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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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세이 덕에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 아인은 후속작 작업에 돌입했다. 가출했다가 겪은 일들을 바탕으로 진짜 자신의 이야기를 쓰리라 결심했다. 아무리 이곳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한다 할지라도, 현실의 작품을 그려서 얻은 가짜 인기는 전혀 기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인은 피넛버터 색깔의 토끼 대신 금빛 토끼 잉잉이 캐릭터를 창조해냈다. 후속작은 잉잉이가 토끼 마을에서 제일 사랑받는 분홍 토끼 핑키에게 괴롭힘을 당했는데, 아무도 믿어주지 않아 마을을 뛰쳐나오면서부터 시작되는 고생 이야기였다.

한 마리의 토끼가 위험한 바깥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생존기를 담았다. 웹툰 연재할 때 하도 까여서 출판사 편집자가 마음에 들어 할지 걱정되었다.

통신 마구도로 편집자에게 <피넛버터 래빗>의 후속작이 완성되었노라 전했다. 그는 이미 인기 있는 땅콩이가 있는데 왜 새로운 캐릭터 잉잉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냐며 걱정을 표했다.

아인은 잠깐만 기다려달라고 하고, 자기애 +999 아이템 실크 옷으로 갈아입었다. 갑자기 현대로 돌아가 웹툰을 연재해도 대박이 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신만만해져 잉잉이 이야기를 소개했다. 편집자는 직접 삽화와 함께 글을 읽어보겠다며 찾아오겠노라 했다.

이상하게 자신감 맥스 상태일 텐데 불안했다. 편집자는 아인이 점심을 다 먹었을 때쯤 찾아왔다.

“작가님, 잘 지내셨어요.”

“네.”

쭈굴해져서 ‘제발 동화책 출판해주세요.’하고 빌 뻔했는데, 다행히 아이템빨 덕에 도도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편집자와 간단하게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다가 원고를 건넸다.

“푸하하하하. 아, 진짜. 작가님 이야기 들었을 땐, 무슨 조난당한 토끼가 고통받는 암울한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잖아요.”

맞다. 그런 이야기.

“이런 개그, 아이들이 엄청 좋아해요.”

개그라니? 편집자가 장르를 착각하고 있었다. 편집자는 잉잉이가 S급 변태인 회색 토끼 알알이의 추적을 피해 두더지 아지트에 들어가고, 거기서 핑키의 스파이를 만난 게 특히 웃기다고 했다.

잉잉이의 순진함과 멍청함이 돋보이는 장면이라나 뭐라나. 아인은 자전적인 이야기라고 말하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꼬리에 달린 리본은 뭐예요? 무지 귀엽네요.”

“아무래도 동화이다 보니까 아이들이 보잖아요. 그곳을 가리기 위해 달아봤어요.”

“하하하. 농담도 참 웃기게 하신다.”

진담인데 편집자가 무시해버렸다.

“그럼 이 작품으로 출판하기로 해요. 그런데 토끼들 이름을 바꿔야 할 것 같아요. 잉잉이보다는 골든 보이가 좋겠네요. 알알이는 뭐… 아시죠? 그레이로 제가 수정해두겠습니다.”

입술이 삐죽 내밀어졌지만 찻잔을 들어서 가렸다. 남의 생존기를 읽고 개그라고 착각한 편집자가 기분 좋게 돌아갔다.

출판되면 독자들이 자신의 이야기가 개그물인지, 생존기인지 진실을 판단해줄 것이다. 아인은 그때까지 달콤이를 위해 복숭아를 먹기로 했다.

아침에 복숭아 다섯 개를 먹었는데도 물리지 않고 계속 들어갔다. 달콤이 식성이 보통이 아니었다. 덕분에 금빛 멸치였던 아인에게도 드디어 살이 붙었다.

말랑말랑한 뱃살이 만져지는 게 이제 알렉세이가 환장하게 좋아하겠구나 싶었다. 가뜩이나 지금도 쉬지 않고 섹스를 하는데 똥배가 나와서 그의 이상형에 가까워지면 큰일이었다. 얼른 운동을 해서 뱃살을 빼야 했다.

침실을 나오니 바로 중년의 기사들이 따라붙었다. 물뿌리개를 달라고 해 정원으로 향했다. 그런데 혼자만 꽃을 피워 눈여겨보고 있는 캐모마일이 누군가 짓밟은 것처럼 으깨져 있었다. 속상한 마음에 한숨을 푹 내쉬고, 짓이겨진 줄기를 깔끔하게 잘라줬다.

뿌리는 살아있으니 놔두면 다시 자랄 것이다. 물뿌리개를 들고 정원을 돌아다니면서 캐모마일 새싹에 물을 줬다. 날이 더워서 물줄기에 작은 무지개가 걸렸다.

“우와. 기사님들, 이거 봐요. 엄청 예쁘죠.”

“예.”

