓겠다며 설레발들을 쳐댔다. 어찌 보면 호라이슨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존재처럼 보일 수 있지만, 알렉세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이복동생은 사람에게 누명을 씌워서 엿 먹이는 짓에 탁월했다. 분명 충성심을 보이도록 추종자끼리 경쟁을 붙였을 것이다. 그게 무리에 경쟁심을 불러일으켰을 테고.

다시는 아인과 그의 가족들을 넘볼 수 없게 만들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그의 수족들을 다 잘라버려야 했다.

알렉세이는 아름다운 오메가인 호라이슨에게 성적 호감을 가진 추종자들을 추렸다. 그리고 추종자 무리 안에 첩자 한 명을 넣었다. 일단은 무리에서 신임을 얻어야 하기 때문에 당분간은 단순히 어울려 놀러 다니라고 했다.

첩자는 순조롭게 무리에 섞여 들어갔다. 그런 다음, 알파들 사이에서 질투를 부추겼다.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원래 그들은 서로를 경쟁자로 여기고 있었기에 호라이슨 추종자들 사이는 금세 험악해졌다.

추종자들은 서로를 견제하느라 똘똘 뭉치지 못했다. 내분이 일어났다. 물론 이것만으로 호라이슨은 무너지지 않았다. 단순히 2황자의 성품만 믿고 지지하는 골수 귀족들이 있으니 말이다. 그들에게는 호라이슨이 그들의 기대와 달리 천사가 아님을 알려야 했다.

아직까지는 완벽하게 가면을 뒤집어쓴 호라이슨의 본모습을 드러나게 하지 못해 그 작업에서 정체 중이었다.

그러나 알렉세이는 호라이슨의 민낯을 골수 귀족들한테 공개할 기회를 잡기 전까지 마냥 손을 놓고 있지 않았다. 알렉세이 또한 자신의 이복동생과 호적수로 여겨지기 위해 실속을 다져야 했다.

귀족들의 파티에 참가해 얼굴을 비쳤다. 가이드가 생긴 알렉세이의 존재를 귀족들이 금방 좋아해줄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아니었다.

그들은 여전히 알렉세이에게 투명한 유리벽을 치고 그를 그 안에 들이지 않았다.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정통성이라면 호라이슨보다 1황자인 알렉세이에게 있다.

귀족들이 아무 이유 없이 알렉세이를 반대할 리 없었다. 귀족 무리에 심어놓은 첩자에게 은밀하게 자신에 대한 소문을 알아보게 했다.

첩자의 말에 의하면 귀족들은 제논이 바람을 피워서 죽었으니, 알렉세이가 황제의 아들이 아닐 거라 믿고 있다고 했다. 어이없었다. 아인의 목에 각인을 하자 나타난 그의 이름은 ‘알렉세이 유르한’이었다.

각인자에게 나타나는 이름은 절대 가명일 수 없다. 아… 그렇군. 아인을 사교계에 대대적으로 공개해 자신의 정통성을 입증하면 된다.

자신이 황제의 친아들이라고 말이다. 알렉세이는 계획을 세운 뒤, 곧 있을 황제의 탄신일까지 발톱을 숨긴 채 기다리기로 했다. 유르한 제국의 모든 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아인의 목에 있는 이름을 보여줄 것이다.

그럼 골수 귀족들이 호라이슨을 고집할 이유가 사라진다.

***

알렉세이는 가이드를 만났다는 이유로 바쁘게 던전으로 끌려다녔다. 함께 던전 공략에 참가한 에스퍼 기사들은 S급 에스퍼의 엄청난 능력을 보고, 그를 두려워하는 동시에 경외감을 품었다.

의도대로였다. 알렉세이는 그들이 자신을 사랑에 빠진 오메가처럼 열렬하게 바라보며 눈빛을 빛내도 더럽다고 꺼지라 하지 않았다.

황태자가 되고, 훗날에는 이 나라의 황제가 되어 아인을 황후 자리에 앉혀야 했다.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최고의 자리에 제 가이드를 앉히려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추종자를 만들어야 했다.

황위 쟁탈전에서 진 황족은 황궁을 나가 공작이 되었다. 황제가 온화해 제 형제를 살려둔다면 말이다. 황제의 막냇동생 안달리시아가 그러했다. 그는 황제의 배려로 수도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황제들은 자신과 황위를 두고 겨룬 경쟁자를 먼 곳으로 유배를 보내버렸다. 그게 제국의 최북단, 얼음과 눈이 뒤덮인 땅덩어리를 다스리는 영주들의 직위가 죄다 공작인 이유다.

A급 던전 다섯 개가 순식간에 클리어되고, 기사들이 아이템을 수레에 실었다. 알렉세이는 시간 절약을 위해 대규모 일행을 황궁으로 공간 이동 시켰다.

그에게는 가이드가 있었기에 능력을 쓰는 일에 거침없었다. 에스퍼 기사들과 황궁 창고에 아이템들을 실어 나르는데 황제가 알렉세이를 찾는다고 했다. 같이 식사를 하자는 거였다.

무슨 꿍꿍이인가 싶고 내키지 않았다. 여태 가이드가 없어서 써먹지 못했는데, 요즘엔 잘 써먹을 수 있어서 관심을 보이는 것이리라.

식당에 가니 이미 테이블에 식사가 올라와 있었다. 헬링턴 황후와 호라이슨이 황제 오른편과 왼편을 차지한 채 앉아 있었다. 이미 식사를 하던 중인데 자신을 부른 거였다.

“앉아라.”

의자 끌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앉았다. 괜히 황제가 마음에 안 든다고 예법에 어긋나게 행동해서 죽은 제논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싶지 않았다.

황제는 식사 내내 대놓고 호라이슨과 알렉세이 중 누가 높은 등급의 던전에서 얼마나 좋은 아이템들을 가지고 돌아왔는지, 두 형제를 앉혀놓고 비교했다.

호라이슨은 겸손하게 A급 에스퍼인 자신이 S급 에스퍼인 형님을 어떻게 이기겠냐면서 몸을 사렸다. 그게 더 재수 없었다.

어릴 때는 가족들 식사 자리에 끼지 못해 슬펐는데, 이제는 밥맛 떨어지는 놈들과 식사를 하려니 소화가 안 됐다. 아인이 보고 싶었다. 언제쯤 그가 그 일을 잊을까 셈해봤다.

바보는 아니니까 한 달은 가려나? 아니다. 아인은 예쁜 바보니까 한 달도 안 가서 잊을지 몰랐다. 그럼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그를 끌어안고 뽀뽀를 할 수 있을 거다.

손으로 냅킨을 접었다가 펼치기를 반복했다. 즐거운 상상을 하며 시간을 때우자 괴로운 식사 시간이 끝나 있었다. 식당을 나오는데 호라이슨이 바짝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알렉세이, 잠깐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시간 괜찮으세요?”

“아니, 바쁜데.”

“그럼 어쩔 수 없죠.”

그가 의뭉스럽게 웃으면서 뒤로 물러났다. 알렉세이는 뭐 저런 싱거운 녀석이 다 있나 씩씩거리며 가버렸다.

호라이슨은 식사 내내 알렉세이가 만지작거리던 냅킨을 챙겨 입술과 목덜미, 가슴, 사타구니에 문댔다.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 페로몬 냄새를 묻히긴 했지만 그걸로는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오늘 호라이슨은 알렉세이의 페로몬을 맡을 수 없었지만, 그와 각인한 아인은 알렉세이의 페로몬을 맡을 수 있을 터다. 유의미한 일이었다.

페로몬 냄새가 빠지기 전 얼른 모래궁으로 향했다. 냄새를 못 맡으니 언제 사라질까 짐작할 수 없어 조급증이 들었다.

정원에 쪼그리고 앉아 모종삽으로 땅을 파헤치고 있는 아인이 보였다. 예전에 자신이었던 그를 타인처럼 바라보는 느낌은 굉장히 묘했다.

아인이 알렉세이의 페로몬을 맡았는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가 호라이슨을 보고 표정을 굳혔다. 아직까지 왜 자신에게서 알렉세이의 페로몬 냄새가 나는지 모르는 듯했다.

호라이슨은 아인의 경호를 맡고 있는 기사들에게 자리를 피해달라고 부탁했다. 대외적으로 천사표인 2황자의 이미지 덕에 그들은 쉽게 물러나줬다.

그가 오메가라 뭔 일이 있겠는가 싶은 생각도 그들에게 없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호라이슨이 알렉세이였다면 절대 저런 부하들을 소중한 사람을 지키는 데 쓰지 않을 것이다.

알렉세이의 부하들은 쓸데없이 인간적이었다. 차라리 호라이슨과 한 번이라도 자보고 싶어서 충실한 개처럼 구는 녀석들이 나았다.