반응이 영 시원치 않았다. 전에 있던 기사들이었으면 엄청 난리 피우면서 좋아했을 텐데. 아인은 아쉬워하며 빈 물뿌리개를 들고 침실로 돌아갔다.

격렬한 운동을 했으니 이제 씻고 낮잠 잘 차례였다. 뙤약볕에 축구 경기장만 한 곳을 무거운 물뿌리개를 들고 걸어 다녔더니 팔다리가 쑤시고 아팠다.

시원한 물로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꿈에서 <잉잉이의 대모험>이 초대박 나 서점 앞에 동화책을 사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편집자가 개그물인 줄 알고 팔아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한창 개꿈을 꾸고 있는데 장면이 전환되었다. 여름인데 전기세를 낼 수 없어 에어컨 대신 선풍기만 켜고 웹툰을 그리는 김아인이 보였다.

목에 수건을 걸고 땀을 닦아내며 작업을 하고 있었다. 아주 오래된 기억이었다. 대학교에서 만난 친구와 데뷔작을 연재했을 당시였다.

그 녀석은 웹툰 시나리오를 작성한 후 대충 졸라맨을 그린 콘티만 넘겨주고, 우리 작품과 관련 없는 작업에 몰두했다. 채색 좀 도와달라고 부탁해도 녀석은 자기도 바쁘다면서 나 몰라라 했다.

노동 비율은 아인이 7, 녀석이 3이었다. 그런데 수입은 반씩 나누니까 어느 순간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우리 작품도 아닌데 무슨 소설을 밤새워 쓰나 한번 보고 싶었다.

열 받은 자신은 그 녀석이 잠깐 외출한 틈을 타 노트북을 뒤져서 저장된 글을 열었다. 놀랍게도 남자가 남자랑 섹스하는 이야기였다. 편의점에 다녀온 녀석이 놀라서 신발을 신은 채 방에 뛰어 들어왔다.

‘무슨 짓이야! 왜 남의 노트북을 함부로 봐!’

‘고작 이딴 거 쓰려고 너 나 안 도와줬냐?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채색 정도는 도와줘야 할 거 아니야. 왜 우리 웹툰인데 나 혼자만 해.’

‘난 글 쓰잖아. 이야기 쥐어짜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아?’

‘웃기시네. 고작 하루에 다섯 시간 글 쓰면서. 난 하루 15시간씩 그림 그려. 허리 부러질 것 같고, 손가락이랑 손목도 다 나갔어.’

그동안 쌓인 불만이 표출되었다. 그래서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하고 말았다.

‘야, 넌 우리 작품은 중요하지도 않지?’

‘너 말 다 했어?’

‘그래, 다 했다. 어떻게 나 일할 때 넌 BL 소설이나 쓰고 있냐.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끝까지 사과하지 않았다. 그땐 그 녀석이 너무 꼴 보기 싫었다. 날씨는 더운데 마감에 쫓겨서 쉴 수 없었고, 돈이 없어서 고작해야 라면 한 개밖에 먹지 못했다. 스무 살의 아인이 버텨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건 BL이 아니라 내 경험… 아니다. 아무튼 그냥 우리 여기서 끝내자. 마지막 콘티는 메일로 보내줄게.’

그 녀석은 편의점 비닐 봉투를 건네고 그대로 노트북만 챙긴 채 나가버렸다. 그날 자존심 때문에 녀석이 주고 간 음식들을 안 먹으려고 했지만, 배가 고파서 컵라면과 즉석밥을 먹었다. 꿈에서 깬 아인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씨발, 광광 작가 새끼, 역시 남자일 줄 알았다.”

꿈에서 본 녀석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이름이 익숙했다. 호라이슨 유르한이라니. 우연히 호라이슨이라는 이름을 소설에 쓸 수 있다. 그런데 성까지 똑같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어쩐지 아인을 꼭 찍어서 웹툰 작업을 맡겼다는 말에 뭔가 싶었다.

이게 바로 작가의 저주인가 싶은데, BL 소설에 빙의해 좋은 부모님과 알렉세이를 만나게 된 걸 생각하면 축복인가 싶기도 했다.

“그래, 김광태. 내가 존나 미안해. 그런데 너도 그때 너무했던 거 알지? 우리 비긴 걸로 하자.”

아인은 천장을 보고 외치다가 멈칫했다. 꿈에서 들은 김광태의 대사가 의미심장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경험. 소설이 아니라 경험이었다고 말하려고 했어. 설마… 그 녀석도 여길 왔던 거야? 그럼 이곳에서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온 거고?”

돌아갈 방법이 있다. 아인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김광태는 어떻게 돌아갔을까. 아니다. 여기엔 자신의 가족들이 다 있었다. 알렉세이는 어쩌고 원래 세계로 돌아간단 말인가.

아인의 마음은 몇십 번이고 바뀌었다. 돌아간다. 돌아가지 않는다. 돌아갈 방법도 모르면서 그럴 수 있다는 듯 고민했다. 돌아가면 떡볶이가 있고, 치킨이 있고, 피자가 있었다. 탕수육도 있고, 라면도 있고, 해물파전도 있었다.