“아인, 드릴 말씀이 있어서 무례하지만 찾아왔어요. 제발 제 알파한테서 떨어져 주세요.”

“….”

멍하니 호라이슨을 보는 꼴이 우스웠다. 어떻게 제 전생과 같은 존재인데도 이렇게 느낌이 다를 수 있을까. 좀 더 다가갔다. 아인의 시선이 호라이슨의 의도대로 입술, 목덜미, 가슴, 사타구니를 옮겨 다녔다.

역시나 아인에게서 오메가 페로몬이 느껴지지 않았다. 호라이슨은 치밀어 오르는 살심을 참으며 마치 비련의 주인공처럼 구슬피 울었다.

‘아무리 각인을 했어도 내가 뿌린 불신의 씨앗이 너희를 불행하게 만들 거야. 두고 봐. 절대 행복할 수 없게 만들어줄 테니까.’

거리가 멀지 않은 곳에 기사들이 있었다. 에테르를 최대한 미약하게 펼쳐서 소리를 막았다. 뒤돌아선 호라이슨은 오직 아인만 자신의 눈물을 볼 수 있도록 서 있는 각도에 신경 썼다.

“제발 내 알파를 빼앗아 가지 말아주세요. 흑. 저는 작가님이랑 정말 친해지고 싶고, 아인의 그림을 오랫동안 좋아해 왔어요. 이런 절 봐서라도 제 연인이랑 바람피우지 말아주세요.”

“…1황자 전하는… 그러니까 2황자 전하와… 형제잖아요.”

“네. 그러나 우린 알파와 오메가예요. 같이 잘 수 있어요.”

아인의 눈이 텅 비었다. 호라이슨은 그가 흔들리고 있음을 느꼈다.

“제가 처음이라고 했어요.”

“오메가 꼬시는데 무슨 말인들 못 하겠어요.”

더 이상 반격의 말을 생각해내지 못한 아인이 얼었다. 호라이슨은 결정타를 날렸다.

“알렉이 아인의 가이딩을 받기 위해 같이 자는 것뿐이라는 걸 알지만, 더 이상 아인을 나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부탁드릴게요.”

아인이 비틀거리더니 다리에 힘이 빠졌는지 휘청거렸다. 호라이슨은 얼른 아인의 손을 잡고 부축했다.

“최근에… 안 돌아와서… 나는 그러니까… 던전 도느라고 바쁘다고….”

넋이 나가서 중얼거리는 꼴을 보고 있자니 예전의 자신이 생각났다. 그때의 알렉세이는 못생기고 덩치가 큰 오메가를 데려와 보란 듯이 아끼는 모습을 보였었지. 그땐 제이콥을 죽여 버리고 싶었다. 그러면 알렉세이의 사랑이 마치 자신의 것이 되기라도 한다는 듯이 말이다.

호라이슨은 손을 덜덜 떨며 식은땀을 흘리는 가여운 아인의 이마를 소매로 닦아줬다. 이번에는 뭣 때문인지 알렉세이가 아인 페르디안을 좋아했다.

그가 증오스러웠다. 제이콥이 또다시 알렉세이의 연인이 되면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죽여 버릴 생각이었는데, 제이콥과 알렉세이는 연인이 되지 않았다.

제이콥보다 아인을 선택했다는 게 더 비참했다. 그건 예전에도 자신을 충분히 좋아해줄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왜 그때 자신에게 줘야 할 애정을 지금의 아인에게만 줘서 사람을 비참하게 한단 말인가. 알렉세이는 예나 지금이나 죽어 마땅한 새끼였다.

각인한 오메가가 알렉세이의 눈앞에서 사라지면 무지 재미있을 거다. 폭주해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 이제 다른 오메가랑 섹스도 못 하는데 딴 놈들이랑 키스로만 가이딩 받으려나? 킥킥.

“그… 그… 오해하지 마세요. 저 1황자 전하와 아무 사이 아니에요. 하. 하. 하. 아이참. 왜 이리 날씨가 덥지? 너무 열심히 일했나 보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걱정 말고 살펴 가세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한 아인이 도망치듯 사라졌다. 호라이슨은 아인이 바닥에 놓고 간 모종삽을 소심하게 발로 차고, 바람궁으로 돌아갔다.

아인은 알렉세이의 침실로 돌아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가 괜히 자신을 찾아와 그런 말을 할 이유가 없기에 아인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호라이슨에게서 알렉세이의 페로몬 냄새가 났다.

아인의 코가 호라이슨이 다가오자 게걸스럽게 알렉세이의 알파 페로몬을 찾아 킁킁거렸다. 공항 마약견도 아인의 코만큼 예민하지 않을 거다. 다 느낄 수 있었다. 알렉세이가 호라이슨의 어디를 만졌는지.

“흐엉엉엉. 거짓말쟁이! 가이딩 받으려고 날 속였어.”

침대로 뛰어들어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 울었다. 아인은 알렉세이와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그런데 호라이슨과 알렉세이가 연인이라는 사실이 충격적이게도 슬펐다.

아인은 그 슬픔 때문에 웃기게도 자신이 알렉세이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었다.

누가 악역수에 빙의한 거 모를까 봐 똑같이 나쁜 새끼 좋아하는 거 봐라. 이러다가 이성 잃고 호라이슨 혼내주겠다며 알파 끌고 갔다가 역관광 당하지.

김아인, 정신 차려. 너 악역수 어떻게 됐는지 그 꼴 보고도 그 새끼 계속 좋아하고 싶어? 질투하고 싶냐고?

“병신, 쪼다. 저 혼자 착각해서 아주 지랄 생쇼를 하지. 제이콥 아니면 꼭 날 좋아한다는 보장도 없는데. 흑. 왜 나라고 생각했어. 각인이 뭐 별거인가. 그건 흑, 아무 의미 없는 거라고. 훌쩍. 도망 못 가고 가이딩하게 만들려고 그냥 한 거라고.”

입으로 내뱉는 족족 상처가 되어 돌아왔다. 아인은 한참 울다가 스케치북을 찾았다. 거기에 그려진 알렉세이 그림을 북북 찢어냈다.

종이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찢어 아주 작게 만들었다. 이런 스스로가 집착남 같아서 소름 돋았다. 엉망진창으로 뜯긴 스케치북을 던져버렸다. 종이가 나풀거리며 날아가 바닥에 펼쳐졌다. 처음 호라이슨을 만났던 날, 그가 너무 천사같이 아름다운 나머지 그린 그림이 나왔다.

“흑. 씨발. 존나 잘생겼어. 예쁘기도 더럽게 예쁘네. 그러니까 동생이어도 사랑하지.”

아인은 호라이슨에게 제발 헤어져 달라는 부탁을 들었을 때, 자신이 막장 드라마에 나오는 내연남이 된 기분이었다. 알지 못했을 때라면 또 모를까, 연인이 있는 걸 아는데 계속 알렉세이의 침실에 있을 순 없었다. 아인은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어차피 맨몸으로 납치당하다시피 온 거라 그냥 몸만 나가면 됐다. 기사들이 문 앞을 지키고 있어서 다른 방법으로 빠져나가야 했다. 그런데 침실은 창문 하나 없는 밀실이었다. 도무지 도망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다가 침대에 드러누워 끙끙 앓았다. 다친 곳도 없는데 온몸이 아팠다.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화병 같다. 양부모들한테 모진 구박을 당했을 때도 멀쩡했던 멘탈 갑인 자신이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나 싶다.

침대에는 여전히 알렉세이의 알파 페로몬이 묻어 있었다. 그 새끼는 밉고 싫은데 그 새끼 페로몬은 아인에게 안정감을 줬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잠을 청했다.

***

알렉세이는 밤늦게 침실에 왔다가 깜짝 놀랐다. 아인의 그림들이 갈가리 찢어져 있었다. 그 누구도 그들의 침실에 함부로 들어올 수 있으니 범인은 아인밖에 없었다.

염력 능력을 사용해 찢어진 종이들을 퍼즐처럼 맞췄다. 그림을 다 맞춘 알렉세이는 어금니를 질끈 깨물었다. 그였다. 아인이 알렉세이를 찢어서 바닥에 버린 거였다.

‘그렇게 내가 싫고 미울까. 우리 그래도 요즘 괜찮았던 것 같은데.’

아인이 그를 싫어해도 어쩔 수 없었다. 아인은 알렉세이와 각인을 했다. 알파 페로몬이 없으면 히트를 달랠 수 없으니 영원히 자신의 곁을 떠날 수 없었다. 배 속에 있는 아이도 좋은 족쇄가 되어줄 거다.