“아, 먹고 싶어 미치겠다. 달콤이 너 누굴 닮아서 이렇게 먹보야. 너 콩알만 한 거 다 알거든. 그만 졸라. 아빠가 고작 치킨 때문에 다 버리고 원래 세계에 돌아가야겠니?”

***

밤늦게 귀가한 알렉세이가 코트를 입은 채 침대에 쓰러졌다. 먼지 하나 묻어 있지 않은 새 옷인 걸 보면 다른 곳에서 씻고 온 건데, 던전에서 방금 온 것처럼 힘든 척했다.

아인에게 멋진 모습은 보이고 싶고, 걱정 또한 받고 싶어서 이러는 것이겠지 싶다. 알렉세이가 다른 오메가의 집에 가서 씻고 왔을 거라는 의심 따위는 전혀 안 들었다. 그저 자신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알렉세이의 마음이 귀엽고 사랑스러울 뿐이었다.

“피곤해. 아인아, 나 뽀뽀해줘. 에테르가 완전 구정물 같아.”

자신의 에스퍼가 가이딩을 원했다. 아인은 피곤해하는 알렉세이를 위해 입맞춤을 했다. 그런데 여전히 머릿속에서는 ‘돌아갈 수 있어. 햄버거. 짜장면…’이란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도대체 돌아가서 무슨 돈으로 그것들을 사 먹는다고 이러나 싶다. 가봤자 좁은 방 한 칸만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웹툰은 망해서 마지막에 지구가 멸망하는 내용으로 끝을 맺어야 했다.

통장에는 잔액이 없고, 집에 쌀도 라면도 없었다. 그런데 이성을 식욕이 자꾸 이기려고 들었다. 이래서 임산부들이 살찌는구나,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왜 그래? 기분이 안 좋아 보이네.”

“아니에요.”

“아니긴. 네 페로몬이 불안정해. 내가 해결할 수 있는 거면 해결해줄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가 라면에 밥 말아서 김치랑 먹고 싶다고, 족발 배달이 가능한 세상에 갈 생각인데 따라오겠느냐 물을 뻔했다. 자신이 미친 줄 알 거다.

“복숭아 먹을래? 깎아줄게.”

“아니에요. 이제 복숭아 질렸어요.”

목구멍까지 김치찌개 먹고 싶다는 소리가 올라왔다가 간신히 가라앉았다. 입맛을 다시면서 배를 문질렀다. 티도 안 나는 지금도 먹을 걸로 고생시키는데 여기서 몇 개월 더 지나면 우리 달콤이 엄청나겠다.

그런데 김광태가 호라이슨이었다면, 지금의 호라이슨은 누구란 거지? 자신이 아인 페르디안 안에 있으니까 혹시 진짜 아인이 그 속에 들어가 있는 거 아니야? 헐….

악역수가 알파들한테 강간당해 죽은 끔찍한 소설 장면이 떠올라 눈을 질끈 감았다. 만일 진짜 아인이 그 일을 기억하고 있으면 어쩌나 걱정되었다. 제정신으로 견딜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알렉세이가 괜찮다는데도 복숭아 껍질을 까줘서 세 개나 먹어버렸다. 배부르니까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침대에 누워 자는 척 생각을 정리했다.

김광태가 호라이슨으로 있다가 한국으로 돌아왔고, 이 세상은 시간이 되돌려져 아인이 악역수 몸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니 호라이슨 몸에 진짜 아인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게 자신의 추측이었다.

설마 진짜 아인 페르디안이 이전 생을 기억하고 있진 않겠지? 안 그래야 할 텐데….

직접적으로 자신이 호라이슨에게 ‘너 혹시 아인 페르디안이야?’ 하고 물었다가 아니면 정신병자 취급을 받을 터였다. 물어볼 용기가 없어 그냥 마음속에 묻어두기로 했다.

***

아침에 눈이 번쩍 떠졌다. 원래라면 알렉세이가 이마에 뽀뽀를 해줘도 모른 척하고 잤겠지만, 갑자기 군고구마가 먹고 싶어졌기 때문이었다.

“응? 우리 아인이 어쩐 일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머릿속에 군고구마라는 명령어가 입력이라도 된 것처럼 후다닥 침대에서 일어났다. 잠옷 차림으로 침실을 나서려는 아인을 알렉세이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쳐다봤다.

“어디 가?”

“주방이요. 바빠서 이만.”

달콤이가 있어서 도도도 달려가지는 못하고 총총총 빠른 경보로 주방으로 쳐들어갔다. 한창 아침 식사를 준비 중이던 요리사들이 ‘허걱, 저 진상은 뭐야?’ 하는 눈으로 쳐다봤다.

실상은 1황자의 가이드를 영접해 긴장한 것뿐이지만, 눈치가 있을 때보다 없을 때가 더 많은 아인은 알아보지 못했다.

“안녕하세요. 혹시 고구마 있을까요?”

“아, 아아. 네. 넵. 여기 있습니다.”

당황해서 말을 더듬던 요리사 하나가 보관 중인 고구마를 건넸다. 군고구마를 먹으려면 냄비에 찜기를 올려두고 물 없이 익혀야 했다.

“혹시 제가 주방 좀 살펴도 될까요?”

“넵. 언제나 청결하게 주방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검사해주세요.”

“그런 거 아닌데….”

하부장을 뒤져서 냄비와 찜기를 찾아냈다. 흙 묻은 고구마를 깨끗이 씻어서 찜기 위에 놓았다.

“불 좀 켜봐요. 이거 어떻게 켜는 거예요?”

요리사가 대신 마도구 버튼을 눌러줘 불이 올라갔다. 아인은 그제야 마음 놓고 편하게 군고구마가 담긴 냄비를 바라봤다. 요리사들이 요리도 못한 채 그런 자신을 보기에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임신을 했더니, 너무 먹고 싶은 게 많아져서요.”

놀란 요리사들이 아인을 축하해줬다. 뜬금없이 복숭아를 계속 찾아서 이상했다는 둥,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둥 다들 아인의 눈치를 보느라 조용하더니 그제야 입이 터져 왁자지껄해졌다.

“앞으로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지 말씀해주세요. 저희가 최선을 다해 만들어 바치겠습니다.”

아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먹고 싶었던 음식들과 대충이나마 아는 레시피를 알려줬다. 이전 세계에서 쫄딱 망하긴 했지만 <요리로 세상을 구원하면 안 되는 걸까?>를 연재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고의 셰프를 꿈꾸는 고등학생들이 이세계로 소환되어 세계 정복을 하려는 우주인들을 음식으로 감동시켜 세상을 구한다는 내용이었다.

연재하는 내내 엄청난 악플에 시달리긴 했지만 ‘작가님 이렇게 시간 낭비 하실 거면 차라리 제가 좋아하는 소설 일러스트나 그려주세요.’ 하는 말을 듣고 외주를 시작하게 되었다.

뭐 그때는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아 울긴 했지만, 이제 와 돌이켜 보면 나빴던 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일러 외주 작업을 하게 되면서 밥은 먹고 살게 되었으니 말이다. 요리사들이 아인을 엄청난 미식가 취급하며 레시피를 받아 적었다.

“아니. 이럴 수가. 도대체 이런 레시피는 어떻게 생각해내신 건가요? 이건 혁명입니다.”

“정말 아인 공자의 음식 식견은 놀랍습니다.”

졸지에 요리사들에게 엄청난 만찬들만 먹으면서 자란 미식가인 양 찬양을 받게 되었다. 열심히 한국 김치의 위대함을 설파하다가 군고구마가 완성되어서 더 이상 어울려주지 않았다.

냉정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군고구마는 뜨거운 때 호호 불어가면서 ‘아뜨 아뜨.’ 야단법석 떨어가며 먹어야 제일 맛있었다.

냄비 뚜껑을 열자 찜기가 새까맣게 타기는 했지만, 고구마는 몹시 잘 익었다. 집게로 군고구마만 얄밉게 구해내 접시에 담았다. 다 탄 냄비와 찜기는 알아서 잘 버릴 거라 믿었다.

군고구마를 소중하게 품에 안고 침실로 돌아갔다. 알렉세이가 그게 뭐냐고 물었다.

“군고구마요.”

“껍질이 다 탔는데 먹을 수 있겠어?”

“히히. 걱정 마세요. 안에는 하나도 안 탔어요.”

“신기한 조리법이네?”

유르한 제국에서는 보통 찐 고구마를 으깨서 샐러드와 먹거나, 튀겨서 먹었다. 평범한 레시피라고 생각했는데 여기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은 듯했다. 마침 <피넛버터 래빗> 후속작 작업도 끝났는데,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들의 레시피 북을 제작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혼자서는 안 할 거다. 웹툰 그리면서 조사한 내용은 기억이 오래되어 잘 생각나지 않았다. 조리 과정을 다 기억하지 못했고, 맛 또한 보장할 수 없었다. 부족한 부분은 1황자 궁 요리사들의 도움을 받아 보완하면 될 듯싶었다.

군고구마를 먹기 위해 껍질을 벗겨내려는데 너무 뜨거워서 손을 뎄다.

“앗, 뜨거워.”

“어디 봐. 많이 다쳤어?”

알렉세이가 걱정스럽게 손가락을 살피고는 살짝 붉어진 손가락에 힐링 포션을 쏟아부었다. 이게 얼마나 귀한 아이템인지 알아서 아깝긴 했지만, 그가 그만큼 자신을 소중하게 여겨주는 것 같아 좋기도 했다.

“넌 만지지 마. 내가 까줄게.”

“알렉도 뜨겁잖아요.”

“괜찮아. 난 S급 에스퍼잖아. 용암에 손이 녹아내려도 재생되는 괴물인걸.”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왜 알렉이 괴물이야. 그럼 내가 괴물 좋아하는 놈이 되잖아요.”