아직 본인은 임신한 걸 모르는 것 같던데, 혹시라도 알면 낙태하겠다며 독한 약을 먹을 수 있으니 만삭이 될 때까지 숨겨야겠다.

알렉세이는 자신을 극도로 거부하는 제 가이드에게 다가갔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아인을 통째로 끌어안고 입 맞췄다. 고작 이렇게 안고 있다고 던전을 돌면서 오염된 에테르가 빠르게 정화되었다.

낮 동안 그토록 맡고 싶었던 오메가 페로몬을 폐 깊숙이 들이마셨다. 조금만 더 참으면 됐다. 어차피 그는 황제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1황자였다. 황태자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모든 계획을 완수해 정쟁에서 승리하면 호라이슨을 최북단으로 보내버릴 거다.

그를 지지하던 귀족들이 혹시라도 훗날을 도모할지 모르니, 그들까지 깡그리 잡아다가 유배지에서 같이 얼음성 짓고 잘 살라고 보내버릴 거다. 잠들었던 아인이 잠에서 깼는지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알렉세이는 오랫동안 밤에 들어와 이불 더미만 봤기 때문에 아인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이불을 내리기 위해 잡아당길 때였다.

“건들지 마!”

아인이 경계심 많은 고양이처럼 앙칼지게 외쳤다. 페르디안 백작저를 방문한 알렉세이를 만나기 위해 가벽 뒤에 숨었던 그때로 돌아가 버렸다.

한 걸음 다가가면 두 걸음, 아니 열 걸음이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알렉세이는 입술을 꾹 다물고 그를 거부하는 아인을 끌어안았다.

“하지 마! 하지 말라고! 꺼져! 만지지 마!”

거부의 말이 사납게 알렉세이의 마음을 할퀴었다.

‘넌 날 싫어하면 안 돼. 날 거부해서도 안 돼. 넌 내 레아를 정복했잖아. 우린 본딩을 맺었어. 넌 날 책임져야 해. 난 네가 없으면 죽어. 고작 알파와 오메가의 각인 따위와는 그 의미와 무게가 달라.’

버림받은 자의 억울함은 소리 없이 입술만 빵끗거리게 했다. 태어날 때부터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도 답답하면 글이든, 손짓이든 뭐든 사용해서 제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멀쩡히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알렉세이는 바보처럼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제가 아인에게 비굴하게 빌어봤자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아인에게 알렉세이는 괴물이었다.

그는 공간 이동 능력을 사용해 사라졌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참 울었던 아인은 슬그머니 이불을 내렸다. 알렉세이가 없었다.

“씨~. 어디 갔어.”

저 혼자 분해서 어디 갔냐고 따져봤자 들을 사람은 없었다. 아인은 내연남 관리를 이따위로 하는 알렉세이에게 화났다. 그는 비겁하게 도망가 버렸다.

주먹으로 침대 매트리스를 마구 때리며 성질을 내다가 놀라 헉, 숨을 들이마셨다. 원수라도 되는 듯 찢어버린 알렉세이의 그림 조각이 다 맞춰진 채 바닥에 있었다.

‘자기 얼굴인데 찢어서 기분 나빴으면 어쩌지?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그래, 이건 내가 잘못했어. 아무리 화나도 사람 얼굴인데 찢으면 안 되지.’

알렉세이가 돌아오면 미안하다고 사과하려고 잠을 자지 않고 기다렸다. 뜬눈으로 아침을 맞이했다. 그는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자기 침실이 여기이면서.

불길한 생각이 아인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설마 바람궁에 가서 잤나? 아닐 거야.’

아인은 헐레벌떡 침실에서 뛰쳐나왔다. 문 앞에 서 있던 기사들이 아인을 뒤따랐다.

“아인 공자, 어디 가십니까. 도망치시면 안 됩니다.”

“헉헉. 도망, 헉, 아니고. 2황자, 헉, 전하.”

폐가 터질 것 같았다. 방구석에서 그림만 그린 탓에 체력이 많이 안 좋았다. 달리기를 멈추고 미친 듯이 헐떡이며 거친 숨을 골랐다. 땀이 비 오듯 흘러 잠옷이 다 젖었다. 한바탕 소란을 피우고 나니 정신이 깨끗해졌다.

이른 아침부터 2황자에게 찾아가 알렉세이가 있는지 확인만 하러 왔다고 말하려고 했다. 정말 미쳤다. 확인해서 뭐 하게. 둘은 연인인데, 내연남이 주제 파악을 못 했다. 손으로 각인이 새겨진 목덜미를 만지면서 버려진 정원을 바라봤다.

저곳을 가꿔서 꽃을 피우면 알렉세이가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었지. 운동도 안 하는 멸치 주제에 몇 시간 동안 힘들게 모종삽으로 땅을 파고 씨앗을 심었다.

그때는 그냥 아무 생각 없었는데 한번 감정을 자각하고 나니까 왜 자신이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겠다. 그를 웃게 해주고 싶었던 거다. 자신이 싫어하는 말 자지인데 말이다.

“흐으으윽. 흐흑. 흑.”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채 울었다.

‘엄마 아빠, 나 이제 알파 좋아해요. 근데 그 알파가 나 안 좋아한대요.’

“아인 공자, 무슨 일입니까. 어디 아프세요? 다알리아를 부를까요?”

대답 없이 복도에 주저앉아 정원만 봤다. 자신을 감시하는 기사들이 수군거렸다.

“어떡해. 감금당해서 우울증 생겼나 봐.”

“이러다가 사람 죽어 나가는 거 아니야? 1황자 전하도 너무하시지.”

원작 악역수가 악을 쓰면서 알렉세이에게 사랑을 구걸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소설을 읽을 땐, 왜 저렇게 미련하나 싶었다. 그냥 포기해버리지. 다른 오메가가 좋다는데 너도 그냥 다른 알파나 만나, 하고 쉽게 생각했다.

한 번도 누구를 좋아해본 적 없는 모솔이니까 할 수 있는 발상이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는지 기사들이 침실로 돌아가서 식사하라고 했다. 그 말을 무시하고 복도에 앉아 정원만 내다봤다.

바짝바짝 마른 눈으로 푸른 하늘을 보고 있는데 익숙한 페로몬이 맡아졌다. 만일 자신이 토끼였다면 귀를 쫑긋 세우고 깡충깡충 뛰어갔을 거다.

아인은 알렉세이의 페로몬을 맡고 자신이 복도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던 이가 그였구나, 제 마음을 되짚었다. 반가운 마음에 고개를 돌렸다. 활짝 피어난 얼굴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호라이슨이었다. 그의 뒤를 따르는 시종은 종이에 싼 캔버스를 들고 있었다. 아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2황자에게 허리를 숙였다.

“아인, 정말 고마워요.”

“….”

역시 호라이슨에게 간 거였구나. 사랑스러운 오메가의 생기 있는 눈은 몹시 반짝였다. 반면 아인의 눈은 검게 죽었다.

“감사 선물로 캔버스를 가져왔어요. 앞으로도 좋은 작품 활동 부탁할게요.”

“네, 감사합니다.”

시종이 아인에게 캔버스를 건넸다. 저번에 준 것도 사용 안 했는데 새것을 받았다. 착하고 좋은 사람인 걸 인증한 호라이슨이 떠났다. 아인은 크라프트지에 포장된 캔버스를 들고 침실로 돌아갔다.

늦은 아침 겸 점심으로 복숭아를 다섯 개 먹었다. 빌어먹을 아인의 기분과 달리 맛있었다. 과일을 너무 많이 먹어서 정작 제대로 된 밥은 먹지 못하고 식사를 마무리했다. 뒤늦게 호라이슨이 보내준 캔버스에서 포장을 벗겨냈다.

“우욱.”

지독한 악취가 났다. 썩은 가죽으로 만들었는지 곳곳이 부패해 구더기가 기어 다녔다. 눈으로 보자 도저히 캔버스를 손으로 만질 수 없었다.

미안하지만 문 앞에 서 있는 녹색 머리 기사에게 캔버스를 버려달라고 부탁했다. 끔찍한 몰골을 본 충격으로 계속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며 토했다. 혹시 몰라 저번에 받은 캔버스도 가져다 버렸다.

“미친 새끼.”

차라리 망한 웹툰 연재하며 노잼이라는 댓글을 받는 게 스트레스를 덜 받겠다. 정말 내연남 노릇도 못 할 짓이다. 그 착하고 천사 같은 얼굴로 썩어 문드러진 가죽 캔버스를 선물할 줄이야.

계속 끔찍한 기억이 잊히지 않았다. 녹아내린 가죽, 붉은 핏자국, 그리고 하얀 구더기가 계속해서 떠올랐다.

“으으으으.”