알렉세이가 군고구마 껍질을 까느라 새까맣게 더러워진 손가락을 손수건으로 닦아냈다. 그가 ‘그러네, 그런 말 하면 안 되겠다.’ 쓸쓸하게 대답했다.

“혹시 누가 알렉한테 괴물이라고 했어요?”

“…티 나?”

“그 새끼 말 귀담아듣지 마요.”

아인이 알렉세이의 편을 들어주며 화냈다. 알렉세이의 계획대로였다. 일부러 기운 없는 척하며 눈가에 눈물이 고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럴게.”

아인이 알렉세이를 끌어안고 등을 쓰다듬어줬다. 이제 아인이 더 이상 알렉세이를 무서워하지 않게 된 것 같았다. 앞으로는 절대 방심하지 않고 약한 척해야지 다짐했다. 또 그를 무서워해 이불을 뒤집어쓴 채 얼굴을 보여주지 않을지 모르니 말이다.

다시 그런 일이 벌어지면, 그땐 알렉세이도 제대로 아인을 인간 대접해줄 수 없을 것 같았다. 알렉세이를 안은 채 아인이 꼬물거리며 움직여 껍질을 깐 군고구마를 먹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알렉세이는 숨을 죽이고 몰래 웃었다. 그가 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포옹을 풀었다.

알렉세이는 아인을 허벅지에 앉혀서 호호 고구마를 불어가며 먹는 그의 모습을 구경했다. 요즘 계속 개좆같은 황제 새끼가 밥 처먹는 거 보느라 힘들었는데, 아인이 먹는 모습을 보니 더럽혀진 눈이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알렉세이는 바지 안에서 발기한 자지 위로 아인의 엉덩이를 옮겨 놨다. 아인은 먹느라 정신없어서 제 구멍 밑에 깔린 게 뭔지도 알아보지 못했다. 이렇게 순진해서 매번 자신에게 따먹히는 거지 싶다.

일단 아인이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등을 토닥여 소화를 도왔다. 허리를 잡고 마구 위아래로 흔들어도 토하지 않을 만큼 참았다가 아인의 바지를 내렸다. 배가 짓눌리면 안 돼서 테이블 위에 아인을 똑바로 눕혔다.

아인은 달콤한 고구마 냄새가 나는 검댕 묻은 손 때문에 알렉세이의 옷이 더럽혀질까 봐 그를 밀어내지 못했다. 어쩔 줄 몰라 당황하는 얼굴이 사랑스러웠다.

알렉세이는 아인의 더러운 손을 입에 물고 쪽쪽 빨아 깨끗이 만들어줬다. 말랑말랑한 손바닥에 뺨을 문대고 손금에 키스를 했다.

흥분한 오메가에게서 풍성한 꽃향기가 흘러나왔다. 알렉세이도 알파 페로몬을 풀어서 오메가 구멍을 젖게 만들었다. 알렉세이에 비해 체구가 작은 아인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자지는 한 번에 넣지 않고 끊어서 박아줬다.

“아. 아아. 아앙. 앗.”

쿨쩍 쿨쩍 쿨쩍. 내벽 주름을 귀두로 긁으면서 통로를 넓혔다. 아침부터 섹스하느라 알렉세이는 던전 공략을 위해 기사들과 만나기로 한 시간을 한참 넘겨버렸다. 약속 시간이 2시간 지났을 무렵,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시종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1황자 전하. 언제 끝나실 것 같습니까. 기사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알렉세이는 어떻게 싸지도 않고 끝내느냐 역정을 냈다. 시종장은 기다리는 기사들을 돌아보며 쩔쩔맸다.

“1황자 전하, 아직도 안 싸셨습니까.”

“닥쳐라! 너 때문에 집중이 안 돼서 나올 것도 안 나오겠다.”

알렉세이가 퍽퍽, 아인의 안에 박아 넣으며 시종장에게 짜증을 부렸다. 아인은 심통 가득한 알렉세이의 뺨을 쓰다듬으며 밖에 들릴세라 조용히 속삭였다.

“알렉, 이만 싸주세요.”

“….”

“알렉, 제발 좆물을 싸주세요.”

아인의 흐느끼는 듯한 가녀린 음성에 잔뜩 성난 말 자지에서 드디어 정액이 쏘아져 나왔다. 몇 시간 더 참을 수 있었던 알렉세이는 아쉬움을 담아 힘 빠진 자지로 좆질을 했다.

“읏. 으읏. 어서 가야죠. 이제 그만해요.”

알렉세이가 보란 듯이 크게 허리를 휘둘렀다. 아인은 신음이 터질 것 같은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알렉세이가 그런 아인의 손을 치워냈다.

신음을 내지 않고는 못 견디게 자궁 입구를 들락날락 자극했다. 아인이 남성기로 묽은 정액을 쪼르륵 지렸다.

“아아아앗!”