아인은 배가 아파서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구르다가 아랫배를 끌어안았다. 보통 배가 아플 때는 위쪽이 아팠는데 이상하게 아랫배가 아팠다. 변비도 없는데 이상했다. 그래도 다행히 시간이 지나니 괜찮아졌다.

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서 통신 마도구를 들었다. 먼저 샤를에게 걸었다. 샤를이 받지 않았다. 레이나에게 걸었다. 레이나도 받지 않았다. 출판사에 거니까 그제야 받아줬다.

“작가님, 지금 서점에서 작가님 동화책이 얼마나 많이 팔리는지 아세요? 어린이, 어른 가리지 않고 다들 <피넛버터 래빗>을 사기 위해 몇 시간이고 줄을 서요. 어서 후속 작품 내요, 우리. 지금 물 들어왔을 때 노 젓자고요.”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다. 지구에 있는 남의 작품을 뻔뻔하게 훔쳐 와 당연하게 성공해버렸다. 스스로가 환멸스러웠다.

왜 자신은 남의 것만 가지고 싶어 하는 걸까. 피넛버터 래빗도, 알렉세이도 모두 제 것이 아닌데 욕심을 내 탈이었다.

흥분한 출판사 직원에게 후속작 작업에 들어가겠다고 약속하고 통신 마도구를 껐다. 스케치북을 꺼냈다. 무릎에 얹은 하얀 종이를 보자 호라이슨이 보내준 가죽 캔버스가 떠올랐다. 입을 틀어막고 눈을 질끈 감았다.

‘미치겠다. 왜 이러지?’

다시 한번 하얀 스케치북을 봤다. 종이가 녹아내리고, 붉은 피가 흘렀다. 날카로운 이빨이 생겨난 구더기가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들었다. 스케치북을 얼른 침대 밖으로 던져버렸다.

“그림을 그릴 수 없어. 그림을 그릴 수 없다고! 어떡해. 나한테는 그것밖에 없는데.”

만일 호라이슨이 자신의 정신을 무너트려 그림을 그리지 못할 작정으로 선물했다면 대성공이었다. 아인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왜 자신이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남의 애인과 자서? 하지만 정말 몰랐다. 알렉세이는 자신이 처음이라고 했다. 그 누구도 이복형제가 사랑하는 사이라는 걸 짐작하지 못할 거다.

지금 당장 엄마 아빠 얼굴을 보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머리가 잔뜩 헝클어진 채로 방문을 열었다.

“집에 갈래요. 엄마 아빠 보고 싶어요. 지금 안 만나면 나 죽어 버릴 거야. 흑. 나 진짜 미쳐서 죽을래. 흐엉엉엉.”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서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기사들은 난처해하며 상의했다.

“정말 위험해 보이는데. 1황자 전하께 연락드리자.”

“안 돼. 그분 성격에 절대 아인 공자를 내보내지 않을 거야.”

“차라리 몰래 집에 모셔다드리고, 백작 부부를 만나게 한 후 데려오자.”

“그래, 그게 낫겠다. 부모님 얼굴 보면 많이 괜찮아지실 거야.”

기사들이 아인을 일으켜 세웠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주고, 헝클어진 머리카락도 빗으로 빗어줬다. 빨리 외출복으로 갈아입으라는 소리에 아인은 울음을 그치고 옷을 입었다. 붉은 머리 기사가 아인에게 로브를 뒤집어씌웠다.

“밤이 되면 1황자 전하가 돌아오실 거예요. 저녁 식사만 부모님과 함께 하시는 거예요.”

“네. 그럴게요.”

아인은 얼른 부모님을 보러 가고 싶었다. 언제 울었냐는 듯 웃으니까 붉은 머리 기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인은 마차를 타고 페르디안 백작저로 향했다.

마차에 달린 황실 문양을 본 시종장이 대문을 열어줬다. 아인은 마차에 내리자마자 시종장에게 부모님이 어디 있냐고 물었다.

“지금 식당에 계세요.”

얼른 집밥을 먹고 싶었다. 황궁에서 나오는 음식들이 더 좋은 걸 테지만, 그래도 우리 집 주방장의 솜씨가 제일이라며 식당에 갔다.

식당 문틈으로 주홍빛 불빛이 새어 나왔다. 웃음소리가 따뜻한 빛의 공간에 울려 퍼졌다. 아인은 이상하게 문을 열고 그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도련님, 왜 안 들어가십니까.”

“쉿!”

숨을 죽이고 도둑처럼 몰래 안을 살폈다. 식탁에는 샤를과 레이나, 그리고 처음 보는 아이가 앉아 있었다. 아이가 앉은 자리는 언제나 자신이 앉았던 자리였다.

빼앗겼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번쩍이며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레이나와 샤를은 포크와 나이프 사용이 서툰 아이를 세심하게 돌보며 식사를 했다. 샤를이 아이에게 나이프 잡는 법을 시범 보여줬다. 아이는 어색하게 샤를을 보고 나이프를 잡았다. 레이나가 아이의 손 모양을 고쳐줬다.

“저 아이는 누구야?”

“백작님이 양자로 들이기 위해 데려온 아이입니다.”

아인은 식당 문에서 한발 물러났다.

“내가 있는데 왜?”

“페르디안 가문에는 후계자가 필요하니까요.”

“….”

오메가인 아인이 여자를 좋아한다고 말한 탓이었다. 자신을 걱정하는 척하더니, 결국 대체품을 들였다.

원래 세계에서 양부모도 처음에는 아인을 친아들처럼 아꼈다. 그들은 12년째 임신을 하지 못했던 부부였다. 보육원에서 아인을 본 후, 첫눈에 반해 자신들의 아들이 되어주길 바랐다. 그렇게 아인은 양부모의 아들이 되었다. 행복했다.

처음으로 생긴 어머니는 다정했고, 아버지는 친구같이 놀아줬다. 영원히 그 행복이 계속될 줄 알았다. 그런데 양어머니가 아인을 입양하고 일 년 뒤 임신을 했다. 양부모는 아인이 잠든 줄 알고 밤에 싸웠다.

‘그러니까 저 애를 왜 데려왔어!’

‘당신도 아인이 마음에 든다고 했잖아.’

‘그건 내 새끼 안 생길 줄 알고 그랬던 거지. 내가 왜 남의 새끼까지 키워야 하냐고. 내 월급이 얼마나 된다고.’

‘그럼 이제 필요 없다고 가져다 버려?’

‘아, 씨. 보육원에 내가 연락해볼게. 파양할 수 없는지.’

부부에게 아이가 생겼다고 한번 입양한 아이를 파양할 순 없었다. 아이는 마트에서 사는 장난감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보육원 원장은 형편이 안 좋아서 아인을 받아줄 수 없다고 했다.

만일 아이를 보육원에 맡기고 싶으면 기부금을 내라는 소리에 양부모가 다른 보육원을 알아보다가 포기했다. 생각보다 보육원에 아이 버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수많은 부모들이 아이를 몰래 버리는 거였다.

양부모는 기부금이 아까워 아인을 계속 집에 뒀다. 청소, 설거지, 화장실 청소, 쓰레기 버리기, 구두 닦기가 아인의 몫이 되었다.

얼마 후, 양부모의 친딸인 진주가 태어났다. 진주는 아인이 봐도 예쁜 아기였다. 진주에게 좋은 오빠가 되어주고 싶었다. 양어머니를 따라다니며 자신도 진주를 돌보고 싶다고 했지만, 그녀는 절대 아인에게 진주를 맡기지 않았다.

너무 진주가 귀엽고 보고 싶은데 못 보게 해서 밤에 몰래 아기방에 들어갔다. 아기 침대에 매달려 진주를 구경했다. 달콤한 우유 냄새가 나는 아기의 작은 손을 살짝 잡고 싶어서 침대 안에 손을 넣었다. 그 장면을 양아버지한테 들켰다.

아인은 밀쳐져 벽에 퍽, 소리가 나도록 부딪혔다.

‘도대체 뭐 하는 짓이야. 하여간 버리지 않고 키워줬으면 고마워할 줄은 모르고. 왜? 진주가 없으면 다시 네가 우리 집 아이가 될 것 같아서 그래? 어림도 없어.’

순수한 호의가 더럽혀졌다. 아인은 그 집에서 철저하게 배척당한 채 자랐다. 학교를 갈 때마다 버스를 타야 했지만, 양어머니는 버스비를 달라는 아인의 말에 화를 냈다.

‘내가 돈 나오는 기계인 줄 알아! ATM으로 보이냐고!’

아인은 버스 카드에 충전할 만 원짜리 한 장도 온갖 욕을 들으면서 받아야 했지만, 진주는 친구들과 치킨 사 먹겠다며 어머니 지갑에서 오만 원을 꺼내 가도 혼나지 않았다.

성인이 되어 그 집을 나왔다. 네가 양심이 있으면 키워주고 입혀주고 재워준 자신들한테 보답해야 하지 않겠냐면서, 고등학교 3년 내내 모은 대학교 등록금 갈취해 가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끈질긴 배고픔의 시간이 계속되었다.

웹툰 작가가 된 건 정말 우연이었다. 대학교 1학년 때, 같은 학과에 취미로 소설을 쓰는 친구가 있었다. 아인이 취미로 그림을 그린다는 걸 알자 자기 소설을 웹툰으로 그려달라고 했다.

자신에게 태블릿도, 프로그램도 없다는 소리에 그 친구가 다 해결해줬다. 그렇게 시작된 작업이었다. 인터넷에 연재 도중 우연히 출판사에서 쪽지가 와서 바로 계약했다. 계약금을 받은 날 그 친구와 삼겹살을 먹었다. 그 친구는 글 작가, 아인은 그림 작가로 수입을 반씩 나눴다.

그런데 사람의 욕심을 끝이 없었다. 아인은 첫 작품을 끝낸 뒤, 홀로서기를 준비했다. 혼자 작업하면 수입을 전부 자신이 가질 수 있다는 욕심 때문이었다. 친구는 아인과 살던 원룸을 나가버렸다.

의식의 흐름에 따라 생각을 하던 아인은 제2의 진주, 아이를 보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3층으로 올라가 방문을 열었다. 존이 걱정되는지 따라 들어와 식사를 방으로 가져올지 물었다.

“부모님한테는 나 왔다는 말은 하지 마요. 잠깐만 필요한 거 챙기러 들른 거라 금방 가면 서운해할 테니까.”

“그래도 말씀은 하고 가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다. 나중에 얼굴 못 본 거 알면 서운해하실 겁니다.”

“존. 부탁할게.”

시종장이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물러났다. 아인은 어두운 방에서 마법등도 켜지 않은 채 침대에 걸터앉았다. 깊게 한숨을 내쉰 뒤, 침대 밑을 뒤져서 예전에 준비해둔 가방을 꺼냈다.

거기에는 돈과 당장 갈아입을 옷들, 억제제가 들어 있었다. 알렉세이가 황궁에 그를 만나러 오라고 편지를 보냈을 때, 혹시라도 위험할 것 같으면 바로 야반도주하려고 미리 싸둔 거였다.

그때는 자신이 없으면 레이나와 샤를이 많이 걱정할 것 같아서 생각만 하고 실천을 못 했지만, 이젠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었다. 로브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썼다. 정말이지 도망치는 데 최적화된 복장이었다.

각인한 오메가가 알파 페로몬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직까지 전혀 짐작되지 않았다. 히트를 견디지 못한다는 말은 막연하기만 했다. 많이 힘든지, 아닌지도 알 수 없으니 그다지 도주가 무섭지 않았다.

마차에서 기사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아인은 미안하다고 속으로 사과하고 미련 없이 발걸음을 뗐다.

아인은 유유히 고용인들이 드나드는 뒷문을 통해 저택을 빠져나갔다. 잠시 망설임 때문에 아름다운 페르디안 백작저를 돌아봤다가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자신이 사라진 걸 알면 레이나와 샤를이 슬퍼할 것을 안다. 그러나 오래 가진 않을 것이다. 아인에 대한 양부모의 사랑이 그러했듯 말이다.

늦은 밤에 성문을 나가는 이는 별로 없었다. 이때 이동하면 오히려 수상해 보일 뿐이었다. 아침이 될 때까지 아무도 자신을 찾지 못할 장소가 필요했다. 호텔은 당연히 안 됐다. 출판사도 안 됐다. 자신과 관련된 그 누구도 만나선 안 됐다.

그렇다면 절대 가지 않을 것 같은 장소에 가면 됐다. 원작 악역수가 알렉세이를 만났다던 인안나 신전으로 향했다.

인안나는 출산의 신이었다. 알파와 오메가들은 발정기 때 상대를 만나기 위해 인안나 신전을 찾았는데, 처음 의도와 달리 변질되어 지금은 몸을 팔러 오는 곳쯤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곳을 찾는 손님들은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인처럼 로브를 입은 사람들이 많았다. 아인은 아무런 의심 없이 사제장에게서 빈방을 얻을 수 있었다.

1일 숙박하겠다고 하니 그는 자신더러 ‘작은 고추가 매운 법이죠. 하하.’ 하면서 추잡한 농담을 건넸다.

안내받은 방은 깨끗했으나, 침대에서 무슨 더러운 짓이 벌어졌을지 몰라 찜찜했다. 평범한 사람들이 전혀 짐작할 수 없는 장소라 택한 것뿐이지, 아니었으면 평생 올 일 없는 곳이었다.

잠들기 전 샤워를 하고 가방에서 잠옷을 꺼냈다. 붉은 휘장이 둘러진 침대 위에 포장을 뜯지 않은 하트 베개가 있었다.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생각만큼 퇴폐적인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런 메시지와 귀여운 선물이라니. 웃겨서 킥킥 터져 나온 소리를 죽였다. 그래도 하트 베개가 새 제품이라 안심되었다. 꼭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방문을 잠가뒀는데 밖에서 남자가 자꾸 들어오려고 했다.

“손님, 문 좀 열어주세요.”

“괜찮아요. 숙박하려고 온 거예요.”

“무슨 말이 되는 소리를 하는 거예요. 여기가 무슨 호텔도 아니고.”

남자의 성질이 보통이 아니었다. 발로 뻥뻥 차대면서 당장 문을 안 열면 사제장을 부르겠다며 엄포를 놓았다. 더 내버려 뒀다가는 문제가 생길 것 같아서 문을 열어줬다.

남자는 연두색에 곰돌이가 그려진 귀여운 잠옷을 입은 아인을 보고 당황했는지 말을 잃었다. 하긴 인안나 신전에 찾아와 작정하고 숙면 취하겠다며 잠옷 입는 고객은 아인밖에 없을 터다.

“아가, 여기가 어디인지 알고서 왔니?”

남자는 아인이 어려 보였는지 아가라고 불렀다. 아인은 복도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남자를 안에 들였다. 그는 어린놈의 새끼가 여기가 어떤 데인지 알고 찾아왔냐면서 마구 잔소리를 퍼부었다.

아인은 꾸중 듣는 아들처럼 가만히 있다가 해명을 했다. 남자는 제 일처럼 분개하며 그 알파 새끼를 부숴버려야 한다고 허공에 주먹질을 했다.

“그러니까 네 말을 요약하자면 부모님을 죽이겠다고 협박한 알파가 널 납치했고, 그놈 러트에 휩쓸려서 히트가 와 같이 잤다는 거지?”

열심히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하루 종일 침실에 갇힌 채 섹스를 했는데, 그놈 애인이라는 이복동생이 찾아와서 제발 헤어져달라고 빌었다고?”

현대에서 국어시험을 봤으면 만점을 받았을 만큼 언어영역 능력이 뛰어났다. 정확하게 아인이 말한 이야기의 요점만 쏙쏙 짚어냈다.

“그 새끼가 각인은 부하 되는 거라고 해서, 넌 집에 돌아갈 생각에 각인을 했고? 부하 놈한테 집에 보내달라고 하려고?”

계속 고개를 끄덕이는 아인을 보며 남자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무슨 오메가가 각인도 몰라. 너 나이가 몇인데?”

“스무 살이요.”

“장난해! 그런데 어떻게 각인을 몰라.”

하지만 특수한 환경이었다. 알파인 아버지는 자신이 어렸을 때 감옥에만 있었다. 오메가니 알파니 하는 형질의 특징에 대해 자세히 알려줄 이가 없었다.

레이나는 아인이 자라는 내내, 아인이 억제제만 잘 먹으면 된다고 했다. 아인이 성장하는 동안, 그녀는 시집오기 전에 배웠던 과목의 선생님들을 초빙해 아인을 교육시켰다. 레이나가 배운 과목에는 오메가에 대한 과목이 없었다.

아인을 따라 같이 폐쇄적으로 지낸 그녀였다. 아인 또래의 오메가를 어떻게 교육시켜야 하는지 다른 부모들과 교류하지 못해 알지 못했으리라.

갈색 머리 남자가 마치 아인의 부모가 잘못했다는 듯 말했다. 화가 나서 부모님 잘못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아이 교육도 제대로 안 시켜서 각인하게 뒀는데 왜 부모 잘못이 아니야.”

“그….”

그렇지만 정말 샤를과 레이나는 좋은 부모님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엄마가 혼자 나 키웠는데 엄마는 베타라서 잘 모른단 말이에요.”