아인이 큰소리로 교성을 내지르며 가느다란 허리를 벌떡였다.

“흐으응. 흑흑. 어떡해.”

뒤늦게 입을 손으로 막은 아인이 바깥 눈치를 봤다. 끙끙거리며 열심히 참는 건 기특하지만, 만일 아인이 진실을 안다면 퍽 억울해할 거다. 아인의 신음 소리를 조금도 타인에게 들려주기 싫은 알렉세이가 능력을 써서 소리가 밖으로 새는 것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알려주지 않은 건 누가 들을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에 아인이 평소보다 더 예민하게 반응하고 흥분하는 것 같아서였다.

아인이 오르가즘에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알렉세이는 드디어 구멍에서 자지를 빼냈다. 아인은 자신이 나가달라고 해놓고 아쉬워하며 더운 숨을 길게 내뱉었다.

“나머지는 갔다 와서 하자.”

“흐흥. 네.”

쾌감에 절은 오메가의 콧소리 담긴 대답에 알렉세이는 씨익 웃었다. 그는 시종장이 재촉을 하든 말든 아인을 안아 욕실에서 씻기고, 느긋하게 자기 또한 씻은 후 옷을 갈아입었다.

아인은 이불에 돌돌 말린 채 알렉세이가 침실 방문을 열 때, 문틈 사이를 내다봤다. 무서운 표정이었던 기사들이 알렉세이를 보자마자 우상을 만난 듯 뿅 가는 표정이 되었다. 반면 그들을 보는 알렉세이는 혐오스러운 벌레를 보듯 오만한 눈이었다.

“가지.”

“넵. 1황자 전하.”

갑옷을 입은 덩치 큰 기사들이 선생님을 따르는 유치원생처럼 알렉세이를 졸졸 따랐다. 복도를 걷던 알렉세이의 귀에 ‘남창이 임신을 했습니다.’라는 소곤거림이 걸려들었다.

남창과 아인은 전혀 연결되지 않는 상반된 이미지였지만, 이 궁에서 임신한 오메가는 오직 알렉세이의 오메가뿐이었다. 어디서 정보가 샜을까.

자신은 비밀에 부쳤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인이 아랫것들한테 그 사실을 흘렸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인의 실수가 아닌, 알렉세이의 과보호 탓이었다. 알렉세이는 혹시라도 아인이 겁먹을까 봐 철저히 아인을 둘러싼 위험이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고, 숨기고 있었다.

그가 알렉세이의 침실에서 마음 편하게 그림을 그리고 쉴 수 있게 하고 싶었다.

소곤거림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절대 들을 수 없는 소리였지만, 그는 평범한 사람이 아닌 S급 에스퍼였다. 소리의 근원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고리를 잡고 돌려보니 잠겨 있었다. 문고리를 뽑아내 잠금장치를 풀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주방에서 일하는 요리사 하나가 외부인과 함께 있었다.

“1황자 전하….”

놀란 호라이슨의 첩자가 알렉세이를 올려다봤다. 알렉세이는 변명도 듣지 않고 첩자의 머리통을 분리해버렸다. 어차피 누가 보냈는지 아니 굳이 번거롭게 능력을 사용해 알아낼 필요는 없었다.

허공에 떠오른 첩자의 몸이 폭발했다.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배에서 내장이 흘러내렸다. 방 안은 온통 찢어진 살점과 내장으로 더럽혀진 채 붉게 물들었다.

첩자의 경우, 정보를 훔치다가 언제 들켜서 붙잡힐지 몰라 동료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첩자에게서 소식을 얻어 주인에게 전해야 하는 메신저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첩자 여러 명을 만나 그들이 건넨 정보를 취합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피로 된 폭우가 내렸다. 메신저가 비명을 지르다가 입에 들어간 살점을 헛구역질하며 뱉었다. 그가 바닥에 주저앉아 엉금엉금 기어 도망치려고 했다. 알렉세이는 구둣발로 메신저의 등짝을 밟았다.

“고맙네. 가뜩이나 쥐새끼들 잡으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메신저를 발로 차서 똑바로 눕혔다. 턱을 움직이지 못하게 발로 지르밟고 눈을 마주했다. 은회색 눈동자가 메신저의 눈을 들여다봤다.

“2황자 측에서 1황자 궁으로 보낸 첩자들 수는 몇 명이지.”

“5명입니다.”

“많이도 보냈군.”

세뇌 능력으로 간단히 첩자들의 명단을 알아냈다. 알렉세이는 메신저가 돌아가지 않으면 호라이슨의 의심을 살 터라 그를 죽이지 않았다.

대신 거짓된 정보를 호라이슨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일정 시간마다 알렉세이를 만나러 오라고 세뇌를 걸었다.

첩자들 다섯은 당연히 찾아가 사살했다. 호라이슨은 꿈에도 자기가 보낸 첩자들에게 이상이 생긴 줄 모를 거다.

알렉세이의 행보를 지켜본 기사들이 조용히 뒤를 따랐다. 알렉세이는 공간 이동 능력을 사용해 황제의 명령으로 따라붙은 기사들과 함께 목적지인 던전으로 갔다.

순식간에 수백 킬로를 넘어 A등급 던전 앞에 도착했다. 기사들은 언제나처럼 충성심 가득한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너희들 아까 봤을 텐데. 나는 정신계 능력도 사용할 수 있어. 두렵지 않나. 내가 너희의 동경과 신망을 세뇌해서 만들어냈을 수도 있는데.”

황제의 개면서 1황자를 연모하는 이처럼 바라보기에 한 소리였다. 물론 알렉세이가 훗날 황제가 되면 그들은 알렉세이의 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지 않는가.

“그럴 필요 없으니까요.”

미하엘이 앞으로 나와 대꾸했다.

“왜?”

알렉세이가 개구진 눈웃음으로 아무리 가리려고 해도 비웃음을 담은 눈동자는 차가웠다.

“1황자 전하께 저희 같은 건 아무런 가치도, 필요도 없기 때문입니다. 1황자 전하와 함께 던전에 다니면서 깨달았습니다.”

꼴깍 침을 삼킨 미하엘이 말을 이었다.

“S급 에스퍼가 우리의 예상보다 더 엄청난 존재구나. 그에게는 이 유르한 제국을 정복하는 일쯤은 별거 아니겠구나….”

맞는 말이었다. 알렉세이가 마음만 먹으면 이 나라쯤은 다 불바다로 만들어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재수 없는 황제여도 아버지여서 참았다. 싫은 호라이슨이지만, 피가 이어진 이복동생이어서 두고 보는 거였다.

알렉세이의 마음은 얼음 성처럼 견고하고 차가웠다. 빗장 또한 그 누구도 안에 들이지 않을 만큼 튼튼했다. 그리되기까지 그는 많은 상처를 받고 실망과 외로움을 겪었다.

알렉세이의 차가움은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하는 벽이었다. 그 안에 들어가 있는 알렉세이는 어린 시절 제논에게 어리광을 피우고, 곰 인형이 망가졌다고 울 만큼 여린 심정을 가지고 있었다.

만일 오리하르콘 벙커에 갇힌 알렉세이를 마탑주 조세핀이 구해주지 않았다면, 그 여린 알렉세이는 죽었을지 모른다. 얼음 성에는 괴물만 살아남아서 그게 아버지든, 이복동생이든, 새아버지든 괘념치 않고 죽였을 것이다. 하나 조세핀이 보호해준 여린 알렉세이는 어린아이였다. 가족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 했다.

그 멈춰 버린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하고,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해준 건 아인 페르디안, 알렉세이의 가이드였다.

언제나 차갑고 냉정하게 보이던 알렉세이의 은회색 눈 속에서 미하엘은 따스함을 발견해냈다. 그는 누구보다도 훌륭한 황제가 되어줄 존재다. 왜냐하면….

“그런데 1황자 전하께서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충분히 전 황후 제논을 죽인 황제 폐하께 복수할 만한데, 단지 1황자 전하의 아버지란 이유만으로… 당신은 진실을 밝혀낼 때까지 인내하고 계십니다.”

알렉세이를 보며 미하엘은 바닥에 한쪽 무릎을 세운 채 꿇었다. 기사들이 주군에게 충성을 맹세할 때 취하는 자세였다. 미하엘을 따라 다른 황제의 기사들도 1황자에게 절을 올렸다.

“1황자 전하의 강함을 존경합니다.”

미하엘을 따라 다른 기사들이 합창했다.

“1황자 전하의 강함을 두려워합니다.”

이 또한 여러 목소리가 하나가 되어 울려 퍼졌다.

“당신을 올곧은 신념과 선함에 충성을 맹세합니다.”

“맹세합니다.”

황제가 귀찮게 붙여놓은 기사들이 알렉세이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알렉세이는 이 버러지들이 귀찮게 하네, 짜증을 내면서도 허리춤에 걸어놓은 검을 뽑았다.

검의 궤적은 미하엘의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어깨, 머리 위로 움직였다. 알렉세이는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기사 모두에게 약소한 주군의 서약을 해줬다.

이제 알렉세이는 그들의 주군으로서 기사들에게 진정한 ‘강함’이 무엇인지 알려줘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무력으로 사람을 때리고 죽이는 게 아니었다. 기사들은 그들이 바랐던 정의를 알렉세이 안에서 봤기 때문에 충성을 맹세한 것이었다.

새로운 바람이 분다. 2황자에게 기울었던 사람들의 마음이 조금씩 1황자에게 옮겨가고 있었다. 그 천칭이 어느 한쪽으로 쏠리는 순간, 황태자가 결정될 것이다. 황제가 아무리 알렉세이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어두운 밤. 아름다운 백장미들이 다 불타버려 잿더미밖에 남지 않은 2황자 궁에 어둠을 가르는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으아아아. 으아아아.”