“아, 그럼 인정. 베타 부모 밑에서 큰 알파 오메가들이 꼭 사고 치긴 하더라.”

남자는 남의 불행이 재미난지 깔깔 웃었다. 그가 호텔보다 비싸게 숙박하는데 이왕이면 제대로 돈값 뽑으라면서 화장실에서 세면도구를 쓸어왔다. 수건도 훔쳐서 아인에게 줬다.

“감사해요.”

“푸하하하. 아, 진짜. 너 무지 재미있다.”

왜 자기가 세면용품 훔쳐 준 거면서 웃기다고 웃나 몰라. 기분 나빠서 입을 삐죽 내밀었다. 능글맞게 웃는 남자는 지금 상황이 재미있어서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남자가 아인더러 각인한 알파를 피해 도망치는 거면 여기 취업하는 건 어떠냐고 제안했다.

“미쳤어!”

“뭐 어때. 이 일이 얼마나 고수입인 줄 아냐. 나도 각인했는데 그거 절대 각인한 알파 아니면 발정열 안 식어. 히트 기간에는 미칠 듯이 괴롭고.”

남자의 말에 아인은 그의 목덜미를 쳐다봤다. 그가 웃으면서 셔츠 목깃을 내려 알파 이름을 보여줬다. 어쩐지 오메가 페로몬이 나지 않아 이상하다 했다.

“히트 왔을 때 어차피 괴로울 거면 돈 받으면서 섹스하는 게 낫지 않아?”

“그래도 전 아무하고나 자고 싶지 않아요.”

“하여간 미련하긴. 그래, 한번 당해봐야 정신 차리지.”

그가 침대에 누웠다. 아인도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그런데 남자가 한 말 때문에 불안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야, 자냐.”

“아니요.”

남자도 잠들지 않고 있었다. 아인은 그에게 그동안 오메가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몰랐던 점을 물었다. 그는 귀찮아하면서도 자세히 알려줬다. 도란도란 이야기하다가 잠들었다.

아인이 잠든 걸 확인한 남자는 침대에서 조심스럽게 일어나 방을 빠져나왔다.

“뭐래? 왜 여기로 도망쳤대?”

호기심 많은 동료가 남자에게 물었다. 시종일관 장난기 많고 가벼운 남창처럼 굴던 남자의 얼굴에 냉엄함이 깃들었다.

“소란 피우지 마. 보고는 내가 올린다.”

“쳇. 재미없는 녀석.”

“기사는 광대가 아니야. 재미있을 필요 없지.”

짧은 반바지를 입은 남자에게 복도에 있던 취객이 다가왔다. 취객은 손가락으로 남자의 젖꼭지를 잡으며 성추행을 했다. 남자는 주먹으로 취객의 코를 때려 한 방에 기절시켜 버렸다.

“이야~, 역시 호라이슨 님의 애첩!”

“닥쳐.”

남자는 품행 방정하지 못한 동료를 경멸을 담아 째려봤다. 백장미 기사단에 소속된 기사 중 그가 제일 체구가 작고 잘생겨 오메가 남창 역할을 맡았다. 그래봤자 베타라 알파들 사이에서나 상대적으로 작은, 182cm가 넘는 훤칠한 체구였다.

없는 페로몬은 각인을 했다며 잉크로 분장해 속였다. 순진한 아인은 전혀 그를 의심치 않았다. 각인한 오메가로 변장했던 주다는 몸을 휙 돌려 인안나 신전을 나왔다.

호라이슨을 모시는 백장미 기사단의 최근 임무는 아인 페르디안에 관한 것뿐이었다. 아인이 페르디안 백작저를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건 그의 도주를 뒤에서 백장미 기사단이 도왔기 때문이었다.

1황자가 붙인 A급 에스퍼들의 보호에서 벗어났으니, 호라이슨이 명령만 내리면 기사들은 아인을 몰래 죽일 것이었다. 그런데 호라이슨은 아인이 왜 인안나 신전에 갔는지 그 의도를 알아보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가 거기서 일하게 하든가, 도주를 계속한다면 알렉세이에게 들키지 않게 도우라 했다.

호라이슨과 오랫동안 살을 섞어온 그다. 그는 주군이 지금 혼란스러워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호라이슨의 명령이 일관되지 않았다. 아인을 망가트리려는 마음과 그렇지 않은 마음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렇게 주다는 오메가 남창으로 위장해 현장에 투입되었고, 주군의 명대로 아인의 속마음을 파헤쳤다. 순진하고 멍청한 우성 오메가는 1황자가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를 찾아 잠을 자러 온 것뿐이었다. 아인은 신전에 남아 남창이 되라는 주다의 설득에도 도주를 택했다.

그러니 백장미 기사들은 이제 아인의 그림자가 되어야 했다. 알렉세이의 개들이 아인을 찾지 못하게 계속 흔적을 지우고, 추적을 방해하는 게 그들의 임무였다.

이전까지 호라이슨은 기회가 왔을 때 아인을 죽이려고 했었다. 그런데 아인이 인안나 신전에 들어가자 마음을 바꿔먹었다.

현명한 자신의 주군이 아인을 멀리 보내 알렉세이를 에테르 폭주로 죽이겠다는, 상당히 비효율적인 판단을 내렸다. 왜 간편한 길을 돌아가는지 모르겠다. 그냥 저 무방비하게 있는 무지한 오메가 하나 죽이면 끝날 일이거늘.

앞으로 기나긴 임무가 시작될 듯했다.

***

아인은 아침 일찍 일어나 가방을 챙겼다. 로브를 뒤집어쓰고 방을 빠져나왔다. 사제장이 기름기 좔좔 흐르는 얼굴로 웃으면서 인사했다.

“아이고, 고객님, 밤에 좋은 시간 보내셨습니까.”

저질 개그처럼 하반신을 퉁기며 춤추는 사제장 때문에 비위 상했다. 얼른 고개를 끄덕이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마시장에 가서 조랑말을 한 마리 샀다. 말은 차마 탈 엄두가 나지 않아서 포기했다. 사람 키만 한 말에 올라타기엔 아인은 엄청난 쫄보였다. 승마가 귀족의 기본 소양이라 배우긴 했지만, 레이나는 승마를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어차피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아인이 또래 귀족들과 어울려 사냥을 할 일이 없으니, 위험한 운동은 안 배우는 게 낫다고 여긴 거다.

레이나의 오라버니가 어렸을 때, 말을 타다 낙마해 목이 부러져 죽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말 타겠다는 고집 따위 생기지 않았다.

15살까지 선생님이 와서 조랑말 고삐를 잡고 걸어주면, 아인이 조랑말 위에 올라타곤 한 게 고작이었다. 어설프게 조랑말에 올라타고 성문으로 갔다. 어린아이들이 아인을 보고 키득키득 웃었다. 왜 그런가 했는데 상인들은 조랑말을 짐 옮기는 용도로만 쓰지, 타고 다니지 않기 때문이었다.

얼른 내려서 조랑말 등에 가방을 올려뒀다. 조그마한 가방이 누가 봐도 초짜 가출러인 티를 냈지만, 아인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성문을 무사히 빠져나왔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멍 때리다가 상인들 무리에 꼬리처럼 붙어서 따라갔다.

아인의 어설픈 도주에 그의 뒤를 따르는 백장미 기사단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메가로 위장했던 주다는 굳은 얼굴로 뒤를 따랐다.

어찌나 허술하고 경계심이 없는지, 상단 꼬리에 붙은 아인을 발견한 상인이 말을 걸자 웃으면서 대화했다. 주다에게도 제 사정을 다 말하더니만 정말 큰일 날 성격이었다.

상인들은 여행 중이라는 아인의 말에 어디까지 가냐며, 가다가 도적을 만날 수 있으니 자기네랑 같이 움직이자고 했다. 아인이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누가 봐도 저 상인들이 도적인데 말이다. 세상천지에 어떤 상인들 눈가에 칼자국이 있겠는가. 얼굴만 봐도 ‘나는 도적이요.’ 하고 적어뒀다. 골라도 저런 놈들을 일행으로 골랐다.

1분도 사고를 안 치면 큰일 나는 줄 아는 세상 물정 모르는 오메가 도련님을 보호하느라 앞으로 많이 바쁘겠다. 주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인적이 없는 산에 들어서자 상인들이 돌변했다. 그들이 아인에게 “가진 거 다 내놔!” 하며 단검을 뽑아 들었다.

아인이 조랑말에 얹어둔 가방을 넘겼다. 결박당하고, 로브가 벗겨졌다. 아인의 얼굴이 공개되자 도적들이 휘파람을 불며 환호했다.

“이게 웬 횡재야!”

“씨발, 내가 제일 먼저 따먹을래.”

“미친 새끼야. 좆 잘리고 싶어? 두목 아시면 큰일 나게. 아지트 도착할 때까지 건드리지 마.”

겁먹은 아인이 오들오들 떨면서 울었다. 예쁜 오메가가 우니까 도적 새끼들이 더 흥분하며 좋아했다.

어차피 호라이슨은 아인을 제거하려고 했고, 그가 남창이 되길 원했으니 기사들은 그를 구하지 않고 대기했다. 그러나 그 상황을 수신호로 보고하자 이상한 답변이 돌아왔다.

-울고 있나?

-예.

-구해.

주군의 속을 이제는 모르겠다.

-구해줘. 아인 페르디안이 구해지는 거 보고 싶으니까.

아인은 창살이 달린 마차에 갇혀 있었다. 주다는 도적들이 술을 질펀하게 마시고 잠들었을 때, 열쇠를 훔쳤다. 창살이 열리자 무릎을 끌어안고 울던 아인이 고개를 들었다.

***

“어디 갔어?”

알렉세이는 오늘이야말로 아인에게 자신이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는 걸 피력하기 위해 큰 결심을 한 참이었다. 그는 귀엽게 보이기 위해 목에 커다란 리본을 매달고 침실에 들어섰다.

방문을 열자마자 싸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알파 페로몬과 조화롭게 섞여 있어야 할 오메가 페로몬이 옅어져 있었다.

“어디 갔냐고!”

방문을 지키고 있던 부하들의 멱살을 잡았다. 겁에 질린 아론이 잘못했다고 빌었다. 이성을 잃은 알렉세이는 아론의 뺨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어디로 빼돌렸어! 내 가이드! 내 오메가 어디에 빼돌렸어! 말해! 말하라고!”

아론을 바닥에 던져버렸다. 그의 위에 올라타 마구잡이로 주먹으로 내리쳤다.

“1황자 전하,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아론이 쌍코피를 흘리며 빌었다. 아직 어린 티를 벗어내지 못한 얼굴이 우는 모습을 보자 알렉세이는 더 이상 그를 때릴 수 없었다.

“A급 에스퍼 다섯이 고작 방구석에 처박혀 그림만 그리던 오메가 하나 감시 못 해?”

“….”

“찾아. 찾아오기 전까지 황궁에 돌아오지 마.”

오직 에스퍼 등급만 보고 감시역을 뽑은 게 잘못이었을까. 케르베로스 기사단에서 제일 잘 싸우는 놈들을 모아서 아인을 지키게 했다. 그런데 이런 어이없는 일을 당하고 말았다. 이 화를 어디에 풀지 화풀이할 것을 샅샅이 찾았다. 어릴 때처럼 궁을 다 불태워 버릴까?

양손에서 불꽃을 피워 올렸다. 꺼지지 않는 불로 이곳을 지옥처럼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아인의 닉스를 빼먹고 이제 평범한 그림에 불과한 그림들이 눈에 들어왔다.

빠르게 손에서 불꽃이 꺼졌다. 아인은 집밖에 갈 곳이 없었다. 그의 행선지는 오직 페르디안 백작저 한 곳이었다.

알렉세이는 그곳에 가면 아인을 금방 되찾을 거라고 위안하며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노력했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눈깔이 뒤집히려고 했다. 공간 이동 능력을 사용해 바로 페르디안 백작저에 갔다.

“아인아! 아인 페르디안. 어서 나와!”

큰 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백작 부부가 놀라서 잠옷 차림으로 뛰쳐나왔다. 고용인들이 어두운 저택을 밝히기 위해 마법등을 켰다.

“아니, 1황자 전하. 이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널 위해 황제가 되려고 했다. 던전에 가라면 갔고, 귀족들에게 잘 보이겠다며 파티에 참석했다. 정말 쉬지 않고 일했다. 압도적인 호라이슨을 뒤늦게 이겨보겠다고 발악했다. 그 결과가 이런 배신이라니. 알렉세이는 버림받은 자신이 너무 웃겨 킥킥 웃었다.

몸이 감정에 휩싸여 주체할 수 없이 흔들렸다.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씨근거리며 거칠게 숨을 뱉었다. 손가락 사이로 날카로운 은회색 눈이 굶주린 늑대의 눈처럼 빛났다.

겁에 질린 백작 부부가 보였다. 머리통이 터질 것만 같았다.

“아인이 어딨어.”

“1황자 전하와 같이 있는 게 아니었습니까.”

샤를이 레이나를 등 뒤로 보내 보호했다. 꼭 자신이 위험한 짐승처럼 말이다. 아인도 알렉세이를 두려워했지. 하하하하. 다들 알렉세이를 기피했다. S급 에스퍼가 뭐라고.

가이드가 없을 땐 폭탄처럼 터질 거라면서, 가이드가 있으면 저놈이 엄청난 능력으로 마음껏 살육할 거라면서 잘도 이유를 가져다 붙였다. 그냥 세상 사람들을 알렉세이를 싫어하는 거였다. 자신의 아버지처럼.

“내놔. 내놔! 내놓으라고! 내 가이드 돌려줘!”

지랄 발광을 하며 소동을 피웠다. 발로 바닥을 탕 탕 내리찍을 때마다 대리석이 쩍쩍 깨져나갔다. 그제야 상황 파악을 한 샤를이 자기 아들 어디 갔냐고 오히려 알렉세이에게 되물었다.

“연기 잘하네. 어디에 숨겼어. 어디야. 응접실이지?”

샤를을 밀치고 불이 꺼진 응접실로 쳐들어갔다. 벽에 걸린 그림이 예전과 똑같았다. 초상화의 뻥 뚫린 눈 중 금안을 찾아봤다. 그때처럼 저 가벽 뒤에 숨어 겁에 질린 아인이 자신을 지켜볼 거라 믿으며.

그러나 아무 데도 없었다. 오메가 페로몬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어째서… 어째서 도망쳐버린 거야. 내가 더 잘할게. 무섭지 않게 목에 리본도 묶었어. 나는…사실… 겁쟁이야. 내가 너보다 더 약해. 아인아. 그러니까 제발 나와 줘.”

양탄자가 깔린 바닥에 털썩 무릎 꿇었다. 알렉세이의 얼굴은 온통 눈물로 젖어 들었다. 그와 처음 키스를 할 때 알았다. 아인의 침을 마시게 되면서 그가 그동안 알렉세이의 홍차에 침을 뱉었다는 걸.

넌 날 참 싫어하구나 싶었다. 그러나 자신했다. 아인은 예쁜 얼굴을 좋아해서 가끔 알렉세이를 보며 멍 때릴 때가 있었다. 그래서 자신을 사랑하게 될 거라고 믿었다. 오만이었다. 헛된 꿈이었다. 아인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알렉세이는 대성통곡했다. 뒤늦게 도착한 부하들이 죄책감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A급 에스퍼라고 벌써 맞은 상처가 회복된 아론이 총대를 멨다.

“1황자 전하, 제 잘못입니다. 아인 공자께서 계속된 감금 생활로 정신 건강이 많이 안 좋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페르디안 백작저로 모셔다드렸고, 그분이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아론은 오열하는 알렉세이 앞에 무릎을 꿇고 검을 건넸다. 주군이 자신의 목을 잘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머지 네 명이 히끅 히끅 숨을 들이마시며 울었다.

가장 나이가 어린 막내는 20살이고, 맏형인 아론도 고작 22살에 불과했다. 등급이 높은 에스퍼라고 살인 병기로 굴려지는 그들이었지만, 아직 어린아이들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들의 주군인 1황자도 그들과 나이가 비슷한 애송이에 불과했다.

아무런 능력이 없는 평범한 샤를이었지만, 그는 삶의 연륜이 깊은 연장자로서 어린 에스퍼들이 감정에 휩싸여 비극을 저지를까 봐 막아섰다.

“1황자 전하. 제 아들입니다. 아인이가 사라졌다면 제가 반드시 찾을 겁니다. 괜히 귀한 목숨 죽이지 마시고, 아인이랑 마지막까지 함께한 기사들 같은데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단서를 찾아보도록 하죠.”

샤를은 시종장에게 따뜻한 코코아 여섯 잔을 가져오라고 했다. S급 에스퍼 하나, A급 에스퍼 다섯이 그렇게 페르디안 백작저 응접실에 한꺼번에 모여 앉았다. 한 나라를 침략하고도 남을 전력이었다. 우습게도 이런 꼬맹이들이 말이다.

알렉세이가 홀짝홀짝 코코아를 마셨다. 울음 가득한 얼굴로 그러고 있으니, 그렇게 무섭게 느껴지던 1황자도 이제 스무 살밖에 안 된 아이구나 싶었다. 아인과 동갑인 게 이제야 느껴졌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 아인은 아직도 샤를과 레이나를 아빠 엄마라고 부르고, 시종들이 입혀주는 옷들이 싫다고 고집을 피우는 아이에 불과했다.