2황자의 발작이었다. 어려서부터 호라이슨에게는 잠을 자다가 비명을 지르거나 물건을 깨부수는 기이한 몽유병이 있었다. 목숨을 위협하는 병은 아니지만, 그를 지지하는 귀족 수뇌부들은 그 병을 꼭꼭 숨겼다. 주군의 약점이 노출되어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정신계 에스퍼 주다가 침대에서 몸부림치는 호라이슨을 끌어안아 결박했다.

“2황자 전하. 2황자 전하, 정신 차리십시오.”

“아아아악. 으아아아악.”

그럼에도 호라이슨의 발작은 계속되었다. 주다는 마법등을 켜서 방 안을 밝혔다. 호라이슨의 눈을 들여다보고 세뇌를 시도해봤지만 걸려들지 않았다.

주다의 특기가 ‘세뇌’였다면 호라이슨이 정신을 놓았을 때, 그의 마음에 침투해 명령어를 심어 넣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무능한 스스로가 짜증 나고 슬펐다. 좀 더 능력을 갈고닦아야 했다.

“제발 진정하세요. 여기는 안전합니다.”

주다는 독단적으로 아인 페르디안을 처단하려고 했던 죄로 자신이 사랑하는 주군이 다른 사내와 섹스를 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심장이 찢기고 산 채로 태워지는 기분이었다.

그가 어떤 방식으로 권력을 유지하고 스스로를 소비하는지 알기에 더 마음 아팠다. 호라이슨은 아직 젊었다. 그가 해야 할 것은 잠자리를 이용한 군림이 아니다.

호라이슨은 주다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 짓을 벌로 내렸지만, 정작 주다가 마음 아파한 까닭은 그 때문이었다. 주다는 호라이슨이 자기 자신을 파괴하지 않았으면 싶었다.

“죽어. 죽어 버려.”

호라이슨을 끌어안은 주다에게 무차별적인 주먹이 내리꽂혔다. 봉합해놓은 상처가 찢어져 피가 흘러내렸다. 주다는 1황자에 의해 탑승 중이던 배가 폭발하면서 큰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치유 에스퍼인 다알리아에게 치료받으면 좋겠지만, 그녀는 알렉세이의 말이 없으면 케르베로스 기사들조차 치료해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신체가 서서히 회복되길 기다려야 했다. 그 누구도 이 나라에서 알렉세이의 명령밖에 듣지 않는 다알리아에게 치료받는 일을 기대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정신계 에스퍼인 주다는 던전을 돌지 못했다. 공격 능력 없이 던전을 도는 건 자살행위였다. 때문에 힐링 포션이 있으면 간단히 회복되었을 부상이지만, 이렇게 지금도 고생 중이었다.

같은 백장미 기사단 소속의 동료에게 힐링 포션을 부탁해봤지만, 다들 비상용으로 1개는 가지고 있어야 했다. 던전에 들어갔다가 언제 부상으로 죽을지 모르니 말이다.

마물을 죽이고 힐링 포션이 나오면 그 여분을 팔아주겠다고 했지만 아직까지 소식이 없었다. 배에 뻥 뚫린 상처를 봉합해 붕대를 감아놓았는데 호라이슨에게 맞아서 다시 터진 것 같았다.

“2황자 전하. 들리십니까. 주다 에르펜서입니다.”

“흑으윽. 흑흐흑.”

잠에 빠진 호라이슨은 주다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가 어서 악몽에서 깨어나길 바라며 주다는 차가운 물을 입에 흘려 넣어줬다.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아무도 2황자 전하를 해치지 않아요.”

몇 시간을 그렇게 끌어안고 같은 말을 반복했을까. 셔츠가 피로 흠뻑 젖은 주다는 눈앞이 뿌예지고 어지러웠다. 창밖으로 떠오르는 붉은 일출을 보며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아침이 되어 그가 잠에서 깨어나면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을 테니까.

주다는 언제 발작을 했냐는 듯 곤하게 눈을 감은 호라이슨을 침대에 똑바로 눕혔다. 그리고 밤사이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는 듯 호라이슨이 던진 물건들을 제자리에 가져다 두고, 깨진 것들은 버렸다.

청소를 끝낸 뒤, 피에 젖은 셔츠를 들키지 않기 위해 침실을 나섰다. 호라이슨이 독하게 구는 척해도 마음 약한 오메가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자기 때문에 주다가 다쳤다는 걸 알면, 심신이 흔들려 밤에 더 심한 악몽을 꿀지도 몰랐다. 주다는 이른 새벽이라 시종들조차 다니지 않는 복도를 걸으며 상쾌한 새벽 공기를 들이마셨다.

새가 짹짹 울었다. 주다는 은신과 은폐 능력을 광범위하게 펼쳤다. 1황자 궁에서 첩자를 만나고 온 메신저가 주다에게 부복했다.

“아무런 변동 사항 없었습니다.”

“그래, 가봐.”

주다는 능력을 거두고 자신의 숙소로 향했다.

3권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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