샤를은 이제 그들을 무기가 아닌 평범한 아이들로 보기로 했다. 그는 긴장을 풀고 기사들 중 제일 나이가 많아 보이는 아론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건지 오늘 아침의 일부터 차근차근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아론은 아인의 행동을 하나도 빠짐없이 설명했다.

“갑자기 허겁지겁 방에서 뛰쳐나왔어요. 무슨 급한 일인가 싶었는데 가만히 복도에 앉아 하늘만 보시더라고요.”

“맞아요. 드디어 미쳤다 싶었죠.”

초록 머리 기사가 아론의 말에 끼어들었다. 제제는 케르베로스 기사단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멤버였다. 옆자리에서 실비아가 제제의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때려 입을 다물게 했다.

“한참 방으로 안 돌아가더라고요. 그런데 2황자 전하가 오셔서 선물을 줬어요.”

“우엑.”

옆에서 또 촐싹거리는 제제가 헛구역질하는 추임새를 넣었다. 샤를과 알렉세이는 눈빛으로 무슨 일인지 설명을 더 요구했다. 자기한테 시선이 쏠리자 자신감을 얻은 제제가 입을 열었다.

“캔버스를 주셨는데 글쎄 썩은 가죽에서 피가 흐르고, 구더기가 들끓더라고요. 그걸 보느니 차라리 마물들 죽이는 게 낫다 싶었어요. 으흐흐.”

제제가 두 팔로 어깨를 감싼 채 떨었다. 알렉세이의 표정이 굳었다.

“도대체 2황자가 건네는 선물 따위를 왜 아인이가 받게 둔 거야. 검수 정도는 해야 할 거 아니야.”

“하지만… 그 2황자 전하시라고요. 유르한의 백장미요.”

“맞아요. 설마 무슨 일 있을까 싶었죠.”

“그분이 얼마나 착한지 아시잖아요. 저희한테도 수고한다면서 쿠키 선물해주고 그랬단 말이에요.”

얼마나 멍청하단 말인가. 착하고 친절하기로 소문난 호라이슨의 이미지를 믿고 그냥 아인에게 접근하는 걸 내버려 뒀다는 거다. 자신이 믿었던 부하들이 말이다.

알렉세이는 이게 다 제 업보였음을 깨달았다. 차라리 이런 어린놈들 대신 등급이 낮더라도 노련하고 경력 있는 에스퍼를 아인의 호위로 붙여뒀어야 했다.

샤를은 2황자의 테러 행위를 듣고 분노로 주먹을 꽉 쥐었다.

“설마 2황자가 우리 아인이를 납치한 건 아니겠죠?”

“….”

기사 다섯이 서로를 쳐다보다가 얼른 부정했다.

“아닐 거예요. 아인 공자님이 가출한 거예요.”

알렉세이는 다 마신 코코아 잔을 손아귀 안에서 부서트렸다.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발밑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그래야 할 거야. 그렇다면 고작 평범한 오메가가 도망치는데 전혀 몰랐던 A급 에스퍼 다섯은 그 이유를 말해볼까. 아인 페르디안이 어떻게 너희를 따돌렸는지.”

아인을 지키지 못한 기사들은 바로 소파에서 내려와 무릎 꿇었다. 그들의 말은 틀렸다. 아인이 도주한 흔적이 없다는 사실이 뜻하는 건 단 하나였다.

그들과 같은 에스퍼들이 아인을 납치했거나 아인의 도주를 도왔다는 의미였다. 샤를이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설마 2황자가 우리 아인이를 납치했다는 의미입니까?”

알렉세이의 눈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그는 부하들의 무릎을 발로 지그시 밟으며 싸늘하게 경고했다.

“일어나. 너희 무릎 따위 가치 없으니까. 그딴 걸로 넘어가려고 들지 마.”

알렉세이는 야멸차게 부하들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그의 부하들은 엄청난 감동을 느꼈다. 죽여 마땅한 죄였음에도 주군이 그들을 살려뒀기 때문이다. 이 은혜를 어찌 다 갚을 수 있단 말인가.

창밖으로 벌써 아침 해가 떠올랐다. 알렉세이는 응접실에 난 커다란 창문으로 다가갔다. 마음은 조급한데 흥분한 나머지 시간 낭비를 해버렸다. 시기를 놓쳤다. 다 그가 이성을 유지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이러면 다시 밤이 되길 기다렸다가 몰래 2황자를 치러 가야 했다.

그렇다고 해가 떴다며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모든 방법을 강구해 자신의 가이드를 되찾아야 했다.

물론 할 수만 있으면 황자들끼리 아무런 마찰 없이 아인을 무사히 찾는 게 좋았다. 아직 그는 완벽하게 적을 섬멸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알렉세이는 이른 새벽임에도 조세핀에게 연락했다.

잠에 취한 조세핀이 놀라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상황 설명을 들은 조세핀이 아인을 추적하는 일에 마탑 마법사들을 투입시켜 주기로 했다.

통신 마도구를 다 사용한 알렉세이는 창밖으로 아이의 그림에 항상 나오던 아름다운 정원 풍경을 바라봤다.

‘저 푸른 잎사귀들이 뭐라고 너는 그리 아름답게 보았을까.’

“실비아, 명령이다. 받아 적어.”

실비아가 재빨리 휴대용 통신 마도구를 꺼내 기사단 전체에 남길 주군의 명령을 써 내려갔다. 알렉세이가 부하들에게 하달하였다.

“지금부터 케르베로스 기사단은 수색조와 급습조로 나눠서 움직인다. 수색조는 아인의 위치를 파악해 그를 보호하는 게 임무고, 급습조는 혹시 오늘 밤까지 아인이를 찾지 못했을 때 2황자의 궁을 급습하는 게 임무다.”

실비아는 너무 놀라 손에서 통신 마도구를 놓쳤다. 막내 제제가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들의 주군은 온건한 방법으로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들이 다 망쳤다. 훗날 역사에 반정을 일으킨 폭군으로 그들의 주군이 기록되게 생겼다. 알렉세이가 그동안 얼마나 그를 싫어하는 아버지한테 인정받고자 했는지 그들은 알았다.

사람들은 가이드가 없어서 억류하는 에테르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짜증을 많이 내던 1황자를 단지 성격 나쁜 놈으로 취급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알렉세이는 그 누구보다 외로움을 잘 타는 여린 사람이었다. 잘못을 저지른 부하들을 죽이지 않는 자애로운 주군이었다. 그런데 결국 제 손으로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게 될지도 몰랐다. 다섯 기사들은 제발 그 최악의 상황까지 가지 않길 바랐다.

***

케르베로스 기사단에 긴급하게 편성된 아인 페르디안 수색조는 결국 해가 질 때까지 주군의 가이드를 찾지 못했다. 마탑에서 파견된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늘로 솟았나? 땅으로 꺼졌나? 도저히 평범한 오메가가 가질 만한 도주 실력이 아니었다. 마법사들은 백장미 기사단 소속 주다가 이 일에 개입되었음을 알아냈다.

주다는 정신계 A급 에스퍼였다. 정신계 에스퍼는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한정되어 있지만, 그는 은신과 은폐에 뛰어난 재능이 있어 암살 업무에 파견되곤 했다.

만일 알렉세이가 본딩으로 아인과 이어지지 않았다면 진작 미쳐버렸을 것이다. 아인이 무사하다는 사실이 지금의 그를 살렸다.

아무런 성과 없이 돌아온 부하들에게 알렉세이는 대로했다. 그들의 무능함보다 본인의 무능함에 더 화가 많이 났다.

알렉세이는 본딩도 각인도 자신에게 가이드를 묶어두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들 사이에는 좀 더 확실한 약속이 필요했음을 다시금 느꼈다.

어떻게 알았는지 1황자의 가이드가 도망쳤다는 소문이 순식간에 귀족들 사이에서 돌았다. 분명 요즘 높아지고 있는 1황자의 입지를 다시 낮추기 위해 2황자 측에서 일부러 퍼트린 거다.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어서 케르베로스 기사들은 이를 갈았다. 이 모든 게 아인이 사라진 지 단 반나절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부디 평화로움을 가장한 황궁에 낀 살얼음이 깨지지 않길 바라며, 시종들과 시녀들마저 윗사람들의 심기를 거슬리지 않기 위해 조용히 움직이던 하루가 드디어 끝났다.

은밀하게 움직여야 할 이들을 가려줄 어둠의 은총이 지상에 내려왔다. 부디 거사를 치르는 이들을 위해 달빛이 너무 밝지 않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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